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타탈/운증경의 풍파雲蒸境之風波 (상)

놋쇠가지 by C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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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의 보물을 찾기 위해 온다. 과거에 번화했던 마을도 지금은 허물어진 담과 끊어져버린 벽만 남았다. 연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해산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운증모험기

1.

 왕생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리월의 관혼상제에서 ‘상제喪祭’를 담당하는 곳으로 죽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보내 송별하는 의식을 치룬다. 당연히 엄숙하기 이를데 없어 누군가가 음모와 난해한 이야기를 하면 그 소리가 반드시 어두운 목재 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었다.

“지나치게 욕심이 많으셔, 모락스.”

리월에서 저울은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흘호암의 노점상부터 법률가, 불복려, 명성재, 군옥각까지. 리월의 뭇 사람들은 저울로 물건을 재고 사고 팔며 오가는 물건의 가치를 재니, 왕생당에도 당연 저울이 갖춰져 있었다. 흑운철로 만들어진 저울은 고고하고도 음울한 색채를 띈다. 그 위엄에 눌려 추로 쓰이는 다양각색의 보옥과 귀금속이 온통 조용했다. 저울은 한참을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는데, 이 저울은 잴 수 없는 것을 재고, 잰 적이 없는 것의 무게를 달고 있는 까닭이다.

시뇨라는 팔짱을 끼고 한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림자 안에 머무는 오래된 신은 거래에 있어 냉철하고도 손익손실을 철저하게 따지며 스네즈나야와의 계약을 몇날 며칠에 걸쳐 조율하며 질질 끌고 있었다.

“한번도 거래된 적이 없는 물건을 다루고 있으니 신중함을 잃지 않아야하지. 재어보아야 길이를 알 수 있고, 저울에 달아보아야 무게를 알 수 있는 법. 그러나 재어본 적도 없고 달아본 적도 없는 물건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아, 네네.”

중후한 목소리에 시뇨라는 기죽지 않고 불만스레 손짓을 했지만 상대, 그러니까 바위의 신은 심사숙고할 뿐이었다. 얼음여왕이 내민 카드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얼음여왕 역시 일곱 집정관의 하나로 말도 안되는 거래를 상업의 신에게 제안할 만큼 오만하고 염치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들의 가치를 따져보아 부족할지, 적을지 재어봐야 할 뿐이다.

물론 숙련된 광부는 바위를 집기만 해도 무게와 가치를 알아보고 능숙한 상인은 물건을 훑어보는 순간 그 값을 매길 수 있으나 지금 급한건 얼음여왕이지 모락스가 아니었다. 시간은 금이란 말처럼 너무 오래 산 바위의 신에게 시간은 금과도 같이 넘쳐흘러 있다는지 없는지도 종종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거래는 서로 가격이 맞아야 성립하겠지?”

“음.”

“이정도로 미루기만 할거라면 차라리 잠시 협상을 쉬는게 어때? 기한을 두고 다음에 한번더 만나 다시 이야기 해.”

시뇨라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이미 질릴대로 질려 있었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몬드의 바람신은 짜증스럽게 귀엽기나 하지... 늙은 바위신을 상대하는 일은 정말인지 귀찮고 지루한 일이었다.

“큰 바람이 부는 날은 휴가를 보내기 좋은 날씨가 아니지. 바람을 너무 크게 키우지 않길 바라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엔 새로 사절이 와서 리월에서의 일을 대신 처리할거야.”

시뇨라는 이제 정말 모락스의 참견에 대꾸하지 않고 사무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마치기로 했다. 바위신은 그 태도에 꿈쩍하지 않으면서 무심코 취각암 한 알을 집어들어 손안에서 굴렸다. 원소의 힘이 가득 담긴 맑은 옥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심지어 성격까지 바꿔놓지만, 오래 된 바위신에게는 그저 작은 물방울이 손등에 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그를 보았어. 젊더군.”

쾌활하게 리월항을 걷던 청년은 풍채가 당당해 낯선곳에서도 꺼리낌이 없어보였다. 젊고, 활력이 넘치는 태도에서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바라볼 정도로 그는 눈에 띄는 젊은이였다.

“아하. 네, 과연 암왕제군께서는 모르는 것이 없으시겠지요.”

시뇨라는 기어코 한마디 비꼬고 서리바람처럼 자리를 떠났다.

 

 2.

 

「리월은 스네즈나야가 아니야. 리월 사람들은 사리분별에 밝고 이익과 계약을 중시하지. 넌 조심성이 없으니 그들과 직접 만나지 말고 서류상으로만 처리하고 힘쓰는 일에나 나서는게 좋을거야, ‘공자’.」

몬드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난 ‘숙녀’의 간단한 인수인계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나대지 말고,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아라. 특히 기분에 따라 한바탕 벌이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걸?

하, 하고 짧게 웃고 ‘타르탈리아’, 귀공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잖아? 게다가 시뇨라는 그보다 계위가 높다고 해도 엄밀히 말해 상관이 아니니 타르탈리아가 그녀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북극은행과 우인단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왕생당의 객경’, ‘종려’는 암흑가의 벗으로 이쪽의 중요한 업무파트너인 모양이었다. 공개적으로 법률해석가와 일하기 어려운(정확하겐, 법률해석가들이 우인단의 일을 기피하는 편이다) 우인단의 입장에서 정식 법률해석가는 아니지만 법률에 해박하고 리월의 풍토에 대해 박학다식한 조력자의 존재는 귀했다.

리월의 율법은 대개 복잡했고, 오래되어 예외나 특례도 많은데 계약 절차는 까다로워 해박한 전문가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나 리월의 칠성은 여타 국가의 권력자들이 그렇듯 공격적으로 외교를 수행하는 우인단을 몹시 경계하고 있었다. 때문에 칠성의 계약과 거래가 생활에 필수적인 리월인들은 칠성의 눈치를 보느라 우인단과 거래하는 것을 꺼려하여 식견이 높거나 쓸만한 사람일 수록 우인단을 멀리했다. 그게 아니라더라도 스네즈나야는 평판이 좋은 나라는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외국에서 ‘온건하게’ 활동하기란 제법 제약이 있었다. 그런데, 이 종려라는 사람은 몹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그런 중요한 사람과 약속을 잡아 한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타르탈리아는 서류보다 자신의 시각- 정확하게는 감에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다. 이름이야 둘째치고, 얼굴도 모르고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과 협업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 그래서 약속을 잡았다. 까탈스럽다는 소문의 왕생당 객경은 의외로 흔쾌히 스네즈나야의 사절이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 인사를 한번 드리고 싶다는, 예카테리나가 한번 윤문을 해서 정중하게 만든 서신은 누가봐도 빈말에 가까운 재미없어보이는 초청이었음에도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귀리평원의 객잔에 날짜와 시간까지 지정하여 정중한 회신을 보내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며 자세한 위치를 적은 종이와 함께였다. 답신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타르탈리아는 휘파람을 불었다. 예카테리나가 번역해준 서한과 비교하며 타르탈리아는 어색한 리월 글자를 열심히 읽었다. 번역으로도 알 수 있는 고풍스러운 어휘와 정중함이 담긴 서한이 어쩐지 기뻐, 괜히 위협적일 수 있을 부하들도 죄다 남겨놓고 왔다. 풀치넬라에게도 그랬지만, 타르탈리아는 어르신에게 약한 면이 있었다.

“아, 현지안내인은 한명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타르탈리아는 사절이자 파견된 집행관으로서 기초적인 리월의 회화, 문자와 현황에 대해 익히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지식이 현지에서 활용되기는 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지리지에 따르면 귀리평원은 먼지의 신이 마신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황무지로 버려졌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민가도 제법 있었고 객잔은 화려하게 등을 켜놓아, 한밤에 모래바람이 부는 중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귀리평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는 객잔은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운치가 있어보였다. 잔잔하니 스산한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스네즈나야의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살던 타르탈리아에게 그정도는 간지러운 수준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간판을 못 읽어도 여기가 이 근방의 유일한 객잔인 것도 알았고, 점원이 이끄는대로 2층의 난간자리에 앉은 것도 좋았는데 ‘메뉴판’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고급 객잔이라 어려운 단어를 쓰는건가? 리월의 문자를 꽤 읽을 수 있을텐데도 메뉴판에 적힌 슬라임이 퍼진 듯한 글씨는 너무 낯설었다. 그가 아는 글자 비슷한 것도 보였지만 그조차도 낯설었다. 적당히 점원에게 아무거나 두드리니 알아서 음식을 내오기는 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내놓곤 수저도 포크도 나이프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식탁을 한참이나 노려보고만 있었다.

뭐지...? 수메르에서는 손으로 집어먹는 음식도 있다지만 리월은 그런 문화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박학다식한 객경이 오면 물어볼까, 하고 타르탈리아는 그저 시간을 죽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종려’씨는 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객잔을 출입하는 사람 중에 학사와 같은 사람,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풍채있는 노인 등등 ‘종려’일까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누구도 타르탈리아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혹시 깐깐한 노학자가 모래폭풍 속에서 길을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물사냥꾼이나 츄츄족을 만나 고난에 처한 것은 아닐까... 마중이라도 나가야하나... 그런 걱정을 하는 새에 음식이 어느덧 식었다. 스네즈나야는 물자가 귀해서 식은 음식이라고 해도 입도대지 않는 일은 대단히 드물었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일단, 딸려나온 긴 나무작대기를 하나 집어들어 찔러 보려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스네즈나야에서 오신 ‘공자’이십니까.”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정중한 태도였는데 어딘지 위엄이 있어 타르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고민하다 리월식으로 포권을 해 인사를 해보였다. 그러자 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웃음과 함께 눈매 끝에 바른 붉은기가 움직이는 것에 타르탈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사내가 눈매 끝을 붉은 색으로 칠을 해둔다니 스네즈나야의 전사인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도 묘한 느낌을 줘서 어딘가 문화충격을 느꼈는지 심장이 쿵, 하고 움직인 것이다. 리월항을 거닐때만 해도 따듯하긴 해도 사람 사는데는 다 똑같구나 했는데... 이런 곳에서 문화충격을 느낄 줄은 백전연마의 전사인 그도 미처 예상 못한 일이었다.

“저쪽 자리에 있었습니다만, 공자인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군요.”

“아, 그러면 당신이 왕생당의 객경?”

“종려입니다. 저쪽에 제가 음식을 주문해뒀으니, 합석하시죠.”

객경이 준비한 자리는 얇은 백금으로 둘러쳐진 연회석이었다. 둘이 앉기엔 너무 넒고 호사스러웠지만 타르탈리아 역시 이런 자리엔 익숙했다.

“하하, 아무래도 리월은 낯설어서... 제가 오래 기다리시게 했을까요? 종려... 음... 선생님?”

“편하신대로 불러 주십시오. 우리의 관계를 고려하여 ‘종려씨’나 ‘선생님’정도면 적당하겠군요.”

“네, 종려씨. 그럼 저도 편하게 ‘타르탈리아’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타르탈리아’. 리월식으로 말하면 ‘공자公子’가 되겠군요.”

“하하하, 일종의 별명일 뿐이에요. 너무 건방지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습관적으로 주변을 훑어본 타르탈리아는 그가 앉은 자리에서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가 지나치게 잘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객경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를 천천히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중하고 고상해보이는 젊은 객경은 그저 박학다식한 먹물 학사일 뿐인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는 틀림없이 녹록한 사람이 아니다. 타르탈리아는 문득, 이 사람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예의와 체면을 차린 대화가 아니라 좀 더... 이 사람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고 일이 성사되지는 않으니 친해져서 그의 속내를 까발릴 수 있을때 까지는 재미없고 지루한 일도 해야겠지.

“리월에서는 친하고자 하면 이렇게 식사자리를 마련해 술잔을 함께 기울이곤 합니다. 스네즈나야에서도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하더군요. 공자는 술을 하십니까?”

“아, 좋아하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여기 계화주는 리월의 명물인데, 세월이 지나 풍토가 많이 바뀌다보니 오래전의 풍취가 이렇게 남아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잔이 조그마하네요...”

타르탈리아는 리월의 술잔을 신기하게 만지작거렸다.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나무통 술잔도 아니고 허리가 긴 형태의 유리 잔도 아니라 바닥에 딱 잡히는 자그마한 술잔은 도자기인데, 조금 술병을 기울이자 금세 골막 하니 차서 금빛의 투명한 술이 찰랑거렸다. 타르탈리아는 이런 술잔을 굽기 위해 경기평원에서만 난다는 흙과, 귀한 돌을 갈아 만드는 유약의 배합비율에 대한 종려의 이야기를 듣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큼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그러자 종려 선생이 앞에 놓인 음식을 권했다.

“그... 이건 대체 어떻게 먹는겁니까?”

“앞에 젓가락이 놓여있지 않습니까.”

‘젓가락’?

아, 이 두개의 깎은 나무를 말하는건가. 맞아, 이걸 젓가락이라고 불렀지. 타르탈리아는 적당히 두개를 손에 쥐어보았으나 역수로 나이프를 쥔 것같은 모양새 이상이 되질 못했다. 전사인 그의 손에 들리면 나뭇가지조차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다. 장병기라면 두손으로 잡고, 장검은 손잡이를 정방향으로 쥐지만 이런 짧은 물건은 저절로 역수로 쥐게 된다.

그래서, 이걸로... 저 만두를 찌르는건가? 푹, 찔러서 잡아당겨서 입에 넣고? 그러니까... 포크처럼 쓰면 되나? 하지만 물주머니같은 것이 찌르면 터져버릴 것 같은데.

어리둥절하고 있는 타르탈리아 앞에서 조용히 잔을 내려놓은 종려 선생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타르탈리아는 제법 놀랐다.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무기를 든 상태의 숙련된 전사인 그의 간격 안에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일단 그 점이 놀라웠다. 그러나 그 놀라움으로 피어올랐던 경계심은 그의 옷깃에서 나는 향기에 이상하리만치 쉽게 사그라들어 더 기이했다. 따듯하면서 어딘지 부드럽고 알싸한 향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려는데 검은 장갑이 그의 손등 위를 움켜쥐었다.

“공자는 젓가락을 처음 잡아보시는군요.”

가까이서 겹쳐보니 의외로 그는 손이 타르탈리아보다 컸다. 동작이 단호하고 절도 있는 것을 보아 장갑 안에 바위같은 단단함이 숨어있을 것 같다. 타르탈리아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손에서 느껴지는 무위를 가늠해봤다. 손을 빼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손을 잡히고도 타르탈리아는 묘한 향이 나는 목덜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목젖이 울리며 담담하고 고저 없는 중후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젓가락은, 이렇게 쥐는겁니다.”

그의 범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손을 붙잡는 남자. 그런데, 싸워보고 싶다기보단... 모르겠네... 타르탈리아는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가지고 놀며 주물러대서 자세를 잡는걸 내버려놓고 편하게 그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댔다. 종려는 멈칫하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주고는 “자, 해보십시오.”하고 타르탈리아에게 젓가락질을 종용했다. 타르탈리아는 몇번 손을 움직여봤지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평소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극해서 움직이는건 쉽지 않았다.

“어렵네요...”

“어렵지만, 익히면 재미있을 겁니다.”

“네에...”

“흠, 타르탈리아씨는 평소에 어떤걸 즐기십니까?”

타르탈리아는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뭘 즐기냐구요?”

“서로 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알아야 하는 법이지요. 저는 그렇군요, 최근엔 리월항을 거니는 일이 제일 즐거웠습니다. 화미조 새장을 들지 않은 산책은 오랜만이었습니다만 항구에서 오고가는 배와 다양한 타지인들을 보니 도시의 활기가 느껴지고, 새로운 물건을 내리는 것을 구경하면 또한 새로우니 어찌 즐겁지 않았겠습니까.”

좀 특이한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타르탈리아는 시뇨라와 달리 말을 배배 꼬고 이리저리 재보는 것은 질색이었다. 외교적 수사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무인으로서 진솔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즐기는 것이라... 역시 가장 재미있는건 ‘전투’일까요.”

“전투라.”

놀랐다는 어투는 아니었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호흡에 큰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평가나 저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첨도 없고, 놀람도 없는 그 평이함에 호감을 느낀다. 그는 반석처럼 단단한 남자다. 타르탈리아는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강한 적수와 마주해서, 최고의 격전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제일 재미있는 일입니다. 복잡한 생각을 할 것 없이 단순하고, 강자를 마주해 주먹을 마주하면 즐겁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네요... 종려씨와 있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말하면서도 타르탈리아는 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않아서 한참을 더 연습해야 할 것만 같다. 종려는 잠시 침묵하더니 몸을 움직인다. 단단한 바위에 기대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뒤통수를 기댈 곳이 없어져 아쉬웠다. 그런데 종려가 맞은편 자리로 가지 않고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공자는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의 얼굴은 언듯 진중하고 무표정했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조금만 입꼬리를 올리거나 눈가에 웃음기를 담으면 표정이 몹시 부드러워졌다.

“조화석습(朝花夕拾)*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아침의 꽃을...? 음?”

“아침에 떨어진 꽃을 저녁에 줍는다는 뜻입니다. 한잔 더 하실까요?”

“아침에 떨어진 걸 왜 저녁에 줍지????”

종려는 대답하지 않고 병을 들어 조그마한 잔에 넘치지 않게 딱 맞게 따랐다. 스네즈나야 사람답게, 타르탈리아는 잔이 꽉 차자 마자 단번에 술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었다. 코끝에 훅 맴도는 꽃향기에 단맛을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끝이 청량하게 코를 자극했다. 잔이 비기가 무섭게 종려는 그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페이스가 너무 빠른가, 싶지만 그의 권주를 거절하고 싶지는 않아 다시 잔을 올리는데 종려가 그의 잔을 손끝에 무게를 담아 지긋이 눌렀다.

“단번에 삼키기보다는 향을 음미하고 마시면 더 좋을겁니다.”

“아하.”

리월에서는 그렇게 마시는군.

“예의에 어긋났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니 서로의 마음만 맞는다면 예(禮)도 비례(非禮)도 없는 법이라오. 스네즈나야의 예법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스네즈나야에서는 따라준 잔을 단번에 들이켜주지 않으면 못났다는 말을 듣거든요. 꽉 담긴걸 이렇게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신기하네요.”

종려는 그의 말을 받듯, 술의 3가지 아름다운 요소- 맛, 빛깔, 향에 대해 말하며 술잔 역시 그에 맞췄으며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흰 도자기 안에 찰랑이는 금빛 술에 옆자리 앉은 사람의 단정하고도 무심한 얼굴이 비춰졌다. 리월에서 검은색과 금색은 그들의 수호신인 암왕제군을 상징한다고 한다. 리월 사람들은 술의 금빛에서도 암왕제군을 찾을까? 리월의 모든 곳은 모락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연을 암왕제군 모습으로 만든다. 암왕제군을 닮은 등을 들어 마귀가 집에 들지 않게 기원하고, 장신구를 보며 암왕제군의 눈동자 같아서 길하다고 말한다. 어딜가도 암왕제군, 암왕제군 타령이라 지겹기까지 했다. 그가 심장을 빼앗아야 하는 리월의 신은 하다못해 이 술잔의 용무늬에도 그려져 있는데 실체는 어디에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도사리고 앉아 지켜보는 신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시뇨라처럼 음모와 계략에 능숙한 이 음험한 느낌이라니. ‘무신’이라는 옛날의 명성에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식이면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그 명성 자체가 어쩌면 그저 리월 사람들의 숭배에 따른 치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옆에서 종려는 한참 계화주를 빚는 전통적 방법을 논하다 옛 주정뱅이 시인이 ‘천년동안 마시고 싶다’고 했다는 얘기를 하더니 이제는 예상꽃, 유리주머니와 같은 리월 특산의 온갖 꽃과 그 꽃들로 우린 차와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하하, 왕생당의 선생님은 박학다식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아시네요. 좋습니다, 더 말씀해주세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 중, 암왕제군에 대해서도 한두가지쯤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타르탈리아는 그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따르고.

따르고 한잔 더 받아 마시고.

또 한잔.

그리고 한잔 더.

가득 따라주는대로 마시고 또 바로 얼른 상대의 잔을 채워주고 또...

“이제 일어날까요?”

“으음?”

타르탈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왁자지껄하던 주변에는 빈 술병만 굴러다니고, 식탁의 먹다 남은 음식을 종업원들이 내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객잔이 문을 닫을 때가 된 모양이다.

이렇게 진탕 마시고, 취하고, 떠들었다고?

타르탈리아는 새삼 눈앞의 사내 얼굴을 봤다. 그는 취기라곤 하나도 돌지 않는 말짱한 얼굴이었는데 오늘 만난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감이 느껴졌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풀어져 있었다.

진짜... 재미있었다.

참나. 왜 재미있지? 타르탈리아는 드물게 취기가 올라 불긋하고 화끈한 자기 얼굴을 몇번 톡톡 두드렸다. 스네즈나야인답게 술고래인 타르탈리아였으나 주량을 넘어선지 오래여서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주량도 주량인데 따듯한 곳에서 술을 마신 탓도 있을 것이다. 이미 몸을 일으킨 종려 선생이 그런 타르탈리아를 부축한다.

나 타르탈리아가 이깟 술 몇잔에 취할까보냐!

전혀 안 취했다고!

하지만 제 몸을 가눌 수 있는 것과 별개로 그를 부축하는 종려 비단 옷은 서늘한 기운이 서려있어 유달리 기분 좋아, 타르탈리아는 그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몸을 기댔다. 종려는 전사가 몸을 기대오는데도 흔들림 없이 지탱하고 선다.

“술값은 제가 낼게요. 제가... 음... 어디보자, 지갑이... 응?”

“어디있는지 말하면 내가 찾겠네.”

“어어... 그게, 어디였지 뒷주머니였나.”

종려의 손이 더듬더듬 그의 엉덩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으려 했으나 지갑은 없었다.

“그럼 안쪽? 벨트에 달아뒀나...”

“여기인가? 여기도 없군.”

종려의 거침없는 손이 타르탈리아가 허벅지 하네스와 바지의 옆주머니에 지갑을 끼워놨는지 확인해봤지만, 지갑은 없었다.

“으응? 이상한데... 가슴 안쪽 포켓이던가?”

타르탈리아가 취기에 제복 상의에 와인색 재킷까지 벗어 털어대려는 것을 말린 종려는 타르탈리아를 대신해서 그의 허리춤, 벨트 앞뒤를 훑고는 이내 그의 제복 안쪽에 손을 밀어넣었다. 얇은 와인색 재킷 안쪽의 포켓까지 종려의 손이 들어갔다. 묘하게 불편한듯, 아닌듯 한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타르탈리아는 인내했다. 디자인을 중시한 스네즈나야 군복은 타이트하면서도 여기저기 안쪽 포켓이 많아 종려는 타르탈리아의 몸을 샅샅이 훑어야 했다. 수색을 할때마다 얼마나 짜증이나는지 타르탈리아도 해봐서 잘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결국 타르탈리아의 지갑을 찾지 못한 종려가 두손 다 들자, 타르탈리아는 객잔 주인에게 영수증을 가져오게 했다.

“손님...”

“죄송해요. 지갑을 두고 온 모양입니다. 외상으로 달고 이자까지 쳐서 우인단에서 전액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우인단 신분증이고, 이건 북국은행의 보증수표입니다.”

“북국은행이라니...”

주인장은 입을 삐죽 내민다. 타르탈리아는 그의 반응에 곤란한 와중에도 속으로 웃었다. 판탈로네는 그의 사업이 리월에 쉽게 뿌리내리리라 자신만만해 했으나, 아직까지 북국은행의 리월에서의 이미지는 험악한 대부업체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반응이 썩 좋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는 숙박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아, 선생님. 맞습니다. 숙박도 합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하루 머물고 가는건 어떤가?”

불쑥 종려가 말을 꺼내자 주인장은 바로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손님분들, 밤이 깊었으니 묵고 내일 바로 북국은행에서 사람을 불러 값을 지불하시죠.”

“그러죠.”

결국 외상을 먹튀할까 붙잡아두려는 주인의 내심을 타르탈리아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종려는 타르탈리아의 허리를 감싸 그를 부축하고, 주인에게서 방 열쇠를 받아들곤 위층으로 올라가는 도르래 승강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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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증모험기 퀘스트에서 버림받은 구름위 폐허 갔을때 생각하고 쓴 글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2년도 넘게 묵은 글이네요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많관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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