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공] 매우 梅雨

2022.02.06 발행

※ 논커플링

환상마전 44화까지 본 시점에서 쓴 터라 캐해석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달이 기우는 만큼 깊어지는 시간에 얼마 남지 않은 빛만을 골라 쏙쏙 삼킨 검보라색 어둠이 진득하게 깔린 야밤.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나와 멈출 줄 모르고 내리긋는 빗줄기 틈에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사라지는 연기 자락을 옆방에서 그저 한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의자 하나를 등받이가 벽에 착 붙도록 끌어다가 앉아 창틀에 차곡차곡 포갠 양팔 위로 오른 뺨을 기대어 엎드린 채. 그러고만 있기는 심심해서 아까 아래층에서 몇 개 챙겨온 고기만두를 입에 물고 야금야금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

“오공, 아직 안 자요?”

“아, 미안해. 바람 들어와서 춥지? 얼른 닫을게.”

“괜찮아요. 그보다 내일 비가 그치는 대로 떠나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자두는 게 좋을 거예요.”

옆에서 오정이 ‘바보 원숭이가 빨리 자기나 할 것이지, 나 참.’ 이라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괜한 소리를 덧붙이길래 ‘할 일 없는 색골 갓파는 잠이나 자.’ 라고 맞받아쳤다. 금세 발끈한 오정이 이불 속에서 뛰쳐나오려 하자 팔계가 진정하라며 말렸고 나는 여유롭게 콧방귀를 껴주고서 새로운 만두를 집어 들었다.

“팔계, 있잖아. 팔계는 왜 삼장이 비 올 때마다 저러는 지 알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줘.”

오정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방 안이 잠잠해졌을 무렵, 멈췄다고 생각했던 가느다란 회색 구름이 다시 빗방울을 어지러이 휘감았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봐서 그런가. 어쩌면 비가 내려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저 작고 씁쓸한 구름이 이 비를 내리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삼장.

“글쎄요. 행여 이유를 안다 해도, 안다고 할 수 없을 거예요.”

“왜?”

“그 일을 직접 겪고 무엇을 느꼈을 지는 삼장 본인만 알 테니까요. 때가 되면 말해줄 거예요.”

그렇겠지? 언제라고 날짜를 콕 집어 약속할 순 없지만 분명 삼장은 또 와줄 거다. 항상 내가 먼저 손을 뻗었지만 창살에 가로막혀 닿을락 말락한 손끝만 아등바등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떨구며 어둠만 수두룩하게 쥐었던 하루하루 속에서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줬던 그날처럼.

“아, 그리고 늦잠 자면 아마 아침밥 못 먹고 갈 테니까 잊지 말아요~”

“앗, 그건 싫어! 밥은 놓칠 수 없다구!”

가는 길에 요괴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니 하나라도 더 먹어둬야 하는 걸. 게다가 이 집 음식은 엄청 맛있단 말야.

“하하, 그럼 저는 먼저 잘게요. 오공도 얼른 자요.”

“응, 잘 자.”

팔계도 다시 잠들었겠다, 달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이 시각까지 혼자 깨어있던 내 옆에 유일하게 있어줬던 고기만두도 어느 새 다 사라졌으니 저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만 기다리다가 자야지.

하품이 비집고 나오는 눈을 끔벅이며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본다한들 지금의 삼장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저기압 중의 저기압이라서 뭘 갖다 줘든 거들떠도 안 보는 걸. 방에는 다 빠져나가고 구겨진 담뱃갑만 굴러다니고. 그래도 걱정되고 신경쓰여서, 마음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파 해서 그를 꼭 안은 채 가면 안 된다고 달래주었다. 창틀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간 손에 눅눅하게 스며들어 빠져나갈 생각이 없는 습기처럼 천천히 등을 마주 대어오는 미련을 덜어내 보려고. 삼장 몰래 어서 원래대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동그랗게 뭉쳐 하염없이 주룩주룩 내리기만 하는 빗속 건너편으로 투욱툭 던지면서…….

“우리 이제 간다, 바보 원숭이.”

“응? 아침밥은?”

어라, 언제 잠들었더라. 비몽사몽 와중에도 열심히 태엽을 되감으며 기억을 더듬으니 마지막으로 듣고 보았던 게 제법 가늘어진 빗소리와 끊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삼장의 담배 연기였다. 기지개를 펴려 하자 팔이 저릿하게 울리는 게 어젯밤 창가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진작 먹었어. 해가 중천이다, 중천.”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온 오정이 달달 볶으며 깨우는 소리에 피곤이 묻어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정말 맑게 갠 하늘 한가운데에 태양이 환히 떠있었다.

“우와, 정말 비가 그쳤네.”

“그러니까 빨리 준비하고 와. 아니면 뒤에서 열심히 쫓아오던가. 원숭이니까 잘 따라올 수 있잖아?”

“원숭이 아니거든?! 두고 봐, 얼른 갈 테니까!”

“네네, 그러세요―.”

마침 근처에 있던 베개를 잡아 있는 힘껏 던졌지만 이에 질세라 오정은 약 오르라는 듯 휙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목표물 대신 애꿎은 방문에 맞고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털썩 떨어진 베개를 주워 침대에 다시 올려놓은 뒤, 내려가기만 하면 한 방 먹여주겠다고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잽싸게 옷을 갈아입었다.

서둘러서 차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기 전, 두고 가는 건 없는지 가볍게 훑어보는데 문득 저녁 내내 옆에 뒀던 접시가 햇빛을 반짝 두르며 눈길을 이끌었다. 분명 어제 접시 바닥을 샅샅이 더듬고 두 눈을 깜빡여 사진까지 찍어서 텅텅 비었다는 걸 확인하고 아쉬워했었는데, 어느 틈엔가 고기만두 하나가 떡 하니 놓였다.

“앗, 따듯하다….”

더 가지러 아래층에 다녀온 기억은 없어서 영문을 몰라 만두를 집어 든 채 머쓱하게 서있던 찰나, 창밖에서 팔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공, 우리 가요―!”

“응, 지금 갈게!”

때마침 밀린 아침 몫까지 합해서 배꼽시계가 두 배로 요란하게 울렸고 맛만 있으면 아무렴 어떠나 싶어서 만두를 그대로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힐끗 고개를 내밀어 지프 위치를 확인한 후 창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차조차 평범하게 못 타는 거냐?!”

“아, 왜! 문 열고 탔으니까 됐잖아―!”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삼장의 부채에 먼지 나도록 맞는 동안, 팔계는 이대로는 출발하기 어렵겠다며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한 대까지 고스란히 맞고 뒷머리를 문지르는데, 그간 접혔다 펼쳐지던 부챗살을 따라 한 움큼씩 흘러나온 쌉싸름하고 매캐한 향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 향…….

“왜?”

무척 옅었지만 아까 들고 나온 고기만두에서도 같은 향이 났다. 늘 삼장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이.

이거 삼장이 가져다 준 거였구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삼장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 못하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앞쪽으로 몸을 돌려 갑에서 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우리를 태운 지프는 구름 한 점 없이 파아란 하늘에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듯 떠오른 태양을 향해 내달렸고 차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뻗은 바퀴자국 위로는 하얀 연기가 물줄기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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