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국서 (3)
규방이란 건 이런 느낌이군. 금혼령이 내려진 지 1개월, 펠릭스의 속성 신부수업, 아니 신랑수업이 시작된 지도 1개월이었다. 부정을 탈 수 있으니 외부 접촉 금지, 앉아서 수나 놓고 베나 짜시오.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말씨는 나긋나긋하게, 걸을 때는 그릇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사뿐하게. 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걸 파니와 레베카는 해냈단 말이지. 펠릭스는 시를 쓰던 펜을 옆에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
정말 미친 짓이었는데 더 미친 짓까지 일어났다. 아브라함이 힘인지 돈인지를 좀 썼는지 서류심사가 통과됐다. 아무리 대충 보고 서류를 넘긴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진짜 미친 짓이었다. 1차 서류심사에서 평범한 집안은 다 걸러지고 어느 정도 권력이나 연줄이 있고 품행이 괜찮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남는데 본인은 대체 왜 통과했냔 말이다. 남자잖아. 이름이 여자로 착각할 만한 뭐, 외제니나 유진이나 예브게니라든가, 카미유라든가 그런 이름도 아니고 멀쩡하게 펠릭스인데. 아무리 멘델스존이라는 성이 익숙해서 프리패스를 줬다 해도 그 앞부분의 이름은 좀 읽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소식을 들은 파니와 레베카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특히 파니는 ‘아, 펠릭스가 좀 예쁘긴 하지’ 라는 무심하다 싶을 정도의 태연한 반응이었어서 펠릭스는 순간 본인이 가족에게 뭔가를 잘못했다든가, 아니면 본인이 인생을 좀 잘못 살아 온 건 아닌지 하는 고민까지 했다. 심지어 레베카는 ‘아, 그럼 여장하는 거야?’ 라고 묻기까지. 객관적으로 키가 크다든가 어깨가 넓고 떡 벌어졌다든가 한 체형은 아니라서 사실 시키면 불가능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여장을 해 봐야 금방 들켜서 왕을 속인 죄로 목이 달아날 바에야 그냥 좀 미친놈 소리 듣고 끝나는 게 나았다.
어쨌든, 여기서 만일 최종선발까지 가게 된다면 관직에는 절대 못 나간다. 비록 왕비가 되지는 못해도 왕의 여자…그러니까 펠릭스의 경우에는 왕의 남자…로 인정받았다는 뜻이 되므로 어디 후궁에 박혀서 분칠하고 수다떨며 사치를 즐기는 여자들 사이에 끼어 있어야 할 테다. 그러니까 떨어질 거라면 제발 2차에서 떨어뜨려 줬으면.
2차 선발에는 약 100여명의 후보가 남는다. 관리들이 가정방문하면서 후보자들을 살피고, 가장 자격이 훌륭한 후보자 10명을 선발한다. 그 10명은 최종…‘면접’이라 해야겠지, 를 거친다. 2차 선발에서 합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이고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안타까운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지만, 멘델스존 저택을 방문한 관리는 펠릭스에 대해 ‘여자였으면 뒷방에 두고 나 혼자 보고 싶어했을 테다’ 라는, 희롱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펠릭스를 최종 면접까지 보내버렸다. 펠릭스는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재력과, 은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정계에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덕분에 여기서 떨어지면 꼼짝없이 결혼도 못 하는 신세가 됐다. 원래 펠릭스는 나라 안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훌륭한 신랑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에는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밖에 안 나갔지만 이제는 나갈 수가 없었다. 나가면 사람들이 다 수군거렸다. 정말 저게 최종면접까지 간 그 ‘남자’ 냐고. 미치겠네, 정말. 남자인데도 최종면접까지 갔다니, 얼마나 예쁘길래, 나도 실물 좀 보자-라든가. 아버지가 돈을 얼마나 부었을까-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남자인 건 진짜 미친 거 아니냐-라든가. 별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차라리 빨리 최종면접이 와서 끝나버리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가장 설레발을 치는 건 레베카였다. 본인 결혼식 준비하는 마냥 레베카는 한 서른 벌 정도 되는 옷을 늘어놓고 펠릭스의 면접 복장을 고르고 있었다. 레베카, 파니, 어머니 레아까지. 거의 인형놀이라도 하는 표정이었다.
“하이고… 그래도 예쁘고 여리여리해보이는 게 없으려나.”
“엄마, 이 분홍색 정장은 어때요? 레이스랑 프릴도 꽤 많은데.”
“하늘색도 괜찮은 것 같아. 목에 다는 리본이 예쁘거든.”
“노란색은 너무 유치해 보일까?”
“오빠는 좀 유치해 보여야 해요. 늘 너무 심각하잖아요.”
펠릭스는 돌아서서 한숨을 내쉰다. 다 쓰레기같은 옷들 뿐이었다. 화려하고, 무의미하고,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옷밖에 보이지 않는 옷들뿐이었다. 저딴 옷을 만드는 데 옷감이 몇 미터나 쓰일지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정작 본인들도 그렇게 화려하게 입는 타입이 아니면서, 검소하고 수수하게 입으면서 본인한테 갑자기 인형놀이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만해요.”
“그럼 뭘 입고 가려 그러니, 옷이 없잖아.”
펠릭스는 팔짱을 끼고, 고집스럽게 선언한다.
“전 늘 제가 입던 대로 입고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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