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들고보니 추월당한 글러 이야기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사람에게
※후반부에 언어폭력, 자살충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감정이 메인은 아닙니다)
어떤 일에든 시작점이 있다. 내 경우에는 그게 2——년의 봄이었다. 당시 학원에서 문제집을 풀 연습장을 다 써버린 나는 집안에 남아있던 작은 수첩을 보고 연습장 대용으로 쓰려고 가져갔다. 수첩은 무지가 아니라 줄눈이 그어져 있는 타입이었다. 사람 없는 자습실에 앉아 작은 수첩에 공식을 풀고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을 무렵, 내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에 글 쓸 수 있지 않나?
나는 거기에 글을 하나 적었다. 장르 기반 2차 연성의 두 번째 글이었다.
첫 번째 글은 컴퓨터에서 메모장으로 바로 적었다. 그 무렵 집필도구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언제든지 꺼내기만 하면 글을 쓸 수 있는 워드 프로세서”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 “컴퓨터” 혹은 “전자사전”이라고 생각했다. (전자사전의 메모장 기능을 켜서 글을 적을 수 있다면 실질 워드 프로세서 아닌가?) 하지만 불행히도 형제자매들은 나의 컴퓨터 사용에 매우 깐깐하게 굴었고 생일선물로 사는 것이 허락된 전자사전도 최소한의 검색기능만 갖춘 것을 사라고 압박했다. (쩨쩨한 인간들.) 따라서 내 연성은 종이 노트에 샤프로 적은 다음 기회가 될 때 컴퓨터에 입력하는 형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손바닥만한 수첩을 썼지만 아무래도 지면 크기가 너무 한정적이었던지라 나중에는 A5 사이즈의 스프링노트를 사용했다.
2—-년에 시작한 연성은 솔직히 말해 잘 쓴 글은 아니었다. 한 문장을 쓰고 엔터, 한 문장을 쓰고 다시 엔터. 축약해도 될 묘사에 세 줄 정도를 할애한 뒤 다시 엔터. 그 무렵에 자주 보던 일본 라노베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나 ‘으웃,’ 같은 오타쿠식 어휘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차마 끔찍해서 검색하진 않았지만 ‘랄까,’ 도 엄청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즐겁게 쓴 글이었다. 내 안에 담겨있던 것들을 언어로 형태화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게다가 그 글을 보고 너무 재밌다며 잔뜩 칭찬도 받았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장점이나 특기도 없이 취미특기란은 독서로만 채우고 특별히 칭찬받는 일도 없이 살아온 내향인간이 갑자기 타인에게 존재를 인정받고 기대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기쁨 이외의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까지 읽었던 수많은 라노베와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2차 창작 패러디물의 패턴 혹은 캐릭터 해석 패턴에 기반한 연성을 썼다. 올리고 덧글이 달리는 걸 보면서 행복해했다. 새로운 덧글을 받으려면 새로운 글을 올려야 하니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 다음 이야기를 썼다. 써서 끝낸 다음에는 학교 컴퓨터 실습 시간에만 쓸 수 있는 컴퓨터나 학원 교무실에 비치된 검색용 컴퓨터 앞에 앉아 쓴 내용을 전부 타이핑했다. 당시 「에버노트」나 「노션」의 전신격에 해당하는 「스프링노트」라는 사이트가 있어서 다른 장소에서 타이핑을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작은 수첩에 글을 적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계속 계속 연성을 이어나갔다. 일상 자체가 연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집안 분위기상 학업을 아예 내팽개치고 2차 연성에만 매달릴 순 없었기에 최소한의 공부시간을 확보한 뒤 연성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정밀하게 짜여있지는 않았는지라 그럭저럭 자신있는 과목의 수업시간이면 수업을 듣는 척 노트를 펼치고 연성을 적었다. 당시의 나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교단에서 수업하는 선생님들 눈에는 쟤가 수업 듣지 않고 다른 걸 한다는 게 빤히 보였겠지….
그렇게 쓴 글을 되도록 집을 피해 학원이나 학교의 컴퓨터로 타이핑해 올리고, 틈만 나면 플랫폼에 로그인해 반응을 살폈다. 그건 거의 집착강박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당시 자신의 핸드폰에 무관심하고 무제한 데이터를 썼던 A가 내 강박에 자주 이용당했다. 자습시간이나 야자시간 동안 그 아이의 핸드폰을 빌려서 거의 3분 간격으로 연성 반응을 체크했던 것이다. 솔직히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고 어딜 봐도 현실도피나 인터넷 중독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A에게서 절교당하진 않았다. (물론 이 모습을 본 다른 아이에게서 안 좋은 말을 들었지만 결국 고치진 못했다….) 때로는 도서관 앞의 검색 컴퓨터 앞을 누구보다 빠르게 선점해서 반응을 체크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컴퓨터는 다른 아이들도 사적인 용도로 이용했던 것… 같기도?
고등학생 때 조금은 밝게 지낼 수 있었던 건 그런 식으로 연성을 했던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고, 칭찬받고, 다시 글을 쓰고, 칭찬받는다. 그 이전까지 책을 잔뜩 읽은 보람이 있어서인지 이따금 글 실력이 올라갔다고 느끼는 상황도 발생했다. (평소에는 노트 6장 정도면 이야기가 끝났는데 어떤 연성은 15장을 거뜬하게 넘긴 뒤에 마무리된다던가.) 그래서 나는 자신의 실력이 점점 올라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이 연성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 연성을 시작한 해의 겨울 무렵에는 내가 연성을 올리던 장르의 엔솔로지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1권의 트윈지와 1권의 엔솔로지에 추가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도 꽤 우여곡절이 많이 일어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추억이다.
잠깐! 회지를 처음 찍는 분들을 위한 팁!
인쇄한 회지수에서 판매량을 제하고(통판 포함) 파본을 제하고 남은 권수는 모두 재고입니다.
저는 수요조사하지 않은 상황에서 50권과 100권 중 후자의 권당단가가 싸다는 이유로 100권을 찍었다가 이하생략^^
물론 연성의 즐거움과 엔솔로지 참여의 기쁨으로만 충만한 채 살아갈 순 없었다. 인터넷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좋아하고 반응해주는 것과 별개로 가족들은 나의 강박적인 인터넷 집착과 새벽에 일어나서 몰래 채팅을 하는 등의 행동을 (*엔솔로지 멤버와의 채팅)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형제자매의 경우 아침에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 등교하기 전까지 컴퓨터를 쓰려는 내가 너무나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유구하게 인터넷과 게임에 매달려 살아온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그들의 태도는 동생을 염려하는 연장자라기보다 약자를 린치하는 강자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까지 컴퓨터 자리를 비키려고 하지 않는거야? 그런 질문을 들은 것은 어머니가 인터넷에 미친 나를 저주하며 욕설을 퍼붓던 때였고 나는 그 자리를 피하지도 어쩌지도 않고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같으면 그냥 컴퓨터 끄고 사과하겠다. 그렇게 말한 것은 연상의 남자형제였고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남자형제가 말하는대로 했더라면 모든 것을 원만히 무마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자형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근본부터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자형제는 내 방을 떠났다. 어머니가 한층 조증이었던 시기였다.
2—-년의 봄에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고 깨달은 순간은 분명 내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집에서 발견한 수첩을 연습장으로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그냥 문구점에서 무지 노트를 사서 연습장으로 썼더라면 창작의 가능성을 깨닫는 건 훨씬 뒤의 일이 되었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나의 내향적인 측면을 더욱 강화시켰을까?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 더 외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난제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일은 가정해도 무의미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나의 자아를 만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현실의 통각을 자아에서 유리시켜 주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언젠가 글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혹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도 허망한 충동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글을 쓰는 걸로 모든 상황에서 구원받을 순 없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 해도 자신의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로를, 직업을, 미래의 자신을 예비하고 그걸 위한 목표를 이뤄나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것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다. 작가가 되려는 마음먹지도 않았고 취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가족들의 말을 빌리자면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자캐커뮤에 발을 들이면서 글러편파/여캐편파도 접했다. 자신이 열심히 쓴 글인데, 내가 읽었을 때는 충분히 재미있고 멋진 글인데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거나 사족으로 붙인 근황에 대한 반응만 돌아오곤 했다. 그나마 나는 고등학생 무렵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고 2차판에서는 여전히 어느 정도 많은 반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나은 케이스였다. 어쩌면 나는 자신을 계속 마취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 나에게는 뛰어난 실력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 나의 고통이 전부 보상될 만한 큰 보람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여전히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상태로 대학을 졸업한 나는 대학 물이 덜 빠진 머리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대학의 문예창작학과를 재입학해서 다녀보면 어떨까?」 편입 자격을 알아본 다음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제출해보니 놀라울 정도로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입학처리도 진행되어서 새학기가 밝았을 때 그 대학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나를 죽이려 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다시 대학을 다니겠다니? 그건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넌 미쳤어. 네 다리를 분질러주마. 얼굴에 침을 뱉어주겠어. 감히 내 뜻을 거스르다니 배은망덕한 년! 죽어! 뛰어내려서 자살해! 난 절대 허락못해!)
학교를 자퇴하려면 직접 서류를 제출해야하는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도장을 받고 내가 합격했던 그 대학교로 갔다. 날은 매우 맑았고 오랜 시간 기다려 겨우 만난 학과 1학년 담당교수는 한 번 등록금을 냈다면 자퇴해도 언제든 복학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자퇴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대체로 암흑기였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닌 탓인지 의욕은 바닥을 찍었다. 어느 정도 성과는 낼 수 있었지만 괄목할 만한 결과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동력조차 퍼올릴 수 없었다. 본래 좋아하던 것을 조금씩 떠나보낸 뒤로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버거웠다.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기뻐하거나 반응을 보내주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바싹 마른 땅에서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무작정 우물을 파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하니 일을 했다. 대체로 금방 잘렸다. 제 몫을 하려면 근본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도무지 고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발버둥치듯이 글을 썼다. 반응은 시원찮았다. 무엇보다 쓰는 내가 흥이 나지 않았다.
별 수 없다. 절필하자.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점에는 자신을 아낀다느니 믿는다느니 자신의 글을 자신이 먼저 좋아해야한다느니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왜 살아있는건데? 살아있으면 돈을 벌던가 누군가의 도움이 되던가 둘 중 하나는 해야하잖아. 어느 쪽도 못하면서 막연한 꿈만 꾸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솔직히 이제 쓰고싶은 이야기도 없어. 지쳤다. 절필하자. 글을 쓴다느니 작가가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질렸어. 일할 수 있다면 푼돈이라도 고맙게 받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래. 그래봤자 금방 잘릴테고 아무런 돌파구도 못 찾겠지만.
…….
약 1년 뒤 나는 새로운 장르에 입덕하고 다시 연성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 뭐지?
대략 3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나는 본가에서 독립하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했고 몇 가지 삶의 행운과 시련을 마주했다. 독립 관련 이야기는 나의 모성가정폭력 탈출기에 적어두었으니 생략하겠다.
며칠 전 내가 예전에 쓴 연성 중 가장 처음 수첩에 적었던 연성의 업로드 날짜를 찾아보았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리라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네이버 날짜계산기에 날짜를 넣고 계산했다. 내친 김에 첫 연성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날짜도 계산했다. 아무 생각 없이 결과를 비교했다. 태어나서 연성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날짜보다 첫 연성을 하고 살아온 날짜가 더 많았다.
그야 삶을 반절로 나눈다면 고정되어있는 전반부보다 하루 지날 때마다 +1이 되는 후반부의 날짜수가 더 많아지겠지. 게다가 나는 고등학생 나이에 2를 곱한 것보다 나이가 많으니 이 차이는 이미 상정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결과를 보고 한동안 동요했다.
죽으려고 생각했다. 중학생 이전 시기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하고 기회를 찾지 않았고 게을렀고 비참했던 탓에 (그리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어떤 요소의 존재 유무로 인해) 나는 죽지 않았다. 사실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살고싶다고 생각하는 건 언제나 단발성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기한이 붙었고 조건이 붙었다. 바다 속에 오래 있다 가끔씩 수면 밖으로 물을 뿜어내는 고래에 비유하자면 물 속에 있는 시간동안은 죽고싶다고 생각하고 바깥으로 나오는 시간 동안은 살고싶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비율이었다.
고질병 같던 비관은 독립 이후에 조금씩 나아졌다. 앞서 말한 두 기간의 길이가 역전 된 지점은 그 이후였다.
글을 쓰지 않은 나는 글을 쓴 이후의 나에게 추월당했다.
그렇게나 죽고싶어했고 이제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기꺼운 건 그 때문이었나?
굉장하다.
나 살아있구나.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고 시작한 글이라 마무리가 이상해졌습니다만 (자아위로글?)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긴다는 감각으로 썼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다면 저는 제 과거를 추월해서 계속해서 후반부 날짜를 갱신해나갈 겁니다. 중학생 무렵에는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이런 게 가능하다는 의미군요.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애매하고 가족에게는 말하는 의미 자체가 없어서 게시글로 올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