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대공님은 까칠하고 싶지 않았다 (2)
북방은 만만찮은 곳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발령해달라 청한 걸까? 펠릭스는 두꺼운 털 코트에 몸을 숨기고 에엑취, 하며 세게 재채기한다. 사실 펠릭스 본인이 태어난 곳도 대륙 전체를 따지자면 북쪽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이런 설원은 아니었다. 이딴 땅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뭐냐 묻고 싶었다. 미네랄이라도 묻혀 있는 건가? 그나마 국경지대가 너무나 추워서 다행인 점이라면 적군도 안 온다는 거다. 이 북쪽으로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인지도 의문이라서 침략해 봐야 별 의미도 없다, 그런 거 아닐까 싶었다. 펠릭스는 태생이 ‘서브남주’ 인지라 군대와는 크게 인연이 없었고, 호위 몇 명 정도만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천재적인 머리가 있었고 필요하다면 전략가로도 대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건 한 37번째 회차쯤이었던 것 같다. 군대를 통솔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제때 의식주를 챙겨주고, 규칙과 규율을 철저히 하되 개인적인 선에서는 자비롭고 온화하면 된다. ‘북부대공이 되겠다’ 는 의지와 타고난 다정다감함이 결합된 그는 의외로 재능 있는 지휘관이었다. 고용인들과 병사들은 펠릭스를 존경했고 잘 따랐다. 나름대로 이 추위만 빼면 나쁜 생활은 아니었다.
펠릭스는 달력을 넘겨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해 본다. 주말에 사냥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그닥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피와 살육에 굶주린 병사들에게는 상쾌한 기분전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도 아마 뭔가 보여줄 만한 큰 동물을 하나 잡아와야 할 테고 말이다. 그 생각을 하자 속이 약간 메스꺼워졌다. 굳이 필요 없는 살육을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북부대공이란 대체 뭘까? 남들에게는 차갑지만 내 사람에겐 따뜻한 그런 남자? 시린 손을 이렇게 문지르면서 입김을 호호 불고 있는 남자는 아니겠지 싶긴 했다. 다시 한 번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펠릭스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문질렀다. 북부의 인프라는 빈약했다. 병원도 약도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이곳의 인프라를 지속 가능하게 재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하루가 또 지나갔다.
기가 막힌 사격 솜씨로 벗겨낸 곰 가죽 카펫을 바닥에 깔아 놓는다. 아니 사실 곰을 진짜 잡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느냐다. 이 곰도 진짜 곰이 아니라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조 곰이다. 사격 ‘실력’을 보여주면 되는 거지 곰을 굳이 진짜 잡을 필요는 없다. 시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이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을 통해 10점, 10점, 10점을 연달아 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병졸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사격 실력을 가졌다, 그런 맹수를 잡을 정도의 용기가 있다는 점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핵심이니까.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누르는 두꺼운 털 망토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 의자를 뒤로 젖혀 눕는다. 그렇게 사냥도 하고 엊저녁 고민 끝에 밤이 새도록 편지를 써 좋은 조건을 제시해 수도권의 의사들에게 연락도 했다. 쓸 만한 의료기기들과 의약품 개발에도 힘을 써야 했다. 덕분에 잠을 거의 설친 판이었다.
“대공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깥에서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하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펠릭스를 두려워 하는 것도 같았고 좋아하는 것도 같은 하녀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로자라 부르는데 원래 로자문데였던가. 펠릭스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쉰다. 지금이 몇 시지? 오전 열 시인 걸 보니까 하루치 편지가 또 돌아올 시간이었다.
“들어오십시오.”
아, 역시 이 말투도 어색하다. ‘네, 편히 들어오세요’ 정도로 말하면 되는데 굳이 이렇게 불필요한 격식을 차리는 것도 펠릭스의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고압적인 북부대공에게는 필수적인 성격 특성이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이지만 그래도 고용인들을 아끼는 엄한 주인’ 뭐 이런 이미지였나. 북방 사람답게 하얀색에 가까운 금색 머리와 창백한 푸른빛 눈의 로자가 편지 꾸러미 두 개를 가득 들고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고마워요’ 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펠릭스는 손짓으로 ‘나가 보라’ 는 뜻을 전한다.
편지가 뭐 이렇게 많이 와, 북부대공이 원래 이런 직업이 아닐 텐데-하나하나 편지를 읽어 보던 펠릭스는 절반 가까이는 청탁임을 알게 된다. 보통 변방 좌천으로 인해 이곳으로 오게 되는 북부대공들과는 달리-심지어 때로는 그 좌천의 이유가 반란일 때마저도 있었는데-펠릭스는 자청해서 온 것이었고 권세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좌천이 아니라 자원이었으니 당연히 곧 중앙에서도 불러들일 거라는 예상을 하며, 이 북방 파견을 능력을 쌓을 커리어 선택으로 판단한 다른 귀족들이 아부와 청탁을 쏟아내고 있었다. 북방에 짱박혀 있겠다고. 여주인공이 찾아올 때까지. 펠릭스는 이마를 문질렀다.
나머지 편지들은 대부분이 펠릭스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그러니까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대한 답장들이었다. 국가의 허락도 있었고, 귀족의 우려와 평민의 찬반이 뒤섞여 있었다. 펠릭스는 자리에 앉아 정성들여 하나하나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눈두덩이가 슬슬 따가워졌지만 쉴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계속해서 답장을 썼다.
편지 가운데 하나는 치유사길드 길드장 루이 베를리오즈 남작이 쓴 것이었다. 그곳에 정착시키는 건 무슨 길드장에게 권한이 있고 한 건 아니라서 데려다 줄 수는 없지만, 제시된 금액을 봤을 때 치유사 다섯 정도를 연수 개념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예상보다 긍정적인 답장이었다. 하긴, 이번 세계 설정상 루이 베를리오즈는 권력의 중심에서는 벗어난 귀족이었지만 동시에 자선사업에는 가장 힘쓰는 귀족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그 아버지 대에서 상당한 비리를 저질렀다가 왕실 중심부에서는 축출됐었던가. 뼈대는 있는데 망한 귀족인 셈이다. 슬하에는 딸을 셋 뒀다던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감사의 답장을 전하기 전 베를리오즈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던 펠릭스의 눈이 마지막에서 세 번째 줄에 잠시 머무른다. 대충 요약하자면 ‘대신 한 가지를 부탁드리고자 하는데, 더럽게 말 안들어처먹는 딸이 맨날 힘들다, 돈없다 징징거리고 있어서 진짜 고생이 뭔지 알게 해줄 겸 북방으로 보내버릴까 생각중인데 혹시 받아줄 수 있다면 고맙겠다’ 라는 소리였다. 치유사 다섯 파견이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펠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아 답장을 작성한다.
이게 이번 이야기의 도입부가 되겠군. 펠릭스는 펜을 내려놓고 답장을 봉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여자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와 주고 있다면, 이번 회차는 펠릭스가 드디어 빌어먹을 탈출에 성공할 수 있는 회차가 될 테다. 아니 아니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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