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밍쿱
2014
김민규(26세, 직업 아이돌)는 실수로 팔꿈치로 숟가락을 건드려 떨어뜨렸다. 맹세코 일부러 한 건 아니었다.
숟가락은 식탁과 바닥에 각각 두 번씩 쨍강! 쨍강! 쨍강! 쨍강! 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굴러 식탁 저 아래로 들어갔다.
같이 식사하던 최승철의 한심하단 시선을 받으며 김민규는 식탁 아래로 숟가락을 잡겠다고 기어들어갔다가 머리를 너무 빨리 빼는 바람에 뒤통수를 쎄게 부딪쳤다. 꽝!
“아, 아퍼억!”
눈물까지 찔끔 나오는데, 보통 이쯤에서 자지러지게 웃어줄 최승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게 조심 좀 하라고 했잖아!’, ‘괜찮냐?’, ‘으휴~~ 으휴~ 그래가지고 식탁 격파 하겠냐?’, ‘잘한다 잘해’ 혹은 네 가지 다 한 번에.
“나 혹 난 거 아냐?”
민규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깐,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사고가 멈춘다더니 진짜로, 눈앞의 광경이 시각으로 인지는 되는데 해독이 안 되는 경험을 했다.
“나, 나, 나, 머리 너무 쎄게 부딪쳤나봐.”
그렇지 않으면 왜 메로나 연습실이 눈앞에?
민규는 입을 벌린 채 느릿하게 뒤통수를 감싼 팔을 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낮은 천장 지하 특유의 눅눅하고 환기 안 된 공기의 냄새. 거기에 더한 꼬릿한 남고 냄새와 전자기기가 돌아가는 열기의 냄새.
방금 전까지 삑삑대면서 바닥에 부딪치던 운동화 소리도, 제각각 서넛씩 모여서 떠들던 목소리도 일순간 싹 조용해진 정적은 뒤늦게 깨달았다. 김민규의 머릿속이 엄청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십년쯤 했는데 또 그 십년쯤 어려진 것 같은 멤버들과, 연습생을 그만 둔 이후로는 더 이상 얼굴 보기 힘들어진 사람들, 조잡하게 놓인 카메라와 결정적으로 메로나 벽지.
민규는 자기 뺨을 갈겨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살짝만 꼬집었다.
당연하지만 살짝만 꼬집어도 아팠다.
멈춰 있던 청소년들(와, 완전…) 중에서 제일 나이도 많고 제일 짬도 되는 권순영이 불쑥 한 발 앞으로 나와서 위아래로 김민규를 훑었다.
“갑자기 누구세요?”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건지 아리송한 민규가 어버버 하는 사이 권순영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보다가 긴가민가하게 내뱉었다.
“민규…?”
그 때 트레이너가 벌컥 문만 열고 밖에서 소리질렀다.
“지금 A팀 다 이동하자~ 순영이 너도 얼른 오고.”
애들의 목이 끼기긱 트레이너에게 돌아갔다.
“저기, 민규가….”
“민규? 민규 왜? 아파?”
트레이너의 시선이 무심하게 민규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민규가 바뀌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얘 왜 이렇게 얼이 빠져있어. 민규, 괜찮아?”
애들끼리 눈알이 미친듯이 굴러갔다.
트레이너는 얼굴, 키, 옷차림까지 모두 다 다른데다 심지어 평소보다 시선을 더 위로 향하고 있는데도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순영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저 민규랑 얘기할 게 있어서 그런데 10분만 뒤에 가겠습니다~”
“그거 때문이야? 연습 끝나고 못하냐?”
“아 그 때 하면…. 지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말만 해주고 바로 갈게요.”
“쯧… 너무 애 닦달하지 말고.”
“옙,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빨리빨리 와.”
몇몇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트레이너와 민규를 번갈아 보면서 나갔다.
순영은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문이 닫히자 바로 돌변해 팔짱을 꼈다.
“누구예요, 당신?”
“순영이 혀엉… 형 맞나? 지금 몇 년도야?”
“민규는 어디 가고?”
“나 식탁에서, 어, 머리 박았는데, 그거 때문인가? 시간여행 같은 거야?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구~ 김민규 맞아. 근데 스물여섯살이야.”
“……뭐라는 거예요.”
권순영의 눈이 약간(?) 크고 약간(?) 성숙해진 김민규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진짜, 나 머리 박아가지고 여기 바뀌었나봐! 우리 데뷔…”
말하다 말고 김민규는 소리를 안 내고 뻐끔거리면서 호들갑 떨었다.
“이런 거 말하면 미래 막 바뀌고 그런 거지? 미래 말하지 말아야 되는데 잘 못하는데 어떡하냐. 그럼 지금 몇 년도야? 형 지금 몇 살이야?”
순영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고2.”
“나는 스물여섯인데, 형 지금 진짜 어리다. 우리 뭐하고 있었어? 근데 팀원도 아직 확정 안 됐지, 비밀이지? 내가 막 와 오랜만에 본다 이러면 우리 팀 아닌 거 알겠네? 큰일 났다 진짜 아우우우! 근데 진짜 과거면 형이 나한테 말을 했었어야 되는데 안 했으니깐, 그래서, 뭐지? 형이 이렇게 비밀 잘 간직할 리 없는데.”
그러면서 비교적 기억력이 좋은 민규는 데뷔 전의 권순영에 대한 정보만 따로 추려서 ‘이거 봐 나 이거 안다니깐?’하고 자꾸 들이밀었다.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 멤버였다면 이 말에서 민규가 겪은 미래에 대한 수없이 많은 정보를 빼냈겠지만, 눈앞의 사람은 권순영.
굳이 머리 쓰지 않고 기합으로 해내는 권순영은 문제를 단순하게 뭉뚱그렸다.
“그러니까 너는, 미래의 민규라고?”
“그런가봐!”
자기를 알아봐주자마자 민규의 기분은 금방 수직상승했다.
정작 권순영은 민규의 말보다 행동과 제스쳐를 눈여겨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니깐, 내가 열여덟인데 너가아… 스물여섯이면… 음. 오히려 니가 형이네?”
민규는 괴성을 지르며 폴짝 뛰었다.
“와! 내가 순영이 형보다 형이라고?!”
순영은 생각했다. ‘사람은 쉽게 안 달라지는구나.’
“그거도, 그거도 막, 형이 지금 고2면 여덟살 차이 나! 우와! 내가 형이야!!!!”
다인원 그룹의 막내… 는 아니더라도 동생 라인에 속해서 그동안 쌓인 것도 많고 어쩌구 한 김민규는 진짜 기뻤다. 뭔가 순영이 형이 자기를 김민규로 인정해준 기분도 들고.
“그럼 승철이 형도 지금 열아홉인 거네?”
“어어.”
그 이름에 순영이 한시름 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맞다, 승철이 형이면 어떻게 해주겠지, 같은.
김민규는 그걸 눈치는 챘지맨 기고만장해서 신경 안 썼다. 왜냐면,
“내가 승철이 형보다도 엄청 형이야!!! 으히히!”
최승철은 ‘형’일 때도 귀엽고 막내 같고 귀엽긴 하지만, 진짜 동생하고는 다르니까. 가오도 엄청 부리고.
맨날 생각만 해본 최승철 저거 진짜 나보다 어리기만 했으면, 그게 진짜 이뤄지다니! 내 소원 당첨된 건가봐!
긍정왕 김민규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봐 온 승철의 취향과 성격이야 뻔했다. 기본적으로 얼빠고, 막내 티가 있다. 메로나 때도 엄청 스킨십 좋아했고.
거기에 자기보다 형이고 키 크고 듬직하면 안심하고 더더욱 좋아서 앵기는데… 이젠 내가 벌크업으로 승철이 이김!
“짱이다!!!”
동생인 최승철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딱 있다. 심지어 넘버 쓰리까지 있다.
1. 형한테 까불지 마. <최승철 단골대사
2. 저기 벽 보고 가서 서 있어. <최승철 단골대사22
3.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최승철 단골대사3333
그러니까 김민규는 최승철이 자기한테 금방 앵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소리다.
김민규가 동생인 원래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만큼 잘생긴 사람 없다고 이미 살살 녹아가지고 니가 더 어른스럽긴 해, 이러면서 자기 애착동생으로 끼고 도는 최승철이니까.
근데 거기에 ‘형’에 ‘덩치’까지 끼얹어?
디엔드. 다 찢어놓으셨다.
각오해라 최승철. 까불지 마라!
그 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살짝 초췌하고 눈 밑이 거뭇거뭇한 최승철이 들어온다. 진짜 엄청 건장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 앳되어가지고 가늘었다.
이 형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든든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른스럽다고, 고작 몇 살 차인데도 엄청 어른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저 형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 지 (적어도 8년간은) 이미 알고 있는 김민규는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우리 비글대마왕……. 쪼끔만 놀려야겠다…….’
그런 쪼끄만 애가 들어오는데도 권순영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승철이 형!”
“어, 순영아. 민규 데리고 있었다며, 애 연습은 보내줘야지…….”
그리고 메로나 연습실 안을 습관적으로 훑던 눈동자가 민규에게서 멈췄다.
민규는 어른스럽게 웃으려고 했지만 어린애인 형아를 보자 히 하고 얼굴 근육이 풀려버렸다.
“승ㅊ…”
“누구세요.”
“어…….”
이 반응에 아닌뎅.
승철은 단단히 수상쩍은 어른을 볼 때의 목소리였다. 사투리 억양을 어색하게 뺀, 점잖은 투의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게 어른으로 보이려 억지로 발돋움한 딱딱한 표정.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확인한 승철은 붉은 빛 없이 꺼져있는 걸 보고 더더욱 범죄자 보듯 민규를 노려본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
이미 순영은 뽀르르 승철이 옆으로 가 있었다.
“아잇, 순영이 형, 승철이 형한테 설명 좀 해조! 나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봤잖아!”
“하아, 그게에…”
순영이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승철의 귀에 입을 가져다댔다. 승철은 순영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도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으로 민규를 쏘아보았다.
승철이 듣긴 들었는데 어이 없다는 투로 잠시 순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이 김민규라고? 너 미쳤냐? 깜짝 카메라 해?”
“나도 못 믿겠어, 근데 진짜야.”
“장난치지 마. 그럴 기분 아냐. 민규 어디 갔어?”
민규가 쪼그라든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 진짜 민규예요…….”
승철이 이마를 짚었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아무튼 나가주세요. 따로 직원이나 경찰은 안 부를 테니까. 소란 일으키면 그쪽도 좋은 꼴 못 봐요.”
존나 어린애라고 생각했지만 최승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나, 나가라구요? 저 갈 데도 없어요…….”
승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민규를 위아래로 훑고 빈정거렸다.
“여기 연습실이지 집 없는 사람 자는 데 아닌데요.”
민규는 허겁지겁 양 손을 반짝 들고 외쳤다.
“나 잘생겼잖아 형!”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닌데 대가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는 바람에 너무 단계를 뛰어넘어 그 말이 먼저 나가버렸고, 순간 승철은 개빡친 표정이 됐다.
순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진짜로, 승철은 민규를 쫓아냈을 것이다.
“승철이 형 근데, 아까 트레이너 선생님이 저 사람 보고 민규라고 그랬단 말야. 우리들은 다… 저렇게 보이는데. 그리고 진짜로 어디서 들어온 거 아냐. 아까 민규가 의자 아래 샤프 떨어뜨려서 주우러 숙였다가 부딪치는 소리 나길래 돌아봤더니, 저렇게 되어 있었어.”
“그래서 민규는 없어지고 대신 저 사람이 민규 행세를 하게 됐다?”
민규는 그 단어 선택이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나 진짜 김민규고 이상한 사람 아니야아, 나도 밥 먹다가 식탁에 머리 부딪쳤는데 아프다고 일어나 보니까 여기인 거야. 봐라?? 지갑도 없는 김민규를 어? 쫓아낼 거야 최승철?”
최승철은 남자가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성까지 불렀는데도 섭섭하다고도 안 하고.
“그럼 잠깐만 같이 가 보죠. 딴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좀 보게.”
그것도 완전 맘에 안 든다는 말투라 김민규야말로 쪼끔 삐졌다.
실험 결과는 엄청 이상했다.
연습생들은 모두 김민규가 왜… 커졌죠? 사촌? 친척? 삼촌? 등등의 달라진 걸 알아챘는데 그 외의 사람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옆에 선 최승철과 김민규의 키 차이가 훌쩍 벌어졌는데도 전혀 못 알아보는 것 같았고, 입고 있는 옷도 달라졌는데도 의식을 하지 않았다.
권순영은 이 사태를 한 마디로 정리했다.
“와, 진짜 신기하다.”
2022
한편 최승철은 밥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린 김민규 때문에 혀를 차며 일어나서 새 숟가락을 꺼내온 참이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 식탁 아래에서 슬그머니 기어나온 김민규는… 방금 전까지 밥을 먹으면서 티격태격하던 그 스물여섯 김민규가 아니었다.
“?!”
“…형?”
갓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 앳된 얼굴. 키만 훌쩍 크지 꽉 차 있지 않은 소년 같은 몸을 잔뜩 구긴 자세. 셀렙이자 28억 자산가(ㅋㅋ)가 되기 전 어린 얼굴.
고개를 든 민규의 표정에 머쓱함과 당황과 불안이 가득했다가 승철을 알아보고 정말 살짝 누그러졌다.
그러다 눈썹 사이를 꼬깃하게 찌푸리더니 중얼거렸다.
“혹시 승철이네 형님?”
“민규… 야?”
“아, 네! 맞아요! 근데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 건 최승철이었다.
갑자기 민규가 새파랗게 어려져서 나타난 것이다. 까뭇한, 아직 연습생 티를 못 벗은 어린 얼굴로. 거기에… 쓸데없이… 추억을 자극하는 트레이닝복.
승철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물었다.
“지금 너 몇 살이야?”
민규는 헤헤 웃었다.
“열일곱인데요.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 무슨 일 있었나? 정신 차려보니까 여기네용.”
“밥 먹고 있었지, 너랑. 아… 아니, 너 나 몰라?”
“알죠오.”
김민규의 눈이 떼구르르 굴렀다. 최승철의 형이라고 생각하는 게 빤해서 승철은 내적으로 이마를 탁탁 쳤다.
외적으로는 안 쳤다. 어린 김민규가 영문도 모르고 불안해하는데 자기까지 그런 티를 내면 안 돼서.
“민규야. 거울 좀 보고 올래? 너가 맞는지?”
“제가요? 저를요?“
민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꾸벅대면서 순순히 화장실을 물어 찾아갔다.
그 뒤통수를 뻘쭘하게 보다가 최승철은 문득 식탁 아래를 확인했다.
아니, 식탁 아래에 대체 뭐가 있는데 이따만하던 애가 요따만하게 되어서 어려가지고 나와요? 우리는 찾은 건가요 불로불사의 비밀을?
물론 그 아래엔 버논이 좋아하는 사이언스 픽션에 등장할 만한 웜홀이라거나 다중세계의 통로 뭐 그런 건 안 보였다. 요정 대모도 젊어지는 샘물 이런 것도 없다. 그냥 방금 전에 떨어뜨린 숟가락 하나만 덜렁 있었다.
그새 민규는 대체 자기한테 뭘 시킨 건지 아리송해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민규야, 너가 좀 놀랄 수도 있겠는데.”
“네, 형님.”
어색해하면서도 김민규는 금방 붙임성 있게 웃었다. 귀 기울일 준비가 됐어요, 라는 듯이.
“지금이 2022년도거든……”
김민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승철이네 형이 아니라 니가 아는 그 승철이 형이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너가 어려진 거 같은데.”
거기까지 얘기해도 민규는 헤… 하고 웃기만 하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건 승철의 말을 믿는다기보다, 깜짝 카메라인가요? 하는 웃음이었다.
승철은 더 뭘 말해줘야 믿을 지 살짝 초조해졌다. 이게 무슨 캡틴 아메리카 남극에 얼었다가 팔십 년만에 해동된 소리냐.
순간 벼락치듯 번뜩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메로나 없어진 걸 보여주자.’
그치, 캡틴 아메리카도 그냥 냅다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 가서 시간이 흘러가버렸단 걸 한 방에 알았잖아.
“어, 그럼 잠깐 밖에 나가볼래? 우리 그 연습실 없어졌어. 진짜 많이 달라졌거든. 보면 좀 이해할 거 같은데.”
승철이 일어나서 나가자는 양 주섬거리자 민규가 갑자기 겁먹은 눈이 됐다.
“진짜, 진짜예요? 저 놀리는 거 아니고요?”
승철은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가봐야 되냐고, 눈으로 확인하기 무서워서 움찔 물러선 민규 때문에 말을 잇기 어려웠다.
뭔가 시작하기 전에 겁먹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건 늘 최승철이고, 김민규는 한 번도 좌절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는데.
“어, 음. 그럼 바로 밖에 나가는 게 좀 그르니까 핸드폰 볼래? 아이폰 12 프로까지 나왔다?”
민규는 이번엔 눈이 휘둥그레져서 승철의 휴대폰을 받았다. 이 낯선 크기, 무게, 못생긴 후면 카메라…….
“형이, 그니깐 승철이 형이 아이폰을 쓴다고요?”
“그렇게 됐다.”
설명하기엔 너무 긴 사연이었다. 사실 별 사연도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인데, 그게 한 십년치 쌓였다는 걸 생각하면 설명할 엄두가 안 났다.
‘민규 열일곱이면 내가 열아홉이지.’
승철은 자기가 성인이 되기 직전인 그 열아홉 때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다가 너무 상세하게 흑역사와 토할 정도로 힘들었던 기억, 그 때 했던 괴롭고 슬펐던 생각 위주로 기억나는 바람에 얼른 뇌리에서 떨쳐냈다. 개힘들었다. 그냥 기억 안나는 척 해야지.
“다른 멤버들도 만나자. 그, 그러면 기억? 이 돌아오나? 일단 셀카 좀 찍고.”
내심 뭐가 됐든 어린 민규와 스물여덟 최승철이 함께 셀카를 남기면 대단히 웃기겠다 싶었는데.
그러나 승철은 사진을 확인해보고 재밌기보단 기겁했다.
사진이 민규 근처에서만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렸다. 그리고 두 명의, 그러니까 스물여섯 민규와 열일곱 민규가 겹쳐 흔들흔들거리는 걸 캡쳐한 것처럼 실루엣만이 초점과 노출이 엉망이 되어 어슴푸레하게 찍혀 있었다.
“와, 이거 좀 무섭다. 눈으로 안 보면 믿기 어렵겠네?”
“으아아아악! 심령사진?!”
덩달아 새초롬하게 올려다보며 사진을 확인한 민규도 자기 사진인데도 놀라 자빠지면서 허우적거리다 의자까지 뒤로 넘어뜨렸다.
익숙하게 민규가 또 민규한 건 익스큐즈한 승철은 단톡방에 올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사진)
이상한 거 잘 아는 사람 구합니다(2/13)
지금 밍규가 열일곱 됐다
브라더 승관
또 이상한 어플 받았지 예쁜 것 좀 써
브라더 원우
초점 왜 저래? 필터 저런 거 있나?
다들 한 마디씩은 하는데 (당연히) 아무도 안 믿었다. 저거 민규랑 승철이랑 둘이 작당해서 이상한 장난 치네, 그런 무드가 기본이었다.
진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잠시 고민하던 사이 조슈아가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조슈아는 민규를 보고 잠시 멈칫한 뒤 랩처럼 생전 듣도보도 못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엄청난 욕이라는 것만 알아들을 수 있어서 승철이 삐죽거렸다.
“뭔 소리여 이게… 너랑 메로나도 견뎠는데 그 때도 이런 욕 안해짜나…”
“그 땐 누가 이런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잖아.”
어쨌든 승철과 민규가 자기 나름대로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요약하면 민규가 머리를 박더니 갑자기 저렇게 됨.
별 거 없는 자초지종(?)을 들은 조슈아 역시 민규와 셀카를 찍었다. 그 다음엔 민규만 사진을 찍어보고, 동영상도 찍어본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 그렇게 나와. 어설프게 만든 심령 사진 같네.”
“……어쨌든 단톡방에 좀 올려 봐. 내가 말하니까 아무도 안 믿어.”
“우리 승철이한테 믿음이 없네~”
조슈아가 꺄르륵 웃고 승철도 웃고만 있자 민규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내가 아는 최승철은 마왕 오브 대마왕인데…….
단톡방에 조슈아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가자, 슈아도 요새 미쳤더라 파와 슈아는 원래 좀 그래 요새 이상해진 게 아니라 원래 이상해 파와 이거 진짜야? 파가 갈려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단톡방에 그렇게 불이 났지, 민규는 혼자 옹알옹알거리기 시작해서 살짝 걱정된 승철은 안 그런 척 가까이 가서 귀를 쫑긋했다.
조슈아 형도 나이가… 진짠가봐… 세븐틴 했나봐… 잠깐, 나… 데뷔했나봐!!
‘이런 미친 긍정왕 같으니라고…….’
그리고 또 옆의 긍정왕 캘리포니아 오렌지 분께선 민규의 나이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럼 민규 우리 막내가 됐네. 디노가 좋아하겠다.”
“겠냐?! 긍정왕들 사이에 있으니까 미칠 거 같애 나 쫌!”
버논이 바로 전화했다. 흥분이 여실히 느껴지는 하이톤 목소리였다.
-어 형, 민규 형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두다다다 대체 뭐냐고 사정을 묻는 버논, 그 뒤로도 전화가 계속 온다는 알림이 귓가에서 띠링거리고, 조슈아는 쿨하게 씻으러 가버리고, 혼자 남은 민규는 웃고는 있지만 어색하게 거실 한가운데서 쭈뼛거리고 있다.
승철은 입으로는 버논에게 대답하면서 민규의 손을 쥐었다. 긴장 때문인지 차갑고 뻣뻣했다.
민규는 잠깐 멈칫했다가 다음 순간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어, 조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규는 아까 넘어뜨린 의자에 걸려서 뒤로 한 바퀴 굴렀다.
“어우, 내가 뭐 때릴려고 한 거두 아니구 그렇게 놀랄 일이야?! 괜찮아?”
“노, 놀라서요. 죄송합니다.”
“안 다쳤어?”
그렇게 묻자 아직 이어지는 전화 너머에서 버논이 물었다.
- 뭐야, 민규 형 무슨 일 있어?
“엉 민규가 민규해써. 김밍규 한결같지.”
당황해서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민규가 대답했다.
“아니, 그냥, 어, 어른 같아서요.”
그 말에 이번엔 승철의 목덜미 근처가 화끈해졌다.
‘아이고, 막 만지면 안되겠다…….’
그리고 동시에 살짝 삐쳤다.
‘근데 김밍규 얘 왜케 연상 형들 좋아해?’
김민규(26)가 들었다면 사돈 남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2014
실험 끝에 김민규는 김민규라서 숙소에 머무르는 걸 허락(?) 받았다. 회사에는 민규가 아파서 병원은 승철이 데려다 주고 왔고 연습 일주일 정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어떻게 비빈 모양이다.
최승철 뿐만 아니라 연습생 최고참 중 하나인 지훈까지 둘이 나서서 비비자 회사는 별 의심없이 그러라고 했다. 빠득빠득 버티기만 했지 먼저 아파서 죽겠다고 고참들이 통사정하는 일이 없다보니 믿긴 하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순영은 거짓말을 못해서 차라리 안 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제외됐다.
여기에 민규의 의사는 없다.
‘아주 지가 다 해먹어, 최승처얼…….’
새파랗게 어린 형들 사이에 끼어서 기본기 연습 4시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물어는!
숙소에 김민규를 데려다 놓은 승철이 민규를 흘끔거리면서 순영한테 표정관리를 시켰다.
“넌 그냥 김민규가 연습 못해서 빡친 척 해, 알겠지?”
“아프다는데 빡쳐해도 돼?”
“엉.”
“형 근데 민규 저렇게 된 거 딴 사람은 몰라두 회사분들한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돼. 미쳤냐? 누가 믿어줘? 딴 사람들은 애초에 저 사람 보고 민규라고 하잖아.”
그야 김민규니까!
김민규는 매우 서운! 했고 속으로 박박 이를 갈았지만, 이마에 못 마 땅 세 글자를 박아넣고 있는 어린 최승철을 보면 걍 쌉치고 있어야지 하게 됐다.
‘왜 이렇게 화난 꾸마 같이 아르르르 하면서 화가 나 있어…….’
연습생 중에서 최승철만큼 민규에게 격렬한 반감을 드러낸 사람은 또 없었다. 제일 어린 연습생 같은 경우엔 “어차피 형은 좀 아저씨 같은 데가 있었잖아요.” 라고 일축했다.
“내가 모오가 아저씨 같애?!”
“그냥 나이가 많아서.”
민규는 완전 상처 받았다. 아까부터 계속 다 나보고 아저씨래.
“나 군대도 안 갔다 왔는데.”
“와…….”
옹기종기 모인 애들은 미래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순영이 연습하자고 쫓아냈다.
“야, 물어보지 마. 잘 하는 애가 데뷔하는 거야. 오히려 자기 데뷔했다고 알면 연습 해이해져서 못하게 된다.”
이 형도 참 한결같네.
민규는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나 점심을 먹다가 딱 두 숟가락 먹고 이렇게 됨.
둘째, 그 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이리저리 실험과 승철의 야림에 시달리며 두 시간 지남.
즉 그 말은.
“배고파.”
“김민규는 진짜 스물여섯 형이 돼도 참 한결같다….”
“아이, 순영이 형한테 형이라고 들으니까 기분 쫌 웃긴 거 같애. 그냥 민규라고 해.”
“그으럴까?”
“그으럴까는 무슨.”
최승철이 멀찍이 현관에서 문고리를 꽉 잡고 서성거리다가 순영을 낚아챘다.
“진짜 민규면 뭐 여기 혼자 있어도 되죠? 다 알 테니까.”
이렇게 대놓고 시험한다는 투로 말하네.
하지만 김민규는 넘어가지 않았다.
“연습생 때 숙소에다가 먹을 건 라면밖에 안 뒀잖아! 먹을 거 많이 먹지 말라구!”
“그래서요.”
“그러니까 뭔 말이냐면… 진짜, 진짜아… 나중에 꼭 갚을 테니까 돈 만원만…….”
다들 별로 돈이 넉넉했던 편이 아니었단 사실은 뒤늦게 떠올랐다.
그렇지만 승철은 선뜻 자기 지갑에서 이만원을 꺼내서(흘끗 지갑 안을 봤는데 전재산이었다) 주고 순영을 들고 가버렸다.
‘하씨잉… 전재산 뜯었네… 진짜 피 같은 돈일 텐데….’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들었지만 뱃속이 아우성치는 것도 진짜였다.
“최대한 잘 쓸게! 아깝지 않게!”
그렇게 김민규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기 위해 대형 마트와 시장과 작은 동네 마트를 각각 세 군데씩 돌아다니면서 식재료를 쓸어 모았다. 붕어빵과 국화빵 냄새가 유혹을 해도 눈 질끈 감고 참았다.
시식코너에서 너무 맛있어요 진짜 부드러워요 하면서 각종 찬사를 하면서 주워먹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서울 길바닥에서 사람이 쓰러졌다고 기사 날 뻔.
그렇게 거의 두 박스 장을 보고 왔는데 숙소에는 별다른 조리 기구도 없었다. 조미료 없을 건 미리 예상해서 다행이지.
식칼도 없어서 민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가 가위를 찾아 손에 들었다.
이것도 그나마 양손잡이용인 게 분명히 자기가 징징거리다가 사다놓은 게 틀림없었다.
김민규는 눅눅해지려는 눈가를 다잡으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하~”
일단 돼지고기 김치짜글이하고 부추감자전하고 시금치무침, 멸치볶음, 참치 강된장, 오징어볶음하고, 계란 한판은 전부 반숙계란 장조림으로 만들어버렸다.
손이 쉬지 않는 만큼 입도 안 쉬었다.
“완전 나뻐, 최승철. 원랜 나한테 그렇게 살살 녹았는데……. 아닌가? 별로 녹진 않았나?”
수많은 티격태격과 놀림과 진짜 개처럼 혼났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민규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치만 형이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했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런데 그런 말을 지금 최승철(19)에게 했다간 경멸의 눈초리와 주먹이든 싸대기든 날아올 것 같아서 김민규는 서러웠다.
최승철은 김민규를 좋아한다.
나=김민규.
그러니까 최승철은 나를 좋아해야 되는데.
심지어 나 지금 형이 좋아하는 포인트만 쏙쏙 가지고 있는데.
‘이거 과거 맞지? 아예 딴 세계인가? 최승철이 나를 안 좋아하는 평행우주? 평행세계? 그런 거 아니지?’
그렇다기엔 다른 모든 것이 똑같은데도.
안그래도 민규는 엄마아빠를 포함해서 외우고 있는 모든 전화번호에 다 전화해보기까지 했다. 통화는 하지 않고 “여보세요…?” 한 마디만 듣고 끊었지만.
다 똑같았다.
단 하나, 최승철이 김민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새벽이 되어서야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숙소에 돌아온 연습생들은 불을 켰다가 거실에서 장승처럼 선 민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끄악!”
“아니 왜 불을 안 켜고 있어~~~!”
최승철이 맨 나중에 들어와 문을 닫으며 한 소리 했다.
“불부터 켜자. 저 사람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잖아, 아까도.”
불을 켜자 죄다 미성년자인 올망졸망한 미성년자들 사이에서 스물여섯 살 어른은 또렷히 튀어나와 보였다.
아까 연습실에서 민규를 보지 못한 연습생들이 던지는 시선이 따가울 정도인데, 승철은 아예 이쪽을 보지도 않고 태연한 척 점퍼를 벗어던졌다.
‘니 돈으로 나 뭐했는지도 안 물어봐?’
원래 그런 식으로 한 번 쓴 돈을 다시 되묻지 않는 걸로 가오 세우는 형이지만, 스무살도 안 된 형아가 전재산 탈탈 털어서 줘놓고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어떻게 기다렸냐고 놀리지도 않고.
그러다 민규는 뒤쪽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명호를 발견했다.
울적한 생각이 다른 환한 생각에 밀려 사라진다.
“와 명호 볼살이 있어! 어려! 똥구래!”
산책 중에 아는 친구를 만난 강아지처럼 김민규는 바로 명호에게 뛰어들었다.
분명히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눈치챘는지, 최승철이 달려들어 몸으로 막았다.
스물여섯 살 덩치 큰 김민규의 돌진을 간신히 막은 최승철이 분하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민규의 어리둥절하고 멀쩡한 표정을 보자 억지로 얼굴을 폈다.
“왜 우리 애한테 달려들어! 요!”
“아니, 아니, 명호한테 갈라구 그런 건데 왜 밀고 그래. 엥? 승철이 형 나한테 존댓말 써? 아까두 그랬나?”
“명호는 그쪽 몰라요!”
“명호랑 내가 얼마나 친한데!”
승철의 뒤에서 명호가 펄쩍 뛰었다. 민규 말이 맞아! 그런 펄쩍 점프가 아니라 왜 자꾸 내 이름이 나와! 펄쩍 점프에 가까웠다.
준이 급하게 명호 가까이에 가서 뭐라고 속삭였다. 조그맣게 빠른 투로 속삭이는 중국어를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어조에 담긴 감정은 알 수 있었다. 경고다.
그리고 그 때서야 석민도 좀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승철이 형만 나 싫어하는 게 아니고 다 나 싫어해?”
“아아니 싫은 게 아니구 낯설어서… 그렇죠.”
석민이 그러더니 일부러 씩 웃었다.
“닮긴 닮았는데 훨씬 잘생겼네요.”
“그, 그래? 고마워. 근데 존댓말 안 써도 되는데, 우리 친구잖아.”
“원래는 그렇긴 한데요…….”
그러면서 승철의 눈치를 보는 걸로 봐서 승철이 오기 전에 이미 뭐라고 한 모양이다.
‘아우, 최승철!!!’
민규는 후웅! 했다가 자신이 요따만한 연생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엄청나게 엄청나게 연상인 걸 자각하고 어른스럽게 미소지었다.
“배고프지 않아? 밥 해놨는데 먹을래?”
원우가 아직 깎이지 않은 사투리 억양으로 힛 웃었다.
“새벽에 먹으면 살찌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민규는 이불을 싹 걷어낸 숙소 바닥에다 자신있게 팔첩 반상을 차려냈다. 그릇이 없어서 냄비째 놓고 약간 뷔페 스타일이라고 변명하면서.
“맛있어!”
“와, 진짜 민규 같다. 뭐 아무 것도 없는데서 이렇게 만드네.”
“진짜 민규 맞으니까 그렇쥬!”
백선생님 말투를 따라했는데 아무도 안 웃었다. 벌써 세대차이를 느껴버린 민규는 힝 후웅 하면서 인원에서 모자라는 수저를 일회용으로 나눠줬다.
씻으러 들어가서 젖은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르고 나온 승철은, 내밀어진 수저를 짜증스런 투로 내저었다.
“안 먹어요.”
“승철이 형 안 먹어요? 안 배고파요? 이거 형이 준 돈으로 차린 건데.”
“이만원으로…? 됐어요. 그리고 형이라고도 하지 마세요. 스물여섯이라고 하셨잖아요.”
이미 자리를 착 자리를 잡고 앉은 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민규래잖아. 민규 맞기도 하고.”
“넌 밥만 주면 민규 같애?”
“그거 아니거든?”
아마 여기서 의견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지훈은 딱히 말을 꺼내진 않고 그냥 한숨 쉬고 밥만 먹었다.
김민규는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뿌듯하게 최승철에게 시키려고 했던 말들을 다 까먹고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지금 내가 형이긴 한데, 계속 승철이 형이라고 했으니까 그냥 승철이 형이라고 부르면…”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불리고 싶지 않은데요.”
근데 이건 진짜 서운했다.
최승철 진짜 나뻐.
김민규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후웅! 했다.
최승철 역시 후웅! …하지는 않고,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마치 연습생들을 김민규에게서 보호하겠다는 양 섰다.
숨막히는 덩치와 숙소의 대마왕이 장승처럼 서서 눈싸움을 시작하자 분위기는 시베리아처럼 냉랭해졌다.
연습생들은 눈치를 보느라 눈만 김민규와 최승철에게 고정한 채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민규는 이 어리고 쪼끄맣고 평소의 한 30%밖에 안 무서운 최승철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씩씩거렸다.
“형 나한테 왜 이래, 누군지 왜 몰라?! 얼굴만 봐도 딱 알아줘야 되잖아 우리 사인데! 십 년이 지났어두!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구 그랬잖아!”
너무 솔직한 말에 최승철을 포함한 사춘기 연습생 일동의 손발이 오그라들어버렸다…….
숙소 전체가 우주에 풍덩 빠진 듯 조용해져버리고, 승철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뭐래.”
그리고 승철이 몸을 돌려 들어갔는데, 그거 완전히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 이젠 상대하기도 싫다 무드였기 때문에 민규는 히잉 하고 울었다.
2022
최승철은 멍하게 잠에서 깼다. 바로 데굴 굴러서 휴대폰을 확인해보니까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나 왜 깼어…?’
멍한 얼굴로 ?? 하고 있으니 승철의 아침잠을 깨운 소리가 또 들렸다.
쨍그렁 와장창…!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가던 와중에 잠에서 깬 머리가 눈보다 빨리 답을 내놓았다: 김민규가 민규했다.
“우웅? 밍규 왜?”
눈 비비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말했는데 소리의 원인은 진짜 민규였다. 물론 여전히 열일곱인 어린 김민규.
편수 냄비를 들고 민규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 먹으려구 준비할려구 그랬는데에.”
“……너 진짜 아침 좋아한다.”
민규가 떨어진 냄비 뚜껑을 주우면서 사과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이게, 너무 높은 데 있어가지구.”
원래 니 키에 맞춰놓은 거니깐.
지금도 꽤 키가 큰데 이게 또 스물 다섯까지 계속 콩나물에 물 주듯 자라나니까.
“일부러 그럴 생각은 진짜 없었거든요…”
“아냐, 괜찮앙.”
민규가 우물쭈물하더니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 엄청, 나이 드니까, 착해졌나봐.”
“야, 그럼 그 때 난 너를 죽였니?”
“암바는 걸었죠, 시끄럽다구.”
“내가 언제 그랬냐아.”
민규는 이미 냉장고를 뒤져서 뭔가 할 만한 걸 꺼내놨는데, 딱히 그럴 듯한 게 없는지 김치통과… 김치통밖에 없었다.
이 빈약한 재료로 뭘 또 해보려고.
“우리 밥 먹으러 나가까?”
“둘이요?”
민규는 별 생각없이 물었겠지만 갑자기 양심에 털이 느껴져서 최승철은 화급하게 덧붙였다.
“조슈지 깨워서.”
잘 자고 있던 조슈아도 깨워서 셋이서 먹으러 나가자, 처음으로 밖에 나와본 민규가 두리번거렸다.
예전 숙소와는 다른 동네기도 하고 상표들도 꽤 달라져서 그냥 낯설기만 한 모양이었다.
승철이 킥킥 웃었다.
“왜 이렇게 두리번거려, 서울 첨 와?”
민규가 고개를 팍 숙였다. 조슈아도 승철의 팔을 툭 건드리며 눈치를 줬다.
승철의 눈만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 아니 보통 여기서 막 민규가 나한테 뭐라 하는데?’
그런데 뭐라 안하고 입 딱 다물고?!
어버어버하던 승철이 보노보노 땀을 흘리면서 뒤이어 말했다.
“많, 많이 바뀌었지, 민규야? 십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더라, 그치이.”
“헤헤… 안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요.”
“왜에, 우리 있잖아, 우리.”
“네엡! 저 근데 데뷔하는 거, 맞나? 아니! 얘기하지 마세요! 들으면 과거가 변하면 미래도 바뀌어가지고 나비효과 알아요? 그러면 큰일인데! 우리 있잖아요, 다 같이, 그러니까 형하고도 계속… 사는 건가? 세븐틴인데 몇 명 없는 건가? 아니면 다 나갔어요? 나이가 있으니까 해체했나?”
승철이 어버버하면서 대답하려고 해서 조슈아가 황급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돌렸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저기 모닝 세트 먹을까?”
“아! 그래.”
아보카도 수란 샌드위치를 시킨 민규는 처음 먹어본다고 호들갑 떨었다.
점심에는 버논이 승관이 찬이와 같이 쪼르르 와서 점심을 같이 먹고, 디저트는 명호하고 석민이 같이 먹었다.
‘아니 근데 우리한텐 민규가 애긴데 경호 형들한테는 민규가 여전히 민규로 보인다는 게 말이 되나?’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마를 문지르자 명호는 진지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지금이라도 명상해보라고 추천했다.
“야, 옆에서 민규 데리고 석민이가 형 해봐, 형! 이러고 있는데 머리가 안 아프겠냐. 너 같으면 석민이한테 형이라고 카겠냐고.”
근데 민규는 합니다.
“석민이 형!”
“니이는… 석민이한테 형이라고 불러주고 싶냐?”
“안 돼여? 나보다 형인데 뭐.”
어린애가 존나 쿨했다.
최승철은 뭐 때문에 어려졌어도 조슈지나 정한이한테 형 소리 못할 거 같은데. 심지어 거기다가 승관이나 버논이한테도 형이라고 하고 존댓말을 써야 돼? 진짜 죽을래.
그동안 했던 게 많아서 거꾸로 되면 당할 게 두려운 첫째는 상상만 해도 무서워서 민규의 처지에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데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게 형형 하면서 크레이프 케이크를 두 개째 해치우고 슬슬 다른 메뉴에도 눈독을 들이는 중이었다.
“진짜 연말 아니라 다행이다.”
민규가 문득 신기하고 뿌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명호 형 우리 말 진짜 잘하게 됐네요.”
“그치, 명호 한국말 진짜 잘하지.”
명호는 우아하게 찬사에 답해주고는, 민규에게 가서 메뉴 골라오고 결제까지 해오라고 카드 주고 쫓아낸 후 승철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근데 민규가 미래에 대해 많이 아는 게 좋은 걸까?”
“버논이 같은 소리 한다 너도….”
“버논이 뭐라 했는데?”
“몰라. 평행세계 이론이 어쩌구 과거가 어쩌구 이랬다가 너무 알게 되면 미래 전체가 뒤틀릴 수 있다느니 결국 이 미래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느니 하다가 승관이한테 꼬집혔어.”
석민이 자기가 울상이 되어서 대답했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돌아갈 방법 찾을 때까지 갇혀 있으라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그러니깐……. 근데 저…, 저, 저 사람? 이 우리 민규는 맞는 거지?”
석민과 명호의 따가운 시선 속에 승철이 화급하게 단어를 찾았다.
“아니, 그러니까, 민규는 민균데. 만약 평행세계 민규라고 쳐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버논에게 들은 각종 이론을 (심지어 확실히 모르는 채로) 얘기 하니 석민이 진저리 쳤다.
“와,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형 버논이 얘기 너무 열심히 들은 거 아니야?”
“난 이 얘기 좀 궁금해. 나중에 버논이랑 얘기해볼래.”
민규가 트레이를 들고 붕붕방방 뛰어오다가 허벅지를 테이블에 부딪쳐서 트레이를 엎었다.
“으악!”
트레이 위에서 갑자기 바닥으로 자유낙하한 마카롱들은… 다행히 개별 포장되어 있어서 조금 부서진 것 외에는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석민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형, 잘 봐봐. 쟤는 우리 민규 맞아. 평행세계 민규라도 저건 고대로 커서 고대로 우리 민규 되는 애야.”
“아니…”
“맞다니깐?”
민규가 마카롱을 다 주워서 다시 트레이에 올려놓고 가져왔다. 방금 전에 테이블에 허벅지를 개쎄게 부딪쳐서 쩔뚝거리면서도, 여전히 조심성이라곤 없이 움직이다가 트레이를 또 한 번 엎을 뻔 하고 간신히.
석민은 눈으로 말했다.
- 이걸 보고도 몰라?
그렇지만 민규를 향해 돌렸을 땐 기대 된다는 환한 얼굴이었다.
“메뉴 뭐뭐 사왔어?”
“하나씩 사와봤는데요, 어, 형은 좋아하는 게…”
민규가 신나하면서 하나씩 나눠줬다. 각자의 취향을 나름대로 고심해서 골라온 게 보여서 다들 군말 없이 마카롱을 잡았다.
조심조심 뚱카롱을 위아래좌우양옆 살핀 민규는 마카롱을 딱 반을 씹었다.
“!!”
“왜? 이상해?”
“너무 마싰어…… 진짜, 너무 맛있어요……!”
마카롱 나머지 반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석민이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가 자기 마카롱을 민규 앞으로 슥 밀어주었다.
민규는 간식을 앞에 두고 기다려! 연습을 하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뚱카롱에서 시선을 못 떼면서도 눈치를 봤다.
“저, 괜찮은데요. 진짜루요.”
“아냐아냐, 나는 명호 거 뺏어 먹으려구!”
“야, 겸아, 내 거 먹어.”
승철이 말하면서 마카롱을 집어주는데 민규와 석민이 둘 다 손을 뻗었다.
민규가 지금 일어난 이 일에 대해 팽글팽글 머리를 돌리는 기색이 보여서 급하게 승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아니, 민규 먹고 싶으면 이거 먹어도 된다구. 나 아아 더 시키러 갈 건데 마실 거나 마카롱 더 먹을 사람? 민규는 더 먹고 싶은 거지, 마카롱? 따른 맛으로 사올까?”
“헤헤… 비싸던데 더 먹어도 되요?”
“당연히 되는데, 들어 갈 자리는 있는 거 맞지?”
민규가 송곳니까지 드러나는 웃음을 지었다.
“완전 있는데요.”
“음료는?”
“그건 괜찮구요.”
“나도 됐어. 얼죽아는 형밖에 없어 지금.”
“아라썽.”
명호가 자기는 버블티가 필요하다고 따라 나왔다. 예명 때문에 식은땀이 그새 줄줄 나서 승철은 진짜 아이스가 필요했다.
“조심 좀 해, 형.”
“완전 깜빡하고 있었어. 버논이나 조슈지나 다 그냥 이름이었잖아.”
“호시 형은?”
“아직 안 만났어. 조심해야지.”
명호가 주문을 하면서 뒤돌아보았다.
“미래에 대해 많이 알게 될 수록 우리가 아는 민규와 멀어지지 않을까.”
“으악, 진짜 버논이 같은 소리 한다.”
“만약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면, 미래가 바뀌고 세븐틴으로 데뷔 못하는 게 더 불쌍하지 않아?”
“알게 된다고 데뷔 못할 리가 있냐.”
“원래 미래는 어떻게 될 지 한 치 앞도 몰라. 이런 일 일어날 거라고 누구도 상상 못 했잖아. 난 그래서 티비나 음악 뭐 안 들려주고 계속, 먹기만 하는 거, 좋은 거 같애. 앨범 안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구. 사실 멤버 만나는 것도… 혹시 모르니깐.”
“으, 그건 생각 안 했다…. 어떡하냐, 쟤 거의 다 만났어. 96 애들 빼고.”
“다 만났다는 말만 하지 말고 그냥 나머지는 상상하게 둬. 그리구, 사실 나도 보고 싶었어. 민규.”
명호가 베시시 웃었다.
승철도 덩달아 뽕긋하게 광대를 올리며 웃었다.
“그치 귀엽지. 우리 이렇게 다 컸는데 갑자기 다시 어린이(그 정도는 아님) 되어버렸잖아. 세월 빠르다.”
“형은 근데 사귀다가 이렇게 됐는데 어떡해?”
막 받은 아아를 쭉 빨던 승철은 입밖으로 아아를 다 뱉을 뻔 했다.
“니, 니가 그걸 어떻게……”
“민규는 뭐 숨기는 거 잘 못하잖아.”
멤버들도 모르는 비밀연애를 하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승철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명호가 한숨을 포옥 쉬었다.
“쟤 미성년자야 형.”
“너, 너, 너는 나를 몰로 보고 그르냐?!”
디저트를 마저 조지고 나서 명호의 조언대로 단톡방에 민규에게 여러 가지 현대 문물 안 알려주기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버논이 도움이 될 거라고 여러 참고문헌, 즉 타임 트래블, 타임 머신 등등의 소재가 쓰인 사이파이 영화, 소설 등을 추천해줬는데 이게 재미와 도움은 둘째치고 볼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메로나 바뀐 건 안 보여주는 게 낫다는 의견이 대다수여서 승철도 차키는 다시 고이 모셨다.
“웅 우지~ 오마카세 내놔랑.”
-이 형은 뭐 맡겨놨나? 갑자기 전화해서 뭐라는 거야. 뭔 예약해둔 것도 없는데.
“너 요새 많이 가잖아. 하나만 양보해. 밍규 메로나 안 가니까 데려가게.”
-그렇게 우기면 없는 게 막 생기나? 지금이라도 예약해? 한 달 후는 되야 하는데?
“헐.”
-그 때까지 민규가 지금 같으면 큰 일이겠는데. 딴 멤버가 찍은 거 봐도 다 심령 사진처럼 나오던데.
문득 머릿속에 이 김민규(17)가 포함된 앨범 자켓 같은 게 확 스쳐갔다.
평균 스물 일곱인 세븐틴 멤버들 사이에 갑자기 들어온 김민규… 충격 진짜 세븐틴임.
자켓에 민규 심령사진 포함이면 사람들이 뭔 소리를 할 지, 아니 어떻게 나와야 덜 이상하게 될 지 까마득했다. 다 같이 심령사진 느낌으로 해? 그걸?
심지어 보는 사람들은 우리 멤버들 말고는 다 스물여섯 민규로 보이는데 알고보면 진짜는 열일곱이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타에 승철은 할 말을 잃었다.
“어버… 어버버…….”
-쿱형, 정신 좀 차려.
“우지야.”
-어.
“글케 되면 민규… 심령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보컬이랑 댄스 연습 첨부터 다시 해야 돼. 얘 지금 미스터 아대님이다.”
느긋하게 웃고있던 지훈의 목소리에 확 각이 섰다.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게요.
“그르자.”
-형은 뭐… 계속 애 델구 다니면서 떡국이나 먹여. 나이 먹나 봐라.
“나 농담 아냐.”
-나도 농담 아니야. 뭐라도 해봐야할 거 아냐.
“구랭… 아라썽.”
떡국 얘기까지 나오니까 진짜 현실성 없어서 승철은 전화를 끄고도 한참 멍청하게 있었다.
정한이와 함께 온 갈비집에서도 승철은 멍했다.
“형…?”
민규가 눈치보면서 쿡쿡 찔렀다.
“어? 왜? 아직도 배고파? 더 시켜?”
“더 시키는 건 좋고요….”
근데 원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지 민규가 머뭇거렸다.
“저어, 더 안 드세요?”
“어어 더 먹어 민규야.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이랬지만 사실 거짓말이다.
진짜 먹어서 배불렀다.
열일곱 살의 블랙홀 같은 위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심지어 아침점심간식저녁야식까지 소화시킬 틈도 없이 야무지게 먹방을 찍고 있어가지고.
승철보다 더 입짧은 정한은 일찌감치 젓가락을 놓고 심령사진을 많이 만들어두겠다며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너는 걱정도 안 되냐.”
“승철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야. 언제 우리가 이런 이상한 일을 또 겪어보겠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또 생길 거 같으니까.”
이렇게 먹방 브이로그 세 화쯤 나올 하루를 끝내고 나서 원우한테 데려다 줄까 했는데 원우는 집에 가있다고 해서 그냥 승철이 맡기로 했다.
넷플릭스로 진짜 옛날 영화도 틀어주고 거기다 야식 먹여주면 끝이지.
“형이 불닭볶음면도 먹어요? 와!”
“내가 좀 수련했지.”
승철이 으쓱으쓱하면서 자랑도 좀 했지만 한 젓가락 먹고는 안 땡겨서 다시 내려놓았다. 조슈아까지 사람이 세 명이라고 다섯 봉을 끓여낸 민규가 눈치를 봤다.
“매운 거 못 먹으시면 딴 거…”
“아냐냐냐. 내일 부을까봐.”
그나마 민규의 먹방 투어에 브런치만 같이 했던 조슈아가 1.5인분은 먹어줘서 어찌어찌 넘어갔다.
심심하지 말라고 넷플릭스 계정에서 옛날 영화도 틀어주고 무려 20년간 애용해온 2002년 ver.최신 발라드 플레이리스트도 넘겨주고 하니까 민규가 좋아했다.
그 사이에 승철은 더부룩한 속을 붙들고 몰래 소화제를 먹었다.
거실에 라꾸라꾸를 펴주고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으니까 하루종일 밖에서 뺑뺑이 돌았던 피로가 촥 몰려오면서 잠이 솔솔 오…
……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잠이 잘 와도 이상하지.
머릿속에서 민규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전혀 정리가 안 되고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김민규(26)과 김민규(17)이 바뀐 걸까, 아니면 누가 싹뚝 잘라버린 것처럼 똑같은 김민규인데도 시간이 잘려나가 어려진 것일까.
이석민은 얘는 김민규가 맞다고 강변을 했지만 아직까지 승철은 확신이 들진 않았다.
김민규는 맞는데 우리 김민규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아니, 얘가 커서 김민규(26)가 될 건 아는데.
그래, 진짜 김민규 맞다. 절대 헷갈릴 수 없다.
그치만 아직 안 컸잖아.
최승철은 뒤척이던 걸 멈추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까.’
민규가 트웰브를 안 건다. 맞다. 아침에도 그랬지.
뭔 말만 하면 득달같이 형 그거 알아? 그거 아니지 않아? 아니거든. 맞거든. 하면서 엄청 시끄럽게 재재재재 거리고 쉴 새가 없어야 되는데 조용했던 것이다.
갑자기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서 승철은 손으로 목앞을 감싸쥐고 쓸어내렸다.
김민규는 눈에 들어오기만 하면 죄다 이러니저러니 꽁알꽁알 잔소리 다 늘어놔야 만족하는 앤데.
지 딴엔 그게 애교라고 주로 애정어린 사람에게만.
그런데 김민규(17)은 아직 쭈뼛거리기만 하고, 엉뚱한 세계에 떨어져버린 것처럼 - 맞긴 한데 - 다 낯선 사람인 양 친해지려고 애쓰고만 있었다.
‘그럼 우리 애가 영영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 계속 저렇게, 우리하고 있었던 기억은 싹 없는 채로, 그냥, 그냥 애기 민규면…….’
방 안에서 얼마나 빙빙 돌았는지 멀미가 다 났다.
속이 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싶어서 승철은 살짝 문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민규에게 준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끝났는지 거실은 불도 꺼져 있고 조용했다. 조슈아 방을 건너봐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거실에 규칙적이고 낮은 숨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깨는 건 아닌지 한참을 우뚝 서서 기다리던 승철은 계속 해서 잠들어 있는 것 같자 깨금발로 살금살금 걸어서 민규 옆으로 다가갔다.
민규는 한쪽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양 이마에 주름을 잡고 꾸깃해져서.
그렇게 꾸깃했는데도 잠든 얼굴은 심지어 깨어 있을 때보다 어려보였다. 깨어있을 땐 쫌 낯가리느라 어색했던 승철은 이제야 맘껏 그 얼굴을 뜯어보았다.
‘진짜 애기네.’
그러나 애기 때도 으른 때도 잘 때는 언제나 행복하게 자던 잠민규가 이렇게 근심걱정 가득하게 잠들어 있으니 마음이 쓰렸다.
쓴물을 삼키고 승철은 살살 민규의 꾸깃한 눈썹 사이 주름을 눌러폈다. 민규가 우웅 하고 더 찡그리더니 반대로 누웠다.
등돌린 어깨가 얇았다.
내 잔소리쟁이 김민규가 아닌 그냥 어리고 불안한 김민규.
진짜 민규였으면 냅다 깨워서 (일어나느냐는 둘째치고) 징징거리고 뭔지 모르겠다 하소연이라도 했을 텐데.
그런 말은 이런 어린애한테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진짜 민규는 누군지, 어디 갔는지, 너도 진짜 민규인데…….
싹 날아가버린 연애 사정까지 세세하게 걱정하고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성년자랑 뭘 어떻게 해 ㅆㅃ 이러면서 고민하기엔 당장 앞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지훈이에게 농담으로 얘 레슨 해줘야 돼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로, 사진도 계속 이렇게 이상하게 남는데 어떡하지. 몇몇 사람들한텐 말해야 할까?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이대로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누구한테까지 말해도 되는지, 민규 가족분들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는지.
동시에 민규 걱정은 제대로 안 하고 이런 걱정만 자꾸 드는 자기 자신한테 환멸 나고.
‘…지금 내가 불안하겠냐, 얘가 불안하겠냐.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승철은 그냥 자기 팔 안에 머리를 묻었다.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한참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최승철은 벅벅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이 조용히 찰칵, 닫히고 나서야 돌아누웠던 김민규가 눈을 스르륵 떴다.
일어날 때부터 최승철은 약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체중계 위에 올라가서 눈으로 확인했을 땐, 좌절해서 바닥에 널부러졌다.
아침부터 야무지게 조슈아가 사준 감자탕을 먹던 김민규가 왜용? 하고 달려왔다.
“괜찮아, 승철이 종종 저래.”
“꺼져… 나 운동 갈 거야….”
멈칫했던 민규가 당황해서 부축하는 시늉까지 하는데, 도저히 위로 받을 기분이 안 났다.
“민규 너도 몸무게 좀 재봐.”
“저요?”
“카메라 앞에 서려면 단련 좀 해야지.”
그런 떠밀림에 민규도 얼렁뚱땅 몸무게를 쟀는데, 민규 말로는 딱히 달라진 걸 모르겠다고 한다. 어차피 몸무게 꼼꼼하게 기록하고 체크하는 인간도 아니고.
다시 보니 어제 그렇게 먹고 지금도 감자탕 1인분은 해치운 것 같은데 배도 안 나왔다.
“…대체 넌 먹은 게 어디로 가니?”
“? 소화되겠죠.”
무섭다, 십칠세의 블랙홀 같은 위장과 소화력.
이제 그 정도까지 미친 위장은 아닌 최승철은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가서 트레이닝 가방을 챙겨 나왔다.
“에휴. 어제 마카롱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아냐, 그전에 토스트도 먹었구 연어 샐러드… 샐러드는 살 안 찌는데……. 나 술도 안 마셨는뎅.”
꿍시렁거리면서 나갈 준비를 하니까 민규가 후다닥 자기 먹은 자리를 정리하더니 따라왔다.
“저두 갈래요!”
“운동을?”
“어, 어, 네.”
얘가 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구나. 와, 하긴 맨날 연습하던 몸이니까 하루 빼먹었으니까 찌뿌뚱한가.
최승철은 그래앵, 하고 대답하고 잠깐 생각했다.
“조슈지 니 트레이닝 복 어딨어? 가져갈게.”
“민규 쓰게? 맨 아래 서랍에 있어. 아니다, 내가 가져올게.”
조슈아가 총총거리며 방에서 트레이닝복과 뜯지 않은 새 팬티까지 들고 와서 건넸다.
“이거는 슈아 형 거예요?”
“엉. 내 건 너무 클 거 같아서. 왜에? 슈아 건 작을 거 같애?”
막 건네주고 식탁으로 돌아가던 조슈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승철아, 작겠니? 사실 니 것도 별로 안 클 거야.”
“야, 지금은 내가 더 크잖아.”
“지금을 즐겨라 승철아.”
“까분다.”
허겁지겁 민규가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아, 이거 큰데 잘 맞을 거 같아요. 잘 입을게요!”
“그래, 잘 다녀와.”
싸우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던 민규가 무색하게 조슈아와 승철은 별 생각없이 서로 콕콕거리던 걸 멈추고 살갑게 인사했다.
“빠이~ 점심 어떡할 거야 조슈지? 이따 민규랑 같이 먹을래?”
“운동 끝나고 불러.”
“웅~”
문이 닫히고 나서야 민규는 조금 안도해서 쭈그러진 어깨로 한숨을 휴, 쉬었다.
“왜에?”
“싸우실까봐 그랬죠.”
승철이 건넨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면서 민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엥, 뭘 싸워어.”
하긴 좌충우돌의 사춘기 시기에 안그래도 불안하고 예민한 음악뽀이들은 별 거 아닌 걸로도 싸워댔고 주먹질만 안 오갔지 분위기는 개싸해진 적이 많았으므로. 그리고 최승철은 그럴 때 절대 져주지 않았으니까. 한 번이라도 지면 그대로 죽을 듯이 굴었다.
김민규 때문에 시간의 모래 아래 쌓였던 열아홉의 기억이 먼지 풀썩풀썩 일으키며 떠올라서 승철은 뒤통수만 긁적였다.
“형이 진짜 착해졌나봐….”
“뭐래. 너 진짜 너무한다. 어 내가 너한테 언제 험하게 굴고 그랬냐?”
“에이잉. 형도 아닌 거 알잖아요.”
김민규가 송곳니까지 드러나는 이가 드러나는 착한 웃음을 지었다. 마스크 아래여도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김민규는 김민규여서.
승철은 반사적으로 그 웃음에 웃음을 되돌려주었다.
‘똥까시야.’
그렇지만 마르고 작은 그 얼굴을 보자 갑작스럽게 겨울 파도를 맞은 듯 외로워졌고, 민규를 앞에 두고도 외로움을 느낀 자신이 속좁고 옹졸하게 느껴져서 얼른 가방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갔다.
착한 김민규.
갑자기 바뀌어버려도 짜증도 못 내고 원망도 못하게 착해빠져가지곤.
2014
김민규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우리 승철이 형 개까칠해.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까칠하고 무섭고 어른스럽게 굴어.
숙소의 대마왕 최승철이었어도 맨날 자기 손 잡고 끌고 다니고 쓰다듬어 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웃음기 싹 빠져가지고 이마에 딱 못 마 땅 세 글자가 자동반사처럼 뜬다.
비글처럼 여기 번쩍 저기 시끌 다니는 승철이 형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불경처럼 서러웠다.
‘아우~ 저거 진짜. 나 좋아해야지, 최승철이….’
최승철이 좋아하는 것만 이렇게 다 가졌는데도. 니보다 형이구… 잘생기구… 키도 크고… 돈도 많… 지금은 없지만.
그리고 하루 지내본 결과 또 저 최승철 나름대로 세운 듯한 기준을 알게 됐다. 지훈이나 순영한테 가까이 가면 못마땅해하면서도 와서 목덜미를 잡아채진 않는데, 조슈아나 명호한테 가면 말벌 아저씨처럼 뛰어온다. 진짜 말 두 마디 이상 하면 최승철한테 물릴 것 같다.
‘쒸이, 연생 경력 짧은 친구들한테 가면 더 이러는구만.’
정작 조슈아나 명호는 곧바로 괜찮아진 것 같은데도, 자기 혼자 그렇게 발톱 세우고. 아퍼 죽겠어 증말.
“됐다. 오늘 좀 개운하게 다 밀어버릴 거임.”
오늘도 순영 앞에서 춤추고 8년차 아이돌인 걸 슬쩍 어필해서 당당히 연습 빠진 상태. (사실 카메라에 잡힐까봐)
덕분에 시간이 생긴 민규는 하루종일 숙소를 다 뒤집어 엎었다.
과거의 숙원이었다. 그 땐 연습하고 지쳐서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는데 눈에 들어오는 꼬라지가 엉망이라서 잉잉 울었는데, 지금은! 시간도 있고 체력도 있고 눈에 들어오는 꼬라지도 엉망임!
이불 다 빨고 널고 쓸고 닦고 중간중간 요리도 좀 해놓고 빨래하고 그냥 건조대에 널어져 있는 옷가지들 개고 구멍난 양말이나 속옷도 싹 버리고.
돌아온 연습생들은 또다시 칠첩반상을 받고 몰라보게 깨끗해진 숙소를 둘러보며 민규를 약간 우렁각시 보듯이 봤다. 지훈이 식사 민규가 해준다고 천원씩 걷어서 주긴 했는데 그 천원이 이렇게 되어서 돌아오나요? 하루만에 숙소가 이렇게 되나요?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연습생들을 위해서 민규는 짜파게티도 네 봉을 사놨다.
새벽에 냄비를 어디서 찾아와서 짜파게티 20인분을 불지도 않게 끓이고 미친 솜씨로 비벼놓으니까 다들 김민규에게 고백했다. 미친.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형. 엄청 맛있어.
심지어 이 때는 아직 적응이 안 되어서 쭈뼛거리던 정한과 조슈아도 감동받은 얼굴로 맛있다고 하고 갈 정도로.
‘근데 이 와중에 먹으러 안 온 사람이 있죠.’
누구라고 말 안해도 다 알 거다. 하여간 속이 빤해가지고.
냄새 폴폴 풍기고 다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으면 못 이기는 척 와서 먹을 줄 알았는데, 되려 잠깐 나와선 애들한테 눈으로 존나 눈치만 줬다. 니들은 연습생인데 이 새벽에 짜파게티를 먹냐? 같은.
짜파게티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 연습생들이 우물쭈물 내려놓으려고 들고 분위기가 다운되자 승철이 그만 한숨을 쉬었다.
“아, 알았어. 먹어먹어. 내일 얼굴 부은 애들만 순영이랑 연습 다시 짜자.”
여기저기서 아이고 하고 곡소리가 났지만 어쨌든, 눈앞의 짜파게티는 못 참지.
승관이 잠시 굳은 얼굴로 짜파게티를 내려다보다가 무슨 캔디 같은 소리를 했다.
“내일의 내가 힘내줄 거야. 그러니까 난 오늘의 행복을 잡을래.”
승관의 행복론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민규는 목으로 짜파게티가 넘어가지 않아서 멀뚱히 짜파게티 그릇을 내려놓았다.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한 번도 먹을 게 싫은 적도 없고 안 먹힌 적도 없고 짜파게티라면 오인분 정도는 먹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아오, 저거저거 나쁜 새끼. 어떻게 한 입을 안 먹어보냐.’
이 때도 몰래 편의점 가서 작은 사이즈 짜장 컵라면 설익은 거 먹으면서 짜파게티 먹고 싶다고 징징거린 게 누구? 최승철이었다.
새벽인데 막 나가도 되나 쪼끔 걱정하는 김민규(17)을 끌고 최승철(19)이 끌고 나가서 먹이고 그랬다고.
근데 이렇게 맛있어서 다들 엄지 척한 짜파게티를 안 먹는다고. 한 입도 안 먹고 혼자 쏙 들어가서 꿍해있다고.
민규는 그릇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걸 안 먹는 건 진짜 범죄야.’
짜파게티 한 젓가락 들고 방으로 들어간 승철을 쫓아갔다.
2층 침대가 즐비한 가운데에 승철이 이마에 손을 대고 앉아 있었다.
“한 입만 먹어봐. 한 입만.”
승철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곧 찡그렸다.
“안 먹어요.”
“아오~ 한 입만 먹어보라고. 누가 다 준대냐? 한 입만 먹으라고. 해준 사람 성의가 있지.”
“안 먹는다고요.”
민규도 울컥했다.
“승철이 형 진짜, 나, 형, 형한테 까불지 마. 빨리 와서 달라고 해. 형 이거 좋아하잖아. 뭐 먹고 싶냐고 하면 맨날 짜파게티 소리만 했잖아. 왜 안 먹어? 불닭소스 안 넣어서 심심한 거야?”
“저 매운 거 못 먹어요.”
“지금은 그러지만 나중엔 형 니가 나한테 불닭 소스 쫌만 넣자고 막 그러잖아!”
민규는 진짜 울음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어린 최승철. 어린애라서 상대방 덜 신경쓰고 호불호가 명확한 최승철. 말이 좀 험한 최승철. 아직 부담을 삼키고 있는 최승철.
이렇게 쪼끔밖에 안 다른데도 날 안 좋아하는 최승철.
“제발 좀 먹어. 안 먹을 거면, 나한테 안 붙어 있을 거면 히잉, 벽 보고 서 있으란 말이야, 흐잉….”
데뷔 전후로 8년차까지 가면서 각종 부침에도 한 번 울지 않았던 긍정왕 김민규였지만, 이제는 무서웠다.
여긴 대체 뭐야. 왜 다 똑같은데 형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나는, 형 계속 좋아하는데.
언제 돌아갈 수 있지? 돌아갈 수 있는 건 맞아? 이대로 살라고 하면 살 수는 있는데 최승철이 나쁘잖아아! 불안해 죽겠는데 최승철마저 나를 안 좋아하고 밀어내잖아!
그런 내면의 소용돌이와 짜파게티를 먹이겠다는 의지가 합쳐져 젓가락으로 짜파게티를 들고 제발 먹어보라고 훌쩍대는 스물여섯 남자애를 보면서 최승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승철은 민규를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여기다 흘리겠네. 나가요, 애들 김치나 꺼내 먹으라고 해.”
거실로 나간 승철이 잘 먹고 있는 찬이를 불러 일시켰다.
“찬아, 김치라도 꺼내놓고 먹어.”
“네엥~”
뒤따라나온 민규가 눈물콧물을 훔치면서 꿍얼거렸다.
“찬이를 뭘 시켜요. 안 먹는 사람이 좀 꺼내주지.”
그러다 민규는 웬일로 진짜 김치를 꺼내주려던 승철과 부딪쳤다.
사실 꽝 부딪친 것도 아니고 슬쩍 닿은 정도였다.
그치만 그 작은 접촉에도 최승철은 기겁하고 민규는 더 기겁했다.
“으악!”
민규는 팔을 휘젓다가 다리가 꼬여서 버둥거리고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짜파게티는 그릇 위에서… 거실 위로 퍼져나갔다.
“우와악!”
푸닥. 푸다닥. 난데없는 2인분의 국지성 짜파게티 비가 석민과 버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으악!!!”
그나마 다행히 몸을 비비 꼬며 피한 탓에 아무에게도 안 부딪치고 혼자 바닥에 벌러덩 넘어진 김민규 위에도 마찬가지로 짜파게티 비가 내렸다.
“아, 괜찮냐?”
“괜찮겠냐아?!”
“이석민 짜파게티 한 그릇 추가임?”
“그릇 맞은 사람은 없어?”
“민규, 형이 그릇은 사수했어.”
“…나 이거 먹는다?”
“최한솔 미쳤나봐!”
“바닥에 안 닿았잖아.”
열일곱 명이 한 마디씩만 해도 열일곱 마디……
그 쪼끔의 걱정과 폭풍처럼 쏟아지는 웃음에 민규는 헤 웃고 말았다. 하 또 나 사고쳤네. 어떻게 사고 안 치는 날이 없어.
승철의 웃음기 섞인 들릴 때까지는 그렇게 웃었다.
다들 웃고 어떻게 치우냐 왜 먹냐 떠드는 와중에도 그 작고 낮은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으이구, 김민규 또 김민규 했지.”
십 년 후까지도 맨날맨날 듣고, 맨날맨날 혼나서.
어쩌다 덤벙대는 김민규한테 매번 지치지도 않고 꼬박꼬박 잔소리를 하고 놀리는 형이라서.
내가 사랑하는 그 목소리라서.
민규는 넘어진 채로 고개만 들었다.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촉촉한 민규의 눈이, ‘김민규’라고 부른 승철에게 꽂혔다.
승철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듯 웃음이 없어지고 있었다. 손 안에 쥔 모래처럼 스르르.
승철이 문득 이를 악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조심성 없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숙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최승철!”
민규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따라갔다. 머리에 붙은 짜파게티는 급하게 바닥에 버려버리고.
오늘 죽어라고 쓸고 닦아 깨끗해진 마루에 시커먼 짜파게티가 붙는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형, 승철이 형!”
자동으로 불이 켜지지 않는 어두운 복도 저 끝에서 최승철이 언뜻 그 부름에 멈칫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김민규를 확인하고 허 하고 어깨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승철이 휙 몸을 돌려 다시 뛰쳐나간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큰 운동화를 꿰어 신은 덜걱덜걱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웠다. 어디로 정해놓고 뛰는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냥 멀리 가려는 소리.
승철의 발도 민규의 발도, 결국 무심코, 몇 년간 수도 없이 들락날락한 익숙한 장소로 향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좁고 닳은 돌계단과 덜그럭거리는 쇠난간. 토끼를 따라 깜깜한 토끼굴로 떨어져내리는 것처럼 그 굴을 따라나가면 고등학교 시절을 꼴아박은 연습실 앞이었다.
승철은 잠긴 문고리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쪽은 죽어도 안 쳐다보는 그 어린 뒤통수.
민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도망가는 건 나쁜 버릇이야, 형. 모르니까 무서운 거잖아. 부딪쳐보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닌 걸 다 알면서.
사실은 내가 김민규인 거 다 알면서.
아나 해가 지나가버렸어
2014
이놈의 건물은 절대 움직임에 반응해서 불이 켜지는 데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으니 차츰 실루엣과 표정이 선명해졌다.
최승철은 발밑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잠긴 문고리를 꽉 잡고 매달려 있었다.
철컥철컥…….
그러나 곧 단호한 표정으로 민규를 쏘아보았다.
“왜요.”
“얘기 좀 해.”
“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숙소에선 언제 나갈 지 그런 거?”
태연하려고 애쓰는데 말끝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난… 내가 뭐라도 할 것처럼 그러지 마.”
하지만 최승철은 그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할 말 없으면 꺼져 오오라를 풍기며 어깨를 탁 치고 다시 계단으로 갔다.
민규는 급하게 승철의 손목을 낚아챘다.
승철의 손목은 차갑고 가늘었다.
최승철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순식간에 경계의 냄새를 내뿜는다.
“아닛! 그냥 쫌! 얘기 쫌! 하자고!”
김민규는 날뛰는 승철을 일단 몸으로 꽉 껴안고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당연하지만 쉽게 안 잡혀줬다.
손목 얇은 거 잡아보고 쪼끄맣고 마른 형아 너무 꽉 잡으면 뼈 부러지는 거 아니냐? 싶은 생각도 진짜 1초 했었는데 존나 택도 없는 소리였다. 이 때의 최승철도 힘이 넘쳐나는 짐승에 가까운 중고등학생들을 꽉 쥐어틀고 한 번도 안 져본 대빵이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면서 꺄르륵 웃지만 이 때는 절대 밀려주지도 않고 그래서 쉽게 잡혀주지도 않았다.
민규는 어거지로 계속 잡으려고 손목이 뿌리쳐지면 허리를 잡고, 주먹으로 맞고(“아악! 승처라!”) 다리를 걸고, 먼지 가득한 연습실 복도에서 우당탕탕 굴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최승철의 양 손목을 위에서 잡고 누르고 있는 자세였다. 걷어차이지 않게 다리를 얽어매고 있는…. 약간 그… 아니, 미성년자 동생 형아랑 뭐 하려는 게 아니고, 근데 우리 형아랑은 쪼옴 했었는데.
승철이 형 이렇게 내려다보는 거 은근히 싫어하면서도, 이 자세로 비처럼 떨어져내리는 뽀뽀 세례는 진짜 좋아했는데. 일부러 입술 쭉 내밀고 문어 입으로 뽀뽀하면 무드 깨진다고 질색하면서도 너는 하는 짓이 뭐 이렇게 귀엽냐고 모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꼬집었는데.
나랑 그렇게 사랑했는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원망과 독기만 가득한 최승철의 눈이, 어떻게 나한테 향할 수 있어.
그렇게 심리적인 통증으로 멈칫하는 사이. 최승철은 이를 악물고 얽힌 다리를 풀어서 무릎을 쳐올려 민규의 배를 가격했다.
“끄앙!”
심리적인 통증 같은 건 실제 물리적인 통증에 비하면, 그냥, 비교한 게 잘못했다 진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진짜 찢어지진 않았던 거네요.
청소년 최승철 하도 짝고 말라가지고(그 정도는 아님) 내가 이러다 최승철 깔아버리면 죽는 거 아니냐(그 정도는 아님2) 하는 생각마저 날아가버리고 민규는 푹 그 위로 엎어졌다.
이미 거부당한 짜파게티 때문에 촉촉했던 눈가에 또 눈물이 번져서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의 민규가 낄낄거렸다.
어우, 김민규 우냐? 울어? 스물여섯인데 열아홉 형아한테 맞고 우냐?
……아니, 그래봐야 너도 난데 왜 비웃고 그래. 아프다고! 열아홉한테 맞으면 안 아프냐?! 아프지!!
그래서 무지하게 아파가지고 앞으로 엎어져서 최승철을 깔고 뭉개는 중에도 김민규는 똑똑하게도 두 손목을 놓지 않고 꽉 잡고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민규는 낑낑거렸다.
“마, 말, 말 좀 하자고요……”
“무슨 말을 해, 여기서!”
“으으, 나, 왜 이렇게 싫어해. 나도 형 보고 싶어! 우리 형 보고 싶다고! 진짜 아파! 너 진짜 쎄게 찼지, 나빴다 진짜아. 우리 형아도 나 이렇게 팬 적 없는데 이씨! 너는 동생이면서……”
이렇게 깽깽거리면 승철이 목소리 딱 깔고 많이 아파? 병원 가야 될 거 같애? 이런 소리나 해줘야 되서 김민규도 으이구 이걸로 병원 가겠냐 하고 있어야 되는데, 이 최승철(19)은 조금도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분노로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커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우리, 민규는 어디 갔는데! 형은 우리 민규 아니잖아! 씨발 민규가 사라졌는데 하하호호 짜파게티나 먹게 생겼어? 걔가 연습실에서 없어졌다고!”
“어, 아니, 그게 민규가 없어졌다니 여기 있잖아.”
“형은 김민규 아니라고!”
“나 김민규야! 그냥 좀 큰 김민규야! 진짜야, 나 못 믿으면 뭐부터 얘기해줄까? 정확한 건 오래 됐으니까 막 날짜까진 기억 안 날 수도 있는데, 왜냠 내가 스물 여섯이라 다 옛날 일 같긴 한데? 근데! 다 말할 수는 있어.”
“그럼 우리 민규는 어디 갔는데! 열일곱짜리 애가 어디 갔냐고!”
“나, 나두 잘 모르지. 근데 나 여기 있으니까 여기 김민규는 내쪽에 있지 않을까? 그게 맞지 않아? 균형적으로?”
“균형?”
“나도 멀쩡한 거 봐. 하나도 안 아프고 카메라랑 그런 거, 알지, 좀, 내가 열일곱 살이랑 겹치잖아. 사진에도 이상하게 나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미래의 민규인 거잖아. 근데 우리 멤버들 말고 딴 사람들한텐 계속 어린 민규로 보이는 거니까 쫌 겹친 것 같고 에러 나서 이렇게 된 거고, 그러면 뭔가 또 고쳐지겠지. 그리구 내가 민규가 아니야? 민규 맞는데.”
민규는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두 팔 사이에 승철을 가두듯 내려다보자 승철의 불규칙적인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코끝에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눈물도 닦지 못하고 눌려있던 승철은 입술에 힘을 꾹 주고 거북하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 가까운 거야 민규는 원래 퍼스널 스페이스 없어서 괜찮았다.
원래(?)면 가슴이 아예 맞닿아 있을 텐데 지금은 승철이 청소년이라 가늘어서 공간이 좀 남는 것만 신기하고, 좀 이상하고, 좀 야릇하고.
민규는 얼른 눈을 부릅뜨고 입을 단속했다.
민규가 입을 닫자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차가운 연습실 밖 복도에 잠깐 억눌린 흐느낌만이 울렸다.
“형이 민규라고…….”
한참만에 승철이 꺼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까지 형이 민규라고 생각하면, 우리 민규는 진짜 어떡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숨이 막힐 듯 조용해서 눈물이 또륵또륵 부드러운 얼굴 옆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렸다.
또 가슴이 반으로 우다닥 찢어지는 듯 저릿했다. 어딘가로 사라졌을 17살 민규를 걱정하고 있었구나. 또 혼자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민규는 울상을 지으며 어린 승철을 껴안았다. 품 안에 몸이 쏙 들어왔다. 승철의 몸이 흐느낌으로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승철은 삐지는 건 오지게 삐지고, 약속도 지가 잡아놨는데도 막 파토내고, 잔소리도 심하고, 기준치는 엄청 높고, 덕분에 쪼아대기도 엄청 쪼아댔지만, 그런 복잡하고 짜증나는 성격이어도.
최승철이 김민규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한 번도 헷갈리게 한 적 없었다.
민규는 그 확신이 너무나 뚜렷해서 만질 수도 있을 것처럼 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리 눈물 쏙 빠지게 혼낸다 해도, 이해하기 힘들 만큼 변덕스럽게 군다 해도, 최승철의 기저엔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애정이 있다.
그러니까 그 위가 변덕으로 출렁거리는 것쯤은 별 것 아니었다. 김민규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김민규’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속을 태우면서 울고 있는 걸 보면 그 애정이 손에 잡힐 것 같아서.
“내 쪽에도 승철이 형 있으니까 잘 해줄 거야.”
승철은 전혀, 조금도, 요만큼도 납득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격렬하게 버둥거리고 빠져나가려 힘쓰진 않았다.
시멘트의 냉기가 뼛속까지 얼려서 민규는 승철을 안아 일으켰다.
잘 보이진 않아도 엉망이 됐을 등을 툭툭 쳐주고 정리해주고 있으니까 꽤나 얌전해졌던 최승철이 불쑥 말을 내던졌다.
“짜증나.”
“뭐가 또 짜증난다구 그래.”
“너는… 형은, 왜 그렇게 태연해. 갑자기 이렇게 됐는데…. 나만 전전긍긍하고.”
“나야 뭐 어른이라서.”
으쓱으쓱했더니 승철은 또 입을 꼭 다물고 조용해졌다.
최승철의 변덕과 복잡한 생각 같은 건 이미 적응 완료한 민규가 살살 달랬다.
“아유,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 많은 일이 있었단 말야. 그냥 된 거 아냐. 막 다 얘기하면 안 될까봐 말은 안했는데 승철이 궁금한 거 있음 물어봐. 나 다 대답해줄 수 있거등.”
“…됐어요.”
승철은 터덜터덜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새침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던 최승철은 난간을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 올라가요?”
“엉?”
“짜파게티 먹지도 않고 왔잖아요. 가서 먹어야지. 가요, 형.”
놀라운 일인데, 승철한테 형이라고 불려도 딱히 기쁘지도 않았다. 공연히 멀게만 느껴졌다. 최승철이 좋아하는 세 가지 다 가지고 있는데도 영영 이 쬐끄만 최승철의 김민규는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김민규는 내밀어진 승철의 손을 잡았다.
눈물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승철은 언제 울었냐는 듯한 단단한 표정이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했더니…… 나한테 형 소리를 하면서도 나한테도 형 노릇하려고 하네.’
멀쩡히 이렇게 다 큰 성인 남자한테도.
더 어린데 더 어른 노릇을 하려고 구는 게, 같잖아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안쓰러웠다.
잡아당기는 차가운 승철의 손을 꾹 잡으면서 민규는 한탄했다.
“나는 진짜아, 어려지고 싶다고 생각 한 적 없는데 왜 이렇게 됐지.”
생각보다 형한테 형 소리 듣는 것도 안 좋구, 하고 싶은 말 1, 2, 3 다 해봤는데 만족스럽지 않구, 형은 자기네(?) 민규만 좋아하구.
그리고 진짜 과거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의아했다. 김민규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만큼 부지런히 움직였으니까.
짜잘짜잘하게 사장님 명패 깨뜨리고 트로피 깨뜨리고 커피 쏟아서 의상 엉망 만들구 그런 거 말고는 과거에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일도 하나도 없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했고, 해볼 수 있는 건 해봤다. 나 연애도 형이랑 해봤는데 좋았어.
난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았는데.
손바닥을 주무르니까 질겁하며 손을 뿌리친 승철이 야멸차게 대꾸했다.
“누가 소원을 빌었든지 둘이 뭐, 똑같은 행동이라도 했나보지. 바뀔 만한.”
김민규는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어서 입을 딱 벌렸다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쿵.
“악! 왜, 왜 그래? 왜요?”
계단을 와다닥 내려가서 벽에 머리를 박는 민규 때문에 승철이 화들짝 놀라 덩달아 내려왔다.
“아펑… 근데 나 이렇게 바뀌었을 때도 둘 다 머리 박았었던 거 같거든? 돌아가려면 똑같이 머리 박으면 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머리를 벽에 박치기 하려니까 승철의 손이 벽과 머리 사이에 급하게 끼어들어왔다.
“아악!”
“아씨….”
“으아, 승처라 괜찮아?! 아니 왜 끼어들어! 손 봐! 손 삔 건 아니지?”
꽝 박으려고 작정을 해가지고 아팠을 텐데도 승철은 어른스럽게 괜찮다고만 손을 내저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민규는 승철의 손을 잡고 꼼꼼하게 살폈다. 손등이 빨갛게 까졌다.
“아퍼? 아프지? 아으, 왜 이렇게 가오를 잡어, 쪼끄만 게.”
그 말에 승철의 눈에 다시 홱 불이 켜졌다. 손을 뿌리친 승철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머리 박는다고 문제가 해결 될 거 같아요? 아, 좀 생각을 하고 하라고요. 스물여섯이라고 해놓고 고쳐지지가 않아.”
“너무 생각 많은 것보단 낫다 뭐.”
“그래서 그 생각없이 당장 머리 박아서 얻은 게 혹 말고 뭐가 있냐 이거죠.”
“으유, 이걸 그냥….”
“뭐.”
……하씨, 최승철 한 마디를 안 져.
뚱해진 김민규는 계단을 오르다가 하나 더 떠올랐다.
“아, 이거 안 되면 사랑의 키스?”
“…….”
승철은 대꾸도 안해줬다.
“아니, 겨울왕국도 그랬잖아.”
말해놓고 겨울왕국이 이 시기 전에 개봉을 했나? 하고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승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거기서도 사랑의 키스는 쓸모 없다고 한 거 아닌가? 무슨 애들이나 할 소릴.”
“아니지, 결국 사랑한 건 안나와 엘사였으니까 된 거지. 사랑으로 그 저주를 극복한 거지.”
민규는 승철의 팔을 잡았다.
‘으악, 가늘어.’
양심에 털이 삐쭉삐쭉 돋았지만 민규도 약간 조급했으므로 애원하듯 같은 계단참에 선 승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함만 해보자.”
“남자끼리 무슨 사랑의 키, 키스야.”
“남자끼리가 뭐.”
그 대답에 최승철이 뭔가를 감지한 듯 이맛살을 있는대로 찌푸린 채로 김민규에게서 팔을 빼내려고 비틀었다.
“왜엥 나중에는 나랑……”
갑자기 민규는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문 채로 승철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년 되면 말해줄게. 내가 아무리 양심 없이 굴어도 이건 아니지.”
그 말의 함의에 어두운 데서도 승철의 눈동자가 1.5배 정도로 커지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 아니… 아, 어…”
“근데 내년까지 내가 여기 있는 거면 좀 문제니까 돌아가려면 이거저거 다 해봐야 되는 거잖아. 뽀뽀만 해볼까?”
“……싫어.”
“아 왜에! 최승철 진짜 미워죽겠지, 내가.”
민규는 팔을 잡아당겼다. 승철의 울 것 같은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싫었으면 아까처럼 배라도 올려차버렸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그게 너무 귀여워서 민규는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확 웃음지었다.
뽀뽀 정도로 닳냐? 닳겠냐? 메로나 때도 그렇고 방송 하면서도 엄청 많이 했다구.
……물론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어리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매가 축 처져선. 난처한 얼굴로 김민규를 그리워하는 형.
김민규의 머리를 어떤 생각이 탁 치고 지나갔다.
‘나도 형 좋아했네. 처음 봤을 때부터.’
멋있는 형, 뻣뻣한 형, 형 노릇 오지게 하는데 잘할 때도 있고 어설플 때도 있고, 그래서 귀여운 형의 모습까지 전부 다.
김민규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살짝 댔다. 보이는 그대로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
2022
연습실에도 분명히 체력 단련 때문에 몇 가지 기구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도 민규는 감탄과 낯설음이 섞인 얼굴로 두리번거리면서 승철의 옆에 붙어있기만 했다.
민규가 금방 자길 버리고 신나서 운동하겠거니 하고 혼자 하는 루틴을 맘속으로 짜놨던 승철은, 꿍하게 루틴을 폐기했다. 혼자 하는 거 싫어하니까 좋긴 한데?
“왜에?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님 관장님한테 여쭤볼까?”
민규가 팔을 벅벅 긁다가 수줍게 대답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아니구. 그냥 형 따라 할래요.”
“나? 나아는… 너랑 하는 게 쫌 다르긴 한데.”
왜냐하면 오늘은 무조건 살 빼는 루틴 할 거라서.
승철은 민규를 위아래로 훑었다. 주로 배 부분을.
아침부터 감자탕을 조질 때부터 알아봐야 했지만 그렇게 먹고 또 먹었는데도 민규는 얼굴도 안 부었다.
그리고 아직 뼈대가 단단하지 않은 청소년한테 강도 높은 거 시키면 키가 안 클 지도. 얘 콩나물처럼 쑥쑥 더 자라야되는데요.
그치만? 몰라. 해도 상관 없나?
으음, 끄응, 후움, 하고 있으니까 쫄래쫄래 어느샌가 순영이 들어와서 승철의 뒤에서 덩달아 고민하는 흉내를 냈다.
“이야, 진짜 눈으로 보니까 다르네.”
“언제 왔냐?”
“방금. 안녕, 김민규~”
“네에… 안녕하세요.”
순영이 약간 큰 소리로 얘가 우리한테만 열일… 이렇게 말을 시작해서 승철이 얼른 덥썩 순영을 뒤에서 조르며 입을 막았다.
“야이! 너 진짜 다 듣는 데서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너 이제부터 햄스터야!”
“아 왜엑! 우리밖에 없잖아!”
“관장님 저기 계시잖아! 쫌 이따 가시면 말하라고.”
정확한 대화를 듣기엔 좀 멀리 떨어져 있긴 한데 승철은 그런 거 존나 예민했다. 귀만 좀 기울이면 어쨌든 다 들리는데.
운동 기구 하나하나 다 살펴본 관장이 손을 탁탁 털면서 가까이 다가오자, 승철은 순영에게 아예 어깨동무를 하고 언제든지 조를 준비를 했다.
민규가 불안하게 힐끔거리는 걸 보니… 아니, 나는 저 쪼끄만 김민규한텐 한 번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나 겁내냐?!
‘너는 임마 쪼끄매서 어디 뿌러질까봐 어깨동무도 못하겠구만.’
그러나 어쨌든 사회 생활을 빡세게 해 온 최승철은 그 말은 입밖에 안 내고 빵긋 웃으며 관장에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침부터 왔어?”
“네, 안녕하십니까아…”
“어쩐 일로 민규 씨가 이렇게 얌전해? 뭐야, 사장님한테 혼났어?”
김민규는 일단 그쵸오 하면서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가더니 삐걱거리며 승철 쪽을 쳐다보았다. 도와달라고 말하는 시선이었다.
관장님과 워낙 친하고 민규는 민규니까, 하고 순영의 입단속만 하고 있던 승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밍규 있잖아요. 감기 기운 좀 있어서 그냥 따라오기만 한 거예요.”
“아이고, 감기야? 요새 독감 유행하는데 그건 아니고?”
“다행히 그냥 감기였어요~”
관장이 그럼 무리하지 말라고 계속 스몰 토크를 이어나가자 민규는 자동차 앞에 달아놓는 인형처럼 꾸벅꾸벅 인사만 반복했다.
“아 형~ 얘 목 나갔어, 그만 말 시켜요.”
“그래도 운동장에 나왔는데!”
“그니까 간단한 운동만 하게 무리 안 가는 걸로만 쪼끔만 짜줘용.”
“무리를 안하면 운동을 왜 하니.”
“민규가 운동 좋아하잖아요. 안 움직이면 찝찝한가봐.”
관장이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푸는 가벼운 운동 루틴을 만들어주고 나가자, 그제야 민규가 휴우 하고 안심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우, 저 변명 뭐 할 지 진짜 하나도 생각이 안 나가지고… 다음 번에도 그런 말 하면 되겠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감기, 감기… 아, 그럼 많이 안 묻긴 하겠어요. 좋아. 담 번에는 잘할게요!”
어엉, 하고 대꾸는 했지만 승철은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덩달아 움츠러든 팔뚝에 순영이 풀어달라고 기겁해서 탭했다.
“살렷… 살렷줫!”
“야, 내가 죽이겠니.”
승철은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목을 조르던 팔을 놓고 순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순영이 착하게 달랑달랑 흔들려주면서 물었다.
“뭐가 또 그렇게 심란해.”
질문의 의미보다 민규의 어깨가 퍼뜩 굳는 게 뇌리에 먼저 전달됐다.
승철은 목소리의 피치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왜 심란하냐니, 다이어트 해야 되니까 그렇지 바보야아! 운동 너무 막 많이 해도 안 되구 진짜.”
“에이, 괜찮아 형. 어차피 형 근육은 다 알잖아.”
그래도 민규의 굳은 어깨는 풀리지 않았다.
민규는 철썩 붙어있는 순영과 승철을 보다가 쭈뼛쭈뼛하며 저두 운동할게요오… 하고 터벅터벅 가버렸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등 뒤에 ‘시무룩’이라고 써진 것처럼 보였다.
‘자기가 또 뭐 심란한 일 제공했다고 눈치 채서 저러는 거 같은데.’
맞긴 맞다. 근데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최승철은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열일곱 애기가 자기 때문에 심란해졌다고 어깨가 처져 버렸다고~~! 내가 심란한 건 내가 심란한 거고 그걸로 김민규한테 부담 주면 어떡해!
요새는 많이 내려놓았던 형아 자아가 다시 어깨에 매달렸다.
승철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어떻게 부담 주지 말자고 결심한 지 하루만에.
“아잇, 형. 왜 그렇게 또 혼자 고민해. 우리 있는 거 잊었어?”
“하아… 잊지 않았지. 근데 너는 진짜 괜찮냐?”
“난 그냥 우리끼리만 이렇게 쑥덕대지 말고 말해야 될 거 같은데. 어디다 해야 되나? 일단 언론에 좀 흘리면 되려나? 도움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승철이 펄쩍 뛰었다.
“미쳤니? 민규 데리고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래도 뭐 우리보단 대응을 잘 하지 않을까?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봤자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뭐가 어때서! 우리가 민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도움이 훨씬 더 많이 될 거라고!”
“민규를 아는 거랑 이 사태를 해결하는 거랑 상관없지.”
태연하기만 한 순영이 얄미워서 승철은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야, 너는 쟤 미스터 아대님이라서 보컬이고 춤이고 다 처음부터 해야 되는데 걱정도 안 되냐?”
지훈이처럼 뒤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영은 어깨만 으쓱했다.
“얼마나 성장할 지 아니까 죽어라고 굴리면 그 정도까지 다시 올라갈 수 있겠지.”
승철은 순간 아연해져서 소름이 돋은 팔을 벅벅 문질렀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긍정왕?
“…세븐틴엔 진짜 미친놈들밖에 없는 거 같애.”
“내가 보기엔 형도 만만치 않아.”
“아냐아냐. 나 지금 엄청 겸손해졌어. 진짜 니네 따라가려면 멀었다.”
그러면서 헛웃음을 흘리자 순영이 기분좋게 하하 따라 웃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도 있고.”
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어도 멤버들한텐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하자. 이런 미친 긍정왕들한테 상담할 건 상담하고. 혼자 무게를 짊어져서는 지 혼자 쩔쩔매다가 뻗어버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 쪼잔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꽁하더라도 혼자만이 간직해야 할 그런 부분은 있었다.
키만 후리후리해서 고양이처럼 말고 있는 김민규(19)의 등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자기가 아는 김민규(26)을 떠올리는 거.
어린애한테 미안해서 최승철은 내심으로 자기 뺨을 쫙쫙 때렸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김민규가 물론 처음부터 붙임성 좋고 사람 좋아하고 그러긴 했지만 커가면서 더 노력하고 사람들 잘 대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이 뼈저리게 가슴을 찔렀다.
특히 한동안 힘들어한 뒤엔 뭐만 해도 자길 싸고 돌아서 낯선 사람들한텐 먼저 나서서 자신이 말 걸고 막 떠들고 어색함을 풀어준 다음에 바톤 터치를 해주던 행동들.
능숙하게 대화를 끌어나가던 행동들.
머뭇거리는 승철의 등을 떠밀어주고 뒤에서 짜란다짜란다 박수쳐주던 행동들.
마냥 의젓하고 어른스럽네 신기하다, 원래 성격이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다 열심히 해서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김민규 기특해……. 기특했어…….
울음 버튼을 딱 누른 것처럼 눈가가 시큰해지더니 순식간에 글썽하게 눈물이 맺혔다.
승철은 앓는 소리를 내며 순영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등 뒤에서 승철이 기대오자 순영이 승철의 정수리를 복복 쓰다듬었다.
머뭇거리며 운동기구 앞에서 할까말까 하던 민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달려왔다가 코앞에서 멈췄다.
“괜찮, 괜찮으세요…”
“어, 별 거 아냐~ 민규 가서 운동 계속 해~”
순영이 커버를 쳐줬지만 민규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조바심 내면서 주변을 서성였다.
“승철이 형 진짜 괜찮아요?”
“괜찮아. 절대 우는 거 아냐.”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승철은 순영의 허리를 콱 꼬집으면서 코를 훌쩍였다.
“아, 아무 것도 아냐.”
“형이 우는 데 어떻게 그게 아무 것도 아니에요. 네?”
“왐마야. 나 빠져도 돼?”
죽는다.
권순영이 이 자리에서 빠지면 둘만 남게 되고, 둘만 남게 되면 최승철은 부끄러워서 죽는다.
승철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으면서 순영의 등에 더욱 꼭 달라붙었다.
덕분에 민규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울적해지고 있는 꼴은 권순영만이 목격했다.
최승철의 현타는 꽤 심했다.
김민규(26) 보고 싶다고 애한테 우는 모습까지 보이고 나니 김민규(19)한테 현대(?)의 미식을 알려주겠다 어쩌구 했던 결심마저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안 먹일 수는 없어서 순영한테 자기 카드를 맡기고 적당히 써서 애 맛있는 것 좀 먹이라고 당부하는 이상한 그림이나 연출하고.
승철이 흐늘거리자 순영이 쭈뼛거리는 민규를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
승철은 점심도 대충 프로틴으로 때우고 흐늘거리며 계속 체육관에서 비비적거렸다. 관장이 왔다가 집중 못할 거면 나가라고 했지만 그냥 바닥에 배까고 애교를 부렸다.
“허엉 저 여기서 운동 좀 할게요!! 제발요!!!”
집에 가면 또 김민규(19, 26) 생각만 해서 심란하기만 하니까.
체육관이라고 다를 바는 없지만 적어도 몸을 움직이겠다 억지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좀 떨쳐지는? 기분인 듯.
아닐 수도 있음.
단톡에서 쿱스가 쏜다 대파티가 열리고 있었지만 심란한 승철은 억지로 외면하고 등 한 번 하고 한숨 쉬고 PT 두 번 하고 한숨 쉬고를 반복했다.
어느새 지훈이 체육관으로 슥 왔다.
“그래갖고 운동 퍽도 되겠다.”
“어, 왔냐.”
“카드만 주고 왜 밥 먹으러 안 왔어.”
“몰라…….”
“카드 긁으면 문자 안 오드나? 확인 좀 해.”
“니가 그 소리 하는 거 보니 끔찍하게 많이 나온 모양이구나.”
입을 움직이는 걸 보니 아직 죽진 않았는데 넋이 나간 것처럼 구니까 지훈도 걱정스러운지 옆에 와서 앉았다.
“민규 걱정되서 그런 거 아는데, 이러고 있음 어떡하냐. 쟤도 자기 시간으로 돌아가고 민규도 우리 시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할 방법을 찾아야지.”
“으응.”
“물어보니까 작은민규 쟤도 뭐 머리 박아가지고 눈에 별이 빙빙 돌았는데 눈 떠 보니 식탁 밑이었다 그러네? 큰민규도 그랬었다매. 둘이 똑같이 싱크 맞아서 바뀐 거 같기도 하고.”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럼 춤 추고 있으면 뭐 딴 세상 사람이랑 바뀌고 똥 싸도 딴 세상 사람이랑 바뀌고 그러게?”
“그럼 뭐 아주 정석대로 해 봐?”
“뭐가 정석인데.”
승철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지. 그리고 해결방법도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근데 무슨 정석이야 정석은.
“키스 해봐.”
승철은 잡아당기던 손잡이를 놓쳤다.
“아이 깜짝아. 좀 조심해.”
“미쳤니 지훈아?”
“뭐, 왜. 문제 생겼을 때 딱 풀어주는 정석이잖아. 사랑.”
“미쳤니?”
“사랑은 원래 개쎔.”
“야이 미친…!”
그런데 지훈이 논리정연하게 헛소리를 시작했다. 우리의 상식을 비춰보았을 때 어쩌구 평행우주론은 거품처럼 맞닿아 있는 저쩌구 변신이 어쩌구 봉인이 어쩌구 사랑을 표현할 때 저쩌구… 그런데 결론은 해봐서 뭐 닳냐? 였다.
진짜 1초 정도 홀릴 뻔 했던 최승철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걔랑 나랑 지금 열 살 넘게 차이 나거든?”
“그치.”
“그럼 민규가 지금 몇살이다?”
“형이 쫌 있음 니쥬큐니까,”
“아이씨, 김민규 나이만 말하라고~”
“열일곱? 열여덟?”
“그래. 내가 꺾인 지도 한참 됐는데 열일곱짜리랑 입술 부비면 그게 정상이겠니 지훈아? 그게 사랑이니?”
“형은 왜 꼭 이럴 때만 정상이 되냐.”
그건 니들이 언제나 제정상이 아니란 뜻 아닐까…….
믿었던 현실주의자 이지훈마저 이 꼬라지인 걸 알게 된 최승철은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눈에 빠짝 힘을 줬다. 나라도 제정신 잘 붙들고 있어야지.
지훈은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우린 해봤는데 안 됐고, 일단 다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말한 거야.”
간신히 찾았던 제정신이 확 날아갔다.
“뭐? 뭘 해봤다고?”
“우린 사랑을 담아 해봤는데 별다른 일 없었고, 이제 형하고 원우 오면 시켜보려고.”
“사, 사랑의? 키스를? 민규한테? 했다고?”
“뽀뽀지만 암튼.”
승철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니가 니 의지로 민규한테 뽀뽀했다고?!”
“그랬다니까.”
“너 제정신이야? 민규 지금 열일곱이고, 니가 형이면 애를 어? 제대로 지켜줄 생각을 해야지 잘 봐라 이제 니 집으로 갈 지도 모른다 이러면서 그런 짓을 해?”
눈앞에서 최승철이 화가 나서 털을 곤두세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데도, 지훈은 밀리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형. 지금 그래서 미성년자한테 뽀뽀해서 화가 난 거야, 아직 첫키스도 안 해봤다는 민규한테 우리가 뽀뽀해서 화가 난 거야?”
“그야……! 그야 뭐에 더 화가 나든 미친, 아니, 애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했지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래?!”
“해봐서 나쁠 거 없잖아. 모든 노력을 해봐야지.”
“모든 노력이 그거야? 진짜 너까지 이러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전대미문의 일인데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보는 것뿐이고. 안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지. 그걸 생각하고 만약에 안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후회를 안 할 거 아냐.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편해지고.”
“받아들여지겠냐? 하…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해.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놔야지.”
“꼭 그래야 되는 이유라도 있나? 좀 다를 수 있어도 민규는 민규고.”
“겠냐? 니 눈엔 진짜 걔가 민규로만 보여?”
훨씬 어리잖아. 아직 두 손에 아무 것도 없잖아. 걔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 해왔던 것들이 다 날라가고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승철은 화를 더 내지도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리더로서, 형으로서 걱정해야 하는 건 이런 게 맞았다. 김민규의 인생과 커리어, 세븐틴까지 걱정하는 거.
그런데 슬그머니 나타나 가슴에 아프게 박히는 건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최승철에게 김민규가 없어지는 것.
체육관의 문이 삐이이이걱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뭐야?”
“민균가?”
“민규라고?”
태평하게 지훈이 대답했다.
“말 안 했나? 민규가 형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나하고 왔는데 화장실 간다고 했거든.”
최승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열일곱살의 불안하고 어린 김민규가 무슨 말을 들었을지 되돌려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승철은 삐걱대며 지훈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은 게 뻔한 이지훈은 여전히 미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너는 김민규 상처받을 거 생각 안 하냐?”
“내가 상처줬냐? 형이 줬지. 내가 똑같은 말 했어도 쟤는 그렇게 상처 안 받을 걸?”
“존나 뭔소리임? 하씨… 넌 이따 죽을 줄 알아.”
이를 악문 승철은 후다닥 뛰어서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짧은 복도와 엘리베이터, 화장실 문, 그리고 비상계단.
비상계단의 문이 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승철은 황급하게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계단참을 내려가던 민규가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민규야!”
울먹울먹하는 김민규의 얼굴을 보자 승철은 다짜고짜 자신이 다 잘못했다고 외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승철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평이하게 내뱉었다.
“어디 가는데.”
민규의 고개가 스르르 떨어졌다.
“나가, 나가보려고요.”
“어디를.”
“…….”
민규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승철은 그런 민규의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인간적으로 열일곱 체력과 똘끼로 도망가면 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야생 동물에게 다가가는 심정으로 ‘널 해치지 않을 거야’ 하는 착한 오오라를 풍기면서 슬금슬금.
승철은 최대한 솜사탕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밍규야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선 대꾸가 돌아왔다.
“내가 민규라고 생각 안 하잖아요, 형은.”
“아니? 뭔 소리야아!”
그렇지만 민규의 목소리만 들어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승철은 변명을 좌르르 늘어놓았다.
“맞지, 너 김민규 맞잖아. 내가 설마 모르겠냐아, 애들도 다 인정했지. 근데 딴 사람이란 게 아니라. 어, 너한테 우리도 그러지 않냐? 일이 년 쫌 넘게 알고 지내던 형들이 나이 엄청 먹고 동생들이 다 너보다 훨씬 형 되고 메로나는 또 없어졌다 그러고. 너한텐 그냥 쫌 친해진 사람 같은 건데 우리는 다 너하고 오래 살았다구 그러고……”
“나한텐 똑같아요. 어쨌든 승철이 형은 승철이 형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여기 있는데. 나를 김민규로 대해주는 사람들 다 여기 있잖아요.”
“그, 그치이. 그… 아니, 근데,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너를 김민규라고 확 알고 그렇다고 우겨도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게 받아줄 지 모르잖아.”
난간을 쥔 민규의 손아귀가 하얗게 질렸다.
“난 딴 사람들 얘기하는 거 아녜요. 형, 한테 어떤지 얘기하는 거라구요. 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 왜 신경써. 그냥 형이 날 김민규라고 생각 안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까 딴 사람 핑계 대는 거잖아.”
승철이 숨을 들이마셨다.
휑뎅그레한 비상용 계단에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뚝뚝 울렸다. 그 작은 물방울 소리에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승철은 어쩔 줄 모르고 후다닥 달려가 민규의 어깨를 붙들었다. 김민규가 울어, 어떡하지, 이렇게 쪼끄만 애가. 너무 긍정적이라서 오히려 나를 (빡쳐서) 울게 했던 걔가.
김민규가 입술을 꽉 깨물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다 결국 승철에게 기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형이 아는 김민규는 내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너무 어려? 잘하려고 했는데, 나는, 나, 잘, 잘하려고 했는데……”
“아냐, 니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냐. 너는 김민규 맞지. 근데, 그냥 내가 쪼잔해서 그래. 내가, 나를 잘 모르는 너한테 혼자 서운한 거야. 알지 민규야….”
흐느끼는 민규의 몸에서 열이 올라 뜨끈뜨끈했다. 안 그래도 작은데 등을 고양이처럼 말고.
“제발, 민규야…”
최승철은 어떻게든 달래려고 등에 손을 얹고 문질렀다.
오랜만에 형아 노릇을 하려고 했는데 형아 노릇은커녕 혼자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애나 울리고, 아주 잘한다, 최승철. 잘하고 있다.
누구보다 불안하고 걱정하고 있을 애 앞에서 자기 걱정이나 줄줄 늘어놓고.
“미안해, 형이 미안해….”
눈물은 손쉽게 전염되었다.
내가 좀만 더 잘했으면, 이렇게 울지도 않았을 텐데.
정작 민규는 왕창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그래도 천천히 진정하기 시작했는데 최승철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씨, 미안… 나 좀 버튼 눌렸나봐. 계속 그냥 나오네…”
눈가가 빨개진 김민규가 고개를 들었다.
민규는 한참을 곁눈질로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는 승철을 보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진짜 뽀뽀하면 원래대로 돌아올까요?”
“그럴 리가 있냐아… 말이 되는 소릴 해.”
“지금 제 상황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거든요.”
자타공인 평소엔 잘도 이상한 짓 하다가 꼭 이럴 때만 제정신인 최승철은, 김민규를 퍽퍽 치려다 주먹만 파르르 떨었다.
“민규야. 휴우…. 사람 함부로 믿으면 큰일 난다.”
“왜요…… 진짜 지훈이 형 말대로 닳는 것도 아니구 그냥, 해볼 수 있는 걸 해보는 건데… 제가 진짜 김민규가 아니라서 싫으세요?”
물기가 아직 남아 반짝거리는 눈이 승철을 처량하게 올려다보았다.
“김민규, 야, 니가 김민규니까 못하는 거지. 남이었음 그냥 눈 딱 감고 쪽 하고 말았어.”
그러나 최승철은 김민규가 이렇게 올려다볼 때 안 들어준 적이 없었다. 존나 뭐라고 하고 존나 구박하고 맘에 안 드는 척 한 다음에 못 이기는 척 봐줬지. 김민규는 모르겠지만.
최승철은 존나 못마땅한 상태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암튼 그래. 해보자.”
승철은 일단 자세를 잡았다.
‘나는 지금 아무 사심이 없다. 나는 사심이 없다. 애기였을 때도 잘생겼긴 한데 나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오.’
김민규의 뺨과 귓과, 목줄기까지 한 번에 감싼 승철은 여전히 복잡해서 한숨을 쉬고 내려다 봤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어우씨.”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힌 승철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보나마나 별 일 없을 건데, 너 만약에 돌아간다 치고 이런 아저씨… 하아, 암튼 나이 많은 사람이 너한테 뭔 이유를 대서 뽀뽀하려고 들면 진짜 죽어라고 걷어차, 알겠지.”
민규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살짝 흘기고 뻐기는 투로 대꾸했다.
“저도 아무나한테 한 번 뽀뽀 해보자 안 그래요. 승철이 형이니까 해보자고 하는 거지.”
기특한지 짜증나는지 알 수 없는 발언.
아직 뜨끈한 뺨을 손가락으로 만진 채로 고민하던 승철은 진짜 눈 딱 감고 입술을 맞댔다.
민규의 얇은 입술선이 뜨겁게 자국처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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