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국서 (2)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펠릭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리를 높였던 게 언제였더라, 열네 살 때쯤이었나 누나가 몰래 자신의 일기에 손을 대서 낱낱이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던 때였던 것 같다. 심지어 아브라함 앞에서는 그 정도 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펠릭스는 집이 떠나가라 경악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아버지!”

아버지에게 ‘미친’ 이라는 말도 처음 해봤다. 하지만 지금 아브라함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정신이 나간 사람의 것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미친 소리였다. 진짜 미친 소리였다. 여자에 미친 왕에게 국서를 들이라 하자고? 왕비의 업무는 후사를 생산하는 것이잖은가! 당연히 여자밖에 할 수 없는 일인데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아버지, 저 엄연히 남자입니다! 어릴 적에 머리 좀 길게 하고 다녔다고 이런 데 등록할 자격이 못 된다니까요!“

아브라함은 진정하라는 뜻인지 모호한 손짓을 해 펠릭스를 자리에 앉힌다. 펠릭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당혹감과 수치심, 분노를 참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 원칙을 보자. 뭐라 적혀 있니.”

“18세에서 25세 사이인 자의 결혼을 금하며… 아버지, 이건 당연히 여자랑 남자가 결혼할 걸 상정하고 있으니까 이 나잇대의 여자가 결혼하지 못하면 이 나잇대의 남자도 결혼할 수 없다는 뜻에서 성별을 굳이 안 밝힌 거잖아요.”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족자를 다시 말아서 아버지 앞에 놓는다. 아버지가 바보도 아닌데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펠릭스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설령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제가 등록을 해 봐야 왕이 저를 뽑겠어요? 관리들이 서류심사에서 바로 탈락시킬 걸요.”

“그렇지 않아. 왕이 프란츠 리스트와 그렇게 친한 게 둘이 자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더구나.”

“아, 아버지. 어째서 그런 더러운 가능성을 입에 올리세요…”

한숨이 끊이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상대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처럼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펠릭스는 이마를 짚고 눈알을 굴린다. 평소라면 아버지 앞에서 절대 하지 않을 무례한 행동이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참을 수가 없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남자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같은 성별끼리 결혼을 합법으로 만들기까지 했잖니.”

“틀린 결정은 아니지만 얼마나 어이없는 결정이었는지 몰라요. 결혼이라는 건 당연히…”

“세상에 ‘당연히’ 라는 건 없다. 펠릭스, 지금 이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이 보이지 않니? 이미 발을 뺀 내게도 보이는 것이 곧 발을 들일 예정이었던 네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국가를 위해서라면 너 하나쯤 희생하겠다는 그 결심은 이 정도 수치에도 발을 빼는 얄팍한 것이었던 게니?”

“어차피 제가 될 리는-”

아브라함은 펠릭스의 어깨를 탁 잡고 고개를 숙인다.

“아들아. 아버지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 부디… 부디 최선을 다해다오. 부디 이 망조가 든 나라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최선을 다해 국모의 자리를 채워주려무나. 이 아버지가 네게 간곡히 부탁한다. 이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은 펠릭스의 두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펠릭스는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아버지를 바라본다.

불가능하다. 절대 가능할 리가 없다. 여리여리한 여인네들 사이에 끼어 그들의 몸가짐을 흉내내고 왕을 만족시킬 자신 따위 없다. 아양을 떨고 환심을 사는 것도 그는 배운 적이 없다. 신부라면 응당 해야 하는 것들 따위 모른다. 신부수업을 할 때 가장 처음 배우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면, 이 나라를 구할 희미한 가능성이라면, 펠릭스는 자존심 따위 갖다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명예, 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보같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펠릭스 자신 한몸은 국가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 정도 희생은,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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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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