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첫눈

2022.12.23 발행

“어제 첫눈 내렸다며?”

“어. 사진 봤어? 세상이 하얀 게 예쁘긴 예쁘더라.”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출근길에 오른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그곳은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지도 모르는 지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청사진을 만들며 적었을 이름은 마모되어 사라진 지 오래인 이 콜로니와는 동떨어진 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환경만 유지하는 이곳에서는 푸른 별에 맞춰 사계절을 따라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직 첫눈은 보지 못했지만 어느덧 나는 너와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엑시즈로 인해 새빨갛게 달아올라 깜빡이던 기체 내부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온통 고요한 바다로 까맣게 뒤덮였다. 모빌슈트는 사지가 모두 타버렸고 카메라는 거의 전소됐다. 기능이 완전히 멈춰버린 콕핏에 켜진 화면이라곤 한 뼘 정도 되는 크기뿐이었는데 그것이 비추는 것은 깜깜한 내부와 별다를 게 없었다. 수억 광년 떨어져 점점이 하얀 숨결을 내뱉는 별들이 없었더라면 구분조차 어려울 만큼 검은 우주가 화면에 떠올랐으니까.

어딘가에 던져둔 헬멧을 더듬거려 찾아 쓰곤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이곳에서 기다려봤자 죽음조차 찾아오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 일단 움직여야만 했다. 해치를 열고 진공의 바다에 입수했을 때, 아까 화면 조각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낡아 뵈는 콜로니였는데 아직 멀쩡히 작동은 하는지 유리관이 회전하는 묵직한 기계 소리가 심장이 뛰는 전신을 미약하게 울렸다.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것과 마찬가지로 새까맣게 그슬린 콕핏이 하나 더 있었다. 콜로니 쪽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동그란 그것에는 누가 있을지 열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전신을 붉게 뒤덮은 기체 속에 손을 넣어 콕핏을 움켜쥐고 전선의 숲을 갈라 바깥으로 끄집어낸 게 나였으니까.

캄캄한 그 안에서 네가 눈을 감았을지 떴을지, 아니, 죽었을지 살았을지 해치를 열어보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걸 했다. 아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돌덩어리 대신 금속 구체를 밀며 콜로니로 향했다. 푸르른 입자를 짙게 흩뿌리며 달려 나가던 긴 띠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키는 이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통로를 지나 헬멧을 벗어도 호흡이 가능한 구역에 들어서서야 굳게 다물린 해치를 열었다. 어디서든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선명했던 붉은 빛깔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안팎이 모두 까만 구체는 오롯이 너 하나만을 품고 있었다. 한 올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채 콕핏에서 맥없이 부유한 너는 눈은 감았지만 다행히 살아있었다. 나는 그런 널 바깥으로 꺼내서 콜로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는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숨어든 숲속에는 앞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어딘지 알 수조차 없는 이곳에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숨만 붙어있는 몸뚱어리 하나를 부축하며 하염없이 걷고 걸었다. 이제 무얼 하면 좋을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점점 무거워져서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꺼풀에 한 줌의 빛이 닿은 건 그때였다. 시간에 바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우리를 보곤 잠시 멈춰 섰다. 그 여파로 잠시 좌우로 흔들린 랜턴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남기며 뒤돌았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널 데리고, 앞장서서 가는 노인을 따라갔다.

십여 분 남짓 걸어 도착한 곳에는 이층집이 하나 있었다. 1층에는 ‘수리점’이라는 간판이 걸렸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가게 이름 그대로 각종 기계와 장비가 사방에 즐비했다. 그는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는데 그곳에는 가스레인지, 냉장고를 비롯해 온갖 가재도구가 놓였다.

“여기서 기다리시게.”

군데군데 해진 소파에 널 누이고 거실 바닥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그는 물과 옷 두 벌을 가져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도 자네만 한 아들이 있었거든.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며 집을 뛰쳐나갔는데 소식이 끊긴 지도 수년이야.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깊게 팬 주름마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은 노인은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부터 적시고 들어오는 맑은 액체는 식도부터 천천히 따듯하게 덥혔다.

“자네도 전쟁터에 있었나?”

“네. 론도벨 소속이었습니다.”

“고생이란 말로는 다 못할 만큼 힘들었겠어.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네.”

두 손으로 감싸 쥔 머그잔을 엄지로 매만지던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옅은 물기가 맺혔다. 모래처럼 쌓인 시간은 과거에 오갔던 길을 지워버렸지만 신발 바닥이 닳도록 오간 그 길은 이미 몸에 뱄다. 그리고 제 아들과 또래의 생존자와 마주한 이 순간은 다시금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처럼 숨은 붙은 채 돌아올 거라는 희망이 있던 위치로.

“돌아갈 곳은 있는가?”

“……아뇨. 없습니다.”

아예 없진 않았다. 여기서 몸을 추스린 뒤 지구로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를 데리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 목숨을 사신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한 채 모빌슈트가 부서지든 말든 서로에게 치열하게 덤비던 전쟁터 이외에는.

“그럼 여기서 지내게. 나는 살날이 얼마 안 남았거든.”

“하지만 아드님이…….”

“그때는… 아이의 말벗이 되어주게. 여기서 다시 살아가야 할 테니까. 다 저물어가는 노인의 이기적인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 생각하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처음으로 아이처럼 순수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로부터 며칠 후, 노인은 고장 난 기계를 고치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도 틈틈이 가게와 집에 대한 걸 세세히 알려주었다. 각 연장이 어디에 있는지, 온수는 어떻게 트는지, 가스레인지를 켤 때는 뭘 조심해야 하는지 등 글로 적으면 책 한 권은 뚝딱 나올 법한 것들을 전부. 그리고 자잘한 요소를 되묻지 않아도 될 만큼 이곳에 익숙해지고 가게 일을 도우며 단골손님의 얼굴을 대부분 익혔을 무렵, 그는 잠든 채 조용히 숨을 거뒀다. 우리가 여기 온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가게 문을 열고서 크고 작은 기계를 들고 오는 손님들을 받았다. 너는 죽지 않을 만큼만 끼니를 챙기며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노인의 묘비에는 기일마다 꽃다발이 놓였지만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주에 일이 몰려든 탓에 주말 동안 내리 잠만 잤더니 아니나 다를까 식자재가 똑 떨어졌다. 나야 근처 식당에서 사 먹으면 그만이었지만 너는 입맛이 까다롭게 변한 탓에 외부 음식은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 그래도 몇 숟가락 뜨다가 마는 밥인데 한 끼라도 굶길 순 없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시장을 미리 찾아보고 부리나케 외출 준비를 했다.

“장 보러 다녀올게. 먹을 게 없어.”

아직 자고 있던 네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자 감겼던 두 눈이 찬찬히 뜨였다. 언제나 여유롭게 굴며 당당하게 행동하던 혈기도, 까만 선글라스로도 가릴 수 없는 총기도 모두 사라진 푸른 눈동자에는 닿기만 해도 한기가 뼛속을 파고드는 겨울 바다만이 남았다. 잔잔하게 밀려드는 파도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전부 가져가 백지의 모래사장만이 공허하게 남았다. 두어 번 깜박인 눈은 공허조차 다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영혼은 사신이 쥐고 있으니 육신마저 그에게 내던지겠다며 죽음으로 침잠하려는 너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네게 무엇을 채워줘야 겨울 바다에도 봄바람이 돌아올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있을 수 있도록 생활 기반을 다져두는 것. 네게 필요한 생필품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때 구비해두는 것. 그리고 네가 먹을 수만 있다면 각종 재료를 사와 요리를 해주는 것. 그래도 귀가 에일 만큼 바람이 매섭다면 겨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걸 하고자 했다.

그러니 샤아, 언젠간 나와 함께 첫눈을 보러 가자. 시린 겨울 바다 위로 하얀 눈이 내리는 것도 꽤 괜찮을 테니까.

사정없이 파고드는 추위에 코트 깃을 꼼꼼히 여몄을 때,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다. 출근하는 이들의 뒤를 따라 버스에 올랐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달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네가 그래도 잘 먹어줬던 음식과 시장에서 사야 할 목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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