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로에리] 지금 사흘동안 인형을 쉬지않고 만들었다고요?

아니 난 그냥 너랑 놀고 싶어서

로그모음 by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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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게 매듭짓는 손 끝이 야무졌다. 솜을 채우고, 바늘을 꽂아넣고, 뽑아내고, 가위로 잘라내고… 마치 인간 재봉틀 같은 정확함과 신속함에 있어서는 천하의 에리카도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확실히 거인은 거인이군. 무늬만 재능인은 아니었구나, 같은 불경스런 생각을 하며.

“뭘 그렇게 봐? 심심해서 놀러온 거면 지금은 놀아주기 어려운데.”

작업하던 인형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여로가 물었다. 그에게 있어 이건 일상이었기 때문에 종종 감탄사를 내뱉으며 신기하게 들여다보는 에리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귀찮았다-내색은 안해도 그가 에리카에게 뭐든 잘해주고 싶어했던 걸 생각하면 이건 놀랄 일이었다- 초짜도 아니고 누군가 작업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것 따위로 실력 발휘를 못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롯이 집중해야할 공간에 자신이 온 신경을 쏟아온 여자애가 등장하는 건 반길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인형보다 에리카에게 시선이 가려는 걸 참고 있다는 걸 에리카가 안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자신이 방해된다고 생각해 집을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이여로는 최선을 다해 작업을 빠르게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심해서 놀아달라고 온 거 아니거든요? 방해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요.”

이여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대답이었다. 내가 혹시 잔뜩 귀찮아하는 티를 냈던가?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기계적으로 자수를 놓을 실을 고르는 순간 싹 사라졌다. 에리카의 말에 대꾸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땅히 돌아와야 할 대답이 없자, 에리카는 작업실 안쪽에 놓인 빈백에 앉아있다가,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가, 또 이여로의 뒤쪽에 서서 인형 만드는 걸 구경하다가 뽀르르 나가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여로는 작업에 몰두했다.

집중력이 깨진 건 테이블 옆에 커피 잔이 하나 놓였을 때였다. 달그락, 유리가 단단한 것에 살짝 부딪혔을 때 나는 소음이 울렸고, 동시에 좋은 향이 훅 끼쳤다. 커피 향이었다.

“뭐야?”

짜증보다는 의문이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웬 커피? 밤을 샐 때는 마시긴 했지만, 이번에는 마시는 걸 잊을 정도로 몰두한 편이라 예외였다. 아무튼 이런 경우만 빼면 이여로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는 걸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수면의 질을 낮추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걸 에리카가 모를 리 없었다. 에리카는 평범한 사람도 아닌, 거인이라면 뭐든 알고싶어하며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었던데다, 거인인 자신과 같이 지낸 지 2년이 지났다. 심지어 서로는 못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한 사이였다. 그래서 일련의 상황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인형, 에리카, 커피, 잠… 두서없는 단어의 배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지금 사흘 째 안 자고 계시잖아요.”

“그게 왜?”

왜? 지금 왜라고 하셨나요? 에리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꾹꾹 눌러 참아온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쾅! 귀여운 두 주먹을 작업대 책상 위로 내리쳤다. 물론 이여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자신이 잠을 제대로 안 잔것과, 커피를 가져온 것, 그리고 에리카가 화를 내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연관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잠이 모자라서 그런가?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는 이여로에게, 이제 에리카는 눈을 찌를 듯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정도면 몰라도 사흘 연속으로 새신 건 처음인 거 아세요?”

너네 만나기 전엔 맨날 이랬는데, 같은 답을 할 수 없었던 이여로는 말을 삼켰다. 자신은 본래 생활패턴이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고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끼니를 챙기는 것도 제멋대로. 유일하게 지키는 것은 마감 일정 뿐. 그는 일정과 약속에 관련해서는 한 번도 늦거나 펑크를 낸 적은 없었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의 건강을 바쳤다. 그게 제일 싸게 먹히기도 했고.

“일정 치려면 어쩔 수 없잖아?”

준비하지 않았던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사실 급박한 일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주까지 마감해서 발송해야 하는 것들은 전부 완성하여 포장까지 해둔 상태였다. 이여로가 사흘 씩이나 새는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에리카랑 더 오래 놀고 싶어서. 오로지 그걸 위해서 무려 다음 달까지 받아둔 예약 건들을 한 번에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나니까 에리카를 데리고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을 거고… 아, 이번엔 아오이랑도 같이 갈까…일주일 정도 해외여행 다녀오면 좋을 것 같은데… 같은 아방한 생각으로.

“허, 참 나!”

“진짠데.”

에리카는 이여로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이런 식의 표정-순진무구하고 무해한-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여로가 제멋대로긴 해도 예약을 미리 당겨 받아서 마감을 했으면 했지 자기가 놀고 싶다고 일을 무작정 미루는 대책없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거짓말임을 간파해냈다. 이 사람은 벼락치기 중이 아니라, 문제집 한 권을 하루 안에 다 풀어버리듯 미친듯이 속도를 내는거나 다름없다는 걸. 그리고 그 이유는 높은 확률로 자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이여로가 자신을 위한다고 해서 그닥 감동스러워할 인간이 아니었고, 본인 스스로의 건강을 자발적으로 망치고 있다는 것에 크게 화가 났다. 자신이 이여로의 작업실을 구경하러 간 건 이틀 전이었는데, 눈앞의 남자는 마치 오늘 낮에 있었던 일처럼 굴고 있는 걸 보니 더 화가 났다. 아니, 인류에 이바지해야 할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안 돌보면 어떡하냔 말이야! 에리카는 거인을 보필하고 도우며 케어할 의무감이 있었다. 이 집에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아직 확증이 없어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지만, 만약 정말 자신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라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냥 이여로 본인이 바짝 일하고 오래오래 놀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뭐,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하겠는데, 날 위해서라면 전혀 이럴 필요가 없다고.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눈 앞의 남자는 으레 그렇듯 오리발을 내밀기로 작정한 모양이니 결국 참아주기로 했다. 내 팔자야.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 후, 그럼 일단 이거 드세요.”

“나 커피 잘 안마시는 거 알면서 왜? 아니 잠 안잔다고 뭐라 해놓고 커피는 왜 가져온건데?”

“잠 깨면서 일할 거면 이거라도 마셔야 도움이 되죠.”

“이것만 마무리하면 바로 잘 거였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이여로는 잔 손잡이를 잡았다. 확실히 연달아 밤을 새는 일은 오랜만이었으므로 피곤했다. 사실 체력보다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마라토너가 사점(死点)을 넘듯, 지금은 어떤 각성상태에 돌입한 상태였다. 따라서 육체는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신은 멍했기 때문에 에리카의 말에서 이상함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커피를 들이켰다.

“오, 뭐지? 맛있는데?”

털썩.

“하여간 이렇게라도 안 하면 고집을 안 꺾는다니까. 꼭 극단적인 방법을 쓰게 해요.”

에리카는 작업대에 그대로 엎어진 이여로를 살짝 일으켜 세웠다. 에리카가 준비한 것은 커피 맛과 향을 재현한 아로마 티로, 커피를 즐기지 못하는 임산부나 특정 체질인에게 인기가 많은 제품이었다. 카페인 대신 수면에 도움이 되는 성분으로 구성된 것만 빼면 커피와 아주 똑같았다. 커피에 관심 없는 이여로가 이런 제품이 있다는 걸 알 리도 없었지만, 어떤 속임수가 쓰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순순히 마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수면제를 안 탄걸 다행으로 알아, 이 자식아."

이윽고 이여로를 태운 의자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아오 무거워. 욕지거리를 몇 번 내뱉고 낑낑대며 용을 쓴 끝에 침실에 다다랐고, 이여로를 침대에 굴리듯 쏟아버리고 나서야 바닥에 털퍽 엎어질 수 있었다. 아, 진짜 개 힘들어! 미친 자식! 이렇게까지 사람을 귀찮게 하다니!

에리카는 한참을 종알종알, 잠든 이여로를 향해 온갖 불만을 쏟아낸 뒤 비척비척 침대에 올라 곁에 누웠다. 사흘이나 비어있던 공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맘이 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못내 어색해 한참동안 민무늬 천장을 바라보다가,제 몫의 이불만 끌어올려 덮고 죽은 듯이 잠든 사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귓가로 넘겨주었고, 색색 잠든 얼굴을 또 빤히 구경했다. 자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작업을 할 만한 이유가 정말 나 때문이었을까, 같은 걸 생각하면서.


스터디 목표: 공포 500자 이상 쓰기 (완전 단문)

현실: 목표의 8배를 써버림

그냥 첫째주고 가볍게 손풀기로 조각글을 써야지~ 했는데 어째서?

딱히 보고 싶은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일정상 너무 바빠서 당일치기로 바짝 썼는데 다 쓰고나니 잠 안자는 애 억지로 재우는 글이 탄생

스페셜 땡스: 도움 안되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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