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사귀면 개이득이지

귤첼

“왜 이렇게 요새 안 나왔어. 연락도 잘 안 받고. 드라마라도 달렸어?”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가 승관이에게 채근하듯 물었다. 승관은 잠깐 움찔했다가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맞아, 나 이제 전 시즌 다 본 거 생겼다. 미국 드라마 길기만 해서 어따 쓰나 했는데 쓸 데가 있긴 하네.”

“뭔 소리야 그게.”

친구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웃었지만 승관은 진심이었다. 미국 드라마가 시즌제로 길기만 하고 깔끔하게 안 끝난다고 굉장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런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예를 들면, 사람하고 안 만나면서 아주 오랜 시간을 후딱 지나가게 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할 때.

“그런 게 있어, 바보야. 넌 그것도 몰라? 내가 요새 뭘 본 줄 알아? 진짜 쪼끔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포켓몬까지 봤을지도 몰라.”

친구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거 넷플릭스가 자꾸 추천해주지, 그치.”

“너는 근데 내가 환승연애부터 제대로 보라고 했지! 넷플릭스를 왜 틀어!”

승관은 메뉴판을 건성으로 훑어보면서 추천해준 환연이나 제대로 봐라 어쩌구 저쩌구 뭐라 하면서도, 동시에 첫사랑이 또다시 자신을 조금 뿌직 꾸긴 일에 대해서는 언급해선 안된다고 뇌에서 열심히 검열 중이었다.

‘뭐 그렇게 엄청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약간. 쪼끔. 아주 쪼끔. 진짜 쪼끔 호감을 은은하게 가지고 있을 뿐이었는데.

심지어 호감이 맞긴 한지 의심스러운 감정이긴 한데, 나름대로 부피가 좀 커서 뭐만 하면 뿌직하고 꾸겨지고 그런다.

근데 생각하니까 화나네.

“나 생맥주. 소주 시키지 마.”

“갑자기 왠 소주?”

“어, 어우! 나 니가 메뉴 아래만 보고 있길래 쏘맥 말고 싶어하는 줄 알고 얼른 그랬지. 그러지 마라 진짜.”

“내가 그렇게 술 잘 먹진 않아.”

승관은 한숨을 파아아아악 쉬었다.

원래 이게 맞지. 맥주만 마시면 밍밍하다고 소주 타서 마실래? 하고 폭탄주 제조해주고 그거 때문에 사람 훅 가면 깔깔거리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최승철 때문에 나까지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 같애.’

입은 다른 말을 부지런히 떠들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자꾸 최승철이 데구르르 맴돌았다.

최승철.

부승관의 첫사랑, 아마 그 비슷한 위치.

왜 비슷하다 하냐면, 이 형을 보고 심장이 빨리 뛰고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입술이 얼어붙는 게 공포와 두려움 때문인지 좋아해서인지 오래도록 난제였기 때문이다.

정의는 못 내리면서도 감정의 부피는 또 커서 절대 무시 못하는.

근데 요새 그 묘한 위치의 형이.

족구나 농구하는데 너 꼭 와야 된다구 너가 있어야 이긴다고 꼬셔(거짓말! 막상 가면 얘 있으면 진다고 다 같이 놀리면서 같은 팀도 잘 안해주고),

술약속 싫다는 걸 어르고 달래고 애교 피워서 결국 술약 잡아(짜증나! 막상 가면 폭탄주나 먹이면서),

먼저 일어난다 그러면 8시 20분 되어서 벌써 가냐고 서운하다고 붙잡아(서운은 뭐가 서운해 이 거짓말쟁이),

맨날 네가 있어 든든하다 이러질 않나(근데 3초 뒤에 앞담 시작함)…….

하도 그렇게 찰싹 붙길래 승관이도 마음이 있는 곰돌이라 생각은 했긴 했던 것이다. 나 좋아하나 이 형이?

그런데 갑자기 남친 소개하기 있냐고요.

진짜 좋아하는 친구들이라고 소개시켜줘도 진짜 하나도 안 기쁘다.

심지어 그 남자친구라는 인간이 자신과는 정반대라면.

‘그 꼬라지 보면 형 취향 절대 나는 아냐. 난 꼼꼼하고 야무지고 눈치도 빠르고 귀여우니까.’

그래서 승관의 마음은 쪼끔 꾸깃해졌던 것이다.

‘물론 형하고 사귀고 싶은 맘까진 전혀 없는데?’

아니 근데 날 안 좋아해? 날 그렇게 가지고 놀기만(?) 한 거야?

진심으로 최승철 꼴보기가 싫었다.

덕택에 팔자에 없는 스마트폰 디톡스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던 승관은, 결국 넘쳐나는 E를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친구와 바로 약속을 잡고 나왔던 것이다.

그래,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마주치겠어, 그런 마음으로.

최승철은 안 마주쳤다.

근데 최승철 남자친구랑은 마주쳤다.

걔 남친이 자기 친구들 다섯명 정도와 우르르 들어와 자리잡은 것이다.

“서울 바닥… 좁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는 사람 있어? 그래, 서울이 좁긴 하지.”

“아아니? 뭔 소리야, 좁긴 뭐가 좋아? 서울 촌놈들 진짜.”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하냐.”

들어오는 와중에 남친은 부승관을 알아본 것 같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만에 만난 건데 눈치 없고 센스 없는 새끼….

부승관만 무의식중에 들어오는 일행을 스캔하다가 알아본 거라서, 가서 인사할 사이도 아니고 반가울 사이도 아니고 뭐… 그냥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론이 났는데. 딱 나온 생맥을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키면서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짜증나고 신경쓰였다.

‘하, 그냥 보자마자 인사할 걸. 이제와서 인사하기도 좀 그렇구 왜 모르는 척 했지. 형 알면 삐진다 이거.’

“승관아, 안주랑 먹어.”

“어? 알았어.”

승관은 전투적으로 마른 안주를 씹어댔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다, 그 인간은 왜 남친이랑 너랑 둘이 만났냐고 둘 다 절벽에서 밀 인간이지. 괜찮아. 오케이. 계속 모르는 척 하자.’

몇 번이나 결심해도 마음은 생각한 대로 착착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이 자꾸 저쪽 테이블로 날아갔다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오는 걸 반복하자 친구도 그걸 눈치챘다.

“왜. 화장실? 저쪽이야? 가고 싶음 얼른 갔다 와.”

“웅…. 모자 좀 줘 봐.”

친구는 뭐라고 하면서도 캡모자를 벗어서 승관에게 건넸다. 승관은 모자를 쎄벼 쓰고 마스크도 쓰고 난 뒤에 물었다.

“난 줄 못 알아보겠지?”

“너 뭐 돼?”

“좀… 너 지금 까불지 마라. 형님 심기 안 좋다.”

“형님 같은 소리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핸드폰 셀카 모드로 한 번 체크하고 못 알아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승관은 일어섰다.

태연하게 가자.

난 태연함. 당연함. 모르는 사람 옆을 지나가고 있는 거거든?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테이블을 지나가면서, 정말 듣고 싶지 않았는데 대화가 들렸다.

“아, 나 연애 질렸다. 결혼하고 싶다.”

최승철의 남친이 거기에 맞장구쳤다.

“그렇게 생각할 때가 좋을 때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정확히! 최승철의 남친에다가 대고 말했다.

“넌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고.”

부승관은 마스크 안쪽에 턱을 떨어뜨린 채 얼레벌레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신이 들은 대화를 곱씹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뭔 소릴 들은 거야? 저거 승철이 형이랑 동거해? 그럴 리가 없는데. 뭘 했다는 거야?

“…아니지. 내가 잘못 들었겠지. 캄다운 캄다운.”

혼란스런 맘에 손만 한참을 벅벅 씻은 부승관은 정신을 차리고 빨리 친구에게로 돌아려 했다.

그런데 문제의 남친이 있는 테이블 근처에서부터 저도 모르게 쪼끔씩… 천천히… 발걸음이 느릿해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다시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스파이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사심 같은 건 절대 없었다. 친구한테 애인이 있어도 이렇게 했을 거야. 진짜 사심 없어.

그러니 침착하게 007처럼 슥 지나가면서 정보만 모으면 그만이었는데, 니 와이프한테 잘해라, 애기 나오면 절대 술자리 못 나오니까 지금 마셔라 하는 소리가 나오자 골이 띵해서 발걸음이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진짜 결혼했어? 형하고는 바람이었냐? 애도 있고?

그 와중에 남친은 레전드 쓰레기 발언 중이다.

“참나아~ 애가 있다고 술 못 마시냐. 애는 부인이 봐주지.”

“뭐야 씨발.”

승관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팍 돌려서 노려봤다.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욕을 갈기며 노려보자 시끌시끌하던 테이블도 싹 조용해졌다.

승관도 씩씩거리는 동시에 ‘설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닌가?’하는 의심도 진짜 쪼끔은 했지만, 정면으로 보니 확실히 맞았다. 최승철이 대롱대롱 매달려대던 그 남친이 맞았다.

남친이 눈을 부라리자 승관도 마스크 한쪽을 귀에서 벗겼다.

“뭐…야?”

남친의 얼굴이 처음에는 어! 아는 얼굴… 로 시작했다가 차츰 뜨끔하게 바뀐다.

“누구세요.”

“아는 사람이야?”

주변에서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데 남친은 입만 뻐끔댈 뿐 승관의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승관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잇새로 자꾸 험한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고.

“야, 나 잠깐만 전화 한 통만.”

앉자마자 바로 최승철한테 전화를 때렸지만 돌아오는 건 ‘고객님이 현재 통화 중이셔서…’ 이거였다.

“아우씨 이 형새끼 이럴 땐 전화도 안 받어!”

샐러드를 야무지게 먹던 친구가 물었다.

“왜?”

“아니이 나 지금 하… 아는 사람 남친이 레전드 똥차인 걸 목격했거든? 빨리 알려줘야지.”

“알려줘야 되나?”

“알려줘야지.”

“에이, 그러면 그 아는 사람이랑 네 사이가 나빠지지 않냐? 남의 연애는 참견하는 거 아냠.”

“그 정도가 아니니까 그렇지!!!”

부승관이 계속 전화 통화를 시도하며 눈을 부릅뜨고 화내자 친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지 알지, 니가 없는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걸 말하면 어쨌든 사이가 나빠질 수 있잖아.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되니까. 그리고 친구보다 애인 말을 더 잘 듣고….”

승관도 그게 맞는 말인 건 알았다. 남의 연애는 참견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냥 어지간해야 그러려니 하지! 이 건은 진짜 재활용 안 되는 타는 쓰레기라고!”

죽어라고 통화 통화 통화 눌러댄 보람이 있는지 승철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막 잠에서 깼는지 푹 잠긴 낮은 목소리였다.

- 웅 승관이 무슨 일이야. 왜 이르케 전화 많이 했어.

저쪽 테이블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쓰레기가 일어나서 오려다가 친구들이 잡아서 어영부영 다시 앉았다.

그걸 똑바로 노려보면서 승관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승철은 응, 그래, 맞아 하고 단조로운 대답만 하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그마저도 없어졌다.

승관은 아직 분노로 씩씩거리고 있는데도.

전화 너머에서 승철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고저없이 물었다.

- 정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

승관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진짜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하고 승철의 남자친구에 대한 악의를 날조해낸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손발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목소리도 덜덜 떨렸다.

앞에서 친구가 뭐 한다고 했으니 잘 해봐라… 하는 식의 해탈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도, 남친 쪽 테이블에서 계속 웅성거리다가 결국 밖으로 나가며 승관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그래. 알았어. 고맙다, 승관아. 이런 거 때문에 너 식사 망치지 말구 깔끔하게 잊고. 맛있게 먹어.

형 지금 너의 쓰레기 똥차 때문에 심란한데 맛있게 먹으란 소리가 나와?!

한 줄기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이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는데 성공한 승관은 이만 빠득빠득 갈다가 씅냈다.

“알았어! 잘 먹을 거야! 나 이거 때문에 절대 술자리 안 망칠 거다 알겠지?!”

- 어엉.

전화를 끊고 나서 승관은 일부러 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후로는 내 알 바 아냐. 고소를 당해도 사실적시로 고소당하는 거지 없던 일 말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진짜 신경을 딱 끊고 살려고 했는데.

인간관계가 좋아도 이럴 때 나쁘다.

“이런 거 나한테 막 말해줘도 되냐?”

부승관은 죽은 눈으로 정한이 흘리는 TMI를 들었다. 승철이가 맨날 술 먹자고 불러내가지고, 남친이랑 대판 싸우고 깨졌고 어쩌고, 길거리에서 어쩌고.

“뭐 너두 승철이 남자친구 봤잖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지.”

“으응… 왜 깨진지는 알아?”

“남친이 싱글인 척 했던 놈이라며~ 어떻게 그걸 숨기고 사람을 만나냐 그치. 그래도 용케 알았어. 몰랐으면 내내 그렇게 숨겼을 거 아냐.”

그 말에 승관은 진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물론 싱글인 척 하는 기혼을 잡아냈으면 당연히 누구라도 미쳤나 싶어서 제보했겠지.

그게 맞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 새끼는 쓰레기고, 자기는 맞았다.

근데 나 때문에 몰랐던 걸 알아서 이렇게 싸우고 깨졌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그 새끼랑 깨지라고 고사를 지내고 싶긴 했는데 진짜 내가 그 새끼 쓰레기라고 말해서 깨진 거잖아…….

거기다 친구의 충고가 자꾸 머릿속을 둥둥 맴돌아서 잔소리했다.

- 남의 연애에 왜 참견해. 참견해봤자, 애인이 쓰레기여도 자기 애인 나쁘게 말하는 친구는 손절당하는 거야.

친구가 알았으면 ‘나 그렇게까지 말 안했어!’라고 분개할 만한 부풀림이었다.

바짝 겁먹은 승관은 단체톡방에 승철이 올린 무난한 안부 톡에도 과민반응하며 히익 놀라 자빠졌다.

그리고 덜덜 떨면서… 근데 차마 단체톡방을 나가진 못하고… 알림 설정을 다 꺼놨다. 카톡 미리보기도 꺼놓고 모든 알람을 무음으로 바꿨다가 아예 표시도 안 되게 꺼버렸다.

그 다음엔 거대한 현타가 왔다.

최승철 딱 한 사람을 차단할 용기가 없어서 아예 모든 사람을 피해? 이거 미친 놈 아니야?

근데 부승관은 겁쟁이라서 진짜 최승철을 차단할 용기는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스마트폰 디톡스 강제 수행 2 페이즈 들어가고 난 후 부승관은 자신이 진짜 E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때로 피곤하고 지칠 때 I가 나오길래 나도 쫌 왔다갔다하는 타입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찐 I는 기분이 아무리 좋아도 E가 나오지 않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E는 혼자만의 시간보다 사람들하고 만나는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최승철 이 형놈은 또 눈치가 왜 이렇게 없는지 평소엔 어쩌다 가끔 ㅇㄷ? 족구할랭? 요러기만 하더니 왜 이럴 때만 자꾸 친한 척 뭔 일 있냐고 카톡하고 전화하구…….

여러가지 이유로 스트레스가 팍팍 쌓여서 하루하루 시들어가니까 슬쩍 정한이가 나가자고 찔러댔다.

“고기 먹쟈.”

“들어가겠니?”

“그럼 죽 먹쟈.”

“맹맹해서 죽 싫어.”

“누가 그래! 요새 죽 잘 나와~ 마라죽도 있잖아.”

“특정 누구만 좋아할 것 같은데 그건. 몰라 그냥 배달시켜.”

“어허 형으로써 아주 말하는데 너 지금 햇빛 부족이야.”

이렇게 대놓고 걱정해주는데 또 매몰차게 드러눕진 못해서 승관은 쭐래쭐래 정한이를 따라나갔다.

‘에휴, 그래도 이 형도 참 착해… 오지랖도 넓어…’

반쯤은 속으로 반쯤은 겉으로 해주던 칭찬은 고깃집 앞에서 최승철을 마주하고 싹 증발했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굴 피하려고 이러고 있는데 그 누구를 딱 내 눈앞에다 가져다 놓는 거야? 대체 왜 이래? 사람이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

원흉은 케헤헤 웃으면서 들어가자고 끌었다.

아직 점심이라 고깃집은 앉아서 먹는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테이블은 딱 이 셋 뿐이었다.

먼저 정한과 승철이 각자 맞은편에 앉아서, 죽을상을 하고 따라들어온 승관은 갑작스레 맞이한 선택의 기로에 눈만 떼굴떼굴 굴렸다.

정한의 옆에 앉는다 > 최승철 맞은편?! 얼굴 보면서 먹으면 체한다 진짜!!!

승철을 피해 정한을 마주보게 앉는다 > 아악! 옆자리에 앉아?! 미쳤어?!

이러나 저러나 완전 끔찍해.

그렇게 머뭇거리며 서 있자 정한이 소매를 잡아당겼다.

“뭐해? 빨랑 앉아.”

“그래그랭. 얼릉 앉아.”

승철은 어느새 자기 맞은편에 승관의 수저와 물수건까지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내가 미친다 진짜.’

이 정도면 가뿐하게 체하겠다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 뒤에 더 커졌다.

평소라면 정한도 자기가 주관한 모임에 먼저 빠지는 사람이 아닌데, 그날따라 급한 전화가 와서 먼저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정한도 당황해서 눈이 1.5배가 되어가지고 흔들렸다. 드문 일이었지만 승관도 같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상할 정신은 없었다.

“미안해 얘들아. 우리 다 같이… 갈까? 다음에 다시 만날까?”

“이제 막 숯도 왔는데 뭘 다 같이 가쟤. 니는 얼른 가고. 난 승관이랑 먹고 갈게.”

“야 그렇게 말하면, 나 서운하자나.”

“뭐래? 사람 불러놓고 가는 게 더 서운해. 얼른 꺼져. 니 몫까지 내가 먹을 거니까.”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승철은 웃으며 배웅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승철의 눈빛은 굳어있었다. (라고 승관은 느꼈다)

“…왜. 뭘 그렇게 봐.”

“너 요새 식사도 잘 안한다며. 나한텐 맨날 뭐 먹어라 영양제 챙겨 먹어라 그렇게 뭐라 해놓고.”

아니↗️↗️↗️

하고 반박하려던 승관은,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았다.

“아니야. 나 다이어트 해서 그런 거야. 다이어트 하니까 사실 고기 이렇게 먹는 건 안 되거든…”

승철의 눈썹과 눈매가 추라도 매달아놓은 것처럼 추욱 기울어졌다. 그리고 말을 돌리려고도 안 하고 바로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너 요새 왜 그르냐. 왜 나 피하는데에…….”

부승관은 진짜 그 자리에서 5cm 정도는 튀어올랐다.

“아니? 아닌뒈? 왜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형 자의식 과잉 아니야? 나 지금 완전 다이어트 중이라 그런 거거든! 하하! 하… 하아…….”

망했네.

승철의 입은 이미 삐죽… 해져가지고 표정이 서운 그 자체가 되어 있고 승관의 입술도 삐죽… 해졌다.

둘 다 삐졌음 서운함 나 지금 울기 직전임 후웅! 후우웅!! 같은 무드로 대치하던 두 오리 중에서 그나마 할 말이 많은 오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 평생 안 말하려고 했는데에.”

머릿속에선 물론 분위기 쫙 살피고 상대방 눈치도 딱 보면서 상황 판단을 하긴 하는데, 그거랑 다른 회로로 입은 모터 달린 것처럼 빙빙 돌아갔다.

형 애인 욕해서 나한테 껄끄러워진 거 아니냐 근데 나도 일부러 본 것도 아니고 내가 고자질쟁이도 아니고 그 놈이 잘못한 거잖아 형이 그걸로 나한테 뭐라고 하면 완전 나쁜 사람인 거야…… 옹알옹알 꽁알꽁알…….

스트레스 농사 지으면서 꾸역꾸역 차올랐던 말을 숨도 안 쉬고 내뱉은 후에 승관은 반사적으로 내가 저 형한테 무슨 말을? 싶어져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벼락이 치겠구나, 난 죽었다… …아니지!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승관은 필사적으로 용기를 짜내서 바락바락 억지로 눈을 떠서 승철을 향했다.

그런데 승철은 상상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난 것도 아니고, 서운해하지도, 삐진 것도 아니고, 그냥 씁쓸한 미소.

형한테서는 볼 거라고 상상도 못한 얼굴로.

“내가 널 왜 탓하겠어.”

“아니 그게….”

“네가 알려준 덕분에 확신이 선 건 맞아. 그래도 네가 신경쓸 거 없어. 원래도 뭐어…”

정확히 그 순간에 메뉴가 나왔다.

승철은 곧장 사회적인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받고 자기가 집게를 들었다.

“먹으면서 얘기 계속 할까? 내가 니 밥 사줄테니까.”

“…형 얘기 들어주는 거니까 당연히 사줘야지.”

그렇게 부승관은 첫사랑의 연애 편력이나 듣는 처지가 되었다. 머릿속에서 버논이가 그랬다. 지팔지꼰. 지 팔자 지가 꼰다.

기가 막힌 게, 최승철의 연애는 이번만 그런 게 아니라 대체로 그딴 식이었다. 그냥 자기 좋아하는 사람하고 덥석 사귀었다. 그렇게 시작했으니 오래 가지도 못하고 끝은 항상 파탄이었다.

‘어쩐지 연애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라니.’

연애를 무슨 초등학생 짝꿍 정하기처럼 적당히 너 나 좋아? 그럼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오케이. 이딴 식으로 한다.

그쪽은 그쪽대로 최승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밀고 나가고, 승철은 승철대로 고집도 쎈 데다가 상대방을 위해 바뀔 애정도 없으니 결국 개같이 싸우고 헤어지는 것이다. 조금씩 만들어가려던 애정은 흉터로만 남았다.

승철이 자조적으로 마무리했다.

“나 좋아한단 사람들은 다 그 모양인가봐. 내가 별로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오메? 형이 그런 소릴 하면 나는 뭐가 돼?”

이놈의 입이?!?!?!?

승관은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뒤통수 맞은 표정만 지었다.

승철이 딱 2초 침묵하고 빵긋 웃으며 커버쳐주기 시작했다.

“어휴, 너한테야 뭐 내가 제일 좋은 형 아니야? 너 꼰대 기질도 이해해줘, 맨날 밥도 사주고.”

이렇게 포장해줘도 코앞에서 승관은 표정관리를 못해서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갔다. 커버쳐주던 승철도 눈치챘고, 승철이 눈치챘다는 걸 승관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눈치채고… 그러니까 줄여말하면 그거였다. 짝사랑 그 상대한테 딱 들킴.

상황 판단이 끝나자 머리가 어질어질 할 정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흔들다리 효과 시즌 2인 건지(시즌 1은 첫만남이다), 나한테 기회가 온 거라고 그린라이트가 켜져서 떨리는 건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해도 지금까지 이 형놈을 지나쳐간 쓰레기 남친들과 비슷한 사람이 된다는 게 떨리는 건지.

‘난 이 얼굴만 잘난 형하고 뭘하고 싶은데.’

고집 세, 곧 죽어도 자기가 형 노릇하려고 들다가도 갑자기 매달려오고, 손은 많이 가, 집돌이고, 맨날 삐지기만 하고.

근데 이 새끼한테 심장이 뛰는 거를 어떡하냐고.

“어쨌든. 나 형 좋아하는데 그런 말 하면 어떡하냐? 형 좋아하는 사람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라구.”

손 달달 덜고 목소리 달달 떨고 심장 떨고 다리 떨고 온몸이 진동벨처럼 달달 떨리는데 승관은 자기가 태연하고 도도한 표정 짓고 있는 줄 알았다.

“근데, 나 이런 얘기를 왜 고깃집에서 하냐. 어우, 장소선정 최악. 나 다이어트 한다니까 진짜로.”

승철이 눈을 못 마주치고 더듬거렸다.

“내가 너를 사귀면……”

머뭇머뭇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승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뭐야, 형 개꿀이라고 해줘? 짜증나게 그러지 마라.”

“아니이. 뭐가 개꿀이야?”

“이거 몰라? 인터넷 좀 해.”

살짝 새침해졌던 승철은 곧 낮고 진지한 어조로 대답을 이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런데.”

승관의 심장이 꽝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런데’가 나오고 나서 좋은 문장이라곤 없다.

“너도 비슷하게 될 거야. 내가 나쁜 거 맞는 거 같애. 내가 제대로 못해줘서 너한테도 별로 좋지 못한 영향만 줄 거라고. 지금까지 계속 말했잖아. 나 좋다던 사람도 결국 나 진절머리 내면서 가는데….”

승관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핑계 대지 마. 솔직하게 형이 나한테 안 끌린다고 해.”

“아니…… 승관아.”

승철이 뭔가 변명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승관은 듣는 척도 안하고 일어서서 가려다가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둬야 할 거 같아서 뒤돌았다.

“나 형 진짜 쪼끔 좋아하는 거니까 알아둬라. 나 형 그렇게 오래 좋아 안 했어.”

승관은 그렇게 척척 계산도 안 하고 나갔다.

혼자 남은 승철이 뒤에서 머리를 헤집고 마른 세수를 하는 장면이 얼핏 유리문에 비쳤지만 모르는 척 하면서.

B급 연애 드라마 조연 된 기분? 아주 찐득했다….

부승관은 알람을 다시 다 재설정했다. 스마트폰 디톡스 해본 결과는 꽝이다. 인간은 역시 빠릿빠릿 살아야 한다. 더 열심히 사람들과 만나고 팀을 서너개씩 모아서 매일 운동을 죽어라고 하고 다녔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다시 그 최승철의 표정만 떠올랐다. 너한테 상처주기 싫어, 그치만 난 네 고백이 껄끄러워, 그렇게 웅변하던 표정이. 상처되지 않을 말을 고르던 그 사이사이의 짧은 침묵이.

당연히 최승철도 양심이 있는지 승관에게 그전처럼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족구에 끼어서 물어봤더니 승철이 형? 요새 안 나오네? 하는 소리만 들었다.

‘오메, 전엔 출석하면서 맨날 나 불러대더니.’

나름대로 부승관을 피하긴 피하는 모양이다.

왠지 모르지만 그 사실에 기분이 상하면서도 동시에 의기양양해졌는데.

근데 또 최승철한테 남자 꼬였다는 말이 부승관의 귀에 들려오고야 만 것이다. 이번에도 원흉은 윤정한이고.

“걔는 술 너무 잘 먹어서 그래.”

“…….”

“말을 붙여오면 뭘 그렇게 다 받아주고 그러냐. 그러니까 결국 번호 따이지. 하긴 좀 있음 크리스마스니까 다들 적극적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모르지? 승철이 먼저 전화 할리는 없는데 그쪽이 워낙 적극적이니까. 걔는 머 고백만 받으면 대체로 사귀잖아.”

들립니까? 부승관 뚜껑 열리는 소리.

승관은 정한이 무슨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신발을 꼬나신고 최승철 집으로 달려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택시 기사도 아무 말 안 걸었고, 덕분에 승관은 머리 뚜껑을 열게 만드는 분노를 고스란히 가진 채로 입 꾹 다물고 도착할 수 있었다.

승관은 다짜고짜 노크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비밀번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이렇게 맘대로 열고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최승철은 형이어서. 무서운 사람이어서. 준비 안 된 상태로 사람 맞는 거 안 좋아하는 걸 빤히 알아서. 이런 식으로 함부로 문짝을 열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극대노 상태는 그런 조심스러움마저 날려버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상탈하고 이불 둘둘 감은 승철이 침실에서 비몽사몽 기어나왔다. 꼴에 야구 배트도 들고 있다.

얼굴은 퉁퉁해져서 눈도 제대로 못 뜬 꼬라지로 승철이 웅얼거렸다.

“머야아… 웅가니야?”

“형 너는 내가 좋다고 했을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딴 사람은 괜찮아? 왜? 내가 뭐가 어디가 어떤데?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

갑작스런 공격에 승철의 눈이 두세번 꿈뻑… 꿈뻑… 했다.

“뭔데엥… 왜 갑자기 화내는데…”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해서 승철이 손을 내저었다.

“잠만 있어봐. 나 세수하고 올 테니까 그 때 말해…”

“옷도 입고 와!”

“아라써엉.”

야구 배트와 이불을 스르르 아무 데나 던져놓고 잠옷을 주섬 꺼내든 승철이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곧 어푸푸 하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승관은 그 때부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모든 게 다 눈물이 났다. 현타도 있고 억울한 것도 있고, 천성적으로 화를 오래 낼 수도 없어서.

최승철이 물에 씻어 말끔해진 얼굴로 해사하게 나온 후에도 수도꼭지를 열어둔 것처럼 계속해서 줄줄줄 눈물이 흘렀다.

“화냈다 울었다 니 진짜 바쁘다. 왜 그래. 뭔 일이야?”

승철이 당황해서 티슈 한 장만 뽑아오려다 티슈곽을 아예 가지고 왔다. 그리곤 별 주저도 없이 승관의 눈물을 닦고 코도 닦았다.

종종 그랬듯이 다정한 손길이었고, 승관은 그거 때문에 또 와앙 울면서 승철의 목을 껴안았다.

억울해애애애애 이 형은 또 아무 생각도 없지! 나만 속터지지!

승철은 갑자기 승관이 꽉 껴안아오자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토닥거렸다.

“히끅… 나 처음에 형 봤을 때부터 진짜 무서웠다고.”

“웅.”

“힘도 쎄고 목소리도 크고… 뭐만 하면 목조르고 까불지 말라고 하고.”

“아니그등. 지금 목조르고 있는 건 너… 켁!”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아니라고 그러냐?! 쫌 그냥 쫌! 들어봐!”

갓 잠에서 깬 승철의 몸은 뜨끈뜨끈했는데 씻고 나와서 얼굴과 머리카락에만 서늘함이 감돌았다.

승관은 열이 오른 머리 꼭대기를 거기에 꾹 눌렀다.

“진짜아, 진짜 매번 볼 때마다 하도 무서워서, 그래서 심장이 뛰는 줄 알았어.”

“너 지금 나 맥이러 온 거야?”

“나 농담할 기분 아냐.”

또 쿨쩍거리자 승철이 몸을 빼서 콧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승관은 승철의 목을 더 꽉 끌어안기만 했다.

“딴 사람 좋아하게 된 거 같아도 그렇게 하다보면 항상 무서운 형이 턱 나타나는 거 같았다구. 맘에 걸렸단 말야. 형은 안 그랬지! 나만 그랬지. 맨날 나 서운하게 한 거 형이야.”

“우웅.”

“나는 진짜 그렇게 예전부터 께에속 좋아했는데 그런 놈하고나 사귀고 소개해주고… 씨이잉… 근데 그 새끼 앞에서 주먹 들고 우리 승철이 형한테 구라쳤냐고 뭐라고 하고 멱살이라도 잡았어야 되는데, 근데, 한 마디도 못했단 말야.”

승철이 어깨를 토닥토닥해줬다.

“아니야, 잘했어. 잘했어. 뭘 그런 새끼한테 낭비해.”

“근데 니가 그런 새끼랑 사귀었잖아! 내가, 내가 이렇게 용기가 없어서 나랑 안 사귀어? 진짜 나한테 안 꼴리면 안 꼴린다고 하지 왜 전남친 핑계 대냐고!! 그래놓고 딴 놈이랑 크리스마스 약속을 잡는다고? 내가 진짜 억울해서 못살아! 허어엉!!!”

어깨에 잔뜩 눈물콧물을 묻히며 통곡하던 승관을 달래던 승철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뭔… 크리스마스 약속? 뭔 소리 하냐 너.”

“너 남친 또 생겼다며!”

“안 생겼어.”

“안 생기긴 뭐가 안 생겨! 윤정한이 그랬단 말야!”

“어휴, 걘 또 뭐라고 그랬길래……. 그런 거 없어. 나두 상식과 이성이 있는데 그러겠냐고. 바로 전에 너랑 안되겠다고 했는데 너보다 못한 남자하고 만나겠냐.”

“그럴 거 같으니까 문제지! 형은 쫌, 생각이 없어? 남자친구라는 걸 대충 그렇게 만나니까 맨날 그렇게 끝나지!”

부승관 생각엔 얼토당토않게도 그 말에 최승철이 엄청 서운해했다.

“아니, 기껏 상담도 하고 그랬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한테 빡빡하게 구냐.”

니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서운하다고 난리야!

승관은 자기가 더 억울하고 서운해서 목놓아 울었다.

“형이야말로 고백하면 다 받아준다면서 나는 왜! 이렇게 귀엽고 꼼꼼하고 야무지잖아! 사귀어보고 결정해보라고! 니 취향 진짜 이상해!”

“좀 진정해 봐라 승관아.”

“너 같으면 진정 되겠니?!”

그렇게 부승관은 최승철의 어깨를 흠뻑 이런저런 액체로 적셔놓으며 하도 울어서 기운이 빠진 후에야 진정했다.

언제였는지 승철의 목에 매달려서 우는 동안 소파로 이동해서 앉아있었다. 내내 승철은 그만 좀 울라느니 왜 이러냐는 말도 없이 말없이 목과 어깨를 내주고 있었다.

실컷 울어 쉰 목소리로 승관이 불렀다.

“형……. 그래서 나랑 사귈 거야 말 거야. 똑바로 대답해.”

“안 사귀면 형동생으로……”

“못 지내.”

뻥임.

그치만 겁쟁이 부승관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겁대가리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너무 대담하게 뻥을 치니까 최승철은 오히려 눈치를 못 채고 눈동자를 떼록떼록 굴리더니 변종 공격을 해왔다.

“어, 친구로는?”

“다신 안 해. 똑바로 해, 그러니깐.”

“야아, 나는 너랑 오래 보고 싶은데 뭐 선택의 여지를 안 주냐.”

승관의 입술이 또 오리처럼 삐죽해졌다.

“사귀고 오래 보면 되잖아. 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아니 내 말은…”

“그래! 나만 형 오래 좋아했지. 형은 나 좋아하냐? 맨날 놀리기만 하고 맨날 까분다고 그러고 맨날 때리고 맨날 나 말고 딴 사람 더 좋아하고, 어? 됐어, 나도 형이 항상 일 순위는 아니거드응…….”

말하다 보니 다 뽑아낸 줄 알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목이 메여서 근데 뻥이었다고, 형동생으로 또 그냥 보자고 하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이구, 또 왜 울고 그래…”

승철이 손을 내밀어서 닦아내려고 하자 승관이 파드득 떨면서 물러섰다.

“에휴우. 넌 맨날 나 이렇게 피하기만 하자나아. 좋아하는 게 맞냐? 진짜 나 무서워만 하는 게 아니구?”

“내가 그걸 의심 안 해봤을 거 같애?“

그 말에 최승철이 살짝 삐진 표정을 했다. 지 입으로도 말해놓고 이놈이.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안 믿는 게 아니고… 나 보면 도망갔으면서. 내가 뭐 하면 다 질린다 질려 이러고.”

“짝사랑해서 그랬다 왜.”

“어쭈?”

승철이 머리만 긁적거렸다. 다 큰 게 나처럼 귀여운 얼굴도 아니면서 그러면 귀여울 줄 알아?

눈치만 살살 보고. 눈 굴러가는 거 봐. 뭘 또 그렇게 혼자 꽁알꽁알 생각하고 있어.

십 년. 장장 십 년. 최승철만 보면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고 할 말 못 할 말 다 못하고(어쨌든 다 말하긴 했지만) 눌려살아온 부승관이 진짜 젖먹던 힘까지 다 냈는데, 그랬는데, 반응이 이따위라니.

그런데 머리를 벅벅 긁던 승철이 진짜 승관의 눈치를 또 보더니 어깨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승관은 고대로 얼음이 되어서 멈췄다. 뭐야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뭔 시그널이지? 지금까지 고마웠어? 안녕 십년간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왜 이렇게 사고가 부정적으로만 돌아가냐 하겠지만 원래 짝사랑은 늘 최악만을 가정해도 상상도 못해 본 최악으로만 흐르는 법이라서.

“? 뭐해. 너도 나 안아조.”

덜덜 떨고 있는데 이 형 왜 이래.

승관은 덜덜 떨면서도 마주 껴안았다. 닿은 승철의 어깨가 자기의 눈물과 콧물로 엄청 축축했다.

코를 한 번 마신 승관은 슬그머니 반대쪽으로 다시 껴안았다.

“너는 맨날 자기가 꼼꼼하고 눈치 빠르고 야무지다 하는데 다 거짓말 같다.”

“뭐래.”

“귀여운 것만 진짜지.”

승관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나 귀여워?”

“이렇게 구는 게 귀엽다 귀여워.”

승철이 빵 터져서 승관의 볼을 콕콕 찔렀다.

하지만 승관의 눈엔 뭐… 그랬다. 자길 보면서 귀엽네 어쩌네 하면서 사르르 녹는 얼굴을 한 승철이 더 귀여워보였다는 뜻이다. 그렇게 무서운 형인데.

사람이 예쁠 수도 있고 멋있을 수도 무서울 수도 있다. 근데 사람이 드라마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항상 예쁘고 멋있을 수는 없어서 ‘깨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귀여움은 끝이 없고 조건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있지.

귀여워 보이면 끝이야.

날 귀여워하면 끝이라고.

승관은 씩씩거리다가 턱을 살짝 들었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그러네?”

“씨이… 내일부터 1일 해.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어쭈 까분다.”

“이거 봐, 이거 봐! 맨날 까분다고 그러고!”

승철이 그 말에 또 사르르 웃는다.

으이구, 귀여우면 단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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