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IPHAE
“오늘 우리는 괴신 티포에우스의 처결을 논의하려 모였다.”
날카로운 목소리, 꿰뚫는 듯한 시선. 산의 주인은 하나요 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올림포스보다 높은 산은 존재해서는 아니된다. 올림포스의 주인, 신들의 왕, 그리스 (그리고 그 후 로마의) 신대를 주먹에 말아 쥔 뇌신은 좋은 성미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문란한 여자관계와 지나칠 정도의 방탕함으로 알려져 있었다면 모를까. 그런 뇌신도 어찌되었든 왕이었고 주신이었기에, 그의 앞 황금 왕좌에 앉은 신들은 시선을 이리 저리 피했다.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만 하옵소서, 한 마디만 하옵소서, 따위의 아첨을 하는 건 명을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로니온은 넓은 아량의 소유자가 아니므로.’ “제우스 님, 산 아래에 처박아 둔 채로 그대로 두옵소서.” 말을 꺼낸 것은 황금 왕좌들 사이에서 나온 청이 아니라, 하늘을 비상하던 목소리였으니, 관을 쓴 남자는 눈썹을 위로 꺾었다. “그대의 말은, 티포에우스를 죽이지 않고 에트나 밑에 두어라…?”“예. 티포에우스는 조모님과 그 형제께서 지극히 비호하는 아드님이시니, 자칫 ‘처결’을 하시다간 평화가 어그러집니다. …폐하께옵서도, 가까스로 되찾으신 명예와 힘줄을 도로 빼앗기고 싶진 않잖으십니까.”
“그대의 충언이 실로 옳구나. … 그럼 그리하지. 나를 도왔던 카드모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만, 그 아이에게는 테바이의 왕위 말고도 적당한 상이 내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가 정분이 났다 하던데. 그대들은, 둘을 결혼시키면 어떻겠나?”
“그것은 이들이 아니라 헤파이스토스, 아프로디테, … 아레스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엄하신 부군이시여?”
암소처럼 동그랗고 말간 눈, 초롱초롱 빛나는 그 동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고, 신들의 여왕인 헤라는 왕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으나, 혼인이라는 인륜지대사, 무엇보다도 ‘결혼’이라는 그녀의 영역에서는 침범을 받을 의향이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고 꼬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에게는 따로 묻도록 하지, 카드모스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상이 여자라니, 참으로 편협한 사고방식이구나, 쯧, 하며 혀를 차는 대양신 오케아노스는 모처럼 바다에서 올라와, 회의자리에 끼어 있었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마냥, 올림포스 산은 그가 좋아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였다, 어찌되었든 그는 오트리스의 핏줄이었고 오트리스의 장자였으니. “백부님.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딱히 없단다. 어머니의 서러움은 어찌 달래 드릴 계획이지, 제우스?”
“조모님께서는 저를 상대로 반란을 꾀하셨습니다. 그런 조모님을 제 ‘혈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감아 드리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여깁니다.”
“한때는 어르신 또한 반역도가 아니셨습니까?”
오케아노스와 함께 올라온 자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게 홀 한 가운데에서 울려 퍼졌다. 금빛 홍채는 영롱히 반짝였고, 머리칼은 새벽의 하늘처럼 노랗고 붉었고 분홍색을 띄었으니, 기껏 님프, 로 보였던 이는 대양신의 뒤에 숨었다. “모습을 보이게.” “감히, 어르신이라니!” “이런 무례한 것을 보았나!” “… 괜찮으니 모습을 보이거라, 어서.” 대양신은 키가 컸고, 풍채가 좋았기에 체격이 작은 여자 정도는 쉽게 숨길 수 있었다, 해서 슬쩍 얼굴을 기울이며 내밀어 보인 처녀, 아니, 아이는 낯익은 광이 도는 눈을, 주신에게 오롯이 보여 왔다. “누구길래 이리 가벼이 말하는고?” “…아, 이쪽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어어, 저기, 태양마차가!” 실로 그러했다, 시종이 뻗은 손가락은 어느새 서편이 아니라, 동편으로 돌아오는, 반짝이는 해, 를 향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태양 마차’를 가리키고 있었으니, 그 이글거림이며 빛을, 열기를 이끌고 회의장 바로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마차를 보며 시끄러운 좌중은 뇌신이 그의 주먹을 내리쳐도 조용해지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대양신보다 키가 작았다. 훌쩍, 가벼이 마차에서 지붕 끄트머리에 앉다가, 지붕에서 회의장의 정중앙으로 고양이마냥, 발뒤꿈치를 세우고 내려앉은 사내의 금색 머리는 바람에 나부꼈다. 대양신과 주신의 사이에 선 자는 대양신의 흰 옷과도, 주신의 자주색 용포와는 확연히 다른,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관’보다는 ‘광채’에 가까웠으니, 붉은 옷의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키르케를 처음 뵈시는군요. 제 여식입니다. 백부님의 외손이기도 하고요.” 이전의 하늘에서 울려펴진 미성의 주인이 바로 그, 태양신 헬리오스였다. 그에게는 올림포스의 황금 왕좌에 앉을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어떠한 중압감이 무겁게 공기를 눌러 왔으며, 키르케는 그 아버지의 뒤에 뒷걸음질쳐 숨었다. “아바마마…” “오냐, 욘석아.” 신들은 보통 제 핏줄에 대한 애정이 없노라 인간들은 주둥이를 놀렸다. 허나, 모든 신들이 그러하진 않았다. 공작새를 쓰다듬는 여왕 헤라부터, 제 아들 아레스를 ‘싸고 돌았으며’, 명계에 있는 하데스는 그 아들 자그레우스를 위해 다달이 신중왕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게 정론이었다.
그랬기에 헬리오스가 님프인 딸을 아낀다 해도, 딱히 신기한 일은 되지 못하였다. ‘아바마마’라는 호칭에 미간에 주름을 잡으려던 뇌신 대신, 태양신이 말을 부드러이 이었다. “이것이 많이 놀라 헛소리를 하는군요, 전하. 이애가 남동생을 얻으면 그 애가 콜키스의 왕이 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로도스의 진정한 군주는, 따지고 보면 제가 아닙니까. 이애는, 인간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인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주 따끔히 훈육할 터이니, 라는 말과 함께, 키르케의 아버지는 제 딸을 안아 들었다. 파에톤을 잃은 지 많은 해가 지난 후였지만, 군왕과 신하 간의 의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음을, 둘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데리고 들어가시겠습니까?” 크로노스의 장녀, 헤스티아의 목소리는 곱고 상냥했다. 만약 헤스티아가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올림포스는 지금과는 다른 형국을 띠고 있었겠지만, 운명은 이따금 잔혹하여 크로노스의 막내를 왕위에 앉혔다. “감사합니다, 헤스티아 누님. 이애가 많이 놀랐는데, 들여 보내고 마저 마차를 몰아도 되겠습니까?”
“… 그리하시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태양신의 어깨에 대롱거리며 매달린 어린 딸은 회의장의 신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신들의 여왕과 똑 닮은 전쟁의 신, 그 곁에 앉은, 미모가 빼어난 사랑의 신, 그녀를 사이에 끼고 불편히 앉은 대장장이의 신, 모두 한결같이, 고귀한 황금 왕좌의 신들. “아버지, 이대로 돌아가도 될까요?” 속닥여 오는 딸의 근심거리를 모를 만치 헬리오스는 헛살진 않았으니, 그는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가도 되지 않겠느냐, 이 아비가 누군데.” 아비가 누군데, 그 여섯 글자는 아주 불안하기 짝이 없게 회의장의 문을 닫으며 나서는 헬리오스의 뒤를 따르다 말고 남았다. “헬리오스께서는 버르장머리가 없으십니다.” “두거라.” “그러나 사실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의 태양신이요, 제우스의 아들이요 그와 가장 닮은 아들이라 불리는 아폴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혈기왕성한 나이임은 부정할 수 없었고, 아폴론은 본디 헬리오스와 공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술도 예술도 음악도 자신의 조예를 마음껏 펼쳐 왔다, 그렇지만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저치가 태양신으로 존재하는 이상, 아버님의 아들인 저는 태양‘빛’의 신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아바마마, 불안하지 아니하십니까?”
태양 마차를 끄는 것은 헬리오스지만, 공양된 제물은 둘이 나눈다는 그 원칙. 저도, 헬리오스 못지 않게 마차를 잘 끌 수 있습니다, 손을 가슴 위에 올려 올 때, 왕이 입을 다시 떼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안다만, 그 마차는 그 핏줄만이 끌 수 있는 것이다. 너는 그 핏줄이 되지 못해. 셀레네, 나 에오스, 가 이따금 서로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것과는 염연히 다르다.” “허나 아바마마!” “헬리오스가 지나치게 방자해지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단다.” 손을 든 신은,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여신이었다. “헬리오스께옵서 지나치게 방자해지시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눈매가 또렷하지만 사납진 않아 고양이에 가까운 상이었지만, 그 눈이 날카로워진 건 순식간이었다. “헬리오스께옵서는 제 오라비시고 개국공신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정 올림포스와 오트리스 두 산이 분열되어 다시 피를 흘리는 광경을 보셔야 한단 말이십니까?”
“어머니, 비약이 심하십니다.”
“헬리오스께옵선 네 외숙이신데, 무례하구나!”
“그만들 하거라! 그만! 조용! 어찌 그대들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우는 게야! 헬리오스가 지나치게 방자하게 굴지 않으면, 걱정할 일은 전혀 없을 테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아폴론 너는 헬리오스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지 말라! 공신을 대접함에 소홀함이 있다면 쓰겠는가!”
불편히 흐르는 침묵 위에, 해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내려 놓았다. “이거 완전 개판이고만, 이럴 때 보면 네가 전혀 부럽지 않단 말이지, 동생아.” “그대도 참… 오늘 회의는 더 이상의 안건이 없다면 파하도록 함세.” 회의의 종언을 선언하기가 무섭게, 여러 신들이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전령신 헤르메스는 아비의 왕좌도 그의 난봉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이리 많은 신족의 통솔은 가히 뇌가 찢어질 정도의 것이리라. 부친이 아테나 누이가 머리에서 튀어나온 후, 편두를 호소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 둘씩 적혀 내려가는 안건을 보며 그는 일찍 자리를 피한 헬리오스야말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대양신은 미간을 꾹 꾹 눌러 왔다. 정치나 통치와는 일찌감치 거리를 둔 그였다, 그랬기에 천부 우라노스의 왕좌를 상속받지 못했지만. 다만, 산처럼 쌓여가는 의견들 속에서 자신의 주관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었다. 프로메테우스였다면, 제 할 말을 똑부러지게 할 터였는데. …젊은 티탄 신족은 권세가 적고, 권세가 있는 티탄 신족은 한정되어 있다.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헬리오스의 궁은 하얀 대리석으로 덮여 있는, 해가 뜨는 동편의 궁전이었다. 그 궁전은 한때 그가 소유했던 것이 아니었으나, 그의 미감이나 옛 소유주의 미감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궁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해서, 익숙한 빠른 보폭으로 딸아이의 손을 잡고 발을 들인 태양신의 궁은 넓었고, 벽에 걸린 등불들은 불을 다루는 주인의 등장을 알리듯 반짝였으며, 천정에 걸려 있던 크리스탈 장식은 사방에 빛을 흩뿌렸다. 먼저 집에 뛰어들어간 여식의 그림자가 불안할 정도로 길게 뻗쳐 왔고, 헬리오스는 아이의 그림자라도 잘못 밟을세라 옆으로 비켜 섰다. 한때 그는 그 어떠한 자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몸이었지만, 어느덧 그는 가장이 되어 그 무게를 온전히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누이들이 그와 나누어 질 수 없는 짐이었다. 어디선가에서 열리는 문의 소리가 들렸고,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저를 향해 뛰어오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조모님, 아버지께옵서 오셨어요!” “오냐, 참으로 아버지께서 오셨구나.”
어둠의 여신에게 있어서, 헬리오스는 그저 아이였다. 그것도 아주 늦게, 아주 힘들게 얻은 아이요 유일한 아들이었다. 어머님, 소자 왔나이다, 라 말하며 몸을 굽히는 그의 금발은 ‘그저 금발’이었고 기다란 속눈썹은 저보다는, ‘그이’를 닮아 있었다. “다녀왔구나. … 간만에 보는구나, 일주일은 된 듯해.” “일주일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농조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테이아는 아들을 문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붙어 먹었노라 고한 아들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지켜 보았고 모든 것을 고했다. 다만, 그 대가가 에로스의 금화살에 맞아 제 가정을 등한시하는 것이라면 어둠의 여신은 지나칠 정도의 대가, 라 생각하고 있었다. 막내 동생의 연애놀음에 아들이 관련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네 아버지를 뵈러 에오스가 어제 연옥에 들렸다 들었는데.” “그애가 그랬나요? 연옥의 일에 저는 손을 떼지 않았습니까.” “… 네 아버지가 딱하지도 않으냐?” 한때 가장 권세롭던 일가에 욕되기 짝이 없는 추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로노스의 부관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에 저는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에오스야 여아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전 다르지 않습니까?” “경우가 다르다는 게 부친을 봉양하는 데 할 소리냐? 네 아버지가 대역죄인이라 할지라도 네 아비임은 사실이 아니더냐.” “에오스가 효성스러우니 그애에게 전담하라 여태껏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 할아버님께서는 대역죄인이십니까?” 어린 키르케가 물었을 때 테이아는 그 답이 두려웠다. 헬리오스에게는 수도 없는 금발머리와 금안을 지닌 아들 딸들이 있었지만, 그의 정처가 낳은 첫 번째 자식이 키르케요 키르케에게 보이는 태도가 진실된 헬리오스의 속내리라고 테이아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제 아들은 말이 없었다, 수다스럽다고 소문난 방정맞은 입은 움직이지 않았고 가만가만 키르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끝만 움직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죄를 지으셨다. …허나 제우스 님은 관대하시니 할아버님은 영원불멸 타르타로스에 계시진 아니하실 것이다.” 적어도 이 아비는 이리 생각한다, 말할 때 사파이어 빛의 눈이 번뜩였다. 제우스 님의 아버지신 크로노스 님도 지금 엘리시움에 계시지 않으냐, 이 아비는 제우스 님을 신뢰한단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뭘 하고 계시니?” 그 물음 하나에 아이는 깡총깡총 뛰며 제 아비 옆에 찰딱 붙었다. 부모의 친하지 못함은 이미 어린 키르케마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때 오케아노스의 딸 페르세는 헬리오스와의 결혼을 무엇보다 바랬지만 막상 그의 처로 자리하고 나니 불우한 결혼을 욕되었다 탓한다는 것은, 올림포스를 두 바퀴 돌고도 남은 소문이 아닌 현실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베를 짜고 계십니다, 고모님께서 오시면 아버지의 치수를 잰다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오셨으니 치수를 재시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어머니는 좋겠구나.” “어머니께서 남동생을 낳으면 콜키스의 왕좌를 준다 하셨던 것은 진심이십니까?” “오냐, 당연하지.” 당연하지, 껄껄 웃는 아버지에게 키르케는 당돌히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자라고 나서는 어디의 왕좌를 주실 것입니까?” “아, 사랑스러운 얘야!” 헬리오스는 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키르케는 제 누이들만치 곱지도 않았고, 아주 훌륭한 배필감을 얻어 오진 못할 것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처가 낳은 첫 번째 딸이었다, 그것도 계처도 아닌 정처의 딸. “네가 자라고 나면 이 아비는 널 섬의 주인으로 만들 거란다. 아이아이에는 기후도 온화하고 풍족한 곳이야, 영웅이 아닌 미천한 사내의 눈을 피하기에도 제격이고.”
영웅되지 못한 미천한 사내와는 손끝 하나 닿지 않게 해 주마, 그리 말하며 헬리오스는 일어 오는 두통을 숨기고자 웃었다. 이러한 약속을 몇 번이나 했던가? 미천하고 천박한 사내와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섞여서는 아니된단다, 이리 오렴, 어머니를 뵈어야지. 궁전에서 가장 큰 방은 그의 것이었고, 두 번째로 큰 방은 아내 페르세의 것이었으며, 페르세의 방은 그녀가 부모, 오케아노스와 테튀스 내외 슬하에서 자라던 처녀 적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형제자매들의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던 수궁전의 방은 좁진 않았으나 언제나 발디딜 틈도 없던 수궁전과는 달리, 헬리오스의 궁에서 그녀는 ‘정실 부인’으로 온전히 공경받았고 정실 부인답게 시종도 여럿 붙어 있었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분홍색 머리를 빗어 오는 시종들은 주인의 등장에 허리를 숙여 읍했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여신은 고개만 숙였다. 본디 이 혼처는 그녀의 것이 아니리라고 많은 이들은 말했었다, 언니 클리메네의 혼처라고, 클리메네는 이미 헬리오스와의 사이에 여러 딸을 두었노라 말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혼담은 파해졌고, 헬리오스는 제 남편이 되었으며 클리메네는 에티오피아의 인간 왕에게 시집을 갔다.
… 그것도 물론, 다 옛 이야기지만.
“오셨습니까?” “지금 당도하였소. 몸은 좀 어떠신가?” “나쁘지 아니합니다. 베를 짜다가 손을 다쳐서, 오늘은 잠시 멈추기로 했나이다.” “그리하였소? 어쩔 수 없구려, 손을 다쳤다니. 심하게 다쳤소? 이리 줘 보구려.” 그의 다정이 참 불편했다. 헬리오스는, 그가 싫어하는 올림포스 신족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그가 섬기는 천신과, 비슷한 구석이 꽤 있었다. 여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 그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그 재주는 탁월했다. 무대의 정중앙에 서지 않으면 당최 버티지 못하는 게 그녀의 남편이었고, 그는 타인과 어울림에 있어 즐거움을 찾았다. 그녀의 가정이 평탄하지 못한 것은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저지른 과오가 반이었지만, 기실 그녀는 금화살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 가정에 평안함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손을 내밀자 그가 깍지를 말아 쥐며 그녀를 향해 웃었으니 말이다. “부인, 약속해 주시오. 이 손이 낫기 전까지는, 아니, 복 중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쉬겠노라고.” “그리하면 부군의 옷은 누가 만든단 말입니까?” “옷이야 재단사를 고용하면 되지 않소? 그러니 부인, 약조해 주시오.” 클리메네는 그녀의 언니였고, 헬리오스가 클리메네 이후 만나던 클리티에 역시 제 언니였다. 헬리오스는 지독할 정도의 풍운아였고 가정을 알기를 돌같이 알았다.
“… 그리하겠습니다.”
그녀는 클리메네, 클리티에 둘보다 현명하다 자부했었다. 그, 에 한해서 그녀는 현명하지 못한 스스로가 꽤 미웠다. 그럼 약속한 것이오, 부인, 살갑게 말하던 남편이 배 위에 손을 얹어 왔다. 그와 결혼한 지 많은 해가 지나고 나서, 어쩌다 임신한 키르케는 그의 사생아들, 혼외자들보다 곱지 않았고 아들도 아니었지만 그는 딸에게 애정을 쏟았다. 해서 이번 아이는 아들이어야만 했다. 그를 실망시켜서는 아니되었다. 그처럼 머리가 노랗고, 성격이 호방한 아들을 낳는다면, 파에톤을 대체할 아들을 낳는다면, 그는 밖으로 나돌지 않으리라. “아이가 얌전하니 좋구려. 부인을 너무 괴롭게 할까 걱정했는데, … 이애는 아비가 왔는데도 반기질 않으니 섭섭하구나.” 배 위에 올려진 손은 따뜻하고, 컸으니, 페르세는 뻔하디 뻔한 사실을 무시하기로 했다. “아이가 아들이라면 페르세스라 부르면 어떻겠소, 부인?” “아이가 딸이면 어쩌시게요?” “아이가 딸이라면 부인이 이름을 지어주시오, 키르케의 이름은 내가 짓지 않았소?” 태양신은 게으른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상냥하고, 따뜻하고, 권태로운 그 웃음에 그녀는 두방망이치는 심장이 멎었으면, 바랬다. “아이가 태어나면 곱게 키웁시다, 조정의 일과 거리를 두고, 권세가나 왕가의 눈에 띄지 않는 한에서.” 페르세는 이 작은 행복을, 잠시 즐기기로 했다. 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옅게 웃었다, 클리메네가 그러했듯, 클리티에가 그러했듯.
헬리오스는 권세로웠고, 젊었으며, 잘생겼고, 성품이 모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는 이 관계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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