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국서 (1)

“금혼령을요?”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브라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비를 폐위하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금혼령을 내린다더구나.”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이라는 작자가 순회연주를 온 유랑악단에 푹 빠져서 말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여자와 결혼해 왕비로 앉혀놓고, 국정은 사랑놀음하다가 신나게 말아먹는가 싶더니, 후사를 생산하자마자 왕비에게 소홀하다가 왕비에게 반복적인 폭행을 당하던 끝에 왕비를 폐위했다는 건 저잣거리 세 살짜리 아기도 줄줄 외고 다니는 소문이었다.

“한심스러운 일이군요. 레베카도 준비해야겠네요. 이 기회에 제발 정무 좀 똑바로 돌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측 사람들을 심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죠.”

나라는 빠르게 망해가고 있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아브라함과 정계에 발을 아직 들이지 못한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펠릭스의 눈에도 빤히 보이는 사실이었다. 시인이며 화가며 조각가며 극작가들은 좋아 죽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농사, 의료, 예술, 과학 분야는 진흥. 법, 주거, 외교, 경제, 교육 부분은 시궁창. 전쟁이 아직 안 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멍청한 왕은 아니었지만 도무지 균형 잡을 줄을 모르는 왕이었다. (펠릭스는 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왕자가 아주 어릴 적에 자신의 조부가 왕자를 좀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버지?”

펠릭스는 고개를 들어 아브라함을 바라본다. 답이 없었다. 아버지 앞에 차를 한잔 따라주고 펠릭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말이다, 펠릭스. 아무래도 우리 집에서는 말야, 레베카보다는 네가 궁에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아, 조금 날짜가 당겨졌나요?”

1년쯤 뒤 펠릭스는 외교부장관 제 3 보좌직에 임명되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흠-하는 소리를 내고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그게 아니다. 레베카, 이미 약혼을 했어…”

“네?! 언제요?!”

“금혼령이 내리기 다섯 시간 전에 이미 디리클레가 와서 청혼을 하고 갔다…”

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레베카가 간택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없다면 결혼을 통해 이 망할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기사, 왕이 여자에 아무리 미쳐 있다고 해도 고를 여자가 차고 넘칠 텐데 레베카를 굳이 고를 이유도 없고.)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아쉽게 됐지만… 그래도 괜찮은 왕비를 새로 맞으시겠죠. 너무 이상한 왕비만 아니면 좋을 텐데 말예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다. 코지마 리스트가 벌써 이름을 올렸다더구나.”

“뭐요? 코지마 리스트요?!”

리스트! 잘 알려진 예인 가문이었다. 아, 가문이라기엔 뼈대가 있는 건 아닌데 그 가주인 프란츠 리스트가 현재 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엄청난 총애를 얻었으니. 왕이 왕자던 시절, 아버지가 궁에서 근무하는 하인이라 뺀질나게 드나들면서 교분을 쌓았다가 이렇게 낙하산이라 해도 될 정도로 팔자를 폈다지. 삼대째 (엄밀히 따지자면 펠릭스는 왕을 모신 적은 없지만) 국가에 충성하는 멘델스존 집안과는 출발선이 딴판이었지만 왕이 리스트를 거의 편애하다시피 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리스트는 일찍 결혼을 해-물론 그 아내가 금방 그를 떠나버렸지만-딸을 뒀는데, 그 딸의 성격이 여간 표독스러운 것이 아니더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그런 사람이 왕비가 된다, 사익을 위해 왕은 휘둘리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런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코지마 리스트. 그 여자는 절대 안 돼요.”

더군다나 펠릭스와 한 번 저잣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펠릭스에게 무척 심한 모욕을 가한 적도 있었던지라.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겠다) 펠릭스는 왕의 관심을 받을 만하면서도 국모로서 적합한 여자를 열심히 머릿속으로 찾아보지만, 너무 나이가 많거나 이미 임자가 있는 사람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뒷배가 너무 약해 간택에서 서류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래, 안 되겠지.”

“상소문이라도 올려볼까요? 아무리 왕비를 폐비로 만들었다지만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새로 금혼령을 내리냐고?”

펠릭스는 가만 고개를 숙이고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는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말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현재 왕이라는 인간은 자기 사랑을 위해서라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법도고 뭐고 여자에 정신이 팔려 칠렐레 팔렐레 할 게 뻔했다. 아브라함은 그런 펠릭스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연다.

“이 아비가 네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다.”

“말씀만 하세요, 아버지. 무슨 일이든 아버지와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이 한몸 바치겠습니다.”

고결하고 충심 깊은 학, 멘델스존 가문은 늘 그랬다. 고지식할 정도로 올곧고 충성을 다한다. 법도, 도리, 규칙, 정도, 모두 멘델스존이라면 좋아하는 낱말들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드리죠.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약간의 희생이 따를 게다.”

펠릭스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약속’ 은 목숨만큼이나 무거운 말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낮춘다.

“네가 후보자로 이름을 올리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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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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