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앗줄

내 모든 것을 대가로서

그 책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이 엉켰다. 말 그대로, 아픙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신의 가벼운 발걸음하나로, 손짓, 눈빛 그 하나로 내가 계획했던 미래 그 모든 것이 망가졌다. 남은 건 계획이었던 무언가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시선. 신의 손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뿐.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나에게 남은 건 그 길뿐이다. 그 이외에는 찾을 수 없다. 신의 손길은 무자비해서 자신의 의사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원하면 나는 가야 한다. 그것이 운명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꿈을 꾼다. 차갑게 식은 준이를 내가 보고 있다. 그의 내장을 꺼내 어머니에게 번제물로 바치는 꿈.

일어나서 생각한다.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을 제물로써 바쳐야 한다.

아니야, 안 돼. 그 애만큼은 죽일 수 없어.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절대로 죽일 수 없어. 그 애만큼은 절대로 안 돼. 절대 절대 절대 제발, 그 애만큼은!!!!

비명과 수면의 반복. 머리를 잡고 제발 그만두어달라고 울부짖는다. 제발, 그 애만큼은 안된다는 자신과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속삭이는 자신으로 내가 둘로 쪼개져서 안에서 썩어들어간다. 스스로 목을 조여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도 죽음을 바랄 수 없다. 죽음조차 자신에게는 사치이다. 신이 바라지 않으니까. 차라리 죽게 해준다면 편할 텐데 그 애를 죽이는 꿈을 어째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걸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절대 죽이고 싶지 않아.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멈출 수 있다면 이따위 목숨 몇번이고 버려줄 것이다. 그렇게 바라는데도 꿈은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힌다. 차라리 매일매일 나온다면 적응이라도 할 수 있다. 그 끔찍한 환상을 어떻게든 입을 다물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꿈은 항상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안정이 조금이라도 시작될 때쯤에 다시금 꿈은 고개를 든다. 그렇기에 항상 비명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언제나 나는 내 세계를 내 손으로 부수고 있다.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싶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지옥과 천국을 믿지 않는다. 삼천세계와 삼도천을 믿지 않는다. 삶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단지 태어남으로 인해서 시작되고 죽음으로서 꺼지는 거다. 연극이 다음에 상영된다고 해도, 완벽하게 동일할 수 없듯이. 인생도 같은 거다. 하지만.

만약 지옥이 있다면 지금 이곳이 아닐까 싶다.

내 사랑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 애의 그 눈을 보고 싶지 않아.

비 내리던 날, 자신을 바라보던 장맛날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아.

그 애가 슬퍼하는 걸, 상처 입는걸, 괴로워하는 걸 전부 보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 애를 구할 수 있지. 자기 손에서 그 애를 떼어 놓아야 한다. 내가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애는 날 따라올 것이다. 난 준이를 알아. 그 애는 날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떨어져야 해. 평생 그 애를 못 보게 된다고 해도, 괜찮아. 그 애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난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 그러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겨우 생각을 돌린다. 제발 제발 제발 생각해야 해. 어머니의 찬가가 아닌 다른 걸 생각해야 해. 방법을.

이서린?

아니야 그 자는 아무것도 신경 쓰려하지 않을 거야. 본인에게 이득이 아니니까.

전재호?

나라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의무감으로 돕기는 하겠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겠지.

한 설?

차라리 이쪽보다는 전재호가 더 낫겠지. 본인과 이서린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무엇보다 간단하게 끊어버릴걸? 그놈은 내가 알아. 분명 그럴 거야. 가면 쓴 위선자니까. 만에 하나 준이가 이서린과 무언가 트러블이 발생한다면 그 천칭이 어디로 기울어지는 눈에 안 봐도 선해. 그놈은 절대로 준이를 봐주지 않아.

아,

한명 있군.

민성하

사람이고자 하는 사람. 주변의 모든 것에도 어디까지나 사람이고자 하는 사람. 어쩌면 숭고하게까지 보이는 멍청이. 강직하고 우둔한 자. 요령은 그다지도 없어서 풍량에 휘둘리는 배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무엇보다 무거운 닻을 가진 녀석. 연민이든, 본인이 말하는 의무든 뭐든 그 녀석은 절대 준이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한 번 말을 걸어두면 계속 눈에 밟혀서 한 번씩 이야기하겠지. 무엇보다 그놈이 나서면 위의 세 명을 따라올 거야.

하하, 정말 추하네. 진짜 이렇게 추하구나. 나는 정말로 추하기 그지없어.

그렇게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그 사람에게 엎드려 절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당연하게 그걸 받아들이고 있어.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고, 애원해서라도 나는 내 사랑을 지켜야 하니까. 그 녀석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아니까. 차라리 준이를 내 손으로 상처입히는 것보다는 내가 죽는 게 훨씬 낫지. 그래서 너만이 나에게 내려온 동아줄이구나. 하하, 아니 목줄인가?

겨우 손을 들어서 핸드폰을 찾아 메세지창을 연다.

키보드 자판을 누른다.

내 그대에게 내 목줄을 넘길 테니까 하나만 약속해주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결국 무엇으로 전락하더라도, 준이를 지켜주길. 그 애가 다시는 상처받지 못하게 더는 장맛비를 혼자서 우산 없이 맞지 않도록 해주길. 그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내가 죽길 바란다면 기뻐하면서 죽을 거다. 그대가 그 약속 하나만 지켜준다면.

준이를 지켜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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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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