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와 다르지 않을 밤

우쿱

돌잡

“나 너 좋아해.”

고백을 들은 이지훈의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내심은 달랐다.

‘뭔소리야, 좆됐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걸 눈치챘는지, 최승철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너 만나고 처음부터.”

그러나 그 웃음은 절대로 장난치기 위해 비식거리는 것이 아님을 지훈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이 보낸 시간들 덕분에. 승철이 자신을 사랑하며 보냈다는 그 시간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에.

여름의 해변가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자신들도 한 떼로 몰려와 비치 파라솔을 세 개 연달아 차지하고 그 인구에 수를 보탰다. 파라솔에 딸린 의자 서너 개와 알록달록한 피크닉 매트에는 그들이 내벗은 신발과 옷가지가 무질서하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지훈은 무심코 눈으로 그 친구들을 쫓았다. 모래는 햇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나고 바다 역시 파도가 하얬다. 한 명을 내동댕이치기 위해 다들 왁자하게 쫓으며 달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승철도 저기에서 같이 달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제일 먼저 달려가서 누구 한 사람 물에 빠뜨리고, 구르고, 넘어지고, 물 먹고 어푸푸하고 고개를 흔들고. 덩치도 큰 게 발발거리면서 작은 강아지처럼.

지훈은 중간까지 끼었다가 바다에 들어가기 전 은근슬쩍 빠졌다. 바다를 보러 오는 건 좋지만 빠지는 건 싫다.

승철은 자기 뒤로 두 명쯤 더 신나게 빠뜨리고는 옷을 비틀어 짜며 비틀거리고 모래 사장을 반대로 가로질러 파라솔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를 털며 뭐라고 찡긋거리고 투덜거리는 얼굴 표정이 선명했다.

‘저 형은 어떻게 저렇게 생겼냐.’

이목구비가 다 커.

매번 봐도 매번 신기한 얼굴 표정들.

그런데 입을 크게 벌리고 깔깔거리던 웃음이 해안의 모래 그림처럼 차츰차츰 희미해져가고… 문득 승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친구들과, 지훈의 가운데쯤에서.

승철은 묵직한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손차양을 하고 예의 그 표정으로 찡그리고 있다.

그의 발 아래에 동그랗고 작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지훈이 아이스박스에서 음료수를 꺼내느라 잠시 몸을 돌린 사이, 승철이 모래에 발을 푹푹 빠뜨리며 파라솔로 뛰어들어왔다.

“아 모래 좀 튀기지 말고 와.”

승철이 반사적으로 입을 내밀었다.

“안 튀었잖아!”

그렇게 먼저 성질을 내놓고는 뒤늦게 피크닉 매트에 진짜 모래가 많이 튀었는지 흘끔거렸다. 그렇게 확인해보더니 자기 보기엔 괜찮았는지 별로 안 튀었다고 궁시렁거림이 뒤따라왔다.

승철의 이런 성격을 십년쯤 보다보면 이렇게 궁시렁거려도 별로 신경 안 쓰인다.

옆에 자리도 많은데 굳이 가까운 의자를 또 질질 끌고 와서 지훈이 앉은 의자 옆에 딱 붙이는 것도 승철의 성격이었다.

“그냥 앉아도 될 텐데 굳이!”

“지금 우리 둘만 있는데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사이 나빠 보여.”

“누가 보는데? 그렇게 보든 말든 우리끼리만 사이 좋으면 되잖아?”

지훈이야 말은 이렇게 해도 굳이 떼자고 할 만큼 싫지도 않았다. 형이랍시고 허세 부리다가도 저렇게 막내딸랑구처럼 구는 게 하루이틀인가. 이해는 못 해도 내버려 둘 정도는 되었다.

옆에 앉은 승철이 몸을 지훈 쪽으로 기울였다.

“근데 넌 혼자서 뭐하고 있었어.”

체온과 바닷물의 서늘한 짭짤함이 섞여서 훅 풍겼다. 바닷물이 뚜벅뚜벅 걸어나온 듯한… 아니 빠졌다 왔으니 맞는 말이긴 하다.

지훈은 나른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대꾸했다.

“바다를 즐기고 있잖아.”

“다 같이 왔는데에~ 왜 혼자 분위기 잡냐고 진짜아~”

“분위기 잡는 거 아닌데? 분위기가 나한테 온 거지.”

그 말에 승철이 할 말은 많은데 하진 않겠다는 표정으로 슥 째려보았다.

지훈은 더 뻔뻔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이런 말 꺼내놓고 부끄러워서 발 동동하면 지는 거지. 분위기가 나 좋다고 왔는데 뭐. 어쩌라고.

표정으로 한 5초쯤 욕한 승철이었지만 바로 베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여긴 진짜 시원하고 좋다.”

“그러니깐. 물 마실래?”

“물 말고 없어?”

“있는데, 낮술하지 말고 이따 마셔.”

“시룬뎅.”

싫다는 말 따위는 듣지 않는다.

지훈은 아이스박스에서 생수를 꺼냈다. 얼음이 살짝 녹아 물이 고여 생수병 아래로 물이 뚝뚝 듣었다.

“탈수 오기 전에 마시고 놀아.”

“방금도 물 완전 짠뜩 먹었거든?”

“바닷물 먹으면 안 되는 상식 몰라?”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뭐.”

“명호가 그런 데 쓰라고 한 말이 아닐 텐데.”

그러면서 지훈은 생수병을 흔들다가 한 손으로 뚜껑을 따서 건네주었다.

“올~ 남자다운데~ 멋있는데~”

심지어 막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휘파람까지 분다.

“아니 이 형 왜 와서 사람을 박박 긁지?”

승철이 깔깔거리며 받아든 생수병을 기울였다.

“너가 먼저 그렇게 행동했잖아.”

“참 나. 퍽도 그렇겠다.”

이 형이 처음에 자기 만나서 눈이 동그래지더니 했던 말은 이거였다.

-얘 조그맣고 하얘가지고 똥그래서 찰떡 같애!

악의는 없는 것 같았지만, 귀여움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지훈을 긁는 말이었다.

지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으니까 귀엽다는 말 좀 들어도 잠깐 부끄러워 하고 말지.

지훈이 정색을 하고 짜증을 한 번 낸 이후로는 승철이가 다시는 그렇게 귀여워 예뻐 하는 소리를 입에 달지 않게 됐지만, 가끔씩 반대로 남자답다, 멋있다 이런 말을 뱉는다. 그것도 자기 눈치 보는 것 같아 별로 맘에 안 든다. 실제로 자신이 좀 멋있는 게 맞긴 하지만.

지훈은 일부러 이죽거렸다.

“나는 그렇다 치고 형은 근데 좀 그치? 그…? 알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 차는 시늉까지 하자 승철이 파닥파닥 낚여서 바로 눈을 뾰족하게 떴다.

“뭐! 뭔 말 하려고 이러는 건데.”

“그렇다구.”

“아 제대로 얘기 해줘~”

지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나래이션 톤으로 말했다.

“사람을 빡치게 하는 세 가지 방법.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

“…….”

“두번째 뭔데?”

“아 다시 해줘? 사람을 빡치게 하는 세 가지 방법.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번째는~ 두번째는~~~”

이제 알아챈 승철이 웃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빡 깨물었다가 놨다.

“이거 현실로 말하는 사람 첨 봤다.”

“그건 그래. 이렇게 빡치게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이 없거든.”

“야 죽는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떠서 노려보는 흉내를 내도 입이 활짝 웃고 있어서 조금도 위협이 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지훈과 승철은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햇빛은 질량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하고, 살짝 끈적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의 떠드는 소리와 승관의 하이톤 비명이 들리고.

“아, 바다 오니까 좋네.”

“바다 왔으면 한 번은 빠져줘야지, 너 그것도 안 하고 여기 앉았으면서 좋다고 그러냐?”

“형도 여기 왔잖아.”

승철이 반쯤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대꾸했다.

“나야……, 한 번 입수하고 왔지. 넌 그냥 여기로 와버렸잖아. 내가 너 괜히 끌고온 거 아니지?”

“아이… 아냐. 그냥 어제 밤 새고 와서 지금은 힘이 없다. 형 말도 지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으니까 잘못한 거 있음 지금 말해. 귀담아 안 들을 테니까.”

승철의 얼굴에 웃음이 팍 피었다.

하지만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훈이 하품을 한 번 하고 고개를 툭 썬베드 위에 떨어뜨리자, 그제야 승철이 손을 눈앞에 휘휘 휘두르며 말을 다시 걸었다.

“자?”

“어.”

“나 그럼 잘못한 거 지금 말해도 되냐?”

“한 번 해 봐. 듣고 판단할게.”

“와 이래놓고 내가 너 돈 빌리고 안 갚은 거 있다 하면 벌떡 일어날 거지?”

지훈은 나른해져서 목 아래에서 끌끌거리며 혀차듯이 웃다가 중얼거렸다.

“형이 나한테 돈 빌린 적이 언제 있어.”

“없나?”

“없지~ 인간 간지 최승철이 어떻게 동생한테 돈을 빌려.”

“이거 앞으로 돈 빌려달라고 하지 말란 소리지?”

지훈은 눈을 감은 채로 소리 없이 웃었다.

“뭐 그렇게 들리면 어쩔 수 없고.”

그늘에 누워 있어도 여름의 햇빛이 투과한 눈꺼풀은 밝은 붉은색이었다.

문득 승철이 그 앞에 손을 대보는지 시야가 약간 더 짙어졌다.

“아… 이거 시원하다.”

지훈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더듬더듬 승철의 팔뚝을 잡았다.

손에 꽉 차는 승철의 팔뚝은 아직 젖어 있긴 했지만 열이 올라 뜨거웠다.

“계속 이러고 있자, 좀~”

“아 뭐야, 너 잠자는데 이렇게 계속 그늘 만들고 있으라고. 나보고?”

“이런 날도 있지. 알잖아. 나 햇빛에 오래 있으면 타는 게 아니라 화상 입어. 아 왜 빼고 그래~ 나 사랑하잖아.”

순간 승철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서 그 팔뚝을 잡고 있는 지훈의 손을 튕겨낼 뻔 했다.

덩달아 놀란 지훈이 곁눈질했다.

승철은 불시에 등 뒤에서 칼을 찔린 사람 같았다.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배신감 같은 것. 그것은 빠르게 지나갔고 승철의 표정은 수없는 더께의 인내심으로 덧칠된 무표정이 돌아왔다.

“? 왜?”

지훈은 승철의 팔을 쥔 채로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뭔데, 무슨 일 때문에.”

지훈은 혹시나 하면서 상체를 돌려 친구들이 있는 바다 쪽을 살폈다. 거기도 별 다른 일은 없어보였다. 멀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찬이와 민규를 바닷물에 빠뜨린 것 같다. 지금 자빠지는 건 조슈아 형이고.

승철이 팔을 빼려고 몸을 비틀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내빼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든 지훈은 인상을 쓰며 팔을 꽉 움켜쥐었다.

힘이 쓸데없이 좋은 형놈인데 너무 놀라서 몸이 흐늘거리는지 제대로 뿌리치지도 못했다.

실랑이를 더 할 힘도 없는지 푹 늘어진 승철은 홱 고개를 돌려서 다른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야 너 진짜…….”

“왜.”

이 반응은 네가 잘못했다는 반응인데…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머릿속에서 자신이 방금 한 말과 행동이 재빠르게 반복된다. 그렇지만, 지훈이 생각하기에, 어떤 말이 이토록 날카로운 단도가 되어 승철을 찔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에휴, 내가 멍청이지 뭐.”

“형이 멍청이인 건 이미 알아.”

지훈은 계속 팔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라고 했지만, 당연히 승철은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

뭐, 그래서 지훈은 그냥 기다렸다.

‘아… 까탈스럽긴. 손 많이 가.’

적어도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화가 나면 오히려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을 테니까.

그럼 자긴 또 모르는 이유, 짐작하기도 어려운 이유로 굳이 부끄럼 타고 있는 거겠지.

그런 면에서 손이 많이 간다.

지훈 자신도 섬세한 편이고 생각도 많았지만, 승철은 더했다. 공회전도 많이 하고 관종인데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외로움도 엄청 타는데 심지어 쌍도남 형아의 자아와 막내딸랑구의 자아가 대립도 했다.

‘진짜 이 형하고 어떻게 친해졌지.’

나 보자마자 찰떡 소리 해서 마음 속으로 한 세 번 쥐어팼나?

아주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오래 같이 보다 보니 그래도 귀여운 점도 많고….

힘들다고 엉엉 울었을 때도 있었고. 이해는 하는데 왜 그렇게 버티는지 답답했던 때도.

승철이 멋있었던 기억도 아련하게 스쳐지나가긴 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신경쓰나 싶을 정도로 세심하고, 그 세심함에 반대로 배짱 잘 부려서.

아니 그러고보니 이 형 동생들 되게 귀찮게 굴게 하는 타입이야. 괜히 와서 아는 척 하고 막 딴 거 시켜.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승철도 겨우 진정이 됐는지 빨간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좀 놔봐.”

“놓으면 나 궁금하게만 해놓고 도망갈 거잖아.”

승철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당연하지. 너 아까 사람 빡치게 하는 거 두번째가 뭐라고 했냐?”

“와~~~~ 너무하네.”

“알았어, 내가 잘못한 거라니까, 아, 좀 놔봐.”

지훈은 어깨만 으쓱했다.

“지금이면 들어줄게. 말해. 나중에 끙끙대지 말고. 지금 기회 놓치면 분명히 후회한다.”

승철이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거 놓으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이거 놓으면 말할게.”

“오케이 좋아. 도망가기 없기, 얼버무리기 없기.”

거기까지 확답을 받고서야 지훈은 꽉 쥐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둘 다 피부가 하얘서 손자국이 나자 엄청 도드라져 보였다. 승철이 그 손자국 때문에 내심 입을 삐죽거리는 게 빤히 보였다.

‘이 형은 진짜 너무 빤해가지고… 뭐 숨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자만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지훈은 기다렸다. 한 입으로 두 말 하진 않을 테지만, 승철이면 분위기 다 잡아놓고 튀어버릴 가능성도 매우 높다. 혹시라도 튄다면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었다.

‘음, 잘 뛸 수 있을까. 어제 너무 늦게 잤는데.’

은근히 몸을 풀고 있는데 놀랍게도 승철이 운을 뗐다.

“아까 너가 그랬잖아. 잘못한 거 지금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다고.”

“…그랬…? 어, 그래, 그랬어.”

거기서부터 삐졌구나, 최또삐.

“알았어, 알았어. 성심성의껏 들어줄게.”

“아냐, 그냥 흘려들어.”

“뭐야 또.”

승철이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지 얼굴을 손으로 마구 문댔다.

‘저러다 닳지.’

그러나 손을 뗐을 때에는 좀 붉긴 해도 승철은 단단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승철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방어하듯 감싸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씁쓸한 미소.

“너 만나고 처음부터.”

"......"

“…그래서 뭐, 네가 알고 말하는 줄 알고 혼자 찔렸다고. 알았지, 흘려들어.”

승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잡을 수가 없었다.

장난이었다면,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면, 잡았을 텐데.

놀리지 말라고 삿대질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혹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농담으로 웃어 넘길 수 있었을 텐데.

그 중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 뭐야. 너 어차피 나 그렇게 안 좋아하잖아.”

반사적으로 지훈이 반박하려 했지만 승철이 자기 입술을 검지로 톡톡 건드려 말하지 말라는 제스쳐로 입을 막았다.

“말이 좀 이상했나? 진짜 나를 뭐 안 좋아한다 그런 게 아니라…… 너가 나 좋아하는 거 알지. 알고 있어. 그냥 다른 거야. 됐냐? 그냥 한 번 부담줘볼려고 말한 거야. 그러니까 이거 괜히 신경쓰고 그러지 마.”

“이걸… 어떻게 신경 안 써요.”

그러자 승철의 축 처져있던 눈꼬리가 동그래지고, 자동적으로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이거 신경 쓰인다고 나랑 안 놀아주는 게 더 싫거든? 너 진짜 이거 때문에 생각한답시고 피하기만 해 봐.”

뜨거운 햇빛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다시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마르기 시작하는 바닷물이 승철의 뺨과 귀밑머리를 타고 말갛게 흘렀다. 지훈은 약간 멍한 상태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승철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생각하지 마.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어, 지훈아.”

해변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야, 승처라~~~ 윤정한 잡아야 돼, 빨리 와!”

“지훈이 끌고 와!”

맑은 웃음소리들이 합창하듯이 울려퍼진다. 승철은 어슴푸레하게 웃다가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는 아무도 모르겠지.’

승철의 속눈썹이, 눈동자가, 젖어 있는 것을.

승철은 태연하게 그쪽을 향해 손나팔을 하고 소리질렀다.

“지훈이 잔대!”

지훈은 이 순간도 빌어먹을 추억 사진첩에 들어가리라는 걸 확신했다.

저 멀리서는 청량한 파도와 햇빛을 맞으며 강아지 떼처럼 돌아다니는 친구들이 있고, 가까이에는 승철이가 좋아한다고 한 말이 아직 공기에 떠돌아다니는 이 순간. 그의 눈에 가득한 눈물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순간.

“저 봐, 정한이 형 잡아!”

“오래 도망 못 가~”

“입수 시켜!”

제각각 떠드느라 난리가 났다. 흠뻑 젖은 민규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손짓했다.

“빨리 와, 최승철!”

승철의 옆얼굴이 사르르 무너졌다가 새침해졌다.

“성 붙여서 말하지 말라고~”

그리고는 성급하게 지훈이 쪽으로 몸을 틀어 손등을 툭툭 쳤다.

“야, 나 간다. 알겠지? 우리 사이 변함 없는 거야. 우리 감정이 안 변했잖아. 난 그냥 너 좋아하고, 너도 나 좋아하고. 알지?”

승철은 미련없이 - 방금 전에 고백한 사람답지 않게, 그러니까 평소처럼, 몸을 돌려 팔을 벌리고 뛰어갔다.

강아지 같다.

항상 지훈은 승철을 그런 식으로만 생각했다.

“이제 너네 다 죽었다!!”

승철은 지훈을 대체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던 걸까.

언제부터가 ‘평소처럼’이었을까.

혼자 남겨진 지훈은,

그래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남자든 여자든 중고등학생은 다 이제 20%의 사회성과 80%의 동물성을 지닌 존재들이고, 가끔 승철은 통합 동아리라고 모인 자리에서 선배들과 친구들이 우글우글 모여 나는 수컷 냄새를 맡으면 좀 진절머리가 났다.

“아 귀여운 후배 안 들어오나?”

그 말에 선배 하나가 승철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이거 봐라, 이제 니 좀 나이 먹었다고 후배 욕심 내나? 이 하늘 같은 선배님보다 먼저 연애하면 죽는다~”

“뭔 말을 못해, 진짜.”

“당연히 말은 생각을 하고 해야지.”

“내가 진짜 형보다 연애 빨리 할 거다. 자신 있거든요~”

“최승철~ 올~”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쫌!”

그렇게 동아리실에서 대여섯 명의 선배와 동갑들과 평화롭게 시간을 죽이면서 놀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먼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지훈입니다.”

뒤돌아 본 순간 승철은 웃음이 터졌다. 왜 그렇게 웃음이 터졌는지는 그 후 십 년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좋았다.

아직 말 한 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그 애는 승철을 긴장감 넘치는 눈으로 흘끗 보았을 뿐인데.

“어, 지훈이라고? 반갑다.”

선배 하나가 근엄하게 대표로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승철에게는 그게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 애 하나만 포커스 되고 나머지는 모두 초점 밖으로 밀려나갔다.

승철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선배를 억지로 자기 앞에 밀어놓고 빠르게 내뱉었다.

“형! 형! 얘 좀 봐! 조그맣구 하얘가지고 똥그래서 찰떡 같애!”

어지간해서는 낯가림 때문에 먼저 입 대지 않던 승철이 이렇게 흥분해서 두세 번 찰떡찰떡 하고 소리치니까 동아리실에 홍소가 터졌다.

“미친 새끼… 지훈이 얘 남자야!”

덕분에 지훈의 얼굴에 숨기지 않는 짜증이 비쳤지만, 승철은 그걸 눈치채고도 지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승철은 매일매일 지훈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래도 승철이 워낙 후배를 좋아하고 잘 챙겨서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승철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이 찰떡 같은 소년에게 뭘 어떻게 해버리고 싶고, 옆이 여자친구가 아닌 남자친구라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길로 가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애까지 하기엔 이미 충분히 즐거웠다. 언제나 하루가 꽉 차 있다.

물론 선배들은 여친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기 시작했고 때때로 음담패설도 돌았다. 승철은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땡기지는 않았다.

“난 진짜 한눈에 반하는 사람이랑 사귈 건데요.”

“그래가고 언제 연애해보냐? 언젠 내보다 먼저 연애한다캐놓고.”

“저게 아직 급한 걸 몰라서…”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승철이 얼굴이 확 밝아져서 벌떡 일어나자 선배들이 한 소리씩 보탰다.

“됐다 야. 저거 연애 하겠다고 싸돌아다니려면 아직 멀었다.”

“남자 새끼 둘이 즈그들끼리만 붙어다니고.”

선배들의 말에 지훈이 간결하게 한 마디 했다.

“전 빼주시죠.”

“와, 배신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훈이 승철을 뿌리친 적은 없었다. 선배에게건 선생에게건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딱 잘라 말하는 애가, 승철에게는 거절을 한 적이 없다.

“싫지 않다고 했잖아. 그럼 좋다는 뜻이지.”

승철에게는 지훈의 그런 무던함이 신기했고, 좋았다. 얘한테라면 헷갈릴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해도 결국 웃어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 무던함이 화가 났다.

지훈이 승철을 좌지우지하고, 가장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훈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 말고도 너무 많은 것이 있었다.

물론 승철에게도 지훈 외에 소중한 것들은 아주 많았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없을 리가 없다.

형도 좋고, 친구도 좋고, 새로 들어온 후배도 좋고, 막내도 좋고,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좋다고 해주는 사람도 좋고, 자주 마주치는 편의점 사장님도 좋고. 엄마가 사준 점퍼도 좋고 할머니가 손에 꼭 쥐어주는 사탕도 좋고.

아마 지훈도 그런 식일 것이다. 승철보다는 좀 좁은 테두리지만 자신의 테두리 안이면 아낌없이 사랑했다. 승철도 그 테두리 안에 있었다. 그걸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크기가 아니다.

승철은 민감하게 그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훈에게 벅찰 만큼 큰 애정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애정의 크기는 자신보다 작다는 것을 불행할 정도로 확실히 안다.

그러한 불균형이 때때로 승철의 목을 조이고 말았다.

지훈이 다른 사람에게 쏟는 애정을 눈치챌 때마다 곯아 들어가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좋아하지? 왜 나는 널 이렇게 좋아하는데 넌 나만큼 안 좋아해. 저 사람을 좋아하는 애정을 빼앗아와 자신에게 덧붙인다면, 자신이 지훈에게 가지는 애정과 크기가 비슷해질까?

그걸 일일히 재고 따져보며 목말라 발을 동동하는 것이 징그럽고 한심했다.

‘난 왜 알아보는 거야.’

너는 네 마음도 모르는데. 정작 너는 모르는데.

아무리 바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의 마음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 만큼이나.

찔찔 눈물 흘리며 이 새끼 내가 안 예뻐할 거다, 딱 니가 나 좋아하는 만큼만 나도 너한테 돌려줄 거다…… 그렇게 잠들었다가도 아침에 도착한 지훈의 문자에 들뜨는 만큼.

‘어제 결심은 어쨌냐고, 최승철.’

그치만 어떡해.

최승철은 이지훈이 좋아서.

그래도 내가 지훈이한테 조금이라도 더 잘하면 혹시나.

그리고 어쩌면 내가 조금이라도 못하면 지훈이는 시원하게 뒤돌아갈 것 같아서.

가끔 승철은 질투를 삼키기 위해 “넌 그것밖에 안되냐?” 같은 소릴 괜히 허세 섞어 내보였다. 그러고서 일주일 넘게 내내 속앓이를 하고 자책하다 정말로 몸이 아파져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마음이 좆같으면 정말로 몸에도 영향이 오는구나.’

존나 큰 깨달음이었다.

“형은 뭐하고 살길래 감기를 그렇게 자주 걸려.”

지훈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감기라고 믿어주었다. 다정하다. 자신이 내뱉은 모진 말 같은 건 이 애의 마음에 한 점의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걸 느끼면서.

그게 슬프고, 그러나 또 부럽고, 한편으로는 얄밉고, 안심이 됐다.

한 번씩 그렇게 앓으며 승철은 손가락을 자르듯 하나씩 기대를 버린다. 포기를 할 수 없으니 기대를 하지 않는 수밖에. 너의 가장 친한 친구, 음, 네가 가장 기대는 사람, 어휴, 사소하게 뭐만 해도 생각나는 사람, 그래. 내겐 그런 의미여도 네겐 그런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걸.

꽁꽁 묵혀놓은 감정은 그저 썩기만 한다는 걸.

승철은 찬이의 목을 붙들고 볼에 뽀뽀를 촵촵촵 퍼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이씨 징그러워!”

찬이 볼을 소매로 빡빡 문지르며 부리나케 도망갔다.

내심 뾰로통해진 승철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니 뽀뽀 좀 할 수도 있지, 그렇게 도망까지 가냐?”

“도망가지 당연히!”

“니들이 다 좋은데 맘에만 꽁꽁 묵혀놓고 살면 병 걸려.”

“어우, 세살밖에 안 많은데 아저씨 같은 발언.”

“진짜야.”

“뭔 소리야, 형도 뽀뽀하는 거 싫어하잖아~~”

“아니거든? 완전 좋아하거든?”

지훈이 눈을 째고 승철의 옆구리를 퍽 쳤다.

“이 형 자기가 당하는 건 싫은데 하는 건 좋아해.”

“고롬고롬.”

승철은 자연스럽게 지훈을 껴안았다. 뒤늦게 지훈이 그 뒤를 예감하고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려 애쓰지만 승철은 놓지 않았다.

“일루와! 지훈이도 일루와!”

그런 식으로 시간은 함께 흘렀다. 승철 내면의 격렬한 롤러코스터는 때때로 밖으로 신경질적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자연스러운 사이클이 되었다.

단 한 가지 항상 똑같은 건, 지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점.

지훈을 빼고 자신을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

***

해변가에서 좀 떨어진 펜션은 열세 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였다.

밥 파와 술 파가 갈려서 앉긴 했지만 두 파티 모두 어쨌든 고기가 우선이라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세팅을 하고, 그 와중에 승철이 자기가 술을 궤짝째로 사왔다고 히히 웃으며 들고 들어왔다.

“와, 그걸 또 다 마시게?”

“뭔소리야~ 이걸론 부족하지. 차 트렁크에 더 있어. 이거 다 마시기 전에 냉장고에 너놔야지.”

“진짜 작정하고 왔구만.”

“어 너 죽일 작정~”

물컵과 소주컵을 번갈아 놓던 순영이 깔깔거리다 승철의 자리 앞에만 큰 플라스틱 컵을 놨다.

“오늘 형만 이걸로 마셔.”

“순영이 너는 쏘주에 대한 예우가 없다.”

“부족하면 병나발 불어!”

햇반을 차례로 전자렌지로 데우면서 지훈은 좀 어이가 없어졌다.

‘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냐.’

진짜 고백하고 간 거 맞음? 내가 놀림당한 거 아님?

바로 몇 시간 전에는 승철의 마음을 의심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승철이 그런 고백이 마치 없었다는 양 평소와 똑같자 지훈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봤다고 한 것도 착각이고, 그 순간 감정이 쏟아져내려 꽉 채운 듯 애틋했다고, 절대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그렇게 느낀 게 모든 게 착각이었나.

지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정한이를 슬쩍 째려보았다. 지훈이 생각하기에 이런 농담을 기획하는 건 확실히 저 둘이었다.

윤정한과 최승철.

둘은 그렇게 붙여놓으니까 더 그럴 듯하게 사기치고 히히 도망가는 인간들이라서 지훈의 마음은 아주 심란해졌다.

하지만 지훈의 마음이 어쨌든, 정한은 젓가락도 아니고 집게를 들고 고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각각 다 얘기하느라 오디오 물리는 와중에도 그 둘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넌 지금 안주만 먼저 그렇게 축낼 생각이야?”

“승철아. 오늘 같은 날은 그렇게 술 찾다가 고기 못 먹는다.”

“아 그건 안 되지.”

그래서 정색한 승철도 착 자리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정한이 고기 접시를 든 사람을 찾다가 지훈과 눈이 살짝 마주쳤다. 정한은 기대감으로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고기에 미친 사람들 같은 자태였다.

“막내야, 빨리 빨리이~ 형들 배고파~”

“그렇게 급하면 어제부터 구우시던가요.”

찬이 궁시렁거리면서도 익은 고기를 휙휙 쌓아서 넘겼다.

지훈은 두 번째로 심란해졌다. 정한과 승철이 짜고 뭐 장난을 쳤으면 딱 지금 놀리기 좋은 타이밍인데 안 했다? 이러면 진짜 고백은 장난이 아니라 진짜긴 했나?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왜 나만 심란해. 내가 왜 눈치 보고 그래야 되냐?’

답답해지는 가슴을 내리기 위해 왁팍팍 고기와 밥을 퍼먹었지만, 햇반 두 개째를 먹어도 내려가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지훈이 가슴을 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옆의 석민에게 짧게 말했다.

“나도 한 잔 할래. 저기 잔 하나만.”

말하고 나서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있던 석민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지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놈한테 말하다니 미쳤지 내가.’

그런 후회가 뒤늦게 스치고 말리기도 전에 석민이 단전에서부터 우렁찬 소리를 뿜어냈다.

“여러부운! 이지훈이 오늘 술을 마시겠답니다아아아앗!”

넓은 장소가 쩌렁쩌렁 울리는 쓸데없는 저 성량.

그 순간 13명의 남자들이 끊임없이 (처)먹어야 해서 엄청 큰 불판에 고기 굽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각자 방송들이 시끄럽고 난리가 나서 정신없던 공간이 딱 조용해졌다.

고기만 여전히 기름으로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나서 더 뻘쭘할 정도로.

‘좆됐네.’

오늘은 좆되는 하루였다.

지훈은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얼굴을 유지하며 앉아 있었지만, 열한 명은 석민처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조용했던 장소가 순식간에 다시 장마비 내리는 것처럼 소리로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미쳤네!”

“나 오늘 여기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어.”

“진짜로.”

“지훈이 형 오늘 술 마신다고?”

“와, 드문 일인데.”

순영이 개빠르게 술잔을 대령했다.

“빠빠빠빨리, 빨리! 얘 맘 바뀌기 전에 누가 술 가져와!”

하필이면 딱 그 때 술병을 들고 있던 승철이 테이블을 빙 돌아 웃음과 함께 다가왔다.

이미 술잔을 든 지훈은 딴 사람 보고 따라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내밀었다.

쪼르륵.

잔을 반 정도 채운 승철이 짐짓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짜 마시게? 내가 흑기사 해줘?”

“…주기나 해.”

두 자리쯤 옆의 정한이 방정맞게 웃었다.

“지훈이가 주기나 하래! 최승철 가오 없어!”

승철이 돌아보며 입모양으로 ‘죽을래?’하고 삐죽거렸다.

거기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석민이 진지하고 다정하게 승철에게 한 마디 더 보탰다.

“괜히 지훈이 거 탐내지 말고 형은 그냥 마시고 싶으면 병나발 불어도 돼.”

“니네는 진짜 날 뭘로 보는 거냐?”

승철이 도겸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쥐흔들다 머쓱해하며 가버렸다.

‘하, 저 놈 때문에 술 마시는데 저 놈이 술을 주고 가다니.’

어이가 없어져서 소주잔에 담긴 투명한 소주를 내려다보는데 알콜향이 확 끼쳤다. 방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한 번 의식하니까 이게 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양이의 플레멘 반응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그래도 동갑이라고 순영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마시려구? 오늘 좀 괜찮아?”

“지가 좋다고 술잔 제일 먼저 가져와놓고 무슨 소리야.”

지훈이 받아치자 순영이 케케케 웃었다.

“알쥐~ 걍 해본 말이었어~”

“야, 순영아! 빨리 너도 잔 들어! 우리 지훈이가 먼저 술을 청한 기념비적인 날이잖아. 건배 한 번 더 하자!”

“뭘 또 건배까지 해.”

지훈의 말은 씹혔다.

다들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고, 종종 맥주가 가득한 컵을 든 사람도 있었다. 승철도 역시 컵을 들었다. 하지만 이 새끼는 소주였다.

“건배사는 역시 지훈이가 해야겠다! 지훈아!”

“아니 뭘 또 건배사까지 해.”

고기 굽는 것도 뒤로 하고 달려나온 찬이 빵끗 웃으면서 석민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우렁찬 성량으로 되풀이했다.

“아니 뭘 또 건배사까지 해!”

“오케~! 시작해! 하나, 둘 셋!”

11명이 웃음 잔뜩 섞인 목소리로 일제히 합창했다.

“아니 뭘 또 건배사까지 해!!!”

“이 미친 새끼들아.”

그러면서도 지훈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쭉 뻗어 제각기 부딪치고 돌아온 잔을 다시 입 가까이 대면서, 그래서 문득, 지훈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승철도 이걸 잃기가 무서운 거구나. 싫은 거구나.

제각각 자신의 페이스대로 술을 마셔도 아무도 별 말 안하니까, 홀짝 한 번 하고 내려놓는 사람도 컵을 한 번에 싹 비운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도 눈치도 주지 않았다. 이런 대인원 속에서 이런 식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렇게 편안한 공기를 잃느니 죽고 만다.

만약 진짜 너 나 사귀자 식으로 고백했다가 죄송합니다 소리 듣고 까이면? 지금 지훈이 좆된 상황보다 한 80000배는 더 좆되는 상황이다.

즐겁게 낄 수도 없고 빠질 수도 없고.

이놈들이면 분명히 몰래 회의를 열어서 <누가 왜 빠지려고 하는지 이유를 찾자, 그리고 그 이유를 박살내자> 이런 안건이나 낼 게 틀림없다. 그리고 장렬하게 11명 앞에서 다 까발려져야……

‘어우! 진짜 싫어!’

이러니 사랑이니 뭐니 하는 소릴 했다가도 꼬리를 빼고 도망가지.

‘아니 근데 그럴 거면 애초에 고백을 하질 말던가.’

지훈은 술잔을 살짝 기울였다. 알콜이 혀에 닿자마자 목구멍에서 울컥 하고 알콜 반대 위원회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우씨…”

이걸 진짜 무슨 맛으로 마셔.

술 파들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지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진~ 짜 맛없고 진짜 쓰레기 같고 이걸 왜 좋다고 마시는지 하낫또 이해가 안 간다.”

“오, 지훈이 한 입 먹고 취객처럼 말하기 오~”

“최고 효율!”

얼굴을 꾸깃꾸깃하고 있자 승철이 참견했다.

“야 오히려 한 입에 목구멍에 털어넣어야 안 쓰다고.”

“…그게 문제겠냐?”

“힝.”

그래도 술 잘 먹는 사람들의 말에는 뭔가 있겠지 싶어서 지훈은 진짜로 목구멍에 술을 털어보다가 사레가 걸려서 한참 기침했다.

알콜로 쫙 긁었는데 거기에 더해 밥까지 긁고 가니까 목구멍이 아팠다.

석민이 다급하게 등을 두드리며 휴지를 입에 대주었다.

“에휴, 저런 술고래들 말 듣는 거 아냐.”

“그러니까. 예시가 잘못됐어.”

밥 파들이 하나둘씩 끼어들어 술 파를 혀로 난도질해버리는 사이에 지훈은 간신히 기침을 멈췄다.

몸에 열이 올라 손부채질을 해도 머리부터 목 끝까지 한 번 빨갛게 되자 다시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게다가 목구멍도 따끔따끔하다.

“내가 저 술에 미친 인간들 말을 또 믿으면, 사람이 아니다. 성을 갈고 만다.”

술 파들이 미안하긴 한 지 에헿헿헿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안 될 줄은……”

“그러게나……”

“왜 안 되는 거지……”

“쉿. 거기 술에 미친 인간들은 입, 다물어주세용.”

석민은 지훈이 머리 끝까지 빨개진 걸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지러우면 먼저 들어갈래?”

“거기까진 아냐. 지금 사레 때문에… 괜찮은 거 같아.”

빤히 보던 승철이 베시시 웃으며 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승관아, 쟤 물 좀 더 가져다 줘. 물 많이 마셔야 돼.”

“그거… 그것도 막 목구멍 열고 술 넣으라는 술고래 생정은 아니지?”

“아니야아! 이제 너네는 술 먹을 때 물 많이 마시라는 말도 무시하냐?”

승관이 낄낄거리면서 아예 물통을 다 들고 왔다.

“에구 지훈이 형 이거 먹고 정신 차령~”

“어, 고마워.”

그리고 지훈은 다시는 술잔을 들지 않았다. 술게임을 시작해도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딱 한 번 걸렸을 때는, 승철이 냉큼 손들고 흑기사 노릇을 했다.

순영이 승철을 쿡쿡 찔렀다.

“와, 형! 형은 술게임 말고 그냥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해.”

“아니지! 내가 우리 지훈이 아껴서 그런 거거든?”

“애껴서 그런 거거든~ 예 변명 잘 들었고요. 흑기사 했으니까 한 잔 더 해.”

“그건 또 무슨 논리야?!”

“앞으로 지훈이 형 걸렸을 때 흑기사 승철이 형이 하면 두 잔으로 마셔.”

“왜에~”

그렇게 입 댓발 나왔으면서 계속 먹으라고 하면 궁시렁거리면서도 먹는 게 승철이었다.

“야! 승철이 죽이고 싶으면 지훈이 공격해!”

“좋다! 완전 딱이다! 나 승철이형 죽여보고 싶었어!”

“니네는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냐…”

“맞아~ 죽인다고 하면 안 돼~ 술 취한 거 보고 싶다고 해야지.”

“아 오케오케. 나 승철이 술로 죽여보고 싶어.”

그렇다. 술을 싫어하는 몇 명이 있는 만큼, 반대로 궤짝째 먹는 몇 명이 있고, 그 중에서도 승철은 간도 타고 났고 자기도 술을 좋아했다.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한 모습도 못 봤다. 지훈이야 당연히 그렇고 술고래 인간들도.

술고래 인간들의 쫀심이 걸려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지훈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하하 웃었는데, 다음 판부터 진짜 극딜이 들어왔다.

“진짜 미쳤나 이것들이.”

지훈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진짜로 그럴 심산이었다.

하지만 고백 때문에 심란하고 알콜이 폭발하는 뇌도 심란하고 자기가 잘못하면 승철이 먹는다고 생각하니까 부담되고 뭐 하나 되는 게 없었다.

연거푸 여섯 잔을 마시고 나서 승철이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손가락질했다.

“너네도 다 죽는 거야 오늘.”

“아 형. 미안해. 그만 마셔.”

“됐어! 지훈이 넌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이 새끼들을 오늘 다 조지고 간다.”

그리고 조져지는 것은 지훈이였다.

“아 쫌 그만 하라곳! 나 그만 지고 싶다곳!”

그렇게 왁자하게 먹고 마시고 골아떨어졌던 지훈은 중간에 배가 고파서 다시 깼다.

‘게임하느라 밥을 덜 먹었구나.’

멍한 채로 휴대폰 찾고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였다.

구남친 시간이고 뭐고 효율 나쁜 몸이라 햇반 두 개로는 택도 없어서 배가 텅 비어있었다.

거기에 그냥 배고픈 것뿐만이 아니었다.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머리도 깨질 것 같고, 목은 껄끄럽고, 혀는 서걱서걱하고, 배고픈데 배가 메슥거린다.

‘진짜 술 왜 먹냐.’

알콜은 백해무익이다.

그런 결론과 함께 지훈은 비척비척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고기 먹을 때 테이블 세 개를 붙여 앉았었는데, 이제는 한 군데로 모여서 - 물론 나머지 두 테이블을 치우지도 않았다 - 세 사람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웃고 있었다.

승철, 순영, 민규였다.

순영이 의외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새끼가 지훈보다 먼저 뻗었다. 일찍 자버렸으니 한숨 자고 다시 처마시러 온 게 틀림없었다.

지훈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몸을 벅벅 긁으며 테이블을 눈으로 훑었다.

이미 차가워진 고기, 김치, 건더기 없는 찌개, 반쯤 먹어치운 과자 등이 널려 있었다.

“쩝…”

이미 지훈을 알아챈 승철이 발긋하게 취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지후니당~~~ 지훈아, 배고프면 햇반 저기 아직 남았어~~”

“……뭐 반찬도 없는데 밥만 있대.”

“어, 그러네. 같이 먹을 게 없네.”

순식간에 쪼그라든 승철 옆에서 순영이 입에 집어넣던 과자를 해맑게 들어올렸다.

“이걸로 초밥 해먹엉!”

“너나 먹어.”

지훈은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으므로 어이만 없었는데, 나머지 둘은 갑자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우하, 초밥, 하하하하하!”

“미친 거 아냨ㅋㅋㅋㅋㅋ”

정말 하나도 안 웃겼다.

또라이 새끼들.

술은 백해무익이다222222.

짜식은 사이 그래도 민규가 술에 취한 채로 움직이느라 잔 두 개를 엎고 소금장에 숟가락을 빠뜨리고 승철이 앉은 의자에 걸려 둘이 같이 바닥에 구르면서도 간단하게 비빔밥을 만들어줬다.

“잘먹을게.”

술에 안 취했어도 저 중의 반은 어차피 했을 일이라 다들 비빔밥만 걱정하지 무덤덤했다. 같이 바닥을 나뒹군 승철만 웃음을 못 멈추고 헤프게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민규가 무안한지 벌떡 일어나서 드러누운 승철에게 삿대질했다.

“뭐하고 있어. 드러워, 빨리 일어나.”

“누가 나 손 좀 잡아줘야 일어나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왜. 플라스틱.”

그런 다음에 또 셋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빵 터졌다.

이번에도 지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음……. 너네 미쳤어?”

몸부림치며 웃어서 바닥을 옷으로 깨끗이 닦아놓은 승철이 간신히 순영의 손을 잡고 일어나다가 그 말에 또 풀썩 주저앉아서 웃었다.

지훈은 기가 막혀서 그냥 인상을 썼다.

“내가 잘못 질문했네. 미쳤냐고 물어볼 게 아니었네. 그냥 미친 건데.”

“아, 새벽반이 원래 이렇다고.”

“뭔 소리야. 나도 새벽에 항상 깨있어.”

민규가 입꼬리를 한껏 비스듬히 올려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노우, 노우, 노우. 술 마시는 새벽반은 처음이지?”

그 말엔 뭐 대꾸할 게 없어서 비빔밥만 두 번 퍼먹던 지훈이 문득 생각난 기억에 고개를 들었다.

“있었어. 전에.”

그리고 지훈은 별 생각없이 승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지? 하고 묻듯이.

승철이 웃느라 지쳐서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져 있다가 그 시선을 받고는, 마주 웃어주다가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슥 시선을 피했다.

그 노골적인 외면은 뒤늦게 지훈의 뇌리에 오늘 새로 추가된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헐….’

맞다. 이러고 있지만 승철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자신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전에 있었던 술 마시는 새벽반’의 기억도, 승철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니. 그러고보니까 그 날 나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한 침대에서 잔 거잖아?’

숟가락이 입 앞에서 멈췄다.

날 좋아하는데 티도 안냈다 하는 말로 소름이 끼치니 징그럽니 하는 마음이 들었냐고? 그건 아니었다.

혹은 반대로 새삼스럽게 심쿵 설렘 핑크빛? 이런 감정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냥 순수하게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 형은 눈치만 봐도 딱 알아챌 수 있다고, 속이 빤해서 개울의 물고기들이 헤엄칠 때처럼 죄다 또렷히 들여다보인다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되는데.’

그리고 승철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내내.

민규가 장난스럽게 의자를 잡아당겨 앉으며 자문자답했다.

“누구랑? 아니다, 승철이겠다. 맞지? 내 말 맞지?”

눈만 꿈뻑거리자 민규가 송곳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찡긋거렸다.

“봐봐,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술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우리 셋 있잖아.”

“정한이는.”

“에이 그 형은 일찍 죽잖아. 새벽반 못해.”

“그건 맞어. 오늘도 일찍 잤어.”

승철이 눈을 떼구르르 굴리다가 주제를 바꾸려고 끼어들었다.

“걔는 진짜 어떡하냐? 몸이 원래 허약 체질인 거 같애. 맨날 운동 시켜도 똑같냐. 한약 좀 지어먹여야 되는 거 아냐? 슈아네 집에 찾아가버려?”

드물게도 인터셉트를 당하지 않고 민규가 손을 내저어 승철을 쫓아냈다.

“아이, 암튼! 내가 지금 추리하고 있자나! 들어봐. 여기에 그, 순영이는 술게임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술 안 마셔. 그치? 그리고 나는 싫다는 지훈이 형한테 얍 이거 먹어라 하고 꽐꽐 먹일 수는 없자나. 안 좋아해 나도. 술 마시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싫다는 사람 붙들고 술을 머겨. 그럼 남은 게 누구야. 술 좋아해, 지훈이 형한테도 억지로 꽐꽐 술 먹일 수 있어야 돼, 새벽반이어야 돼. 남는 게 승철이라고.”

그 횡설수설을 분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훈은 다시 사발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쌈장으로 비빈 밥에는 야무지게 고기도 썰려 들어갔고, 김치도 있고,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가 난다. 배도 엄청 고프다.

그런데도 목구멍이 딱 막힌 듯이 느껴졌다.

‘뭐지, 소화불량인가? 씨발 술 처먹고 이러면 다들 어떻게 술을 먹고 그러냐.’

“아, 왜. 그래서 지훈이 형, 진짜 맞아? 술 마시는 새벽반 승철이 형이지? 왜 이렇게 승철이가 부정하지? 말 딴데로 돌리고 싶어하지? 너 지금 찔리는 거 있지? 지훈이 진실의 입에서 나오면 어, 위험한 거 있지? 그치? 빨리 말해봐.”

민규가 치대는 대형견처럼 지훈이한테 푹 기대서 끊임없이 맞냐 틀리냐 똑바로 말해라 어쩌구 하면서 귀따갑게 소리쳐댔다.

‘이 새끼도 이미 취했네.’

순영을 흘끔 봤는데 순영도 반은 눈이 감겨서 꾸벅꾸벅하고 있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고개를 흔들고 일어나면서 힝 하고 웃었다.

“졸려?”

“아니! 나 아직 안 죽었숴~~~~! 이제 둘둘이니까 겜하자! 나 진짜 오늘 겜하고 싶어!”

“뭐 뭐 뭐. 나 술 안 마실 거야. 술 또 마시면 난 개다, 개.”

“뭔소리야 앙냥냥.”

“꺼져 권순영.”

민규가 무슨 세계적 난제를 푼 듯이 머리 위로 느낌표를 팍팍 띄우면서 벌떡 일어났다.

“형형형! 딱 맞네. 순영이 형이랑 나랑 팀하고 둘이 팀해서 둘이 남잖아? 승철이하고 지훈이하고 같은 팀을 해! 그러면 다 죽이는 거야. 우리가 다 이기는 거야, 순영이 형!”

민규가 오바하면서 순영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순영이 막 도리질치며 밀어내놓고 투덜거렸다.

“민규 얘 있잖아, 이럴 때 말곤 나한테 형이라고 안 한다?”

“아니 형! 지금 그렁게 중효해? 준요해? 중요해? 주뇨하냐교!”

“너네 술게임에 미쳤구나.”

“셋이면 팀전 겜 할 게 별루 없었어. 암튼 자 그럼 고고! 승철이를 죽여라!”

지훈이 한 손을 들고 발언했다.

“지훈! 여기에서 이지훈의 의사는 안 들어보고 합니까?”

“없습니다~ 다음 발표자분?”

“개쓰레기 발언.”

히히 웃던 순영의 눈이 당황스럽게 굴렀다.

“어… 어 뭐야. 수위 왜 그렇게 쎄.”

민규가 꺄르르 웃으면서 순영의 어깨를 쳤다.

“아니야 저거 그거야, 그거.”

“그거 뭐.”

“그거 있짜나~~ 뭐지 뭐지? 트위터에서 마악… 아우, 그러니까 그거잖아. 말투 왜 그래. 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 같아.”

승철과 순영이 서로 의아하고 못 알아듣겠고 쟤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눈빛을 동시에 쏘아보냈다.

지훈은 알아들은 자신이 짜증났다.

민규도 그 큰 게 막 꾸불텅거리며 투덜거렸다.

“…집에 인터넷 선 안 들어오냐? 요샌 군대에서도 휴대폰을 하는데! 이걸 몰라?”

“와 너 진짜로 인터넷 많이 하는 사람 같아.”

“꺼져 진짜.”

“알겠으니까 이젠 게임 하면 안 돼?”

그렇게 억지로 게임을 시작하나 했는데 다행히 버논이 눈 비비고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걸어와서 민규를 잡고 매달렸다.

“나 햇반 두 개 가져올게. 저거 해주라. 나 비빔밥 정말 좋아해.”

“영업 끝났어요 손니임.”

“알았어, 찬이도 데려올게. 됐지? 나 햇반 그럼 네 개 데운다? 지훈이 형도 더 필요해?”

“되긴 뭐가 돼?”

승철이 질렸다는 투로 핀잔했다.

“우리가 너네 밥 안 먹였냐?”

“자다 깬 찬이는 뭔 죄야.”

“아, 밥 먹자고 하는 거지.”

“뭘 밥을 두 시간마다 먹어? 신생아야?”

오디오가 또 왕창 물리기 시작했다.

순영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버논이랑 찬이가 하고… 나랑 민규 하고… 승철이랑 지훈이 하고…’ 꼽기 시작하다 외쳤다.

“그럼 지면 밥 한 숟가락! ……아니네? 이게 왜 벌칙이지?”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심란할 틈을 안 준다.

승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또 히히 웃고 있었다.

“술 마시는 사람이면 그냥 술 먹는 사람끼리 먹어 좀~”

“아까 나 너무 빨리 취해서 많이 못했단 말야…”

“게임은 나랑 민규가 해줄게.”

“셋은 넘 내가 쉽게 발라버려서 싫어….”

“너 가서 발닦고 자라.”

심란할 틈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꼴을 보니까 금방 심란해졌다.

이제 이 형놈새끼는 울고 있지도 않는데도.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 있는데.’

승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빤히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박살난 후라, 이제 승철이 어떤 생각으로 웃고 있는지도 가늠을 할 수 없었다.

근지러운 기분이 단단하게 체했던 가슴에서부터 쿵쿵 울려 온몸으로 퍼졌다. 지훈은 인상을 썼다. 가슴을 쿵쿵 울려대던 진동이 근육을 울리고 등뼈를 차례대로 서걱서걱 썰고 둥글게 또아리를 틀며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

어느 날에 꿈을 꾸었다.

승철은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니까, 흔한 일이었다.

살면서 별별 꿈을 다 꿨다. 판타지적이기도, 일상이기도, 잔인한 것도, 재미있는 것도.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아, 꿈이구나.’ 하고 자각을 했다.

그 날도.

승철은 집들이에 초대 받아 막 문을 연 참이었다.

빛이 잘 들어오는 깨끗한 아파트.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하다못해 신발장 있는 현관마저 지훈의 취향대로 절제된 색만 보이고 깔끔했다.

승철은 신발을 벗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현관에서 들어오자마자 결혼 사진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대체 승철이 지훈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누가 알아보겠는가.

심장이 뚝 내려앉았다. 차갑게 식은 피가 돌며 온몸이 선득하고 뒤통수가 당겼다.

‘꿈이야.’

승철은 입 안에서 중얼거려보았다.

‘꿈이어야 한다고.’

그러나 지독할 정도의 현실성 앞에서 자각은 의미 없이 흐려졌다.

원래 꿈은 어디에서 왔는지, 방금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깬다.

하지만 그 골은 쉽게 뇌가 메웠다. 자각몽에 익숙했기 때문에 더욱 손쉽게 뇌는 상황을 설명한다.

그럴 듯한, 현실적인, 최승철이 늘 대비하려 홀로 이를 악물었던 순간들에 대해서.

이지훈은 연애엔 관심없다 이러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청첩장을 주면서 웃는다. ‘…누구랑?’ 아무런 낌새도 몰랐던 자신이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는데 지훈은 별 생각도 없다. ‘몇 년 됐지. 아이, 그래도 결혼 전에 한 번 만날까?’

태연하게 그 모든 걸 해치울 거라고.

지훈이 모든 걸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얄팍한 질투심은 밀려들어왔다. 이지훈에겐 모든 것이 그렇게 쉽다. 뭐든 거머쥘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려움 같은 거 없지. 누구나 너를 좋아하니까.

나처럼.

그 때 현관에 마중나온 지훈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나 행복해.”

말랑말랑한 흰 뺨은 윤기가 돌아 발그레했다. 보조개가 예쁘게 패인 그 뺨이 움직였다.

어깨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서 승철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나 진짜 행복해, 형.”

한 번도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이지훈이.

다른 말로 표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에서부터 터져나온 것처럼.

승철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집들이에 초대되었고, 지훈을 앞에 두고 있다. 거실 안쪽에서 복도로 지훈의 부인이 나오는 기척이 있었다.

인사부터 해야지.

선물도 건네야지.

웃어야지.

축하해야지, 살짝 지훈이 욕도 하고.

오래 본 동생이에요. 진짜 친동생 같아요. 혼주석에 앉을 수도 있을 걸요. 주례 제가 설 뻔 했지 뭡니까, 핫, 핫, 핫…

그런 말을 해야 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은 너무나 많았다. 처음 신혼집에 집들이 하러 왔으니까. 씨발 결혼식 때 난 뭔 소리를 했지.

승철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일단 웃어. 지금 너 분위기 안 보이냐? 웃어야지.

그리고 말해. 처음부터.

축하한다고. 둘이 잘 어울린다고. 좋아보인다, 그러니 오래오래 행복하시라고.

잘 하잖아, 승철아.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머리속이 하얗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히 집들이에 초대되어 왔을 때 해야할 말을 미리 정리했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여기 올 결심도 못했을 테니까.

아니, 결국 해야 할 말은 하나다.

행복해라, 지훈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걸 안다.

하지만 입만 뻐끔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몸 어딘가에 틈이 나서 거기로 계속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텅 비어서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채워지지 않았다. 별 것 아닌 호흡에도 자신의 틈으로 새어나가는 것들이 또렷히 느껴졌다.

아무런 말 하지 못하고 승철은 우두커니 현관에 한 짝은 신고 한 짝은 벗은 채 멍하니 섰다.

지훈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이의 감정과 표정에 예민한 것은 승철의 천성이었다.

왜 그러고 서 있냐고, 너는 묻겠지.

들어오라고. 내 행복한 곳으로 오라고.

‘나 없이 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아.’

근데 난 너 없이 행복할 줄 모르는데.

텅 빈 숨을 채우려는 듯 눈물이 차올랐다. 눈동자마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거기마저 빈 틈이었다.

승철의 빈 속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행복하라는 말 한 마디 해주는 것을 해줄 수 없어서, 지훈을 볼 수 없었다.

온몸을 덜덜 떨며 승철이 눈을 떴다. 수면등의 주황색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 왜 여기 있지…?’

차가운 얼굴에 여전히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지훈이네 집들이…’

한순간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꿈인데, 분명히 한 번은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너무 생생했다.

온몸의 피가 식어서 차갑고 식은땀과 눈물로 축축하고 정신은 또렷했다.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집에서 나는 공기의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어우씨, 나 지금 꿈 꾸고 우는 거야? 애냐?”

일부러 그렇게 웃고 말하며 팔뚝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하지만 감정은 멈추지 않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02:23

탁자에 올려진 탁상시계에서 아주 작게 탁 소리를 내며 분이 넘어갔다.

02:24

끔찍했다.

너무 좆 같았다.

너가 결혼하는 게 싫다고, 왜 내가 아니냐고 소리지르고 싶어진 자신이 치졸해서.

평소에는 좋아했던 찰칵찰칵 초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로 들렸다.

승철은 손을 뻗어서 탁상 시계를 엎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덜덜 덜려서 옆의 수면등에 손톱이 부딪쳤다.

“아파…”

일부러 지훈에게 졸라서 같이 산 수면등이었다. 클래식한 디자인이어서 반은 PC방인 승철의 방보다 무드 있게 만든 지훈의 방에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샀다.

-너도 이거 같이 사자. 네 방에 이게 딱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봐. 잘 어울리지?

-아니 왜에.

-무서운 거 싫단 말야. 내가 너거 집 놀러갔는데 밤에 어? 불 다 끄고 무서워서 잠 못 자면 너가 밤 새서 나랑 놀아줄 거야?

-형도 일해.

-이거 봐, 이거 봐. 안 놀아줄 거잖아. 그러니까 이거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사줄게, 응?

진짜 찌질하지.

그냥 커플템 한 번 맞춰보려고 용을 쓴 거였다.

아무도 몰라도, 너조차 몰라도,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그 사이를 날카로운 꿈이 파고든다. 결혼식, 신혼집이며 집들이, 온전히 자신의 상상일 뿐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은 서늘하다. 이런 날은 곧 올 테니까.

커플템 하나 몰래 맞춰보겠다고 안절부절 못했던 게 우습고 비참하고 기가 막혔다.

여전히 마음의 크기는 불균형하다.

승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수면등을 벽에 던졌다.

유리로 된 갓과 전등이 한순간에 파작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전선은 뽑히고 전등이 깨진 수면등은 딱 두 번 깜빡거리다가 조용히 죽었다.

그 빛이 사라지자 밤은 놀랄 정도의 고요한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승철은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씨발 미친 새끼…….”

틈을 메워야 했다. 숨을 마시면, 몸안에 꽉 차도록.

허튼 소리를 계속해서 늘어놓고 몸이 빳빳히 서서 그 애의 진짜 형이 될 수 있도록.

“무, 서워.”

그러나 아침이 오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눈물은 계속 흘렀다.

일어났을 때 으직, 하고 발 아래에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승철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밖으로 흘러나왔으므로.

***

2:58

지훈은 컴퓨터의 시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 순영아! …순영이 없네.”

야식각이 딱 섰는데!

“그럼 누구 부르지.”

새벽이라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줌일 수 있는 것도 감안해야지. 하지만 분명히 이 놈들 중에 한 명은 깨어 있다. 밥 먹고 싶다. 올 수 있다.

핸드폰을 든 지훈이 카톡을 열어 대화창을 훑었다.

맨 위는 순영이었다.

먼저 자러 감. 깨우지 마시오! 오전 02:00

아, 이미 늦었네.

그 아래에는 카카오톡 채널 광고들. 별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휙 돌렸더니 승철과의 채팅방에 멈췄다.

날짜는 며칠 됐다. 자기가 뭐 물어보는 게 마지막이었고 읽음 표시는 떠도 답변은 없었다.

그게 웃겨서 채팅방을 좀 살폈더니 승철이 답변한 건 정말 반밖에 안 됐다. 심지어 대화가 이어지는 게 세 줄 이상을 넘지 않는다.

항상 다섯 줄 넘어가기 전에 거의 페이스톡, 보이스톡 해요 이런 메세지가 쌓여있다.

‘이 형도 뭐만 하면 급발진이라 전화부터 해가지고.’

카톡 알림은 켜놓기는 하는 거 같은데 알림이 울려도 본 척도 안 하면 그건 꺼놓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심지어 카톡 좀만 길어질 것 같으면 바로 전화하면서, 전화하면서도 이거 말이 좀 길어질 것 같다 싶으면 당장 만나자부터 세 번 네 번 알았다고 할 때까지 반복한다.

‘형 지금 깨어 있으려나? 카톡이라도 보내봐?’

그러다 지훈의 시선이 딱 옆에 있는 수면등에 닿았다. 달항아리 같이 생긴 수면등이었다. 승철이 억지를 부려서 사다놓은 수면등.

귀엽게도. 등치는 문짝만한 게 디즈니 프린세스가 따로 없었다.

자는 자세도 손 모으고 포옥~ 인 데다, 밤에는 꼭 잠을 자야 되고(아니 그러면 새벽까지 술은 왜 먹어?), 잠옷도 입어야 되고, 수면등도 켜야 하고. 이게 무슨 새나라의 어린이인지.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벽 3시인 지금, 새나라의 어린이 최승철 군은 아마 잠옷 예쁘게 차려입고 디즈니 공주 포즈로 자고 있을 것이다.

‘괜히 깨우면 미안하기나 하지.’

그 순간 갑자기 바로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의 전화가 와서 지훈은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으이씨, 깜짝이야!”

다행히 케이스 쪽으로 떨어져서 액정은 무사했다.

지훈은 어디 한 번 깨진 데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밥…”

-야 너 만약에 사귀는 사람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돼.

“밥이…”

이 형 깨어 있다! 같이 밥먹을까! 그 생각으로 순식간에 업 됐었던 지훈은 잠깐 대화주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버버 했다.

승철은 그걸로도 모자란 듯 성급한 투로 덧붙였다.

-아냐, 썸타는 사람만 생겨도 바로 보고해. 알겠지?

“새벽부터 뭐래.”

-그러니까 연애하면, 썸 타면 쩰 먼저 나한테 알리라고.

“내가 뭔 연애야 진짜. 아닌 밤중에.”

-너 인기 많잖아.

“알지. 나 인기 많지. 근데 그건 그거고 연애하는 거랑은 틀리지. 형이면 나랑 사귀겠냐?”

반대편에선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성격에 차마 ‘야 나도 그건 그렇게 생각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진 못하고 돌려서 어떻게 포장을 하는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 같으면 별 생각 없이 동조해줬을 텐데. ‘니 말 맞다. 너는 연애 불가능 인간이야.’

연애 가능 인간은 승철이니까.

자타공인 외로움쟁이. 날짜 챙기는 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대체 뭘 먹으면 저런 인간이 되지? 싶은.

‘근데 이 형은 왜 연애 안 하지?’

한 번 시작하면 중독될까봐 안 하나? 이것도 그럴듯 했다.

승철이 낮게 선언했다.

-아무튼 청첩장만 딸랑 주면 나 너 결혼식 안 가. 주례도 안 볼 거야.

“보통… 하겠다는 게 사회 아냐?”

-축의금도 안 넣을 거야. 결혼 선물? 국물도 없어. 너 신혼집 집들이 해도 절대 안 가.

자, 지금은 새벽 세시. 평소엔 새나라의 어린이인 승철이 갑자기 전화해서 꼬장을 부린다.

지훈이 들으란 듯 한숨을 팍 쉬었다.

“꿈에서 내가 갑자기 청첩장 돌렸어?”

-씨이… 대답부터 해. 근데 정답이야.

“아니 지금 뭐 그런 걸로 나한테 전화를 해! 이 새벽에!”

-어짜피 너 안 자잖아! 그리고 너가 진짜 그럴 거 같으니까 그러지!

“자다 깬 사람 화풀이 듣는 나…… 제법 젠틀해요. 내가 뭔 결혼을 해, 진짜? 아닌 밤중에 왜 갑자기 날 결혼시키냐고. 이건 예지몽도 아니다! 예지몽이라고 우기기만 해 봐 진짜.”

-……미안해.

자기가 씅을 냈다가 자기가 풀이 죽어서 목소리가 젖어든 것이 느껴졌다.

으유 최또삐.

진짜 진짜 너무 섬세하고, 진짜 어쩌다 이렇게 사람 좋아하고 여려.

지훈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 목소리를 끌다 말했다.

“나하고 지금 야식 먹으면 용서해준다.”

건너편에서 승철의 웃음소리가 다시 피어오른다.

-둘만?

“음…”

사실 둘만 먹는 건 메뉴가 제한적인데.

지훈은 잠깐 고민했다.

“형은 어때? 누구 더 부를까? 에이, 귀찮은데 그냥 둘만 먹으면 안 돼?”

-나야 좋지! 뭐 먹을래? 내가 편의점 들러서 사가지고 갈게!

꼬리가 있으면 분명히 풍차처럼 돌고 있을 것이다. 붕방붕방 기분 좋은 티를 팍팍 내는 승철이 웃겨서 픽 웃은 지훈은 곧이어서 사올 목록을 쭉 불렀다.

“외웠어? 카톡으로 다시 남겨놔?”

-아냥! 외웠다 이놈아. 나 그럼 전화 끊고 간다? 좀만 기달려!

지훈은 참을성 있게 자신의 배를 달래며 기다렸다. 출발해서… 편의점 쓸고… 솔직히 이거 맞나? 저거 맞나? 하면서 10분은 쓸 듯. 그리고.

띵띠띠띠띠띵!

인내심 없이 누르는 현관 벨소리에 지훈도 후다다닥 달려갔다.

“오, 마침 잘 왔어.”

“갑자기 무슨 상황극이야? 전화 하고 왔잖아.”

“좀 맞춰봐라. 찬 바람 들어온다, 얼른 들어와 문 닫어.”

지훈은 몸을 돌려 미리 세팅한 테이블로 오늘의 경건한 야식과 승철을 인도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걸어 오는데 승철이 발을 절룩거리는 기색이 있다. 무거운 비닐 봉지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훈은 인상을 쓰고 승철의 발을 내려다봤다가 바닥에 승철이 디딘대로 핏자국이 점점이 찍혀있는 걸 보고 비명을 질렀다.

“형…! 형 뭐야? 발에 뭐야?”

“어?”

승철이 빵빵한 비닐봉투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체리 아이스크림부터 꺼내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바닥에 핏자국 났잖아! 발 좀 봐, 왜 이래!”

“어라.”

“어라는 무슨!”

승철이 어리둥절한 태도로 지 양말 바닥을 내려다보고 끼약 소리 질렀다.

“으악 피!!!!”

“미친놈아 그걸 이제 알아!?”

“으아아앙 아퍼!!!!!”

한 번 다친 걸 알게 되니까 그 때부터 아픈지 승철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푸닥 주저앉았다.

“양말 벗어 봐! 그래, 내가 이 형 슬리퍼 짝짝 끌고 올 때부터 알아봤다. 어두우니까 뭐 밟았지?”

“그런가봐… 뭐지. 언제 밟았지.”

“아픈 것도 지금까지 몰랐어?”

“어.”

“잘한다. 파상풍 주사 맞은 건 기억 나냐?”

“그건 아파서 기억 나.”

이것도 그만큼 아팠을 텐데. 아니지, 뭘 이렇게 밟아서 찢어진 게 주사 맞은 것보다 훨씬 아프지.

그런데도 승철은 별 말 하지 않고 피에 젖은 양말을 슬쩍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 뿐이었다.

다행히 발에 박힌 유리 조각은 없었다.

“병원 가?”

“아냐, 이 정도로 뭘 병원을 가. 그거 있지, 너 운동 간다고 사다놓은 거. 그거랑 밴드 좀 빌려줘.”

“진통제는.”

“됐어, 이 정도로.”

“허세 부리지 말고.”

“진짜 보기만 이러지 별로 안 아프거든. 내가 아팠으면 어! 이러고 있겠냐! 119 불러 부르라고! 하고 악썼을 걸.”

승철이 말만 이래놓고 그런 적이 없는 인간이라 걱정되는 거였다. 센 척은 하여간.

물로 씻어내고 약 바르고 밴드 붙이고, 물티슈로 피 묻은 것까지 대충 닦고 왔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얼른 먹자. 나 배고파. 벌써 세시 반 다 됐다. 먹고 빨리 자야지.”

“그러게, 밤이 짧다.”

“진짜 형 때문에 내 명이 사흘은 단축됐으니까 그거 보상도 해라.”

승철이 사온 비닐봉지에서 나머지를 부스럭부스럭 꺼내는데, 콜라캔 옆에 투명한 연태고량주가 하나 은근슬쩍 섞여 있었다.

“아, 나 술 안 먹어. 여기에서 술담배타투피어싱 금지!”

“왜 그래, 너 주려고 사온 거 아니거든?”

“아까면 또 몰라. 다친 사람이 뭘 술을 마셔.”

기미가 좋지 않았는지 최승철이 후다닥 지훈의 손에서 고량주를 빼앗아서 지 품에 꼭 안았다.

“나 술 없으면 오늘 다시 못 자. 꼭 마실 거야. 못 마시게 하면 너 못 자게 괴롭힐 거야.”

“취하지도 않으면서…….”

“꽐라가 안 되는 거지 술 마시면 기분 좋다고~! 잠도 잘온단 말이야! 진짜다, 나 오늘 못 마시게 하면 여기 드러누워서 코인노래방 만들어놓는다?”

“나가.”

승철이 급하게 지훈의 팔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싫어싫어 지훈아~ 제발~~”

“뭐 이렇게까지 마시고 싶어하는데.”

“나 진짜 코 자고 시포.”

지훈은 얼굴을 찡그렸다가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 먹어먹어. 흘리지나 말고.”

“어우 나 너 없음 어떻게 살았냐~ 사랑하는 거 알지?”

“몰라.”

편의점에서 털어온 과자며 각종 냉동 냉장 식품을 차려놓고 둘은 콜라와 고량주의 잔을 부딪쳤다.

당연히 지훈의 집에는 술잔 같은 게 없어서 그냥 머그컵에 담았는데도 승철은 좋다고 히히 웃었다.

“저쪽에다 놔, 내가 물인 줄 알고 마시면 너 죽일 거야.”

“알겠습니당…”

“에휴. 형 이제 나을 때까지 운동도 못하겠네.”

“괜차나, 원래 운동은 일주일에 150분 하는 게 제일 좋댔어.”

이건 아무리 형이라도 못할 말이다. 지훈의 숟가락이 딱 하고 테이블에 부딪쳤다.

“내가 뭐라 그랬냐? 하루는 23시간이라고 그랬지.”

“왜에~ 내가 일주일에 150분 하라 그랬냐? 과학자들이 그랬다니깐.”

“하루에 한 시간 무조건 운동해.”

“그럼 좀 불러줬어야지, 운동 가자구.”

입술이 아주 그냥 또 삐쭉거린다.

이 형 진짜.

“불렀는데 형이 안 왔잖아. 부르면 오늘 술 마시러 가서 못한다, 뭐해서 못한다 그랬으면서.”

“왜에! 아니야. 나 저번에도 운동 너랑 가서 엄청 열심히 했잖아.”

“작심삼철 조용히 해.”

“아니거드은?”

“뭐야 그럼 낫기만 하면 바로 끌고 간다? 술 약속이고 뭐고 다 파토내고 와. 알겠어?”

“에휴… 내가 진짜 엎드려 절받기지 이게…….”

“싫어? 싫으면 말고.”

“아냐, 간다구.”

이 짧은 대화에도 승철이 혼자 어찌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삐졌다가 웃었다가 조르다가 반복하는지 지훈은 이제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이 저럴 수도 있네. 피아노처럼 다양한 음에서 나오는 표정들은 질리지도 않을 만큼 많았다.

“근데 우리 같이 가도 뭐 같이 하는 건 없지 않나?”

“아냐. 너하고 같이 가야 열심히 해.”

“알았어. 같이 가. 내가 빡세게 시켜줄게. 두 시간 하자. 이제 하루는 몇 시간이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승철이 뒤에 몸을 젖혀서 바둥댔다.

“아 발 다친 사람! 발 좀 가만히 둬!”

시답잖은 얘기로 야식을 먹어치우는 중간중간, 승철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컵에 조심스럽게 입을 대고 홀짝홀짝 고량주를 마셨다.

‘얌전하게도 마신다.’

창백했던 하얀 얼굴이 술 때문에 복숭아처럼 핑크빛으로 달아오른다. 귓가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발긋했다.

그리고 기분도 엄청 좋아보였다.

아까는 분명히 질질 짜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팅팅 눈도 붓고 죽상이었는데.

‘술이 그렇게 좋은 건가.’

술은 최승철이 그렇게 좋아할 만한 건가.

몇백 번이나 되풀이했던 질문을 지훈은 또 해봤다.

그리고 쓸데없이 궁금해졌다.

형이 좋아하는 거라면, 나도 좋아할 만한 걸 텐데.

이 새끼가 이렇게 얌전하게 마시는 꼴을 봤으니 쐬주 나부랭탱이를 뛰어넘는 독주구나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지훈도 배가 차고 기분이 좋아서 깜빡했다.

“줘 봐, 나도 한 모금만 마셔볼게.”

“이거? 고량주는 도수 좀 있어.”

“아니 그래도 뭐… 한 모금은 같이 마셔줘야지.”

승철이 같이 마셔준다니까 눈을 살살 접고 헤헤 웃으면서 컵을 건넸다.

콜라로 먼저 입을 달달하게 만든 지훈이 컵을 받아들어 숨을 멈추고 한 모금만 딱 마셨다.

승철이 붕방거리며 물었다.

“어때, 괜찮아?”

지훈은 말없이 컵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싱크대로 달렸다.

“퉤에엣! 에퓃! 퉷퓃!!!”

맹세코 한 방울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똑같은 것 같다. 입에 잠깐 머금었을 뿐인데 목구멍까지 화끈했으니까.

물컵으로 양치를 세 번 했는데 알콜 때문에 혀는 여전히 아릿아릿하고 코끝에 술 냄새가 계속 박히고, 심지어 목은 진짜 타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미친 놈아! 이거 독약이잖아?”

“헤헤… 고량주는 복숭아 향기 나는 건데.”

“대체 어디가 복숭아인데!!”

얼굴이 금방 시뻘개진 지훈이 뒤로 벌러덩 누웠다.

졸라 귀찮네.

치우는 건 내일 하자.

내일이 벌써 오늘이다. 하지만 언젠간 하겠지.

“잘 거야?”

“어.”

“씻고 자.”

“귀찮아. 이따 일어나서 씻지 뭐.”

“야, 아직 쌀쌀해. 침대 가서 자.”

“형은 어쩌게.”

“뭘 어째, 이불 꺼내야지.”

지훈은 아우…,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승철이 발도 다쳤는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꿈질꿈질 움직일 게 짜증났고, 일어나서 승철이 이불 치우지도 않고 쏠랑 가버릴 것도 다 예상이 되어서 자신이 갤 미래를 생각해보니까 짜증났다.

이불도 사람이 한 번 썼다고 빨아야 되나? 그것도 귀찮다.

“됐어… 걍 같이 자. 형이 문짝 같아도 내가 앙증맞잖아.”

승철이 배를 잡고 웃었다.

“미쳤다이, 지훈이가 자기 입으로 앙증맞단 소리를 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너 그거 한 모금 혀에 대고 에베베베 한 게 단 데 술 취했어?”

“기껏 생각해줬는데 걷어차겠단 뜻이야?”

“아닝뎅? 완전 좋다는 뜻인뎅?”

승철이 쩔뚝거리면서도 침대로 먼저 뛰어들었다.

지훈도 불 끄고 반쯤 기어서 침대로 올라갔다.

“맞다. 수면등 켤까? 형이 사준 거.”

“됐어, 너 있음 안 무서울 거야.”

“그럼 왜 사준 거야?”

“너가 나랑 같이 잘 때가 없잖아.”

하긴 이럴 때 아니면 싱글 침대에 굳이 두 명이 자는 일은 없으니까.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 여행 온 것 같다, 그치?”

“난 내 집인데 뭔….”

승철이 먼저 킥킥 웃으면서 지훈을 토닥였다. 지훈이 팔을 잡아 내팽개쳤지만 승철도 꾸준했다.

도망가기엔 좁아서 옆으로 돌아누운 승철의 무릎과 종아리는 떨어지려 해도 지훈과 거의 맞닿아 있을 정도였다.

‘침대 좁아.’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내려가라고 할 수도 없고.

이 형은 지 발을 다치고도 남이 신경써주지 않으면 자기도 신경쓰지 않을 인간이고.

혼자일 때보다 침대가 따뜻하고 포근했다. 코끝에 이제 독한 고량주가 아니라 풀어진 알콜 향과 달달한 향기가 났다. 익숙한 듯 낯선, 승철의 냄새.

지훈은 자신의 가슴을 토닥이려는 승철의 손을 떼내고 중얼거렸다.

“…진짜 여행 가고 싶다. 여름 되면 다 같이 바다 갈까.”

승철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흥분해서 손을 휘저었다.

“좋아! 야, 진짜 가는 거야! 알겠지?”

“오케이, 오케이. 좋아. 완벽해. 최승철이 이제 계획만 잘 짜면 돼.”

“허어어어엉… 왜 갑자기 꿈을 꺾고 그래….”

승철은 푹 베개로 고꾸라지는 시늉을 했다. 뿌앵한 승철의 눈썹과 눈이 정말 축 처지는 게 눈앞에서 보였다.

진짜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지훈은 슬쩍 웃었다.

“이야, 귀엽다, 이 형.”

“꺼져 임마…”

말은 그래도 싫진 않은지 지훈의 코앞에서 승철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큰 개 같애.”

“야.”

승철이 정색했지만 지훈은 킥 웃었다.

“내가, 내가 개 안 키우는 이유가 있다. 형만 보면 다~ 알 것 같아서 그래.”

“나 술 먹고 개 된 적 없거든?”

지훈을 강제로 토닥여주던 승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훈은 계속해서 크크크 웃었다.

“술 먹고 개 됐다는 말 한 적도 없어. 찔리는 게 많으시구만.”

“죽을래?”

승철이 아예 멱살 잡고 쥐어 흔들어댔지만 지훈은 웃기만 하고 대꾸도 안 했다.

“두고 보자 니 진짜….”

승철은 더 따지고 싶어도 졸린 모양인지 궁시렁거리다가 조용해졌다. 숨소리는 금방 평화로워졌다.

지훈도 반쯤 잠기운에 빠져서 고개를 돌렸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눈을 감은 승철의 옆얼굴이 있었다.

“진짜 자?”

가만히 물어보았는데 승철은 입술을 웅얼거릴 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높은 이마에 흩어져 있고 깊은 아이홀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형 때문에 진짜 내가 개 안 키워도 된다니까.”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양순한 점. 생각이 팽팽 돌아가는 쪼끄만 머리통. 뜨끈뜨끈한 체온.

예의바르고 무리생활 좋아하는 점. 사람한테 금방 치대는 점. 손타는 거 좋아하는 점. 금방 신나고 금방 주눅드는 점. 눈치빠른 점. 상대방의 기분 잘 파악하는 점.

의외로 엄청 손 많이 가는 점. 외롭게 두면 죽는 거. 예쁨받는 걸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채는 눈치.

언제나 한결 같이 애정을 퍼부어주는 점.

지훈은 무심코 손을 뻗어 길고, 부슬부슬한 승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열기가 퍼졌다.

이 형 없으면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텐데.

***

그리고 최승철은 진짜 드물게도 친구들을 닦달해서 날짜를 잡고 콘도 예약을 마쳤다.

“오 작심삼철이 이럴 줄은 몰랐네.”

“야, 여행 가고 싶다고 한 거 너잖아!”

***

그러나 그 여행에서 최승철은 좆같은 실수를 저질렀고, 때문에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잠시 멈칫했다.

별 생각 없이 지훈에게 전화를 할 뻔 했다.

“와씨… 대가리에 총 맞았나?”

혹시라도 또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누를까봐 승철은 아예 전화 탭을 껐다.

술 취해서 실수 한 적은 아직 없지만 이러다가 하나 둘 씩 생기고 사회적 말살이 되는 법이다.

손에 휴대폰을 꽉 쥐고 승철은 방안에 굴러다니는 참이슬 병들을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술이라도 좀 가성비 넘치게 취해야 될 거 아냐.”

그러는데 휴대폰에서 징 하고 알림이 와서 승철은 펄쩍 뛰면서 손에서 휴대폰을 놓쳤다.

“끼약!”

벌레라도 되는 듯 보다가 엉금엉금 기어 확인해보니 카톡이었다.

브라더 순영이

형 이거 이제 내 꺼할게 고마워 오후11:40

그러고서 첨부된 사진이 벙거지 모자였다.

“어… 이거 내 꺼잖아? 그러네? 바다 놀러갈 때 쓰고 갔었는데.”

여행은 이 주 전인데 잊어버린 걸 이제 알다니.

이 새끼도 지 가방에 넣고 가고 지금까지 가방 안 풀었다가 오늘 풀어봤구만?

확신에 가까운 촉으로 승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이마를 팍팍 쳤다.

내놔. 오후 11:42

그 외에도 알림을 꺼둔 단체카톡방에는 돈 입금했다는 카톡이나 사진 올려둔 톡들이 난무했다.

지훈도 거기 딱 한 번 입금 완료했다고 카톡 보내고 아무 것도 없었다.

단톡방 말고 개인 채팅을 봐도 그랬다. 원래도 좀 드문드문했다 해도 여행 이후로는 완전히 딱 끊겨있었다.

“하아…….”

승철은 자기 대가리를 퍽퍽 쳤다. 존나 아팠다.

“내가 뭔 정신으로 고백을 해가지고, 멍청하게 진짜….”

입이 근질근질했다. 다 누구한테 털어놓고 우엥엥 짜고 싶다. 그런데 친구한테 말하면 누구나 다 그 상대가 지훈인 걸 알 테니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미 실수해서 지훈이한테 나 너 좋아행… 하고 다 까발렸는데, 친구들한테도 까발려지면 정말 수치심 때문에 사회적 말살행이다.

이 친구들은 진짜 연애 얘기에 별로 관심도 없긴 한데….

그 분위기 자기가 만들어놓은 줄은 모르고 승철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 잔 해.”

스스로에게 한 잔을 건넨 승철이 목구멍에 다이렉트로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으아아 미친 새끼야 진짜 왜 그걸 불어버렸냐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했자나~~~~!!! 넌 오늘부터 최승철이야! 진짜 실망이다 최승철~~~~!!!”

자기가 말했지만 최승철 최승철 이러는 게 귀에 울리니까 속상했다.

눈물까지 찔끔 났다.

이건 진짜 지훈이가 먼저 잘못한 건데. 갑자기 왜 나 사랑하잖아 이런 말을 하는데.

들킨 줄 알고, 대체 언제부터 알았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근데 너는 그렇게 농담처럼…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가…? 하고 머리가 한순간 과부하로 펑 터져버려서 정확한 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다.

물론 1초만에 ‘농담이잖아!!!! 정신차려 승철아!!’하고 이성이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이성이 아무리 쥐어뜯어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건 똑같았다.

착각한 자신이 창피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지훈이한테도 오기가 났고.

아, 그리고 솔직히 너무 행복했었던 거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 해왔다는 데 내심 뿌듯해 있었고 지훈이가 먼저 여행 가자고 해서 왔으니 잔뜩 들떠 있었다. 머리에 나사가 세 개쯤 풀린 거다. 이 멍청한 최승철.

착각해선 안 될 일마저 착각할 정도로.

승철은 목을 벅벅 긁었다.

“몰라, 아이쒸…”

그러는데 전화가 왔다.

민규였다.

-형 모해에? XXX에 오면 밍규가아~ 쏜다~!

“뭔데.”

-가고 싶은 데 3초만에 말하면~ 그거도 밍규가~~~ 쏜다!

“XXXX.”

꽤 비싼 가게를 골랐는데도 민규는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오케이했다.

-진짜. 내가 쏜다. 오기만 해, 승철아. 나 오늘 진짜 멋있게 하고 나왔거든. 근데 이 새끼들이 내일 일 있다고 나갈 거래! 나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외로워요.

“모오야, 꿩 대신 닭 이런 거야?”

-꿩 대신 승처리~ 헉! 아닙니다, 형님. 나와만 주시면 이 김민규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용.

승철은 망설이며 자신의 앞에 쌓인 소주병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두세 병밖에 안 마셨고 취한 기분도 안 든다.

그리고 또 상대는 부담스럽지 않은 민규.

“나 진짜 간다? 어디로 나가면 돼?”

-어, 나 XXX에 있긴 한데 자리 옮기자. 4번 출구 앞으로 오면 있을게.

“됐어. 괜히 나와서 지갑 잃어먹고 그러지 말구 그냥 거기 있어. 테이블만 갈아달라 해.”

-어웅~ 사랑해 형~

“예압. 나 간당.”

전화를 끊은 승철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그래, 지훈이 말한 건 이런 건데 내가 그 땐 미쳤다니깐.

승철은 더듬거리며 물 한 잔 마시고 나갈 준비 딱 하고 모자 뒤집어쓰고(“어쩐지 그게 없더라. 그거 바다가려고 산 건데.”) 나섰다.

친구들이 이미 나갔는지 민규는 혼자서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형!”

멀끔한 미남이 승철을 먼저 알아보고 베시시 웃었다.

“아 왜 2차에 불러어~”

“나 오늘 진짜 집에 들어가기 싫어여. 봐봐, 나 오늘 얼굴 진짜 멋있지 않아?”

그러면서 김민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두 손으로 턱받침을 했다. 승철은 자리에 앉으려다가 눈을 세모낳게 떴다.

“니 그딴 말 하면 나 집 감.”

“아이잉.”

말은 그랬지만 승철의 얼굴은 한결 풀렸다.

“뭐 시킬 거야.”

“나 대충 먹었어. 형 먹고 싶은 걸로 해.”

“나도 2차야. 혼자서 집에서 달렸어.”

“왜 혼자 달렸어! 날 부르지! 나도 있고 친구들 다 있는데 왜 혼술을 해, 섭섭하게.”

승철은 입을 앙 다물었다.

고백 실패하고 혼술했음. → 상대가 누군데. → 알려주고 싶지 않아. → 왜 안알려줘?!

이 루트를 타느니 그냥 눈썹 축 늘어뜨리고 귀엽게 눈 뜨고 삐쭉거리는 애교로 넘어가고 만다.

다행히 민규는 이렇게 하면 더 파고들지 않고 적당히 넘겨주었다. 얘가 괜히 친구가 많은 게 아니었다.

반대였으면 승철이는 민규한테 개꼬장을 부려서라도 상대는 누군지 왜 혼술을 했는지 심경은 어땠는지, 이런 것도 안 알려주고 난 너한테 그것밖에 안 됐냐고 다 알아내야 했을 텐데.

심지어 안 친한 사이였어도 머릿속에 저거 때문에 내심 꽁… 해버리는데.

그게 미안해서 승철은 얼른 주문하고 손하트를 빵빵 날렸다.

“응, 그래서 불러준 밍규 사랑행.”

승철은 안주도 없이 일단 술부터 땄다.

짠 하고 건배하고 승철은 혼술과 똑같은 속도로 술을 속에 밀어넣었다. 속은 시커멓게 타는데 술이 시원하니 쭉쭉 들어갔다.

“형형, 형 2차라며. 이 속도 괜찮아요? 이렇게 막 마셔도 괜찮아요?”

“어, 괜찮아.”

“안주라도 좀 나오면 같이 먹어.”

“알썽…….”

그리고 민규는 잠깐 눈치 보다가, 승철이에게 잘 먹히는 예쁜 포즈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요새 밖에 안 나와. 술 마시자고 할 때만 나오는 거 맞지.”

“설마 그러겠냐.”

근데 맞았다.

“그저께는 원우 형하고 마셨다며.”

“야, 걔랑 마시면 맥주만 마셔서 배만 불러. 그걸 어떻게 술 마셨다고 표현하냐.”

“형이 이상한 거지! 원래 맥주도 술이야!”

“뭔소리야? 그건 탄산 보리차지!”

“마시고 취하는 탄산 보리차가 어디써!”

“요기 있짜나!”

알바가 자본주의 미소를 띠고 등장해서 안주를 내려놓았다.

“네~ 천엽, 간 나왔습니다~ 곱창도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알바가 다시 사라지자 민규가 다시 드릉드릉 잔소리에 시동을 걸었다.

“근데에 진짜 요새 왜 이렇게 술 많이 마셔. 평생 안할 거 같던 혼술도 자꾸 했다고 그러고.”

“모르겠어, 술이 그냥 계속 들어간다.”

“그러다 피부 썩는다.”

“몰라… 내 간이 해줄 거야.”

“으이그 잘한다. 이러다 한 방에 훅 가지.”

“그러니깐. 토끼처럼 간을 꺼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신선한지 체크 좀 해보게.”

그러면서 남의 간을 념념 먹고 있으니 간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이 진짜아. 형 요새 왜 이렇게 술 마시러만 나오고 집에 처박혀 있는 거야? 정한이 형도 지금 형 걱정하잖아.”

막 한 입에 잔을 털어넣었던 승철이 꿀꺽 삼키고는 정자세를 했다.

“정한이가…?”

“그래, 그 프로 집콕러가 형 보고 승철이 쟤 집에만 있는 거 같다 하고 걱정할 정도라고.”

승철은 정말로 제 자신을 돌아볼 정도로 반성했다.

아니 그 집에만 들어가면 돌멩이보다 덜 움직이는 정한이 내가 집에만 있다고 걱정해?

‘내가 그 정도야 지금?’

그 어느 말보다 자기 반성이 되는 말이었다.

“나 지금 심각한 거네?”

“그렇다니까. 그래서 뭔 일 있어?”

최근 한 번 실수를 했지만, 승철은 지난 10년간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잘 꽁꽁 감추고 살았다. 이런 질문에도 태연히 넘어갈 줄 안다는 뜻이었다.

승철은 그냥 입술 말고 웃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다.

“아냐, 아냐. 그냥 술 너무 많이 마시니까… 뭐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좀 쉬고 그러려구 그랬지.”

“뭐가 피곤해.”

“내가 너흴 너무 사랑해서 괴롭다, 진짜.”

“한두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형 노릇하느라 힘든 건 알어. 우리 여행 간 것도 형이 줄줄이 인간들 스케줄 잡아가며 하긴 했잖아. 우리가 형 나이 되어보니까 되게 웃기긴 해, 근데.”

“너는 야, 세살 차이잖아.”

“아 진짜. 최승철. 지금 내가 감동적인 말 했는데 그게 중요해?”

“너가 지금 이렇게 부르면서 뭘 감동적이래! 은근슬쩍 까놓고 지금 할 말이야 이게?”

그래도 민규는 언제나 밝고 기운이 넘쳐서 같이 있다 보니 술 마시고 죽고 싶은 생각은 슬슬 옅어졌다.

감정이 좀 찔끔찔끔 새어나와도 민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해준다. 진짜 모를 수도 있고.

어느새 술 주량으로 얘기가 넘어갔는데 일단 자기 둘 빼고는 다 비슷한 수준으로 못 마셨기 때문에 둘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래도 준휘가 잘 마시지 않아?”

“근데 술 마시는 걸 안 좋아하니까 뭐…….”

“지훈이한테는 막 꼬시면서!”

“아니, 하, 지훈이는…”

가슴이 짜부러질 듯 아파서 승철은 잠깐 눈썹을 모으고 인상을 썼다가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지훈이는, 내가 아무리 막 마셔마셔 해도 못 마시잖아? 그러니까 그냥 더 하는 거라고. 어차피 안 마실 거니까. 준이는 진짜 내가 마시라고 그랬다가 마실 수 있잖아. 싫은데도.”

“? 싫으면 안 마시겠지.”

“행복하냐? 그렇게 살아서.”

이죽거렸지만 승철은 누구보다 민규가 사회생활 잘 하고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적당히 뻔뻔하면 눈치 좀 없음 어때. 아예 눈치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딱 적당하지, 이 정도가.

그래서 지금 승철은 원우나 민규 같은 좀 무딘 친구들과만 마셨다. 정한이나 승관이 같이 비상한 놈들하고 이럴 때 마주치면 다 들킬 테니까.

줄줄 흘리고 있는 게 그놈들 눈에는 다 보일 거다. 나 실연했고 상대는 누구고……. 석민이면 뭔지 몰라도 속 썩는구나 하고 덩달아 시무룩해질 테고.

승철 역시 애들이 줄줄 흘리고 다닐 때는 표정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인지, 어떤 맘으로 지금 저러고 있는지 척 하면 딱 하고 알아차리곤 했으니까.

“정한이 형 불러볼까?”

승철은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저었다.

“걔는 2차 같은 데 안 와. 고기 안 먹는다고. 내가 그래서 1차는 무조건 정한이랑 다니지. 고기가 최고거든.”

“고기에 얼마나 환장한 거야, 이 사람들은.”

“맛있잖아! 그거 먹고 힘 내서 살아가는 거라고.”

“그렇게 살지마! 지구! 지구한테 미안해 하라고!”

“아 몰라. 술이나 마셔.”

“섞어먹지나 마.”

“시렁… 안 취하는 걸 어떡행…!!!”

***

툭하면 연락해서 툭툭 건드리던 형이 카톡도 없다. 물론, 전화도 없다.

그러면 인스타라도 열심히 하던가. 인스타를 제일 열심히 하던 사람의 피드가 뚝 끊겼다.

친구들 사진은 종종 올라오는데, 때때로 들어가서 슥뽕 한 세 번 하면 덧글을 달든 하트를 찍든 자기 걸 올리든 하던 승철이 없으니까 지훈은 슬슬 꽁기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하루이틀도 아니다. 삼 주가 다 됐다.

그 와중에 순영이는 얼마 전에 승철이와 술을 마셨다고 해서 지훈의 꽁기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아 승철이 형 어제 엄청 많이 마셨어. 나도 덩달아 달렸잖아.

-어, 그래?

-오늘 널 부른 이유는… 외로워서다. 진짜 이래놓고 술이 그냥 몇 병씩 쭉쭉 들어가니까. 못 따라가, 못 따라가.

-……원래 그 형 사람 없으면 죽잖아.

-맞어. 그건 그래. 요새 맨날 물어보면 집에 있어 이래놓고 술만 마시러 다니나.

거기에 딱 최고점을 찍은 건 이거였다.

민규한테 전해줄 것 때문에 연락 하라고 카톡 메세지를 남겼는데, 한참을 안 읽다가(이건 꽁기하지도 않았다.) 두 시간쯤 후에 답이 왔다.

어 나 지금 승철이랑 술ㅋ 오후1:31

이게 별로 안 오케이.

이 형 진짜 매일 술 마시는 거 아니야? 지금 친구들 돌아가면서 다 마신 듯.

그거 가지고 지훈은 한 번도 서운한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 자긴 알쓰니까.

심지어 술자리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 같이 마시면 어어 그래도 나만 빠질 순 없지 하고 끼는 정도.

그러니까 이건, 정말, 원래 그런 일이다. 술고래가 알쓰를 술자리에 왜 불러.

‘근데 술자리 빼고서도 왜 나한테 전화를 안 하냐고. 맨날 밥 같이 먹자, 운동 같이 하자 먼저 졸랐던 게 누군데.’

지훈은 원래 별 일 없으면 연락 따로 안 하는 성격이긴 했는데, 승철은 안 그랬으니까. 이건 큰 일이 맞았다.

‘자기 입으로 별 거 아니라고 우리 사이 똑같자고 말해놓고 이게 똑같아?’

지훈의 마음이 와그작 종이처럼 꾸겨졌다. 변하는 게 없다며. 모든 게 변해버리고 말았는데…

지훈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술자리 파할 때 되면 그 때 전화나 해봐야지.

지훈은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새벽을 보냈다. 시간이 통 가지 않아서 네모낳고 새카만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때쯤 됐다 싶어서 한 첫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한 일고여덟번 울리는 걸 듣고 지훈은 끊었다.

‘참아라 이지훈. 이거는,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다… 술 처먹느라 못 받는 거다….’

그리고 인내심 깊게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 쉬고, 바닥 보고 한숨 쉬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귀엽고 유치찬란한 벨소리를 한참 듣고 있으니 이번엔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아, 지후니, 지후니. 네. 여보세요.

그런데 그 옆에서 민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최승철 씨. 하.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전화를 받죠?

-아 그만해, 광공 흉내 그만 하라고!

그게 또 무슨 농담이라도 되는지 둘이 폭소했다. 숨넘어가게 웃으며 승철이 민규를 퍽 치고, 민규도 승철이를 퍽 치고, 아주 대형견끼리 물고 깨물고 하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선명했다.

지훈은 웃을 수 없었다.

농담을 알아채지 못한 건 둘째치고, 왜 못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헤비 크림처럼 뻑뻑하고 무거울 뿐이었다.

‘체했나.’

진짜로 가슴 속에 체기가 있다. 답답한 게 영.

요새 계속 답답한 게 덥다고 찬 것만 너무 많이 먹었나 반성하고, 손을 따든 소화제를 먹든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지훈의 입은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나 배고픈데 둘이 아직 마시고 있음 갈게.”

-머??

-콰당창!

휴대폰이 테이블과 바닥에 연달아 부딪치며 떼굴떼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질겁해서 귀에서 휴대폰을 뗐다.

-으악! 내 핸드폰!

-꺄악, 승철이 취했다! 주사가 이런 거였어?

-미끄러진 거야!

스피커 너머로 아련하게 민규와 승철이 서로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혼술하면 안 된다니까.

-야, 야, 야, 시끄러. 좀 조용히 해 봐. 어, 지훈아. 뭐라고?

“거기 갈게. 어디야? 기다리고 있어.”

-어, 그게, 여기가… 여기가……

어버버거리고 있는 승철을 대신해서 민규가 휴대폰을 빼앗아가서 대꾸했다.

-지훈이 형 올 거야? 진짜로? 우리 여기 역 앞에 있는 XXXX야! 한참 더 먹을 거니까 와용. 와 근데 다행이다, 형. 휴대폰 안 깨졌어.

“어. 좀만 기다려라.”

-아니 내 폰 내노으라고!

승철의 앙탈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지훈은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쓰레빠만 신고 지훈은 달렸다.

도착한 가게엔 민규 혼자만 있었다.

“어, 형! 여기여기!”

상심한 대형견처럼 시무룩해있던 민규의 표정이, 지훈을 발견하자 드디어 환해졌다.

“왜 혼자 있어, 승철이 형은?”

“나는! 형 기다렸지이~ 승철이 형은 아까 전까진 있었는데, 진짜 안 좋아보여서 먼저 가라고 그랬어.”

“안 좋아보였다고.”

“그니까. 진짜 취한 거 처음 본다. 안그래도 요새 계속 혼술한다고 그래서 막 밖에 나오라고 한 건데 주량 오버 됐나봐. 이거저거 섞어마시면 그래서 안 된다니까. 와인을 마시려면 딱! 와인을 마시고 소주를 마시려면 딱! 소주를 마시고!”

지훈은 억지로 웃었다.

“나 배고픈데 밥부터 더 시키고.”

“엉! 알았숴!”

“…형은 잘 들어갔어?”

민규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두 발로는 걸었어. 콜택시도 태웠구.”

이 새끼들의 ‘괜찮아’는 대체 어디까지 허용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덜렁 태워보내기만 한 게 아닌 듯, 한 10분 뒤에 택시 기사님이 잘 내렸다는 문자를 보내셔서 민규가 지훈에게도 보여주었다.

“잘 들어갔대!”

“아, 이게 이렇게 알려달라고 할 수 있구나.”

“걱정되잖아, 잘 들어갔는지. 원래 잘 안 취하던 사람이 취하면 더 못 가눠.”

“난 상상도 못해봐서.”

“으하하하! 이것도 사실 술꾼 생정인데~ 승철이 형이 먼저 이런 거 해줬었거든. 처음엔 기사님들도 다 뭘 그렇게 하냐 귀찮게 뭐라고 그랬는데 그냥 새벽이라 너무 걱정된다, 부탁드린다고 허리 꾸벅꾸벅하면 알겠다고 해주시더라. 좋아보였어, 그거.”

가끔 이럴 때면 민규와 승철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 같았다. 잘생기기도 잘생긴 훤칠한 새끼들이 이런 거까지 잘해. 왜 그렇게까지 다정하냐고.

꽁기 +1.

입꾹꾹이를 하고 지훈은 민규와 한 시간 정도 놀아주면서 야식을 먹었다.

새벽 3시가 넘자 민규는 술도 들어갔겠다 졸립고 한지 눈이 슬슬 풀렸다.

“다 먹었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나 안 졸았지?”

“안 졸았어. 근데 지금 너는 잘 시간 같애.”

“웅…”

새벽반이라면서 찐 새벽반도 아닌 것들이…….

새벽 3시쯤은 오후 3시 같은 지훈은 은은하게 웃으며 민규를 배웅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가야할 곳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최승철 집.

왜 그렇게 결심했는지 지훈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충동적이고 혼란스런 결심이었다. 게다가 이 결심이 이루어진 과정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복합적이라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지훈은 대체로 그런 감정을 누르고 제대로 된 이유를 붙여주는 편이었다.

삐진 것 같으니까 달래주러.

무시하지 말라고 화내러.

진짜 별 거 아니고 아무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러.

왜 그랬냐고 궁금해서.

치사해서.

아무리 이유를 붙이려 생각해봐도 결국 딱 정해지는 게 없었다. 그냥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감이라면 감일 것이다.

승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복도에서 아주 희미하게 TV프로그램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적막함에서 그 소리는 야릇할 정도로 발랄하고 들떠 있었다.

그 외에 움직이는 기색이 있을까 지훈은 가만히 귀기울였다.

지훈이 들어왔을 때 팟 하고 켜졌던 복도 천장 조명은 다시 조용히 꺼졌고, 아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서 지훈은 고개를 든 채 골똘히 기다렸다.

‘나 왜 여깄지.’

안에서 사람들이 떼지어 와르르 웃는 소리가 울렸다.

지독하게 낯선 기분이었다.

망설이던 지훈은 결국 벨을 눌렀다.

“형, 나 지훈인데.”

한 2초 뒤에 갑자기 안에서 후다닥하고 티비 소리가 꺼지고 우당탕 구르는 소리가 났다.

‘민규짓하네.’

그러나 몇 초를 더 기다려도 현관으로 달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지훈은 살짝 속에서 울컥하는 걸 참고 벨을 또 눌렀다.

이번엔 안에서 꾸물꾸물하는 것도 없다.

지훈은 벨을 연달아 누른 다음, 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승철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 형놈 새끼의 벨소리가 딱 거실 중앙에서 새어나왔다가 바로 무음 모드로 돌려서 사라졌다.

‘이게 지금 없는 척이라도 하는 거야?’

안에 들어있는 걸 뻔히 아는데, 밖에 뭐 사채꾼이라도 찾아온 것마냥, 대가리만 숨기면 다 숨는 거라고 착각하는 토끼마냥.

기가 막혀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쾅.

지훈은 문을 주먹으로 쳤다.

“안에 있는 거 알아.”

고요한 새벽의 무음에 날카롭게 이런 사채꾼 대사가 울려퍼지니 이웃 세대한테도 미안하고, 현타도 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누가 먼저 잘못했지? 최승철.

누가 먼저 피했지? 최승철.

누가 화낼 만 하지? 나.

근데 왜 나는 이 새끼 집앞에 찾아와서 벨 누르고 전화 하고 문 두드리고 이러고 있는가.

왜 나는 지금 짜증이 벅벅 올라와서 안하던 짓까지 하고서 열받아 죽을 지경인가.

문을 한 번 더 쾅 두들긴 지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

“형은 내가 안 삐지고, 화 안나는 돌부처인 줄 알아?”

당연히 그 순간 승철은 소파에 웅크린 채로 쿠션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혼자 청승 떨면서 TV 틀어놓고 울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지훈이가 우리 집앞에 있어.

승철이 아는 지훈이면 불시검문처럼 이렇게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 만일 오더라도 미리 연락을 했을 텐데.

이렇게 집앞에 갑자기 찾아가서 문 열라고 쾅쾅거리는 행위는, 차라리 승철의 전문이었다. 술 마시면서 아련하게 쏴랑했다 이런 거 읊조리고… 미련 철철 넘치고… 약간 자기가 비련의 어쩌구 되고… 이런 일 하는 거.

얼굴 표정 컨트롤이 안 되고 다 들킬 것 같아서 도망쳐 왔는데 정작 그 피하고 싶은 사람이 우리 집앞에 와?

대체 무슨 일인지, 어떻게 된 건지, 사고 회로가 부정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들켰나? 말했나? 내가 도망쳤다고 화가 났나? 술마셨나? 너 징그럽다고? 내가 두고 간 게 있어서 왔나? 이럴 거면 절교하자고 찾아왔나?

아니, 뭘 다 해도 지훈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되지 못했다.

지훈이는 절교 하는 게 중요하지 수단이 중요하냐며 면대면은 귀찮으니 카톡으로 절교하자고 할 인간이다. 읽든 씹든 차단 당하든 자기 인생에서 깔끔하게 도려내 버리고.

상정 외의 상황이 와버리니 술 퍼마시고 질질 짜고 있던 머리로는 즉각적인 파악이 안 된다.

이 상황에서라면 최강 긍정 김민규라도 긍정적일 요소를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죽여줘 진짜….’

패착은 무수히 많은데 벨소리에 놀라서 티비를 끈 게 제 1 패착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계속 뒀으면 그냥 잠든 척 할 수도 있을 텐데.

하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서 피맛이 났다.

그 때 지훈의 씹어뱉는 목소리가 밖에서 울렸다.

“형은 내가 안 삐지고, 화 안나는 돌부처인 줄 알아?”

그 말에 진짜로, 승철의 가슴이 덜컥 소리 내서 내려앉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어조, 이 목소리에 담긴 모든 감정을 승철은 캐치해낸다.

본능적인 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수없이 세어보았으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대로 보내면 영영 못 본다.

함께 했던 시간들은 싹 사라지고, 흐지부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던 앞날도 싹 사라진다.

벌떡 일어나려다 소파에서 떨어져 두 바퀴 반을 구른 승철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꽥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 30초만, 아니 1분만!”

그리고 그 사이 불도 켜지 않은 화장실로 달려들어가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거울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분명히 울고 있던 거 뻔히 보일 정도로 팅팅 부어 있을 테니까.

‘아니지, 어쩌면 지훈이는 몰라볼 지도.’

택도 없는 생각을 한 승철은 얼굴을 벅벅 수건으로 문지르고… 그냥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현관문을 열러 나갔다.

“음, 푸, 어어… 지훈이네. 어… 나 새벽이라 조심 좀 했지. 어쩐 일이야.”

고개를 수그려 정수리가 정통으로 내려다 보이던 지훈이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할 말 있어서.”

“어…”

승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어어, 해.”

“들어가서 얘기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아…… 내가 술 먹어서 좀 냄새도 나는데.”

지훈이 한없이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승철은 시시각각 지훈의 몸에서 암흑의 오오라가 짙게 풍겨나오는 걸 느끼며 핑계를 쥐어짜냈다.

“그리고, 막, 잘려고 하는 참인데 어수선해서.”

그러나 마른 스폰지를 아무리 비틀어 짜봐야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잠옷도 안 입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

승철은 문고리를 잡아 현관을 막은 채로 수건에 얼굴을 그냥 푹 묻었다.

수건 사이로 웅얼거리는 말이 빠져나갔다.

“너 삐질까봐.”

“이런 걸로 안 삐져. 내가 형이야?”

그리고 인내심이 거의 닳은 지훈이 승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퍽 밀었다.

승철은 살짝 휘청만 하지 밀리지는 않았지만, 지훈이 인상 팍 쓰고 다시 밀치니까 스물스물 뒤로 밀려나갈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지훈은 자기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쓰레빠를 벗어던지고 들어갔다.

그러나 딱 그 앞에서 거실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으이그, 이러니까 아무도 형 집에 안 놀러오는 거야. 앉을 데가 없네, 앉을 데가. 이게 옷장이야 분리수거 쓰레기장이야? 사람 사는 덴 아닌 거 확실하네.”

오우,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는 잔소리.

……좋겠냐? 하나도 안 좋았다.

승철은 현관문을 잡은 채 머뭇거리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고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띠리링 소리가 무겁게도 느껴졌다.

이대로 튀었으면.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너는 뭐 약속 일주일 전에 안 잡으면 오기도 싫어하잖아.”

인상 쓴 채로 발로 술병을 슥슥 밀어내던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지훈의 눈매가 사나워지고 그 안의 검은 눈동자에 불이 확 붙었다.

“할 말 있어서 왔지 왜 왔겠어?”

“어….”

그 할 말을 듣기 싫어서 피해왔는데.

승철은 여전히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지훈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형이 그랬잖아. 평범하게 넘어가라고. 우리는 변한 게 없을 거라고. 근데 이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어… 미안해…….”

졸라 다 망했다.

‘죽여줘 진짜.’

지훈이 말을 돌려하지 않을 걸 알긴 했지만 서론 다 떼고 본론부터 들어가니 스트레스로 목이 콱 메이는 기분이었다.

수건에 고개를 묻은 채 슬쩍 눈동자만 굴려서 지훈이를 보자, 지훈은 여전히 개빡쳐있고 짜증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화난 지훈을 본 건 정말로 드문 일이라 덜컥 두려운 와중에, 슬그머니 삐죽삐죽한 감정도 새어나왔다.

일부러 피한 거 맞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 힘들다고 도망치면서 피하고 그런 건데 왜 넌 그거 안 알아줘. 왜 갑자기 한 번도 안 왔던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난 뭐 좋아서 그랬냐?!

나도!

할 말 많아!

스무 살은 어딘가에 내팽개친 듯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꾸역꾸역 밀고 올라왔다.

목구멍까지 그 서럽다는 소리가 올라와서 승철은 거의 첫 마디의 ‘할…’까지 발음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내팽개친 스무 살은 집에 무사히 처박혀 있던 모양이었다.

승철은 눈깜빡임 한 번에 스물 중후반의 말짱한 정신머리를 다시 챙겨서 그냥 다시 입을 꾹꾹 다물었다.

말이 되지 않는 그 단어마저 알아챈 것처럼 지훈이 한숨을 후 쉬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안 볼 거야? 계속 이렇게 멀어질 거야?”

승철의 고개가 자동반사적으로 도리질쳤다.

그 말의 의미가 와닿은 건 그 후였다.

서운했다.

지훈이 한 말은 승철에게 늘 내재된 두려움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크기가 다른 애정은 언제나 승철에게 미묘한 패배감을 선사했다.

어쨌든 승철은 지훈을 놓아줄 수가 없는데. 자신이 꽉 잡은 손을 놓으면 지훈은 다시 잡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아쉬워하면서도 다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거란 말 같아서. 이 관계나마 울고짜면서 어떻게든 잡으려는 건 자신뿐만인 것 같아서.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훈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겠지만 알콜로 뇌가 터지고 탈진하다시피 울고 난 뒤라서 승철이 자랑하는 예민한 감도 많이 무뎌진 후였다.

승철은 서운함을 꾹꾹 눌렀다.

다 내 잘못이지 뭐.

아니 근데.

허… 아니다. 내 잘못이다. 지훈이 화났잖아.

“안, 안 그러려고 나도 노력하고 있어.”

“이게?”

거기에 담긴 빈정거림에 승철이 고개를 들었다. 억누르고 있던 서러움이 결국 턱 밑에서 치솟아 올랐다.

“나보고 뭐 더 어떻게 하라고. 뭘 더 내가 어떡해야 해? 나한테도 맘 정리 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진짜 평생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너가 먼저, 씨, 어, 그런 말 해가지고……”

“울지 말고 얘기 해봐.”

“야이 나쁜 놈아! 넌 지금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아니, 미안한데 울면서 말하면 잘 안 들리잖아.”

“넌 피 무슨 색이냐? 진짜 이씨, 지금 너가 내 말을 알아들어서 뭐할 거야!”

“말을 들어야 생각을 알 거 아냐.”

지훈은 와중에도 차분한 말투였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지금 형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연애에 맞는 사람도 아니고. 나 가지고 노나? 그런 생각까지 든다고.”

승철은 개같이 삐쳤다.

지금까지 십년간 지훈과 알아오면서 참 수없이 삐졌는데 이만큼 한 마디로 속상하고 서러운 적이 없었다.

“뭘 가지고 놀아? 이게 장난 같애?”

“장난 아니면 대체 왜 이러는데? 갑자기. 난 이런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형이 나한테 없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고백한 다음에 멀어져갔잖아. 평소대로 될 거라며?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평소대로 같아?”

“할 수 있었어, 나는 진짜 할 수 있을 줄…”

승철은 말하다 말고 눈물이 터져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처난 얇은 입술이 기어코 찢어졌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순간이 너무 길었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상대방의 눈을 보며 하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다른지 몰랐을 만큼.

‘사랑해’도 아니고 ‘좋아해’, 그렇게 입밖으로 낸 한 마디가 십년간의 마음보다 더 크게 기우뚱거리게 만들 것이라곤 짐작할 수 없어서.

승철은 정말 자신이 지금까지처럼 잘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 지금까지처럼 못해?

그것 때문에 가장 자괴감이 드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십년간 대체 뭘 해왔지? 어떻게 해왔지?

달라진 건 입밖에 낸 한 마디뿐인데.

지훈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고 믿었었는데.

입밖에 낸 순간 거기에 섞인 희미한 기대를 느낀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너도 날.

어쩌면 아주 약간이라도.

그런 기대를 지훈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승철이 모를 수는 없었다.

그 기대, 그리고 그 기대를 품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기막힘이 가슴에 따끔하게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승철은 눈앞을 손으로 가렸다. 손바닥 안은 더운 눈물로 잠겼다.

조용한 거실에 찰칵거리는 시계 소리만 멀리서 들리고, 오직 승철의 흐느낌만이 간헐적으로 샜다.

지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고 그래? 형이 이러면, 나라고 화 안 나고 안 삐질 것 같아?”

그 말에 승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급하게 저었다.

“그러지 마…….”

차분하고, 모든 일을 무던하게 넘기고, 신경질을 부려도 그게 절대 오래 가지 않는 이지훈이.

“넌 그러지 마….”

그렇게 화내고 돌아선다면 다시는 되돌아 보지 않을 테니까.

제어할 수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숨이 찰 정도로 계속 계속.

동생 앞에서 이렇게 제발 너 가지 말라고 엉엉 울고 자빠진 게 가오 상하고 쪽팔리고 부끄러운 동시에 가오고 나발이고 진짜 가버리면 끝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너 신경 안 쓰게 잘할 거야. 제발, 내가 더 잘할 때까지 잠깐만… 지금까지 그랬잖아. 너도 알잖아. 그냥 나한테 며칠만. 조금만. 이제 진짜 조금만…….”

승철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고 무너지듯이 쪼그라들었다.

“형.”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는…….”

“덩치도 좋은 게 무슨 비 맞은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어. 그러지 마라.”

지훈이 한참 뒤에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왜 나 때문에 이렇게 해.”

두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채 승철은 목메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 너가… 넌 진짜 왜 그러냐. 너 좋아하는 내가 바보 같애?”

“…….”

지훈이 보기엔 그랬다.

바보 같았다.

그동안에 최승철의 또래 남자치고 너무나 과한 치댐을 받아오면서도 이랬다는 걸 짐작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엄청나게 치대는 편이고, 그리고 굳이 최승철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가 인기야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식으로, 로맨스적으로 팔릴 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했으니까.

지금까지 연애를 한 적도 원한 적도 없어서.

저만치 다 가진 인간이 왜 자신에게 쭉 좋아했다 해왔는지 사실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날 가지고 장난치나? 나보고 좋아한다고 하는 게 재밌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면 분명히 지들끼리 행복하게 하하호호 연애의 나라로 갔을 게 아닌가. 솔직히 외로워서라도 제일 먼저 결혼할 것 같은 인간인데.

불쌍하게도, 뭔가 잘못되어 자신에게 사랑했다 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남의 일처럼 지훈은 생각했다.

불쌍한 형.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면 승철이 또 개같이 삐질 것도 짐작했다.

한참만에야 지훈은 차분하게 손을 문질렀다.

“알았어. 시간 가지자. 형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코를 훌쩍훌쩍하면서도 승철이 얄밉게 중얼거렸다.

“또 지금처럼 삐진다고 안 그럴 거지.”

“……누가 누구보고 삐지네 뭐네 하고 있어?”

지훈은 빡친 김에 무심코 몸을 수그려 형의 뻘건 볼따구를 콱 잡았다.

볼은 열로 뜨뜻하고 눈물로 미끈거렸다.

볼을 꼬집히면서도 승철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안 된 어리버리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꺼풀이 부어 덮었는데도 눈동자 크기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뺨도 마찬가지로 새빨갛게 눈물에 젖었는데도 보기만큼 말랑말랑하지도 않았다.

“…!”

지훈도 당황해서 볼을 잡은 채 사고가 멈췄다.

‘아, 이래서 맨날 내 볼따구 잡아늘렸구만. 내가 말랑말랑해.’

지훈은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가 찌릿하게 등줄기에서부터 치고 올라올 것 같아서.

얼른 손가락을 뗀 지훈이 의식적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

“안 삐져. 내가 진짜 형도 아니고.”

승철은 입술을 내밀면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래. 나도 잘 삐지니까 삐지면 엄청 서운한 거 알거든.”

“그걸 일일히 서운해하고 있었, 아니다, 이거 말하면 형 진짜 삐지지. 됐다.”

“너 짜증나.”

지훈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나서 승철에게 물 한 잔을 떠다 주면서 잔소리에 다시 시동 걸었다.

“술 좀 그만 마시고, 청소도 좀 자주 하고. 옷 아무데나 놓지 말고 정리를 하든지 빨든지.”

지도 안 하면서.

그렇지만 승철도 자신의 집이 현재 엉망진창인 건 인정하는 바라서 컵만 두 손으로 동그마니 말아쥘 뿐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거실에 늘어진 옷 뭉치를 대충 주워서 침대 위에 버리고 온 지훈이 물었다.

“수면등은 어디갔어? 형이 무섭다고 나한테도 억지로 사다 안겨놓고.”

“어… 전선에 발이 걸려서 떨어져서 깨졌어.”

“잘한다.”

지훈이 열심히 ‘평소대로’를 시도해주고 있기 때문에 승철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보면, 다시 지훈이 눈에 들어온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번 파헤쳐진 것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오직 시간만이, 다시 무던히 덮을 것이다.

승철은 얼마나 까마득한 시간이 걸릴 지 속으로 헤아렸다.

얼마나 아픈 밤들을 보내고 나는 괜찮아졌더라.

얼마나 은근슬쩍 못된 말을 하고 후회했더라.

승철이 눈물 닦고 콧물 닦고 조용히 쿨쩍거리며 말이 없자 지훈도 더 이상 말을 걸진 않고 어정어정 집 안을 돌아다니며 혼잣말로 투덜거리기만 했다.

“좀 치우고 살지 이게 뭐야. 운동도 안 나오고 이래 먹어가지고 골병 들지. ”

시켜먹은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데다 술병이 무슨 박스째로 쌓여있는 꼬라지가 아주 지층이었다. 치우지도 않았으니 다 보였다.

딱 여행 갔다 와서 퍼먹은 흔적이었다.

“으이그 으이그. 이게 뭐야, 분리수거 좀 잘 해.”

“할 거야.”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하던 승철이 휴지로 팽 하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지훈은 몸을 돌려 현관에 슬리퍼를 신었다.

“됐다, 나 그럼 이제 가본다.”

“이 새벽에?”

승철이 반사적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훈의 눌러 참아 덤덤한 얼굴과 축 처져서 울상이 된 승철의 얼굴이 딱 마주쳤다.

승철은 눈이 마주칠 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내렸다.

“지금 택시도 안 잡히는데 자고 가. 아무 짓 안 해.”

지훈이 삐쭉 웃었다.

“……뭘 하려고 해도 내가 힘으로 거부할 수 있긴 해.”

“아니이 안한다고오……. 내가 안할 거라고. 미쳤어? 걸어갈라면 좀 멀고 새벽이라 택시 안 잡히고 그러니깐… 저번에도 엄청 안 잡혔었단 말야. 아 진짜 뭘 하긴 뭘 해.”

“뭘 그렇게 정색해.”

“너가 나를 쓰레기 파렴치한으로 몰았잖아!”

“내가 먼저 한 거 아닌데? 형이 먼저 그렇게 말했는데?”

승철은 괜히 휴지를 잡아서 또 코를 풀었다.

나쁜 새끼. 이렇게 부득불 찾아와서 사람 마음 아주 휘저어놓더니 이제 자기가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게 싫어서 간다고.

“씨잉….”

가끔 별 것 아닌 것들이 괜스레 마음을 시리게 만들 때가 있다. 그리고 승철에게는 그 별 것 아닌 것들이 엄청 많았다.

별 함의가 없이 그냥 툭 한 말인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평소엔 보통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하고 과도하게 실망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말들.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했어도 너는 그러지 말아야지.

넌 아무런 것도 모르잖아.

내가 무슨 생각하고 사는 지 하나도 모르면서.

“내가, 진짜 그런 쓰레기 아닌데… 진짜 처음부터 너 좋아했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거 알면서, 진짜 나 못 믿구…”

“형이 시간 좀 달라며.”

“그… 건 맞지.”

“봐, 지금도 나 안 보잖아.”

“아니! 아씨…… 됐어, 가라 가. 너 침대에서 자고 나 소파에서 자면 되는 걸 가지구! 가, 가, 가, 그냥 가. 걸어가든 뛰어가든 맘대로 해라. 내 장담하는데 택시 존나 안 잡힐 걸.”

지훈이 마치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짧게 웃었다.

고개 숙인 앞에 단단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열로 빨갛게 익은 턱에 얼음 조각상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손끝에는 별다른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끄는 대로 이끌려 올 것은 아는 것처럼.

승철은 멍청한 상태로 손이 들어올리는 대로 턱을 들었다가 여전히 참지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바로 앞에 지훈의 얼굴이 있었다. 동그랗고 하얗고 엄청 고집스럽고, 그런데 승철이 애타하는 그 예쁜 보조개가 쏙 패여있는.

웃느라 가느다랗게 접힌 눈이 승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울고 술도 부어서 눈도 퉁퉁 붓고 얼굴도 붓고 콧물 닦느라 코도 시뻘겋고 입도 못 다물고… 하여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얼굴을.

“야이씨…”

홱 고개를 돌리려는 승철을 지훈의 손이 단단히 잡았다.

지훈의 손 아래에서 눌린 부분만 하얗게 질리고, 붉은 잉크 방울이 떨어져 내린 것처럼 승철의 양 뺨에서부터 붉은 기가 퍼져 귀뿌리까지 흩어졌다. 붉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목 아래까지 번져나간다.

“아유, 눈 많이 부었네.”

승철이 거기에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지훈이 고개를 숙여 벌어진 입술이 맞닿았다.

***

부승관

승철이 형 감기 때문에 상태 안 좋은 것 같아서 들려보려고 하는데 형도 같이 갈래? 03:33

나도 감기 기운 있는지 목 잠겼는데 못 가겠다ㅠ

부승관

으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 여름에 왜 다들 감기 걸리고 그래?

비타민 잘 좀 먹으라고 했지!!!!! 03:34

에어컨 때문에 그런가봐ㅋ큐

부승관

어휴 내가 못 살아 나이도 있는 양반들이 이렇게 골골대 03:38

너도 내 나이 되어봐라…

아련한 척 점을 찍어댔지만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

그 후로 승관이가 걱정됐는지 엄청 카톡을 날려대고 이쪽도 병문안 가줄까 물었지만, 지훈은 목 조금 붓고 간질간질한 정도라서 괜찮다고 사양했다.

대신 승철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좀 들었다. 누구랑 약속 갑자기 파토내서 연락 해봤더니 앓아 누워 있었고, 가벼운 몸살인 줄 알았는데 열이 오래 갔고, 혹시 그 병인가 해서 병원도 갔다왔는데 감기라고.

지훈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그 날이네.’

둘 중 누군가가 그 날 이미 감기 보균자였던 것이다.

‘형이 앓는 거 보니까 형이었겠지.’

다음 날엔 정한이와 지수가 같이 갔다왔는데 먹을 것도 못 먹고 약도 못 먹고 빌빌거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덕분에 단톡방이 불탔다.

최승철이 감기 잘 걸리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자주 있는 일이었는데도.

하지만 이렇게 오래 앓는 경우도 없어서 승관이 호들갑을 떨고 정한이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감기는 거의 불치병이라도 된 것마냥 불어나기 시작해서 넷플릭스 자체 제작 SF 재난 영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딴 게 아니고 밥을 못 먹는 수준이라고 하니까 다들 흥분한 거 같은데.’

밥지상주의의 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밥을 못 먹는다는 게 심각한 사태의 바로미터였다. 처음엔 ‘감기? ㅇㅇ몸조심’했던 친구들도 ‘밥을 못 먹는다고?’로 바로 심각해지는 것만 봐도.

부승관

나 그럼 한솔이랑 같이 죽이라도 좀 사갈까?

먹고 싶은 메뉴 말해봐 08:14

최한솔

나도 가는 거야?! 08:14

이찬

합의 안 된 내용인 거야? 08:15

지훈은 생각하다가 생각하는 이모티콘부터 날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같이 가

그리고 메뉴는 특능이삼계죽

부승관

아니 너 말고~~~~~~ 08:20

날라차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승철에게선 ‘몰라 그냥 맛있는 거’라는 세계최대난제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에 승관의 날라차기 이모티콘이 또다시 열심히 단체방을 날아다녔다.

“그래서 진짜 특능이삼계죽 사오는 게 맞아?”

“맛있다니깐.”

“지금 우리가 밥주러 가는 사람이 형은 아니잖아.”

“아이. 마싯서. 의심하지 마.”

승철이 문 열러가기 힘들다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공개해버려서 한솔이 문앞에서 숫자 패드를 누르고 들어갔다.

“승철이 형~ 우리 왔어~ 아, 이지훈 마스크 벗지 마. 감기 기운 있다면서 덩달아 또 걸리지 말라구!”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어디까지 낮춰놨는지 꽤 쌀쌀했다.

승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니까 감기 걸리지! 밖은 이렇게 아직 더운데!”

며칠만에 바로 오게 된 승철의 집을 지훈의 눈이 훑었다.

거실은 조금 깔끔해져 있었다. 일단 나뒹구는 술병들이 없다. 그리고 배달 음식 용기들도 없었다. 정리라고 어딘가에 다 쪼르르 줄세워놓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치운 듯이 없었다.

‘어쭈, 다음에 치울 정신이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마음 어딘가가 홱 웅크러들며 차돌처럼 딴딴해졌다.

“형 침대야?”

“어엉……”

침실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났다.

셋이 쫄래쫄래 침실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보인 건 둥글게 솟아오른 겨울 오리털 이불이었다.

그리고 그 이불이 꿈질꿈질거리니까 머리맡에 초록색 병이 늘어서 있는 장면이 딱 포착되었다.

지훈이 나비처럼 폴짝 뛰어가서 이불을 한 대 후려쳤다.

“감기 걸려놓고 술처먹냐??!?!?!?!!”

“으아?!”

갑자기 한 대 맞은 승철이 이불을 말아쥐고 풀썩거리는 와중에 승관 역시 기겁해서 다가왔다.

“술!? 술을 먹었다고? 제정신이야?”

“아니 저거 말하는 거 아냐? 저거 트레비잖아.”

그나마 침착한 한솔이 말해서, 지훈은 퍼뜩 다시 확인했다.

트레비 병이 맞았다. 소주 병이 아니었다…….

“……음, 감기 좀 괜찮아졌어?”

“야 니 진짜…… 이지훈…….”

이불 속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승관이 싹 무시하고 상태 점검을 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 했어야지. 몸은 좀 괜찮아? 열 계속 나?”

“니들한테 맞은 게 아픈데 지금.”

“열 나냐고.”

“니네 꼴찌로 와놓고오…”

“지훈이 형이 감기 기운 좀 있다고 그래서.”

승철이 이불 돌돌 말고 있다가 고개만 쏙 내밀었다. 부스스하게 머리카락이 흩어져서 평소보다 더 대형 개 같은 상태였는데, 그 대형 개는 살짝 삐쳐있고 살짝 당황해하고 있었다.

“감기?”

“어, 나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몰라서 얘들하고 늦게 오자고 했어.”

“진짜? 요새 여름 감기 유행이야? ……아.”

승철의 입이 갑자기 살짝 벌어졌다. 당연하지만 눈동자 역시 격렬하게 떨리며 당황스럽게 승관과 한솔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승철의 시선은 속절없이 지훈의 얼굴에 닿았다가 급하게 떨어지곤 했다.

승철의 눈은 왕방울만해서 그렇게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너무 선명히 보였다.

지훈은 가끔 이럴 때마다 흰자가 보이는 동물은 인간과 개밖에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영장류조차도 시선을 감추기 위해 진화했는데, 인간과 개만이 서로의 눈을 보고 무얼 해야 할 지 상대가 어딜 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진화했다.

단지 누구를, 무엇을 쳐다보는지 알기 위해서.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을, 마음을 알 수 있으니까.

지훈은 눈을 내리깔았지만 그 당황해서 떨리는 시선의 열기가 잠깐씩 눈꺼풀에 어리는 듯 해서 피식 웃었다.

승관이 비닐 봉투를 높이 들었다.

“짜잔, 우리가 승철이 형 위해서 죽 사왔지롱! 입맛에 딱 맞을 걸?”

승철이 다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둘둘 감고 웅얼거렸다.

“죽 맛없어.”

“…챙겨줄 때 그냥 먹어.”

“나 진짜아 이틀째 죽만 먹었다구.”

“목이 부었으니까 그렇지 으이구! 밥 못 먹고 있는다고 해서 우리 다 얼마나 걱정하는데.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뭔 일이야 정말. 메뉴 다른 걸로 골라온 거니까 죽 타령 그만 하고 먹어. 이거 지훈이 형이 강추함.”

“우웅.”

“그럼 이거 냉장고에 넣어놓을게. 시간 맞춰 먹어.”

“같이 안 먹어…?”

“우리가 왜 죽을 먹냐.”

대뜸 서운해졌는지 승철의 입술이 쭉 앞으로 밀려나왔다.

“나 혼자 먹으라구?”

“먹어야지 그럼.”

승관은 비타민 선물로 가져왔다고 내려놓고 냉장고에 죽을 넣어주러 갔다.

“이럴 줄 알았어, 냉장고에 술밖에 없어!”

“따른 고 있오.”

“한 삼 년 전에 먹었어야 할 것도 남아있잖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진심이야 형. 청소 좀 하고 살아.”

승관이 얼굴을 찡그리고 냉장고에서 접시 두 개를 꺼냈다. 위에 랩까지 씌워져 있었지만 그 속은 뭔가가 말라비틀어져서 원 요리가 무엇인지 짐작이 갈 듯 말 듯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한솔이 한 번 들여다 봤다가 진저리쳤다.

“오. 버려.”

“여기서 병균이 나오는 거야, 여기서.”

승관 역시도 치를 떨며 싱크대로 가져갔다.

한솔이 물었다.

“형은 왜 저런 걸 냉장고에 넣어?”

딴 놈이면 모를까, 한솔은 정말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찬 어조였다.

지훈이 끼어들려다가 기침이 나와서 마스크를 눌렀다.

숨을 참고 싱크대에서 봉투에 음식물 버리던 승관이 눈을 흘겼다.

“어우… 여기 병문안 왔다가 나도 감기 걸리는 거 아냐?”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솔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냐, 감기 그렇게 쉽게 옮지 않아. 기도 분비물, 그러니까 타액으로 옮겨지는 건데.”

“푸흑어흐어억! 켁, 켁!”

“이거 봐, 이거 봐! 기침 그냥…! 승철이 형 빨리 마스크 해. 말할 때도 침 튀어 바보야! 마스크 쓰고 다니니까 유행성 감기 독감 싹 줄어든 거 몰라? 기침이 제일 위험한 거야. 그러니까 지훈이 형! 형도 마스크 벗지 마.”

“알았어.”

한솔이 다급하게 승철에게 가까이 붙었다.

“아니, 형. 형 얼굴 봐. 빨개. 열 오르는 거 같아?”

그리고 돌아보자 승철의 얼굴은 정말로 열이 오른 것처럼 붉었다. 승관이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짚었다.

“뭐야, 말 좀 했다고 또 열 오르는 거야? 괜찮아? 약 언제 먹었어? 여섯 시간 지났어? 지금 죽 먹고 약 먹을래? 으이구, 겨울이불을 이렇게 뒤집어 쓰고 있으니까 그러지. 땀 뺀다고 그래도 이정도는 아니잖아.”

“열 아니구 기침해서 그렇긴 한데… 진짜 땀 나긴 해.”

승관이 눈을 흘겼다.

“그러게 누가 이불을 그렇게 겨울 이불로 똘똘 말고 있어, 이 여름에. 미쳤냐구. 이불은 좀 치워. 왜에! 왜 이불 좀 놓으라구! 형이 빨가벗고 있어도 아무 말 안할 테니까!”

“죽을래?”

그래도 덥긴 한지 승철은 마지못해 승관이 잡아당기는 이불을 손에서 놓았다.

전위적인 패턴이 들어간 잠옷이긴 했지만 긴바지 긴팔에 소재도 평범해서, 승관이 짐짓 가린 손가락을 벌리면서 실망했다.

“뭐야… 왜 평범해…….”

“너 진짜 나 낫고 나서 보자.”

“베베베.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섭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좀 마.”

승철이와 승관이 더블로 입술 내밀었다.

지훈도 승철의 이마를 짚는 시늉을 했다. 승철이 움찔했다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지만 손은 사실 이마에 닿지는 않았다.

“착각 아니고 열 좀 있는데. 나도 기침 있으니까 병원 같이 가자.”

“지금?”

“생각 날 때 가야지 그럼.”

“??”

“이따 승관이랑 한솔이 갈 때 형도 준비해서 나랑 병원 가는 걸로.”

“그래? 그럼 우리 지금 갈게. 형들도 빨리 병원 가. 가자가자.”

승철이 당황해서 승관을 붙들었다.

“니네 막 왔는데 그냥 가?”

“원래 문병이란 게 그렇지 뭐. 아픈 사람 붙들고 모하겠어. 아니 좀 나아졌다고 그러더니… 얼른 지훈이 형 따라서 병원 가.”

“보호자가 지훈이 형이야?”

한솔이 당황해하는 승철과 멀뚱한 지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잘 어울린다.”

승철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가 형이거든. 내가 얘 보호자지.”

“원래 덜 아픈 사람이 보호자 하는 거야. 어? 그럼 우리도 같이 병원 갈까? 우리는 감기 안 걸렸잖아. 건강해.”

“지금 이 나이 먹고 소아과 가냐?”

승관이 얼른 검색해서 근처 평점 높은 내과들 이름 불러주다가 소아과도 줄줄이 불러서 베개가 날아왔다.

“진짜 던져! 와! 진짜 던져!!!? 무섭다 무서워!”

“너는 임마 맨날 말로만 무섭다고 그러고.”

한솔의 뒤에 숨은 승관이 헤헤헹 하고 웃었다.

“그게 내 매력이지.”

“…지금은 내가 기운이 없는데 넌 진짜 낫고 나서 보자.”

한 십분은 툭탁대던 끝에 승관과 한솔이 먼저 나섰다.

“우리 먼저 간다.”

초췌한 까치집 머리 꼴로 현관 앞까지 나온 승철이 손을 흔들었다.

“와줘서 고마워. 죽도 고맙다. 잘 먹을게.”

“얼른 먹어. 사랑하는 승관이가 줬다고 냉장고에 오래 보관하지 말구. 병원도 바로 가구.”

지훈이 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내가 잘 데려갈게.”

“어. 형만 믿는다.”

문이 잠기는 띠릭띠릭 소리가 나고 발걸음 소리와 두 명의 대화가 멀어질 때쯤에야 승철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몸을 빼서 지훈과 한 걸음 사이를 벌렸다.

지훈은 약간 반응을 기대하며 승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승철은 뻔하게 얼굴이 빨개지거나, 갑자기 울거나, 민망함에 피식거리거나, 그 날 밤에 왜 갑자기 키스하고 가버렸냐고 따져묻거나 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조정한 얼굴로 삐죽삐죽한 까치집 머리를 쓸어넘길 뿐이었다. 손만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병원 안 가도 돼. 약 받아온 거 남았거든.”

지훈은 시선을 맞받아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갈 생각은 나도 없어.”

내리뜬 채 관심 없는 척 하려던 승철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승관이랑 한솔이한텐 갈 거라고….”

“간병 좀 해주려고. 형 이런 거 좋아하잖아. 머리맡에서 수건 갈아주고 이런 간병 받아보는 거.”

정곡인지 승철은 입을 벌리고 어버버 했다가 곧 꾹 다물었다.

“나 그냥 병원 갈래.”

하지만 지훈은 듣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하나 낚아채서 물에 적셔왔다. 손길은 서툴렀지만 힘이 있어서 괜찮았다.

“흐잇쨔.”

꽉꽉 찬 수건을 팍팍 펴고 거실로 돌아오자 궁금해서 쫑긋거리고 있던 승철이 마치 그런 적 없는 것마냥 팩 고개를 돌리고 투덜거렸다.

“너 간병 해본 적도 없잖아.”

“없지. 근데 인생에 원래 첫번째는 늘 있는 거야.”

“그걸 아픈 사람한테 실행해보겠다고?”

“뭐 좋잖아.”

“환자 죽어.”

“아잇, 뭘 이런 걸 가지고 죽을 생각을 해. 일단 누워봐.”

그리고 승철의 팔을 덥석 잡자, 승철이 화들짝 놀라 퍼더덕 몸부림쳤다.

“차거!”

확실히 팔의 온도가 뜨겁긴 했다. 피부 한 겹 아래에서 석탄으로 불을 피우는 것처럼.

‘열은 진짜 있었구나.’

지훈은 피식 웃었다.

아니 뭐, 자기 때문에 열이 올라서 난리였나 하고 생각도 했는데.

‘뭐라냐. 자의식 과잉.’

하지만 자길 피해서 침실로 몸을 도망가는 시늉을 하면서도 쏙 들어가지 않고 반만 피해선 눈을 굴려 뒤돌아보는 승철을 보면, 이런 생각이 그냥 도끼병 수준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추론 같기도 했다.

“열 나면 좀 식혀야지. 근데 에어컨 온도는 좀 높이고 이불 집어쳐라.”

입술을 삐쭉거린 승철이 홱 침실로 들어갔다.

“지금이 딱 좋거든?”

“좋긴 뭐가 좋아. 감기 걸려서 골골거리면서.”

젖은 수건을 들고 뒤따라 들어가자 보인 것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돌아누운 승철의 뒤통수였다.

“너도 가.”

“가긴 뭘 가. 간병 해준다니까.”

“…싫어.”

지훈은 이제 이 형의 마음을, 갑작스럽게 빨개졌다가 침착해졌다가 웃다가 쌩해졌다가 힘들어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그 사고 회로를 손으로 더듬듯이 알 수 있었다.

그 기분은 마치 캄캄하게 덮였던 안개가 걷혀나가고 윤곽만 어렴풋이 어른거리던 주위가 또렷해지는 듯한 것이었다. 안심과 자신감이 동시에 가슴 안을 채워 등뼈를 세웠다.

나만 속 끓였나 했는데 형까지 속 끓인 게 보여서 안심하고 갑자기 입술을 들이댔을 때처럼, 내가 뭘 해도 괜찮으리란, 혹은 용서받아서 우리가 틀어지지 않으리란 확신.

그리고 저 머리 안에서 대체 뭐가 굴러가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안도감.

‘재활용 쓰레기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훈은 한 쪽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눈의 웃음을 감췄다.

승철은 물론이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이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냈다는 게 부끄럽고 기가 막혀서.

승철과 지훈의 간병 실랑이는 결국 승철이 다시 벌떡 일어나면서 끝났다.

“나 병원 진짜 간다. 가서 딱 떨어뜨리고 만다.”

“약도 남았다며?”

“더 쎈 거 받아올 거야.”

안그래도 열이 올라있는데 갑자기 홱 움직였으니 머리가 핑 도는지 승철이 쇄골께를 짚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냥 누워 있어, 좀.”

승철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가 비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 진짜 왜 이러냐, 나한테. 너 안 그런 사람이잖아.”

눈꼬리와 눈썹이 솔직하게도 축 늘어져서.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게 지금 중요… 아니다. 나 진짜 옷 갈아입고 병원 갈 거니까 좀 나가봐.”

“? 왜? 병원 갈 거면 같이 가자니까.”

충혈된 눈으로 지훈을 노려본 승철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 옷을 갈아입는다고……. 어우 진짜! 이지훈 개싫어 진짜!”

그리고 주섬주섬 자기 옷을 챙겨서 나가더니 화장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엄청 삐졌는지 꺼져 이지훈! 하고 한 마디 더 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지훈에게는 타격이 하나도 없다.

당연하지, 성 붙여 불렀다고 진심으로 서운해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고.

그렇게 부르는 생각만 해도 이틀 내내 뾰로통해져있을 승철이 떠올라서 지훈은 피식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앞에서 옷 갈아입는 걸 꺼려하는 게 웃기고.

‘원래는 어땠지.’

‘원래대로, 평소대로’라는 건 처음부터 승철이 하나 하나 그어둔 선 안이었다. 지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사이 화장실에서 승철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왔다. 이 자식 더운데도 반팔 위에 긴팔 셔츠를 입고 긴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슬쩍 지훈 자신을 쳐다본다.

지훈은 놀랍게도 그 시선을 느꼈다.

“진짜 갈 거야?”

그전이었어도 분명히 최승철은 복잡한 인간이었다. 쌍도남 형아 자아에 막내 딸랑구 자아에 뭐만 하면 섭섭하고 근데 웃음 버튼 잘 눌리고 예민하고 다정하고 충동적이고 게으르고…….

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어떤 감정을 이제 지훈은 안다.

망설이고, 재고, 판단하며 거리를 잰다. 여기까지 했을 때 ‘친구’ 같은지. ‘동생을 대하는 형’ 같은지. 혹은 '짝사랑 하는 사람' 같은지.

지훈은 드러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다가 침대 발치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럼.”

나란히 승관이 검색해서 평점 최고인 병원을 가서 - 그런데 묘하게도 승철과 지훈의 집 중간쯤의 위치인 - 진찰 받고 아래층 약국에서 약 받고 밖으로 나오자 쨍쨍한 햇빛이 작신작신 몸을 두들겨팼다.

“복날도 다 지났는데 왜 이르케 더워.”

“아직 말복은 남았지 않았어?”

“그니까.”

그러더니 승철이 슬쩍 지훈의 옆으로 종종 따라왔다.

“얼른 가자. 바래다줄게.”

“미쳤나? 피차 환자끼리 이러지 맙시다. 가서 자기 몸이나 챙겨.”

“그러니까 빨리 가자고. 너 바래다주고 내가 뭐 혼자 놀러 나갈 거 같냐? 나도 집으로 갈 거거든. 약 먹고 잘 거거든.”

“아니 그냥 헤어지자고 여기서. 딱 중앙이잖아. 형은 저쪽으로 가고 나는 이쪽으로 가고. 오케이?”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가오가 있지 어떻게 동생 안 바래다줘.”

“지금 대낮인데. 그리고 무슨 가오야, 동생도 알아서 집 잘 갑니다.”

마스크 쓰고 비니까지 눌러쓴 최승철은 보이는 게 딸랑 커다랗게 처진 눈밖에 없었다.

“…바래다주면 안 돼?”

그 눈으로 바라보면서 옷을 쥐어잡고 바래다주게 해달란다.

바래다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어지간히 미친 짓인 거 같아서 어이 없는데, 바래다 준다고?

“나 보고 바래다달라고 그, 시위하는 거야?”

“헐. 그런 방법이?”

“그런 방법이? 진짜야? 내가 형 바래다줘야 돼?”

“농담이지, 임마. 내가 너 바래다줘야지, 당연히.”

“당연히는 뭐가 당연히인데?”

“더 실랑이 하지 말고 가자앙.”

그러면서 지가 너무 덥다고 빨리 가자고 이마에 주름잡고 짜증낸다.

가지를 너무 바짝 잘라 그늘 하나 없는 보도의 뙤약볕 아래에서 갑자기 바래다준다고 사람을 못 가게 하면… 짜증을 낼 사람은 내가 아닐까?

좋아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지훈은 이런 실랑이 할 시간에 그냥 집으로 가면 5분은 더 에어컨 바람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떠올랐다.

승철은 약봉지를 든 왼손으로 손차양을 하고 오른손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중간까지만 가자고욥. 뭐였지? 횡단보도 건너서 패밀리 마트 있는 데까지.”

“어… 그래, 알았어.”

당연하지만 패밀리 마트 앞까지 왔어도 승철이 거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럼 여기까지’하고 돌아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어차피 기왕 다 왔는데.”

“아직 1/3이 남았잖아.”

“어차피 바래다주고 있는데 뭐 애매하게 중간까지만 딱 끊고 바래다 주고 그래.”

…내가 이래가지고 연애 안하는 체질이라고.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런 실랑이 할 시간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5분은 더 에어컨 바람 앞에 서 있겠다!”

결국 말해버렸다.

하지만 더워서 할딱할딱하는 데다가 나란히 걸을 때마다 승철의 몸에서 열기가 훅훅 끼치는 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말 안할 수 있는가 말이다.

더워서도 있었지만 진짜로 승철의 체온도 열 때문에 높았다.

-열이 있으시네요. 해열제는 언제 드셨어요?

-확실한 시간은 잘 모르겠어요. 새벽쯤?

한솔이 물어봤을 땐 아까 먹었다며? 그런 짜식은 시선을 보내니까 승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딴소리만 했고.

진짜 아픈 놈이 왜 이러고 있냐고.

지훈이 약간 달래듯이 톤을 바꿔서 말했다.

“해열제라도 가서 먹어야 될 거 아냐. 뭘 바래다주고 말고 할 게 있어, 대낮에.”

“그니까 좀 빨리 가자고. 멈춰서있지 말구.”

“나는 열이라도 없지, 형은 열도 있고 원래 땀도 많이 흘리면서 더운데 마스크에 비니에, 옷은 두 배씩 껴입고 뭐하냐. 그냥 여기서 바로 뒤돌아서 빨랑 가.”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흘러내리면서도 승철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나 진짜 힘들거든? 갈 때 택시 탈 거야. 근데 어차피 기본 요금이니까 여기서 타나 니네 집 앞에서 타나 똑같잖아.”

“그러니까 그냥 택시 타고 니네 집 가라고 여기서.”

“내 맴.”

지훈은 이 등치만 큰 8살 정신머리 형새끼를 콱 쥐어박고 싶은 맘을 참았다. 물론 주먹은 참지 않았으니까 꽉 쥐어졌지만.

‘진짜 이 형이랑 맘이 안 맞네. 대체 뭐가 좋다고 이러는 거야.’

둘 다 몸 상태도 안 좋은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실랑이를 해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다.

빨리 들어가서 죽 먹고 약 먹고 쉬라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다가도 지가 고집을 부려놓고는 기죽어서 기웃기웃 눈치 살피는 꼴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맘대로 해.”

고집은 고집대로 부리면서 기죽은 모습까지 보이는 건 진짜 이상한 거 아니냐? 기막혀.

승철은 바로 베시시 웃고서 쫄랑거리며 지가 앞서 나갔다.

“나도 한 고집하지만 형은 진짜 지독하다.”

승철이 특유의 아학학 하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지. 니 고집이 젤 쎄.”

“형이 그러지.”

“그러고보니까 너는 꼭 나한테 형이라고 잘하네. 이제 애들 하도 본 지 오래 되니까 그냥 승철이라고 하는 게 더 많은데.”

“그래? 그냥 입에 붙어서 그런가. 처음부터 그렇게 불렀으니까. 애초에 이름 부를 일도 많이 없지 않아? 낯간지러워가지고.”

“것도 그랭.”

그런 식으로 별 시답잖은 얘기만 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정말로 굳이 승철이 지훈을 바래다줘야 할 만한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밤도 아니고, 설령 밤이어도 이지훈은 위험하지 않고, 자기가 아파서 쓰러지기 직전도 아니고, 형이라고 해봐야 대단히 어른도 아니고 한 살 차이.

스물 다섯이 넘어가면 이미 다같이 늙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렸을 때의 그 차이는 없는 것만 같다.

예전이었음 진짜 왜 이러는지 이해 못했다. 최승철이 하니까 됐다고 맘대로 하라고 두고 봤을 텐데.

한 번 걷힌 안개는 다시 드리워지지 않다. 해상도를 올린 세계는 깨끗하다. 예전엔 왜 이래? 정도만 생각했을 일도 이제는 안다. 오직 좋아하기 때문에 승철은 이러고 있다는 걸.

지훈의 기억상 최승철은 언제나 이랬다. 먼지 낀 기억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순간이 깨끗이 닦여 거울처럼 비쳤다. 언제나. 과하게 형 노릇을 하려고 들고, 간지럽게 지훈을 챙기고, 엉뚱한 데서 생색내고.

그래, 그 때도 최승철은 이지훈을 좋아하고 있었군. 그런 깨달음.

정말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급발진하는 변덕쟁이가, 사방팔방 팔랑팔랑 튀는 브레이크 없는 인간이 항구적으로 유지해왔던 단 하나.

가슴 안에서 풍선 불듯이 둥둥한 감정이 차올랐다.

‘어우, 왜 이러냐.’

우월감까지 느낄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만큼 큰 무게로 살아있다는 것이, 최승철에게 주요 행동 원리가 될 만큼 큰 의미라는 게.

가슴팍을 잔뜩 채운 둥둥함 때문에 실제로 몸이 들리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꼬였다.

이지훈은 마스크 안에서 심호흡을 한다. 땀이 줄줄 쏟아져 윗입술에 고이는 것마저도 웃겨서 허파에 바람이 빠지질 않는 것 같았다.

이 더위에, 이 날씨에, 열 나서 낑낑거리는데 마스크까지 쓰고선, 어색한 기류 같은 건 무시하고 바래다 주겠다고 찡찡거리는 최승철이 어이 없어서.

‘이 형은 왜 날 이렇게 좋아하지.’

그만큼 돌려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너무나 확실한데.

만약 최승철을 이지훈이 좋아한다고 해도, 같은 무게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드러나지도 않을 거고, 같은 방식으로 돌려줄 수 없을 텐데.

승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더워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그거 셔츠라도 좀 벗어.”

“아니 벗으면 지금 땀 때문에 좀…….”

“그 땀 나는 것 때문에 벗으라고 하는 거야.”

“너는 땀 많은 사람의 고충을 몰라.”

없어지지 않는 사투리 억양의 흔적을 느끼며 지훈은 픽 웃었다.

지훈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소소한 대화는 끊겼다.

“드러가아.”

털레털레 걷는 것도 모자라 다 녹아버린 발음 보니까 개힘든 모양이다.

그러게 누가 힘든 일 자처하래.

지훈이 현관문을 열며 손짓했다.

“택시 잡힐 때까지 들어와 있어. 땡볕에서 기다리지 말고.”

“금방 잡혀.”

“여기 그늘 없어서 지금 이대로 있다간 형이 내 집 앞에서 택시가 아니라 응급차를 탈 것 같아서 그래.”

땡볕에 줄줄 녹은 아이스크림은 매우 갈등하는 것 같았으나, 죽기 일보 직전이긴 했는지 결국 지훈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려봐.”

지훈이 후딱 들어가서 에어컨을 켰다. 어차피 잠깐 외출할 요량이었어서 환기도 필요 없다 싶어서 창문도 다 닫혀있었고 공기는 아직 미묘하게 서늘했다.

희망 온도를 18도까지 죽 떨어뜨리자 바로 찬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승철은 더 이상 들어올 생각이 없는 듯 현관의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거기까지만 허락되었다는 양.

“왜 안 들어오고 그러고 있어.”

“택시 금방 잡히는데 신발 벗었다 신었다 하기 귀차나.”

그런데 택시가 정말 안 잡혔다. 승철은 눈을 떼구르르 굴리면서 앱을 계속 살폈지만 거짓말처럼 아무도 10분 내외의 짧은 택시 이동에는 관심이 없는 듯 배차가 되지 않았다.

민망한듯 승철이 드문드문 변명했다.

“아, 이상하게 안 잡히네. 너무 가까운가?”

“이 날씨에 물 안 먹음 탈수 온다.”

“어어. 고마워.”

승철이 지훈이 건넨 물병을 손이 닿지 않게 조심히 받아들었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생수엔 금방 물방울이 생기기 시작했다.

승철은 약봉지를 한 손에 쥔 채로 뚜껑을 열고 별 생각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가 머리를 흔들고 머쓱하게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녹아서 땀도 흥건하고 온통 발그스름했다.

꼭 축구라도 한 판 뛰고 온 것처럼. 심지어 내내 벌어져있는 입술은 새빨갛고.

승철이 목을 젖히고 물을 그 안으로 쏟아넣었다.

지쳐있던 낯이 시원한 물로 풀어헤쳐지며 생기가 돌았다. 굵은 눈썹이 느슨하게 슥 처진다. 피부 속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충족으로 밝아지는 것을 뚜렷히 알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주고받음이나 복잡한 생각에 의한 충족이 아닌 정말로 단순한 기분이 좋아, 살겠다, 에 가까운 본능적인 충족이었다.

그 날 밤처럼.

지훈은 홀린듯이 한 걸음 다가갔다.

표정이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내내 잊은 척 하고 아무 일 없는 척 했지만 당연하게도 잊지 않았다.

사방팔방 켜놓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러나 새벽 밤이기 때문에 어둑한 푸른 기가 섞인 밝은 그 빛 아래에서 드리워진 얼굴의 음영.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주 잠깐 동안의, 그저 짐승처럼 단순한 충족과 갈망과 만족이 진하게 느껴지던 표정.

입안의 온도. 눈물의 찔찔한 맛. 살짝 돌다 사라진 철의 비린 맛. 방금 전까지 물고 빨아 잇새에 선명히 남아있는 입술의 모양.

지금은 또 어떤 맛일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내가 이 형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어서.

그런 오만하고 순전한 궁금증이 일었다.

지훈은 대뜸 멱살을 잡아 승철을 아래로 당겼다.

승철이 반사적으로 저항하며 몸을 뒤로 꺾으려 했지만 지훈의 손이 목덜미에 닿자 순식간에 뻣뻣해졌다.

땀으로 미끈미끈하고 뜨거웠던 목덜미가 차가워지고 쭈뼛하게 서는 것이 손가락과 손바닥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짜로 피가 식는다는 관용구가 이런 뜻이구나.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뻣뻣해진 승철은 지훈의 손이 이끄는 대로 수그러들었다.

방금 전에 마신 차가운 물 때문에 혀도 미끈거리고 차가웠다. 그러나 곧 다시 체온을 품고 데일 듯이 뜨거워진다. 맞닿은 지훈에게까지 불이 붙었다. 궁금했던 그대로였다.

머릿속으로 쭉 쾌감이 달려올라가 폭죽처럼 터진다. 입안에 달콤한 타액이 고여 넘어갔다.

그 때보다 더 뜨거워서 머리에 열이 퍼진다.

‘아, 또 감기 안 떨어지겠다.’

이지훈은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진한 눈썹, 승철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바로 파르르 떨고 있는 소리가 눈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툭.

승철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물병과 약봉지가 바닥에 추락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물병 안에 남아있던 물이 현관 바닥과 마루에 엎질러져 쏟아지고 맨발가락에 찬 기운이 닿았다. 열기를 씻어내둣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승철이 퍼뜩 지훈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충족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엔 좀 더 제정신이었다.

단지 젖은 입술이 무어라 말을 만들어내려다 무너지는 꼴만이 지훈에게 또렷히 박혀왔다.

“…너는….”

승철이 간신히 소리를 만들어냈다. 단단히 녹슨 목소리였다.

“…….”

“너 왜 이래. 이러면 재밌어? 나한텐 이렇게 해도 괜찮을 거 같아?”

폐부를 찌르는 적확한 질문이다.

그랬다.

이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궁금하니까, 했다.

이지훈이 형을 사랑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실상 고백을 받기 전에도 후에도 승철에게 향한 감정은 별다르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승철의 미스터리를 좀 더 납득했을 뿐이다. 아, 이래서 그랬던가? 아, 저것도 설마?

그러니까 이지훈이 어떻게 해도 최승철이 살펴주고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선을 물릴 걸 알아서.

“미안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이번엔 반대로 승철이 지훈의 멱살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칠 듯이 주먹이 올라오는 걸 보고 지훈은 진짜 맞는구나 싶어서 눈을 꽉 감았다.

맞을 만 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궁금해서 이딴 짓을 했는데, 상대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봐줄 거라고 생각해서 키스했으니까, 당연하지.

지훈은 맞더라도 어금니를 보호하기 위해 이를 사려물었다.

번개처럼 멱살을 잡아 올린 것과는 다르게 승철은 주먹을 든 채 멈춰있었다.

거친 숨소리만 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홱 승철이 지훈을 밀쳐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뜨린 약봉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우리 붙어 다닌 적이 없거든 원래?

브라더 승관

장난해?

지금 우리 회의 주제가 승철과 지훈이 서먹해졌다 이걸로 잡힐 뻔 했거든? 오후 2:30

먼소리ㅠ그건 니 얘기였자나

1초도 안 돼서 날아차기 이모티콘이 다섯 개가 빵빵 화면을 점령했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각각 다른 캐릭터의 주먹질 하는 이모티콘이 세 개쯤 연달아 떴다.

승철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 점점 좆될 수가 있지?’

운세 보면 올해가 무슨 최악의 해로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별자리 운세도 말조심 하세요 착각하지 마세요 이런 걸로 도배되어 있을 것만 같다.

감기 핑계로 며칠, 또 이런 핑계로 며칠, 다음엔 저런 핑계로 며칠, 거의 한 달간 잠수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승철은 아주 많이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매일 똑같이 기계적인 일과를 승철은 못 견뎌하고 계속해서 딴 짓을 하는 타입이었는데, 이렇게 멍할 때는 그런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일과가 오히려 나았다.

그러나 마냥 규칙적이고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관계는 거의 작살났다. 사람 쫌 만나고 기운 차려야지, 하고 꾸역꾸역 잡았던 약속도 잡는 그 순간부터 답답해져서 30분 후에 슬그머니 카톡을 열게 됐다.

-미안 약속 취소해도 되냐

-왜?

-컨디션이 그래

-아니 약속은 토요일인데 왜 컨디션이 수요일부터 나쁘다고 취소를 해

-좀 그래

-감기 아직도 안 나았어?

-미안

자기가 봐도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같아서 머리 박고 사죄 외에는 딱히 더 할 말도 없었다.

근데 만나서 무슨 말을 해.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이 들고 너무 많은 불안이 차지하고 있어서 제정상인 대화를 할 수 없다.

-아 반응 좀 해

-ㅇㅇ

-자꾸 그러면 나 이거 안 돌려준다?

-맘대로 해

-?!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도 나지 않고 멍하기만 했다.

왜, 그런 물음과 동시에 입술과 혀의 감촉이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컨디션 때문에 그러려니 했어도 시간이 지나자 슬슬 승철의 태도가 친구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초광속으로 물밑에서 뭔가가 오가더니 놀랍게도 올바른 추측이 됐다.

승철과 지훈이 사이에 뭔가 있다! 싸운 듯!

그걸 쑤셔보는 총대는 승관이 맡았는지 이렇게 카톡과 전화를 번갈아가며 해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씨발 이래서 진짜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는데.’

승철은 베개에 입을 파묻고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 휴대폰 위로 승관의 장문의 톡이 떴다.

브라더 승관

맨날 우리 보고 사이 좋아서 좋다던 형이 이러면 어떡해. 이 때 시간 있지? 자리 마련해둘 테니까 나와 무슨 일이 있든지 만나서 얘기 좀 해 (…)

그리고 그 장문의 톡으로도 부족했는지 결국 전화를 해서 “말하기 힘들면 듣기만 해” 이러더니 20분 동안 화해 요구를 빙자한 걱정을 쏟아냈다. 제발 만나라고. 만나서 풀자고.

말하다 승관은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참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혼자 힘들면 내가, 내가 같이 갈게. 내가 뭐라도 할게, 응?

승철은 겁을 내는 승관의 마음을 이해했다. 손금처럼 뚜렷하게 그 불안이 전해져온다. 승관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승철 역시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더욱.

나 때문에 모든 관계가 일그러질 지도 모른다.

그건 생각만 해도 정말 무서운 말이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단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승관도 예민하게 승철이 나갈 거라고 결심한 걸 알아챘는지 투정하듯이 말을 받았다.

-알면 잘해!!!! 잘하라구우!

“그렇다고 너까지 올 필요 없고….”

-그래 잘 생각했어. 형이 맨날 그랬잖아. 만나서 싸워. 싸우다가 누가 다쳐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쌍방합의였다고 증언해줄게.

“니네 우리 믿는 거 맞지?”

한편 그 때 지훈은 지수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아니, 방문이 아니라 일방적인 협조의 요구였다. 지훈의 총대는 체력 있고 마이 페이스의 지수였다.

“그래그래. 한강의 치킨 파티 좋지 않니? 나가 보자, 지훈아. 승철이한테 얘기는 안했지만 나도 따라가 줄까?”

“형 왜 그래요.”

뇨롱 웃음을 장착한 지수는 꺾을 수 없었다. 인내심도 있어서 십분째 자신이 못 나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지훈에게 지치지도 않고 ‘응 네 말도 알았어. 근데 아무리 바빠도 지금은 나가야 해’를 시전한다.

도돌이표 X100.

하지만 이지훈은 ‘아 그게 내가 형한테 키스 갈겨서 얼굴 볼 낯이 없거든요?’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지수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해요’라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 지수가 이럴 정도면 지금 상황이 심각하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아니, 실제로도 심각하고.

여전히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확실한 이유가 없어서 지훈은 머리가 빠개지기 직전이었다.

울컥해서 참지 못했다는 게 정답이지만 그 정답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뭣 때문에?

땀과 열에 쩔은 최승철 처음 봄? 그것도 아니다.

근데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지훈 미침? 돌았음?

지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말고. 지훈이 너가 승철이 이길 수 있지?”

“그… 선빵치면 될 것 같긴 한데.”

“Okay, 좋아, 난 너 응원할게.”

이래도 되나? 뭔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아리송함 속에서도 지훈은 지수의 응원으로 결국 밖으로 잡혀나올 수밖에 없었다.

***

늦여름의 한강에는 그래도 시원함이 감돌고 있었다. 열대야는 물러가고 밤공기는 부드럽게 서늘했다. 옷차림도 가지각색이라 반팔, 반바지, 긴바지, 점퍼, 야잠까지 거의 모든 시간대의 옷이 모여있을 정도.

강권으로 어떻게든 화해의 자리에 나온 두 사람도 꽁꽁 싸맨 사람과 짧은 반바지로 정반대로 입고 있었다.

그 사이로 떠나가려 하는 여름의 어색한 바람이 불었다.

“감기는 좀 괜찮아?”

“어, 다 나았어.”

“……다행이네.”

“그치 뭐. 어……애들이 나가서 싸우고 오라 해가지고.”

“나도…….”

함께 해온 십년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아서 둘 다의 머릿속에 동시에 ‘이 새끼들 누가 선빵 쳐서 이길지 내기라도 하고 있는 거 아냐?’ 하는 타당한 의문이 떠올랐고, 그 의문이 표정으로도 드러났다.

그리고 서로의 표정을 알아보고 머쓱하게 웃음이 터졌다.

승철이 먼저 쿡 찔렀다.

“야, 니 편은 누구야.”

“지수 형.”

“나는 승관이가 쌍방합의라고 주장해주겠다는데.”

“…이 새끼가?”

부승관의 시뮬레이션 속에선 쌍방이라고 주장해야 할 정도로 이지훈이 좀 못 때릴 것 같다 이거 아냐?

물론 너 진짜 왜 그랬냐고 급발진한 최승철이 선빵 때리면 매우 불리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역시 먼저 치는 수밖에…….

라고 이지훈이 생각하는 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승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뭐 치고박고 할 거 아니잖아.”

한 박자 늦게 지훈이 오, 맞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고박고 할 각오였나보다. 약간 서운해진 승철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언제 니네하고 주먹싸움 했냐?”

“주먹싸움은 안했지. 안 했지만? 과연? 평화로운 일만 있었는지에 대해선?”

“그만 해라. 어디 자리 앉아서 치킨이나 시키자.”

“좋지이.”

그런데 여기도 사람이 있고 저기도 사람이 있고. 쪽쪽대는 연인들도 개많고.

그럴 때마다 당연하지만 대화는 어색하게 끊겼고 승철은 약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아 진짜 치고받아? 차라리 치고 받아? 그게 나은가?’

그 와중에 지훈이는 귀엽다.

느릿느릿 걸을 때엔 발에 힘이 풀려서 슬리퍼가 발 아래에서 짜닥짜닥 움직이는 것도.

늦여름 밤에 반팔 반바지로 나온다고 모기 기피제 가지고 나온 것도.

은근히 자기 눈치 살살 보는 것도.

진짜 평생에 지훈이 자기 눈치 보는 것도 느껴보고. 살다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한 것에 대해 생각할 수록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러웠다. 저번부터 얘 왜 이래.

지훈도 어색한지 앉을 자리를 찾자마자 엄청 빠르게 배달 어플을 켰다.

“땡초?”

지훈이 화면에 보이는 걸 툭 말했다가 빠르게 말을 바꿨다.

“아니다, 오늘은 숯불양념 먹자. 나 도시락 추가 해서 한 마리면 되겠지.”

“그래 모…. 우리 진짜 늙었어. 위장이 예전 같지 않다.”

약간 발끈한 지훈이 눈을 굴려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아직 일인일닭은 할 만해.”

“에이~”

“할 만 하다니깐?”

그래서 도시락 추가해서 두 마리를 시켰다.

잔물결이 치는 묵직한 한강을 바라보면서 승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다.

대화거리는 떨어졌고, 둘은 벤치 양 끝에서 약간 일행 맞나? 싶은 간격으로 멀찍히 앉아있다.

서럽고 짜증나고 머쓱하고 얄밉고 화나고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죽고 싶진 않았다.

‘이런 느낌으로 계속 가면 되나?’

좀 어색하고, 좀 뜸하고, 좀 거리를 두고.

그렇지만 거의 한 달 간 대화를 안 했던 것은 없었던 일처럼.

차츰 시간으로 잊혀질 수 있도록.

입술 부빈 것 정도야 뭐 잊을 만한 시간이 됐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결국 여기까지 나온 거겠지만.

다행히 앉을 자리를 찾아 헤맨 시간보다 배달 시간이 더 짧아서 둘 다 금방 치킨 한 마리씩을 차지했다.

손에 비닐 장갑도 하나 딱 끼고 다리 한짝씩 벤치에 접어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예전에 어렸을 때 동아리실에서 책상 두 개 붙여놓고 몰래 치킨 뜯고 족발 뜯었을 때가 기억 났다.

그 때도 여전히 밥에는 진심인 친구들이 십대의 지갑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메뉴를 고르고 있으면 메뉴가 맘에 안 드는 척하고 미루면서 계속 지훈이를 찾았던 거.

나중에는 배고픈 민규가 아예 지훈과 좀 늦게 모이는 친구들 - 지수와 명호를 아예 잡아다놓고 메뉴를 골랐다. 메뉴 고르는 데 30분 이상 쓰기 싫다 이거였다.

그 때야 비닐 장갑이고 나발이고 대충 손으로 뜯어먹었다. 닭다리 누가 먹느냐고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매일같이 교복 바지에 치킨 기름이 묻어있고, 떡볶이 국물 튀어 있고, 우동 꼬치로 교복 찢어먹고.

‘그 때 지훈이한테 삐졌던 일 진짜 많았는데.’

그 중 80% 정도는 이지훈이 죽었다 깨나도 모를 만한 일이었고 25%는 쉽게 서운해지는 자신 탓이고(‘근데 너가 먼저!’) 15%는 성향이 달라 자잘하게 부딪치는 일들이었다. 예를 들면, 자긴 지훈이 찾는다고 나갔는데 지훈은 이미 순영이와 짝짝꿍이 맞아서 자리를 떴다거나. 이미 밥을 먹었다거나. 나랑은 안해주던 일을 다른 형한텐 해줬다거나. 나 부르지도 않고.

그렇게 도합 120%로 지훈이한테 삐쳤지만 이지훈은 에궁 그러려니 하세용 하는 타입이라 이 형 뭔가 삐졌네? 는 있어도 살살 풀어준 적은 없었다. 한 5%?

눈치 빠르게 상황을 보고 파악은 하는데, 파악만 하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도리어 그걸 가지고 서운해했다. 이걸 가지고 왜 삐져?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태도 때문에 승철은 더 삐졌다.

-아니 한 마디만이라도 좀 더 해주면 어디 덧나냐?

-뭔 소리야. 뭘 한 마디를 더해. 왜 그렇게까지 말해?

그런 식으로 모든 게 서운하고 짜증났다.

그런데 지훈이를 못 보는 게 더 속상했다. 하루라도 안 보면 허전하고 외로운 건 둘째치고, 조바심이 났다. 나 없는 사이에 누가 얘한테 고백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번개라도 맞고 누구랑 갑자기 사랑에 빠지면 어떡하지. 내가 하려던 걸 누가 낚아챘는데 존나 이지훈이 갑자기 그 일 때문에 사랑에 빠지면.

그러니까 인소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마저 너무 무서워서.

괜히 아련해진 최승철은 17세의 자신에게 속삭였다.

‘야 너 이지훈 한달 안 보고 살기 가능하다.’

근데 술만 처마셔서 간이 좆됨.

인간관계도 좆망됨.

하다못해 부승관이 거의 다 눈치챈 채로 눈물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읍소함.

‘어쒸…… 이걸 가능이라도 봐도 되냐?’

승철은 눈썹을 찌푸리고 비닐장갑만 만지작거렸다. 식욕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얼굴 보고 개지랄은 안 할 수 있잖아.’

서운해서 죽지도 않았다.

‘니 어른 됐다, 승철아.’

입술 까이꺼 궁금하면 좀 부빌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는 건 십대 후반이나 하는 거지 이십대 후반에서 할 생각이 절대 아님에도 승철은 약간 두루뭉술하게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우리 지훈이 씨발 꾸러기 천국일 수도 있지. 별로 스킨십을 좋아하지도 않고 닿는 것도 진심을 다해 Ewww 하는 놈이긴 한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왜냐하면 최승철은 정말로 미친 듯이 궁금했었기 때문에.

사랑이고 나발이고 저 뽀얗고 말랑말랑한 뺨이나 입술이. 슬쩍 웃을 때 길어지는 그 입술이나. 아주 아주 가끔씩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때. 땀 때문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길 때. 얇은 까만 티만 입었는데 가슴팍이 굴곡져 있을 때….

미쳤니? 아무튼 이지훈이야 담백하니 1/10쯤 희석하면 비슷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잘못된 계산식이었다. 하지만 최승철 삐짐 만들기 장인 이지훈이기 때문에, 약간 어이없어도 넘어가는 게 승철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그러려니. 돌땡이를 발로 차 봐야 발만 아프다는 사실을 근 십여년간 함께 하면서 터득했다.

그렇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어른스러움을 다독이고 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폭탄이 터졌다.

“형이 나 좋아해, 그래서 내가 형 좋아한다고 쳐, 근데 그렇게 어떻게 되어가지고 연애를 한다고 쳐 봐. 달라질 게 있어?”

승철은 윙을 집다 말고 치킨 박스를 떨어뜨릴 뻔 했다. 지훈이 재빠르게 손으로 받쳐주지 않았으면 치킨은 그대로 사라질 뻔 했다.

떨리는 손으로 소중한 치킨을 간신히 제자리로 놓은 승철은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 하지 마라.”

“아니 그냥 생각해보라고. 딴 건 둘째치고 우리가… 다 같이 이것저것 엄청 많이 하잖아. 그거랑 뭐 다를 게 있나?”

얘 뭔소리야.

승철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뭔 개소리를 해?

필사적으로 화를 누그러뜨리며 승철이 눈은 웃지 않지만 입만은 활짝 이를 드러낸 으른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어.른. 나.는.어.른.

“그런 말 안 하면 안 돼? 우리 잘 지내보려고 나왔잖아.”

지훈은 태연하게 순살 치킨을 집어들어 입에 쏙 넣었다.

“이대로 어영부영 덮으면 분명히 나중에 또 문제 생기니까. 그러니까 따져봐야 될 거 아냐. 내랑 뭘하고 싶은데.”

지훈이 손짓으로 자신과 승철을 번갈아 가리키며 덧붙인다.

“지금도 우리 같이 하는 게 많잖아.”

승철의 어른 미소가 와작 부서졌다. 이 흰둥이 새끼가. 얘가 진짜 헛소리 해 엄마.

열일곱 먹어가지고 서로 손잡고 하교하는 게 연애 활동의 전부인 그 때도 아니고 스물일곱 먹었는데 이지훈이 헛소리를 해서 최승철은 진짜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장난 하냐? 완전 다르지.”

“뭐가 달라?”

최승철은 할 말 개많은데 참았다. 진짜 눈 튀어나와서 개막말과 취향을 와다다 쏟아놓을 뻔 했는데 한 달 간의 정신 수양이 그래도 한 건 해냈다.

‘명호야 형 이제 명상할 수 있다. 앞으로 제발 가라고 말하지 말아주.’

하지만 인간은 정말 동물인거 같았다.

그냥 내가 짐승이거나.

‘섹스를 어떻게 빼놓고 얘기하냐고.’

최승철은 절대 FWB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니까 부비는 건데 부비는데 사랑이 없을 수 있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물었다가 잘근잘근 씹었다가 어둑하게 반짝이는 한강 너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승철은 액셀을 밟으려는 마음을 참았다. 내 인내심 쩔어.

“나 지금 액셀 안 밟았다. 빨리 칭찬해.”

“형 머리 아프냐?”

“아픈 건 너지, 지금. 그냥 우리 상황 싹 빼고. 누가 연애를 한다고 쳐봐라. 그게 똑같애? 똑같으면 애인은 왜 있겠고 결혼은 왜 하겠는데?!”

“근데 그런 게 형한테도 많아?”

“…미안한데 존나 많다. 됐냐?”

“근데 그걸 굳이 나하고 해야 돼?”

승철은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찔했다. 눈을 감지 않으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서 지훈을 중심으로 후루룩 말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럼 누구랑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 말고 누구랑 하는데? 이지훈 대체 왜 이래.

“굳이는 또 뭔데! 야 나하고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누가 나하고 안하면 죽인댔냐? 니가 이럴까봐 내가 그동안 암 말도 안 한 거야!”

“했잖아.”

승철이 눈을 부라렸지만 이 새끼는 겁도 안 냈다.

“죽을래? 아니다 하나만 해. 꺼질래, 죽을래.”

지훈이 약간 맹하게 자신의 도시락과 치킨을 내려다보았다.

“나 치킨 다 먹고.”

“당장 꺼져 이씨.”

“싫어, 최씨.”

“…이게 지금 이것도 농담이라고.”

“농담 아니고. 형이 나하고 하고 싶은 건 뭐가 있어?”

“이지훈. 화해하기 싫어?”

동시에 눈으로 죽어라고 욕하는데 지훈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치밥을 만들고 있었다. 야무지기도 해라 내 새끼.

“형이 나하고 하고 싶은 거 뭔데.”

“왜 물어봐 그건.”

“나하고 관련된 얘기잖아.”

승철은 날선 투로 쏘아붙였다.

“니하고 관련되어 있으면 꼭 다 알아야 돼? 재밌어 보여서? 남의 상처 후벼파는 일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침착했다.

“참작할 가능성은 있잖아.”

“뭔 개소리야.”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여도 할 수 있으면 해도 되는 거잖아. 뭐 있어. 술 먹는 거 - 난 술 안 먹으니까 됐고.”

지훈이 비닐 장갑을 낀 채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또 뭐 있냐? 영화 같이 보기? 밥 같이 먹기? 드라이브? 놀이공원? 섹스?”

“미친미, 미친 새끼야!”

승철이 거의 날아가다시피 펄쩍 뛰었다. 용케 바닥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가로수에 등을 부딪쳐서 꽥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쪼그려 엎어져야 했다.

큰 소리가 나니까 먼 데에 자리 펴고 앉은 사람들도 뭔 소린가 하고 흘끔거리다가 별 거 아닌 것 같으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으쓰이…”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욕도 잘 안나왔다.

그런 폭탄을 던져놓고서도 여전히 지훈은 태연히 치밥을 제조중이었다. 귀만이 독보적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는데, 승철은 고개도 못 들고 있어서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연애라며. 연애는 그런 것도 포함이잖아. 아 왜 그래, 어린애처럼.”

“미친 놈아 닥쳐 좀.”

지훈이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 치밥을 야무지게 만들어놓고 아직 한 입도 먹지 않았고, 콜라 역시도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반응 보니까 생각 안 했던 건 아닌 거지?”

“미쳤냐?”

“형이 소녀 감성이라 우리끼리 말 안하는 거지, 보통 이 정도는 말해.”

“보통이 문제야?! 그게 보통이야?!”

완전히 수치플레이였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내가 왜.

뱃속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머리를 쥐어싸맨 채로 승철은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찰했다.

이쯤되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지.

승관이가 울고불고 해도 내 마음이 정리 안 됐으면 나와선 안 됐는데,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나왔던 것부터 잘못됐다.

그래, 병문안 왔을 때도 병원을 같이 가지 말았어야 했다. 지훈이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됐다. 조신하게 턴해서 택시가 안 잡혀도 걸어갔어야지.

지훈이 아무리 예쁘게 굴어도 그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나치게 오래도록, 자신의 인생에서 이지훈을 떼어놓고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이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와, 자기 가지고 내가 뭔 생각했는지 하나도 모를 새끼가 진짜 섹스 어쩌구 이러고 있고 진짜…….’

머릿속의 생각을 1/n만 꺼내봐도 질색하고 멀어질 이지훈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진심으로 질색할 얼굴.

물론 지훈은 누군가가 자길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곤 떠올리지 않을 느낌이긴 했다. 심지어 형이 그랬다고 하면…….

‘잠깐잠깐. 그럼 그냥 내가 쓰레기잖아?’

눈을 깜빡이던 승철은 확실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내가 되게 쓰레기 같은 건 아는데 쟤가 먼저…….

…….

됐다, 지구에 폐 안 끼치게 재활용이라도 잘 되게 해주쇼…….

“없어.”

“뭐?”

“나 너랑 할 거 없다고. 됐어. 그런 거 안 해도 그냥, 뭐 더 걱정할 일 없는 거 보면 모르겠냐…….”

승철은 아직 고개도 못 들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도 쪼그려 있으니까 다리가 저렸다.

지훈이 부스럭거리며 비닐 장갑을 벗었다.

“뭘 걱정하는데.”

“걱정… 아니, 너 가까이 오지 마라 지금.”

“왜.”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그런데 이지훈은 최승철을 무서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존나게 말을 안 들었다.

“다리 안 저리냐?”

“그러니까 절로 꺼지라고.”

“팔 잡아줄게, 일어나 봐라.”

승철의 말은 싹 무시하고 지훈이 승철의 팔을 잡았다. 파드득 떨면서 오바를 떨어도 지훈은 익숙하게 다리로 승철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막으면서 팔을 잡았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오!”

“아 그니까. 좀 앉아서 얘기하자.”

“할 말 다 했어 난.”

“치킨은 먹어야지.”

“하아…….”

더 거절할 수도 없어서 지훈이 잡아당기는 대로 일어나던 승철은 다리가 찌릿찌릿해서 비틀거렸다.

지훈이 혀를 차는 시늉을 하면서도 부축했다.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야. 형. 난 그냥 좀 궁금한 거야. 형이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좀 궁금하다고.”

승철은 s로 시작하는 단어를 모두 머릿속에서 쫓아내기 위해 애쓰며 은근슬쩍 지훈의 손을 뿌리쳤다.

“뭘 궁금해. 다 말했잖아.”

“다 말했다고? 아닌데. 내가 보기엔 남았는데?”

“다했다고오!”

“나하고 뭐 하고 싶은데. 말로만 없다, 없다 이러고. 그게 말이 되냐? 왜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지 충분히.”

지훈은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 신경질적으로 비닐 장갑을 부스럭부스럭 꾸겼다.

“표정 봐. 형이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좀 그렇다고. 대체 그 머릿속에 뭘 들고 다녀서 그러나 하잖아.”

“장난하냐.”

“진짜 지금까지 형이 한 일이야 뭐 다 내 손바닥 안이었는데.”

“내가 무슨 그거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손오공이야?”

“쫌 비슷했지.”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승철의 입술이 삐쭉해졌다.

니가 뭘 알아 내가 알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니 머릿속을 다 읽으려고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동시에 그렇게 이지훈을 꼼꼼히 보고 있기 때문에 알기도 했다. 이지훈도 자신의 바운더리 내에 있는 것은 한 톨의 미지 없이 싹싹 알아놔야 하는 타입이다. 다만 사람과의 관계에 예민히 천착한 최승철과는 결이 다르게, 사람 그 자체에 대해.

이를테면 최승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먹을 수 없는 게 뭔지, 자주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뭔지, 커피 종류는 뭘 좋아하는지.

무심한 듯 세심한 새끼.

“…내가 내 속을 까발려 보여줄 수도 없고 어쩌냐.”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속을 왜 까발려 보여줘. 미쳤냐.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궁시렁 대꾸하고 있던 승철의 몸이 지훈의 말에 움찔 떨었다.

“내가 키스한 건.”

지훈은 여전히 치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비닐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꾸기고 있었다. 침침한 가로등 아래에서 봐도 손의 모양은 예쁘고 가지런했다. 비닐을 구기는 그 예쁜 손가락 끝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형이 뭐 만만하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놀리려고 한 거 절대 아니고.” 지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 하면 어떤 표정을 하는지 궁금해서.”

“뭔 소리야.”

“형이, 나하고 다른 걸 하면 어떤 표정일 지도 궁금해.”

지훈과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지훈은 표정 변화도 없다. 그저 서스럼 없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직 손가락만이 희미하게 떨고 있고.

‘아, 손가락….’

승철은 자신도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쥐다가 땀 때문에 손바닥이 축축하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온몸이 시끄럽게 울려서 손을 바지에 문대도 제대로 닦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형이 왜 그런 표정인지도 신기한데.”

문득 지훈이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살짝 웃었다.

“그러니까 묻는 거야. 형이 해보고 싶은 게 뭐야?”

심장이 하도 뛰어대니까 땀은 줄줄 흐르고 목이 타서 승철은 한참만에 아무 말이나 대꾸했다.

“그러니까 너는 나 안 좋아하구… 그냥 궁금한 거라고.”

“형이니까 궁금한 거야. 내가 낯선 사람한테 그런 게 왜 궁금하겠어.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인데. 근데, 내가 다 알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걸 말 안하고, 내가 모르는 얼굴 할 줄 알고 있으니까… 내가 답답해. 내가 몰랐다고. 내가 형을.”

지훈이 문득 입술을 다물었다가 몸을 뒤로 물렸다. 어느새 너무 승철 쪽으로 몸을 기울여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뭐 됐고 뭘하고 싶은지는 형한테 달렸지.”

“싫어……. 왜 내가 그래야 되냐. 돼써어, 그냥 친구로 지내. 형동생 하면 되잖아.”

지훈이 고민하는 시늉도 안 하고 빤히 승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나 사랑 안 할 수 있냐?”

당연히 그럴 수 없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한 달 전만 해도 몰랐으면서.

등줄기에 기분좋은 짜릿함이 달렸다.

승철은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왜 그러냐?”

“솔직해지려고. 솔직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또또 이거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가 형 맘에 걸리고 삐지는 거 있으면 형이 한 세 달 처박혀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듣자마자 빡은 치는데 정말 딱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넌 뭐 내가 하자고 하면 뭐… …그, 어디까지,…”

“섹스까지 하겠냐고?”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좀 마.”

“근데 섹스고 뭐고 형한테 달렸다니까.”

“거짓말 쫌 하지 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마시고, 내쉬고.

다시 크게 들이마시고… 그런데 내쉬는 숨에 갑자기 화가 섞였다. 가슴에서 기체처럼 확 하고 올라온 화는 금세 눈물샘을 터트렸다.

승철은 짧게 반성했다. 명호야, 나 아무래도 명상은 못하는 거 같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커다란 눈망울은 금방 그렁그렁해졌고 열이 뻗친 대로 승철이 삿대질을 했다.

“진짜! 니는 자꾸 나한테 달렸다고 그러는데 나한테 달리긴 뭐가 나한테 달렸냐고. 나는 너 가지고! 다 할 수 있거든? 내가 씨발 성인군자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 가지고 뭐 생각하고 살았겠냐고! 딸… 아니 그니까 내가 뭔 문제가 돼, 니가 날 가지고 할 수 있겠냐갸 문제지!”

숨을 끊을 새도 없이 와다다 뱉어놓은 후… 현타가 쫙 밀려왔다.

내가 무슨 말을. 내가 또 무슨 말을.

‘최승철 이 새끼는 한 번 액셀 잘못 밟아서 다 들켜놓고 꼭 또 이러기 있냐?’

하지만 지훈은 부담이니 질색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눈을 기분좋게 사르르 접으며 하하 웃었다. 순식간에 임계점을 뚫었던 승철의 화가 깜짝 놀라 갈 데 모르고 사라질 만큼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뭘 웃어.”

“웃기잖아. 진짜 형은 나 잘 안다고 해놓고 왜 모르지.”

울컥한 승철의 눈썹이 곤두섰다.

“뭐래.”

지훈의 얼굴엔 진짜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도 개구지게 웃어서 보드라운 양뺨에 보조개가 깊이 패인다.

“형이 하자고 하면 나도 다 완전 가능하지. 형하고라면.”

승철이 당황해서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니 지금 내가 무슨 말 했는지 잘 모르냐?”

“아니? 잘 알아. 그래서 굳이 나하고 해야 되냐고 계속 물어봤잖아. 사랑이든 섹스든 다른 사람하고 해도 되는 거지. 근데 굳이 나하고 해야 되면.”

지훈이 공처럼 뭉친 비닐 장갑을 바닥에 툭 던졌다.

“하자고. 형이 하고 싶은 게 뭐든. 이런 얘기 왜 못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지? 나 그렇게 잘 안다고 맨날 그래놓고.”

승철의 사고 속도는 언제나 빠른 편이고 눈치도 개빨랐지만 이때만큼은 외적으론 턱이 떨어지고 내적으론 심장이 떨어져서 하염없이 바닥을 더듬느라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뭔 왜고.”

“너 나 안 좋아하잖아.”

지훈이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바다에서도 그랬지. 이 형 맨날 어차피 나 그렇게 안 좋아하잖아 이 말 달고다니네? 형을 왜 안 좋아한다고 생각해.”

“나… 나만큼은 아니잖아.”

“됐고 형이 뭘 보고 날 좋아한다 하는지 모르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나 진짜 이 형 궁금하네. 그 안에 무슨 도식이 있어서 어떻게 굴러가고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왜 날 좋아한다고 그러지? 왜 날 좋아해서 섹스까지 하고 싶다고 그러지? 근데 나도 뭐 궁금하니까 같이 해보자고. 솔직히. 관음증도 없고그렇다고 상상하는 것도 별로 자신은 없어.”

말은 분명히 들었는데.

머릿속에서 이해가 안 가고 조약돌처럼 덜그럭거렸다.

딱 한 가지는 알았다.

이지훈도 급발진했어.

불안과 초조로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 꿈에서 그랬듯이 이 자식 태연하게 모든 걸 뛰어넘어 가버렸다고.

“……니 이래가지고 결혼 홀랑 할 거 같다 생각했다 내가.”

“결혼은 또 뭐야. 전에 그거? 청첩장만 주면 축의금 안 준다고? 와 내 꿈이나 꾸고 있고 진짜 이 형 나 너무 좋아하네.”

“꺼져.”

물론 지훈은 꺼지지 않았다. 그냥 살짝 상기된 채로 입 다물고 웃기만 했다.

여전히 앞에는 단 한 점도 집지 않은 치킨이 놓여있고, 그 치킨의 냄새와 늦여름의 시원한 강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살짝 물비린내가 났다. 별보다 더 많이 뜬 야근자들의 눈물이 한강 너머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한강 위에 잔물결을 만들었다.

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아 형 답답해.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멋있게 확 팔 잡아채고 그럼 확인해보러 가자. 이래야 되는 거 아니냐.”

“아씨, 너는 진짜….”

지훈이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승철의 팔을 낚아채듯 잡아 당겼다. 쉽게 뿌리치기엔 힘이 들어가 있고, 그렇다고 전력으로 도망가면 뿌리침 당해줄 것 같은 그런 힘.

“우리 집 갈래?”

승철은 팔을 내민 채로 눈치를 봤다.

“너 궁금증 다 풀리면 그럼 우린 끝이야? 볼 장 다 보고?”

“해보지도 않고 꼬치꼬치 따지긴. 우린 안 변할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지훈이 너무 무심해서, 승철은 뚱하게 지훈의 다른 팔을 잡아당겼다. 지훈이 아이, 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얼굴이 가까이 붙고 코끝이 닿았다.

주고받으며 달라지는 사랑의 크기를 몰라서, 너무 오래동안 사랑해서 눈앞에 뵈는 게 없어서 용감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키스했다.

떨리면서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 안에서 또 다른 맛이 났다.

긴장과 흥분의,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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