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어느 여름밤
2022.08.15 발행
※ 아직은 캐해가 얄팍한 시절 쓴 연성
“하여튼… 이 정도는 자기가 하면 될 텐데.”
방금 막 귀가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부탁이라니 귀찮게도 군다. 욕조로부터 피어오른 수증기를 머금어 부드러워진 손가락 사이로 굴리는 유리잔은 챙겨가 놓고 가장 중요한 와인을 빠뜨렸단다. 앞뒤가 맞는 핑계를 대야지, 나 참.
어찌됐든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던 터라 작은 한숨을 쉬며 냉장고를 열었다. 남아서 용기에 담아둔 음식 몇 가지를 제외하곤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안을 슥 둘러보니 고급 진 포장지를 두른 와인 병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것 외에는 그가 든 유리잔에 담길 만한 액체가 없어서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와인을 꺼냈다.
전에 누군가가 마셨던 적이 있는지 반만 남은 와인을 열고 욕실로 향했다. 병을 손에 쥔 동안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냉기가 아무리 달이 뜬 밤이라 해도 완전히 식혀주지 못하는 한여름 날의 열기를 야금야금 앗아가서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욕실로 들어서자 훅 다가오는 후덥지근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데서 술이 마시고 싶나?”
“한 잔의 여유라고 해두지.”
“에둘러 말하기 전에 스스로 움직이기나 해.”
그는 기다렸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여유를 부리며 잔을 내밀었고 나는 욕조에 걸터앉아 병을 기울였다. 안주 대신 오가는 보잘것없는 담소 속에서 알코올의 줄기를 둥그런 벽면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고 금세 불그스름한 소를 빚었다.
“같이 들어오지 그러나, 아무로. 온도도 적당한데.”
잔을 절반 정도 채웠으면 됐겠다 싶어서 병을 거두고 이 텁텁한 공간에서 서둘러 탈출하려는 찰나,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애도 아니고. 나중에 알아서 씻을 거야.”
거절의 의사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손아귀에 은근히 힘을 가하며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동으로 인해 흔들린 유리잔에서 거칠게 파도가 일더니 허공으로 솟구친 적포도주 한 방울이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린 팔뚝 위로 툭 떨어졌다. 살갗을 따라 붉은 길을 새기며 흘러내리는 그것은 폭발에 휘말리며 수습조차 불가해진 시신이 전부 우주의 먼지로 흩어지지 못하고 꺼져가는 혼을 불살라 별들 사이에 남긴 단 한 방울의 선혈 같았다.
“지금 안 씻으면 찝찝할 텐데?”
“놔.”
이건 세면대에서 씻어내도 충분하다고.
더 세게 힘을 주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잔과 부딪히며 깨질 위험이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신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 찝찝함에서 한시라도 빨리 해방되고 싶은데 그는 얄망궂게 웃으며 느긋한 손놀림으로 잔을 입가에 대었다.
“놓으라고 했잖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
“샤아―!”
뭘 그리 생각하는 건지 꽁꽁 숨긴 그의 속내처럼 안쪽으로 한참 빙그르르 돌던 유리잔이 한순간 멈췄다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망설임 없이 앞으로 뻗어져 기울어진 잔은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와인을 내 정장 위로 깔끔하게 쏟아 부었다. 덕분에 단내와 술 내음이 바지를 흥건하게 적셨고 옷자락이 다 빨아들이지 못한 포도주는 고스란히 발목까지 타고 내려갔다.
“넌 왜 꼭 항상 이런 식으로…!”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건 의미가 없다고!”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이 상황에서는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날 응시하는 그의 두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고요했지만 생동하는 욕심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오랜 시간 정체를 감추며 동시에 바이저 아래로 숨겼던 푸른 눈동자는 까만 막을 씌운 창을 통해 세상을 목도하긴 했지만 소통은 단절되어 흘러가는 시간 속 과거의 정류장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그 시절의 순수함을 온전하게 간직했다. 그래서 그는 날 종종 어린 애 취급했지만, 오히려 아이처럼 굴곤 하는 건 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몰아치는 현재에 휩쓸려 이제는 뒤틀리고만 치기가 어린 행동이 그날로부터 새어나오는 건.
결국 내가 한숨을 쉬며 욕실 바닥에 와인 병을 내려놨다. 그가 손에 쥐고 흔드는 게 누군가의 목숨이었다면 이야기로 끝날 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 하나만을 원했으니까.
걷어붙였던 하얀 소매와 셔츠 단추를 찬찬히 푸는 동안 그는 나를 제게로 끌어당겨 당연하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그는 순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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