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클

틈새 낭만

현대AU / 세온아스세온

* 커플링성은 옅지만 후반부에 가볍게 키스합니다. 묘사…는 하지 않았으나 주의해주세요.

* 원작이 아직 뭔가를 많이 주지 않아서… 이것저것 날조했습니다. 캐해 많이 미숙합니다 죄송합니다…

* 리다님의 썰( https://twitter.com/saleda12345/status/1767172870369943845?t=x_EuMU4WK0fGiSn3OWtVNw&s=19 )을 보고 허락 하에 소설로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

캘리포니아에서 맞는 아침은 뉴욕에서 맞았던 아침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스카와 세메이온은 침대며 가구 등이 난잡하게 어질러진 집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자다 내리쬐는 햇살에 서서히 눈을 떴다. 뉴욕에서 한참을 달려 늦은 밤에서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둘은 짐 정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널부러져 잠들었다 막 일어난 참이었다. 평소 둘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참 답지 않은 일이었으나 미국은 지나치게 넓었고, 그만큼이나 힘든 여정이었으니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요상한 자세로 잔 대가로 슬슬 뻐근함을 호소하는 어깨며 근육들을 풀어주며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타이밍에 일어난 둘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아갔다. 짐을 미리 보내두긴 했지만 그뿐이다. 업체 사람들은 그 가구를 보기 좋게 배열해주지는 않았으니 움직여야만 했다. 아스카가 1층의 창을 열고 있자면 세메이온은 2층과 작은 다락의 창을 활짝 열었다. 바다 특유의 짠 내음이 섞인 공기가 기분 좋게 집 안을 쓸어갔다. 정리되지 않은 집에서 쌓여가던 먼지와 함께 폐까지 깨끗해지는 듯한 감각이 타향에서 맞는 아침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합쳐져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바다 근처의 집을 구하길 잘한 것 같네요. 그렇죠, 아스카?"

"음."

저 나름대로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것을 알아챈 세메이온이 가볍게 웃었다. 로스엔젤레스도 뉴욕 못지 않게 활기 넘치는 도시였지만, 그래도 이 집 근방은 한적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고집을 조금 부려 다소 외곽 쪽 바다 근방의 집을 구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세메이온이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캘리포니아 주 하면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선연하게 빛나는 색이며 따사로운 햇살, 선선한 바람, 아득히 들려오는 도시의 옅은 소음...

어딜 가나 거친 소음 뿐인 뉴욕 한복판에 조금은 지쳐있던 둘은 그 고즈넉한 공기에 한껏 만족하고 있었다.

바다 공기를 느끼던 것도 잠시, 이제는 정말로 급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러니까, 1층에 멋대로 세워져있는 가구의 재배치 건 말이다. 아스카도 세메이온도 근력이나 체력에 있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사람을 불러야 했을 정도로 꽤 많은 가구들을 옮겨두고 나자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직 초봄이었으나 과연 로스엔젤레스. 지중해 연안과 비슷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날씨는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기까지 했다.

"긴팔을 입고 작업한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캘리포니아 주니까."

확실히... 이 정도 더위는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요.

슬슬 허기가 질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은 세메이온이 말알 맺으며 눈을 데굴 굴렸다. 지금 집에는 식료품이 거의 없는 상태고, 그렇다고 주변 브런치 카페 등에서 때우기에는 맛집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기분만 상하기 딱 좋다. 미국 사람들은 언제나 음식을 과하게 자극적으로 먹었는데, 그건 어쨌거나 두 사람의 식성과는 썩 일치하지 않는 편이었다. 덕분에 둘의 요리 실력만 나날이 늘어갔다...

잠깐의 고민 끝에 둘은 그냥 식료품점에 들러 가볍게 장을 봐오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날의 점심은 창 너머의 바다 향과 잘 어울리는 봉골레 파스타였다.

*

"이게 뭐지?"

급한 불도 껐으니 점심을 먹고 난 이후부터는 굳이 함께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세메이온은 1층을, 아스카는 2층을 정리했는데, 세메이온의 경우에는 조금 전 1층의 정리를 끝내고 도와주겠다며 올라온 참이었다. 마침 남은 마지막 방도 세메이온의 방이었다.

방에 널려있는 박스 두세 개를 집어들어 안의 물건을 본래 그가 두었던 위치대로 옮기던 찰나, 아스카의 시야에 거대한 악기 케이스로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분명 눈에 익은 악기 케이스임에도 이런 악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고등학교에 다녔을 적의 일이라 그런가 가물가물했다.

"뭘... 아, 제 기타 말씀하시는 거군요."

"기타?"

"기억 안 나십니까? 저 고등학생 때 나름 밴드부였는데요."

아하. 그제서야 아스카는 출처 모를 친숙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거의 십 년은 된 일이라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분명 그랬다.

아스카는 애써 흐린 기억을 뒤졌다. 9학년의 어느 여름의, 같은 기숙사를 쓰던 세메이온이 매일 들고 다니던 악기에 관심을 뒀던 날이 분명 있었다. 그때 눈 앞의 이는 어떻게 대답했더라. 아마 늘 그렇듯 웃었을 것이다. 맑은 여름 하늘, 햇빛마저 청춘의 빛으로 덧씌워지는 듯한 그 아래에서, 마치 여름 조각처럼.

……아, 역시 그때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미 10년은 지난 일이었으니까. 그런 아스카를 가만히 보던 세메이온이 뭐, 다 옛날 일이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새 창 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네요. 하하, 이삿짐 정리에 하루를 다 쓰다니...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확실히. 이제 내가 요리할 차례였던가? 먹고 싶은 건?"

"글쎄요. 아까 사왔던 소고기로 뭐 간단히 해 먹을까 싶기도 한데, 어때요?"

"나쁘지 않지."

아스카가 고개를 주억이고는 잠깐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크림 스프에 샐러드, 로스트비프 정도면 무난하게 맛있는 저녁 식사가 될 것이다. 세메이온은 아까 점심에 요리를 했음에도 가만히 있기 뭐 하다며 샐러드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스카는 추가적으로 말을 얹지 않고 식재료 손질에나 박차를 가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LA에서의 첫번째 날-엄연히 말하자면 둘쨋날이 맞았으나 둘은 암묵적으로 오늘을 첫날로 여기기로 했다-의 마지막 식사는 그렇게 크림 스프와 감자 및 양배추 샐러드, 로스트비프가 되었다. 아까는 서서히 하늘에 붉은 기가 좀 돈다 싶었는데, 어느새 하늘이 어두운 색에 거의 잡아먹히고 있었다. 태양만이 지평선 바로 위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강렬한 빛을 세상에 흩뿌렸다.

이렇게 노을까지 보고 있자니 어디 근사한 바다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라도 하는 것 같네요. 세메이온이 반쯤 장난 식으로 말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어쨌든 요리의 결과물은 훌륭했으며, 창 밖으로 보이는 경관은 꽤나 운치 있었기에.

*

"오늘 좀 피곤했죠?"

"딱히."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래도 조금 뿌듯하긴 하지 않나요? 10대 때보다는 체력이 많이 줄어든 줄 알았는데."

"……미안하지만, 우린 20대야.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다."

"하하하!"

아스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메이온을 바라봤다. 그는 척 보기에도 꽤 진지해 보이는 낯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이 웃음기를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이십 대여도 청소년 때의 활기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걸요... 세메이온은 워낙에 잘 웃는 사람이긴 했지만, 아스카를 보고 있자면 그 빈도가 더 잦아졌다. 한없이 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가끔 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재밌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세메이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스카는 다시 멀뚱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지중해 기후의 영향을 받는 지역은 밤에도 아주 쌀쌀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초봄임에도 잠옷 위에 가볍게 담요 한 장씩 걸치고 나와서 대화하고 있는 것도 가능했다. 아마 한 달 즈음만 더 지나면 밤에도 담요는 커녕 긴팔도 꺼리게 될 것이다.

세메이온과 아스카가 마련한 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바다가 위치한 곳이었다. 당연히 외곽 지역이니만큼 멋진 해수욕장은 없었으나 둘에게는 이것으로도 족했다.

원래 밤 즈음의 공기는 묘하게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데, 심지어 조용한 공간에서 아득한 파도 소리까지 듣고 있자 답지 않게 감상에 젖어들어갔다. 보통 그 감상의 종착지는 약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장소이자, 아직까지도 무척이나 소중한 기억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 고등학생 때 기억 납니까?"

"고등학생 때, 어떤 거?"

"제가 축제 때나 여러 행사에서 공연했던 것 같은 사실 말입니다. 기억하고…… 있는 건 맞죠? 아까 보니까 제가 밴드부였다는 것도 거의 잊고 있었던 것 같던데."

"……잠깐 악기 이름이 헷갈렸을 뿐이야. 잊지 않았어."

"정말요?"

"정말."

아.

정말로 기억났다.

세메이온이 말하던 '밴드부 기타리스트로 공연하던' 그가 아닌, '처음으로 그의 연주를 보았던' 날의 기억이었다. 사실 아스카는 세메이온이 했던 모든 공연의 순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으므로 세메이온이 언급한 기억은 새로이 기억해 낼 대상도 아니었다.

……아마 9학년의 6월. 슬슬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을 무렵일 것이다. 기숙사제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룸메이트로서 만났던 둘은 당시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관계였다. 둘은 방만 같이 쓸 뿐 반도 달랐고, 교과 과목 외의 활동에서도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으니까. 아침과 저녁에는 늘 함께였으나 형식상으로 하는 대화만 했을 뿐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카는 제 룸메이트가 늘 들고 다니는 악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현악기 류일 것이라 멋대로 짐작이야 했지만 어디 현악기 종류가 한두 개이던가? 미처 가장 흔한 기타를 떠올리지 못했던 아스카는 저것이 비올라인지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즉시 찰나의 순간 동안 세메이온은 당황했고, 눈을 굴리다가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어쩌다가 아스카가 제 룸메이트가 예의상 늘 얼굴에 띄워두던 미소가 아니라 즐거워서 터트린 웃음을 처음 본 후 여름의 편린이라 생각했는지, 그 사고의 흐름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기숙사 안에 있었고, 그 방의 창은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이미 5시가 넘은 시각이었기에 그렇게 따사롭게 내리쬐지도 않았을 텐데도...

어쩌면 여름 청춘 영화랍시고 선생님들이 중학생 시절 보여주고는 했던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저런 식으로 웃어서일지도 모른다. 애써 생각을 털어내던 아스카는 곧 세메이온이 직접 악기 케이스를 풀고 기타를 치는 모습에 홀린 듯 이끌렸다. 무슨 곡인지도 모르는데 그 목소리만이 기억에 진하게 남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교내 음악회에 밴드부가 나온다는 소리에 몇 번이고 조용히 참석했던 것은.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

"그러고 보니 너도 기억하나?"

"뭘요?"

"네가 처음 들려줬던 노래."

"……아스카,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사실 노래를 들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럴 법도 하죠. 10년은 족히 된 일인걸요. 저도 사실 기억나는 건 없는데..."

세메이온이 말 끝을 흐리며 거실 한 구석에 놓아둔 기타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것이 언제였는지도 슬슬 까마득하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급한 일이 없었고, 여유를 가져도 되는 만큼... 또 나름 특별한 첫날이기도 하니 오랜만에 꺼내볼까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침 적기이지 않은가.

바람이 불고, 별과 달이 반짝였다. 저 멀리 윤슬이 빛났고, 귀에는 아스라이 파도 소리가 들리며, 그 소리를 제하면 사위가 고요했고... 그래서 아마 조금 충동적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세메이온은 이미 낡은 기타를 가져온 참이었다.

"연주라도 해줄 셈인가?"

"글쎄요... 원하신다면."

"그런 것 치고는 가져오기까지 했잖아."

"다시 가져다놓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답지 않게 유치하게 구는 세메이온에 아스카가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세메이온이 농담이었다며 가볍게 웃고는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계속 케이스 안에만 있었던 탓일까. 케이스에는 먼지가 수북했으나 악기는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줄이나 피크가 세월에 의해 헤진 것이 살짝 문제였으나 연주에 지장이 갈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익숙한 코드를 잡아갔다. 연주를 안 한 지 한참 되었던지라 기억에 남는 악곡이라고는 없을 줄 알았는데...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몸이 기억한다는 건 괜히 나온 관용어구가 아닌 모양이다.

"처음 제가 불렀던 노래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걸로라도 만족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어차피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노래니 상관없어."

"하하, 상관 없다면 다행이고요."

세메이온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노래의 전주가 손끝에서 잔잔히 퍼졌다. 오래된 영화의 유명한 ost였다.

처음에는 몇 번 삐끗하던 세메이온이 이내 안정적으로 코드를 잡아나갔다. 아스카가 그 모습을 새삼 신기하게 바라봤다. 하긴, 세메이온은 고등학생 시절 꽤 유명한 실력자였다. 그렇게까지 열중했던 분야이니 10년이 훌쩍 지나서 잡아도 엊그제까지 연습하던 사람처럼 퍽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일까. 그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였기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

고요한 밤중에 세메이온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특히 밤과 상성이 좋았다. 아스카는 문득 이 멜로디가 굉장히 익숙한 것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 I'm crossin' you in style some day...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

아무렴 어떤가?

아스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그 순간을 차마 놓칠 수 없어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으면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한 낮은 노랫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으나,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는... 달빛에 적셔진 그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도 꽤 아까운 일이었다. 10년 만이니, 간만의 향수에 잠기기라도 한 모양이다.

"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

이유 모를 간질거림마저 애써 새벽 탓이라 생각했다. 오랜만이라서, 하필은 장소가 이래서, 또 이사를 온 첫날이어서 그렇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바람에 따라 우수수 흩날렸다. 그 끝이 달빛에 비춰 거의 백색에 가까운 색으로 보여, 달빛에 잠길 것만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거의 반쯤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하던 세메이온은 중후반부에 들어서야 자신감이 생겼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아스카를 응시해왔다.

"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

언뜻 보면 무심하게만 보이는 눈동자가 세메이온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못하고 조금 흔들렸다. 조금 동요했음을 알아챈 세메이온은 꽤 기꺼운 기분이 들었다.

이 노래의 무엇에 이끌려서 저리 시선을 끈질기게 두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아스카는 늘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얼 빠진 행동을 하고는 했고, 그런 것을 바라보는 것은 세메이온의 소소한 낙이었으므로.

" Waitin' 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

노래는 가볍게 끝났으나 둘 사이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스카는 노래의 여운에 잠겨있느라, 세메이온은 그런 아스카를 관찰하느라.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 후, 아스카가 겨우 입을 뗐다.

"곡의... 제목이 뭐지? 익숙한 것 같은데."

"<moon river>이라는 곡인데... 유명한 곡이니까, 아마 학교 다니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음."

아하, 어쩐지 유난히 익숙하게 느껴진다 했다.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메이온이 습관적으로 웃고는 보충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아시나요? 오드리 헵번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입니다만. 뭐... 벌써 60년은 된 영화긴 하지만, 어쨌든 명작이 괜히 명작이 아니잖아요."

"……들어는 봤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영화의 주제가입니다, 이거."

"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

"생각보다 많이들 모르더라고요. 옛날 영화라 많이들 안 봐서 그런 건지..."

"음..."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아스카가 머쓱하게 눈을 피했다. 기어이 세메이온이 그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아스카를 찔리게 만들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뭐 잘못한 사람처럼 굴지 않아도 돼요.

"……어째 갈수록 날 놀리는 걸 즐기는 것 같은데."

"착각이예요. 아스카가 알아서 웃겨주는데 제가 왜 그러겠어요."

"웃기려고 한 적 없어."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의도하지 않고 웃기는 것이 가장 즐거운 법인걸요."

차마 노려보지도 못하고 미간만 구기는 아스카에 세메이온이 그쯤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 <moon river>.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여주인공이 창가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남주인공이 노랫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었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듣고... 사랑에 빠지게 되죠."

제법 클리셰적이긴 하지만, 클리셰가 아직도 먹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겠죠. 아니면 60년 전 영화이니, 그때는 클리셰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고요.

이어지는 세메이온의 말을 들으며 아스카가 생각했다. 클리셰, 그런가? 하지만 그만큼이나 당연히 사랑에 빠질 만한 순간이라는 게 아니겠는가. 아스카는 보지도 않은 영화의 한 장면을 세메이온의 설명에 의존해 그려나갔다.

늦은 밤중, 타자기를 붙들고 있던 폴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에 홀려 창문을 열어보자, 홀리가 창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시각에, 홀리의 목소리만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그럼 이런 상황도 '클리셰적인 상황'인가? 그런 별 것도 아닌 생각을 하던 아스카는 별 고민 없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꼭 너 같군."

"네?"

"그 홀리라는 주인공 말이다."

그야 그렇겠죠?

세메이온이 오묘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선후관계가 살짝 반대이기까지 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해당 장면은 너무 유명한 장면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꼭 그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서 선곡도 하필 moon river으로 한 것이니까. 그러나... 어딘가, 아스카의 그 말에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 영화에서 폴은 홀리를 사랑하게 된다. 세메이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스카를 바라봤다. 세상에는 말로 감히 형용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지금도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낯설고, 그럼에도 여전히 친숙한...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은... 한 두 단어로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세메이온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잠시 갈등했으나, 답은 명확했다. 밖에 꽤 오래 나와있었다. 제아무리 따뜻하다고 해도 늦은 밤인 만큼 실외에서 오래 머무는 건 아주 권장되지는 않는 행위였다. 동시에 세메이온은 그것이 일종의 회피라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도 알아채고 꽤 놀란 사실이다. 회피? 왜?

……무엇으로부터?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밤이 깊었습니다."

"……세메이온."

"네."

세메이온과 아스카의 시선이 다시 얽혔다.

세메이온은 그와 10년 간 함께하며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자부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서만큼은 그를 모르게 되었다. 아니다.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다만 어떤 답을 주어야 할 지 몰라 외면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혀 싫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

그러니까…….

일종의 직감이었을까.

세메이온도, 아스카도... 로맨스 영화를 특별히 즐기는 것도 아님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은 아무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적기이고...

둘 중 누구도 그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걸.

"불편하다면 거절해."

"그럴까요."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둘 모두 사랑에 큰 관심이 없었던 만큼 서로의 첫키스였으나 성격 탓인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둘 모두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제법 담백했다. 그럼에도 달빛 아래에서 입을 맞추고 있자니 순간순간이 퍽 아름다운 명화처럼 보였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두 사람은 미련 없이 떨어져서는, 마주 보고 슬쩍 웃었다. 심란했던 감정이 그제서야 사그라들고, 상대방의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제가 홀리 골라이틀리라면 당신이 폴 바잭인가요?"

"가난한 작가는 아니지만."

"하하, 그렇게 치면 저도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성은 아닌걸요."

……그보다도, 이제는 정말로 들어가야죠. 이미 한참 전에 침대에 기어들어갔어야 할 시간인 건 알아요? 꼭두새벽에 일어날 거면서.

가볍게 타박하며 이번에야말로 세메이온이 아스카를 실내로 들여보냈다. 여러모로 목표를 성취한 아스카는 더는 붙잡지 않고 얌전히 집으로 들어갔다. 슬리퍼 두 짝이 마룻바닥에 가볍게 부딪치며 타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는 파도소리도, 풀 벌레 소리도,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세메이온이 묻는다.

"어디든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줄 건가요? moon river의 그 가사처럼."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 캘리포니아 주까지 따라왔잖아."

잠시 세메이온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 그랬지. 하며 아스카를 바라본다. 하긴, 한없이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사람이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컸던 뉴욕을 떠나 이곳에 오기로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 있었고.

"하긴, 그렇네요."

"……."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지만... 밤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로 미룰까요."

"……그래."

"이제 저희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세메이온이 제 방의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덧붙였다.

습관적으로 웃는 상이 더욱 다정하게 휘어진다. 아스카는 제가 이 모든 것들을 한여름밤의 꿈과도 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실성보다는 환상성이 짙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혹은 그냥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좋은 꿈 꾸세요. 많은 고민은 하지 말고."

"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아스카가 바로 옆 방인 자신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번이고 서술했듯, 그들 사이에는 특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많다.

아마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이에 몇 가지 주석이 붙여질 뿐이다.

새로운 관계의 정의에 누구나 그렇듯 가끔은 삐걱이겠지만 그들은 결국 빛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리고 영원히.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