[조각글] 기다리며

밥헤 by sol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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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타부더지 (묘사x)

게일은 왕관 찾으러 갔어용


네가 오지 않는 밤에도 나는 괜찮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너를 볼 수 있었으니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너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잠이 덜 깨 흐릿한 시야에 가득하던 네가 나를 향해 지었던 미소. 어느 깊은 밤 잠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던 너의 애틋한 단어. 화창한 햇빛 아래 함께 걷다 눈이 마주치자 네가 지었던 장난스러운 표정. 너의 모든 순간이 나의 떨리는 눈꺼풀 너머로 한 번씩 맺혔다 스러진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 견딜 수 없다.

어떤 모습은 너무나도 그리워 자주 꺼내 본 나머지 흐릿해졌다. 아끼는 유리 세공품을 꺼내 볼 때마다 새로 생기는 흠집처럼.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너의 모습은 이제 흠집투성이가 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더라. 그 오로라 아래에서 처음 입을 맞춘 후,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너의 이상을 흉내낸 그 환상 속에서, 나는 너에게 …….

흐릿해진 네 모습을 더 잘 보고 싶어 나는 눈을 뜬다.

적막만이 나를 반긴다. 희미하게 울리던 너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절망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발끝을 간지럽힌다. 이불 속에서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너는 몇달째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흠집뿐인 기억만을 남기고는.

빈 옆자리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긴다. 테이블 위에는 네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너의 물건들이 미동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네가 가끔 쓰던 스태프를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네가 자주 입던 옷을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벨벳이 바늘처럼 느껴져 손을 뗀다. 본래의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 옷에서는 푸근한 온기 대신 버석한 정전기가 맴돈다.

나도 네가 챙겨가지 않은 물건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테이블을 힘주어 넘어뜨린다. 네 흔적이 제각각의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다. 그 중에는 흐느끼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나는 소리가 멎기 전에 테이블을 다시 바로세운다. 그의 흔적을 두 손으로 긁어모아 올린다. 엉망이 된 테이블을 보며 생각한다. 그는 돌아올 거야.

다시 눈을 감고 기억을 끄집어낸다. 흐릿한 선착장에 서 있는 그가 보인다.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그가 잠시 서 있다 나를 등지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목소리를 잃은 그 대신 내가 속삭인다.

꼭 돌아올게.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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