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아이

세 번째 이름

타로아이 고록


Q. 마지막 장기말을 둘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응? 생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데... 그냥? 확신? 이건 여기니까... 이제 끝나겠구나. 뭐~ 그런거?”

Q. 그럼 지금까지 추측만으로 결정을 내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지?

“응! 없었어~ 난 확실하지 않은 거 싫어하거든. 그래서...”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건 함부로 결정하지 않아.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들어와 눈꺼풀을 자꾸만 간지럽히는 것이 못내 성가셨다. 눈살만 찌푸리며 이리저리 뒤척이던 아이카가 결국 항복해선 입을 크게 벌려 하품했다. 아직 졸음이 묻어 있는 눈을 꿈뻑거리면 옆에 누워있는 흐릿한 인영이 점차 선명해졌다.

“... 너무 푹 자는 거 아니야?”

손을 뻗어 뺨 부근의 상처를 스치면 풀어진 눈썹이 평소처럼 매섭게 꿈틀거리다 금방 돌아왔다. 대신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손에 슬 들어가는 힘. 까슬한 손바닥이 등허리 피부에 닿는 감각이 간지러웠는지 아이카의 작은 웃음소리가 이불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예 몸을 옆으로 돌려서는 초록빛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콕콕 코끝을 눌러대던 손으로 턱 아래를 간질여 보기도 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졸음에 겨워 한껏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귀찮으니까 그만해라.”

“뭐야~ 일어나 있었잖아~”

잘 자는 걸 깨워버린 행위가 고의였다는 듯 밝은 목소리 톤에 장난기가 듬뿍 담겨 있었다. 양팔을 벌려 몸을 붙여선 껴안는 행색이 딱 놀아달라 떼쓰는 고양이다. 팍 미간을 찌푸린 채 서슬 퍼런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코타로를 보고도 아이카는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팔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확인한 코타로가 머리를 베게에 푹 묻었다. 한 팔은 여전히 아이카의 허리에 올린 채다.

“에에ㅡ 또 자는 거야?”

“겨우 얻은 휴가인데... 늦잠 정도는 상관 없잖아.”

“타로짱도 맨날 일찍 일어나서 나 깨우면서...”

“아침도 안 먹고 자겠다고 하니까 그러지... 오늘은 늦잠 자도 되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둬라.”

툭 내뱉곤 다시 눈을 감은 코타로를 가느다란 눈으로 째려본 아이카가 입술을 샐쭉였다. 허나 침대 위에서 애인과 뒹굴거리는 걸 좋아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라 풀썩 등을 매트리스에 댄 채로 눈을 끔벅였다. 잠은 다 깼는데.

“어제 많이 힘들었어?”

“그냥 좀... 귀하신 분이 오신다 해서 한 달 전부터 오너가 난리였을 뿐이야. 난 평소대로 했어.”

“에이~ 그래도 좀 긴장했지?”

“아니라니까... 그만 더 자라.”

푹 한숨을 내쉬던 코타로가 큰 손을 뻗더니 그대로 아이카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잔머리가 뺨이며 이마에 묻어선 흐트러지자 아이카가 고개를 돌리며 뚱한 얼굴로 머리칼을 정리했다. 꿍얼거리는 목소리에 큭큭 웃음소리가 번져 섞여 들자 아이카의 눈이 옆을 향했다. 역시 더 잘 생각 없잖아. 베게에 반쯤만 얼굴을 가린 채로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코타로를 보자 아이카는 뭐라 불평하려는 것도 까먹어 버렸다. 남들은 오래 사귀면 아무리 잘생겨도 콩깍지가 벗겨져 질린다는데, 자신은 왜 이 얼굴이 자꾸 멋져 보이는 거지?

괜한 심통은 곧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이라 작은 손으로 쭉 코타로의 뺨을 잡아 당겨버리는 아이카였다.

“아야! 아프잖아! 어이!”

“귀여운 여친 덕분에 잠 다 깼지? 응응! 아이카짱 대단하네~”

“나 참, 알았다, 알았어. 일어난다 내가. 배고파서 그러는 거냐?”

그대로 허리를 일으키려는 코타로를 아이카가 뒹굴 몸을 굴려선 막아냈다. 어이없는 웃음을 짓던 코타로가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나가려고 하자, 이번엔 아예 코타로의 허벅지 위에 상체를 올려선 무게를 실어 꾹 눌렀다.

“... 어이, 이게 뭐 하자는 거냐. 얼른 일어나라며?”

“타로짱 가면 침대가 허전해~ 추워~”

“지금 5월인데.”

“... 그 얘기가 아니잖아!”

아이카가 손등으로 팍! 코타로의 명치를 때리면 아픈 척 으윽, 소리를 내며 풀썩 허리를 숙이던 코타로가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고는 다시 침대에 눕혔다. 옆으로 누워 한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아이카를 내려다보는 눈가에 아직 그을린 피곤이 묻어 있었다. 괜히 깨웠나?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 아이카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흩어진 코타로의 머리칼을 정리해 뒤로 넘겼다.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 속의 시린 빛이 지금 자신만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카는 여태껏 애써 가벼운 애정행각만으로 억눌렀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톡, 터져버릴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터트리는 쪽이 자신이 될 것이라는 기묘한 불안감과, 직감.

“조금 더 잘래? 이번엔 안 깨울게.”

“왜? 나랑 더 놀고 싶은 거 아니었냐.”

코타로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선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겨냈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자 따듯한 공기의 흐름에 아이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어 눈을 감은 채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안긴 채로 가만히 있던 아이카가 꾸물꾸물 움직이며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하는 김에 한쪽 다리도 허리에 올려버리고, 팔로 껴안으며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가 된 채 실실거리면 가슴팍의 온기를 느낀 그가 습관적으로 아이카의 뒷목을 간질였다.

맞닿은 살결이 따듯했고 눈꺼풀을 건드는 햇빛도 이제 귀찮지 않았다. 창밖에서 일찍 일어난 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결의 목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 자락을 사랑스럽다고 표현할 수가 있을까. 아이카는 퍽 자신이 문학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은 수없이 겪었다. 그러나 아이카는 오늘, 지금, 이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어.’

깨닫는 순간 드는 감정은 놀랍게도... 가슴을 가득히 채워오는 따듯한 충만감이었다. 아이카는 명치, 아니지, 좀 더 관용적인 표현으로는 ‘심장’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그것이 코끝까지 올라와선 금방이라도 팍 터져 나올 거 같은 기분.

이 세상에서 절대 숨길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하나는 재채기고, 또 하나는...

“저기, 타로짱 말이야...”

자는 걸까. 말을 꺼냈지만 사실 자신이 어떤 얼굴로 코타로를 바라봐야 할지 몰라 아이카는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가, 눈을 감은 채 다시 고개를 들었다가... 결국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서 가만히 있는데 심장이 이리 빨리 뛰는 건 처음이네. 답지 않는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스웠는데도 평소처럼 잘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긴장해 버렸다는 거겠지. 천하의 나가야마 아이카가.

“그... 내 이름, 알고 있어?”

“...뭐?”

하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는지 가만히 듣고 있던 코타로가 번쩍 고개를 들어 아이카를 바라보았다. 힐끔 곁눈질로 보랏빛 눈동자를 굴린 그녀가 그냥 가만히 들으라며 손으로 그의 머리를 꾹 눌러 내렸다.

“아니... 맨날 너, 라고만 부르니까...”

반쯤 잠이 깨버린 코타로가 고개를 돌려 아이카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팔로만 감싸 안고 있던 것을 팔뚝에 힘을 주어 꽉 한번 껴안으니 그녀가 답답하다며 버둥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어쩐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얼굴을 손으로 잡아, 자신쪽으로 돌려냈다. 당황한 티가 역력한 동그란 표정에서 두 눈만이 빠르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이카.”

손끝으로 얼굴을 덮은 파란 머리칼들을 걷어내는 손길이 섬세했다. 아이카는 그가 자신을 이리 대할 때마다 눈길을 피하고 싶어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귀한 사람이었나? 딱히 자존감이 낮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앞에만 서면 어쩐지 자꾸만 과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손이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엄지가 눈가를 쓸자 이젠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지금의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어색하게 웃으면 눈앞의 코타로의 표정이 되려 진지해진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내려 아이카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대로 목덜미에 코끝을 부비는게 이쪽도 지금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보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때, 아이카는 언제나 웃음이 먼저 나와버리고 말았다.

“푸핫! 그거 다행이네~”

“... 너, 설마 날 그 정도의 바보로 알고 있던 거냐?”

“으음~ 약간?”

이 녀석이. 괘씸한 마음을 그대로 벌려 살짝 아이카의 목덜미에 잇자국을 내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몸을 떨어트리려 어깨를 바르작거리는 걸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코타로가 이번엔 아이카의 귀 뒤쪽을 혀끝으로 길게 핥아 냈다. 흐읏, 자신의 약한 부근을 건드리자 무심코 옅은 시음을 흘린 아이카를 보며 코타로가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악당 같은 얼굴. 확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서 떨어트리자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힘이 들어가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더우니까 좀 떨어져~”

“아깐 내가 없으면 춥다며?”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

코타로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선만 아이카에 고정하다 푹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아이카는 직감했다. ‘아, 또 날 위해 물러나는구나.’

평소에는 직설적이고 둔감하던 그도 아이카가 이렇게 무언가를 피하려고 할 때마다 이리 날카롭게 눈치채곤 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일이라던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공허감으로 살았는지에 대한 얘기를 굳이 코타로에게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마 코타로도 그걸 느끼고 있었기에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거겠지.

그렇지만 오늘 아이카가 꺼내려는 주제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여태껏 그녀가 맺어오거나, 끊어 버리거나, 완결 내버린 인간관계와는 다른... 도전이라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 타로짱은, 내 이름 다 기억하고 있어?”

“또 그 얘기냐? 알고 있다니깐.”

“아니, 내 성씨까지 말이야.”

다시 돌아온 주제가 뜬금없었는지 코타로가 다시 눈을 떠선 아이카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아이카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은 늘 모든 일의 결과를 너무도 쉽게 예상해버리곤 했다.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읽어냈으니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 충동적으로 행동했었다. 자신을 즐겁게 해줄 다른 결과를 만나려나 싶어서. 그건 기대라기보단 긴 체면에 가까웠다.

“당연히 기억하지. 나가야마 아이카.”

“그 전에 것은?”

“... 오오즈키 아이카.”

“딩동댕~ 아하하... 타로짱, 의외로 기억력이 좋네...”

자신의 말끝이 떨려오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까. 코타로의 손이 천천히 아이카의 손을 맞잡았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한 얘기는 그에게 자세하게 한 적이 없다. 그 일이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적이 없다고, 그리 믿고 싶었기에. 그러나 아이카는 코타로와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깨닫게 되어버렸다. 인간이 얼마나 온기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채워진다는 것의 안정감. 앞으로의 미래를 예상하지 못해도, 즐거울 수 있을거라는 이상한 예감.

“내 이름 말이야, 지금까지 두 번이나 바뀌었잖아? 동창회 때 내가 결혼했다고 알던 사람도 있었단 말이지~... ”

그땐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이었던 거 같아. 아이카는 코타로와 함께 지내면서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이 늘어갔다. 처음엔 미미한 불안이던 것을 온전히 행복을 직감하게 하는 기대로 바꾸어 준 것은 오직 한 사람의 덕택이다.

이것을 쭉 어떤 말로 정의해야 할지를 고민했었어.

“나, 이름... 또 한번 바꾸고 싶은데 말이야. 이번엔 쭉 영구소장으로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이젠 알 것 같아. 너와 함께하면서 유일하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니까.

“내 세 번째 이름, 타로짱의 것으로 하게 해줄래?”

맞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마 지금 자신의 얼굴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을 것이다. 수줍음이라던가, 부끄러움이라던가... 아니다. 이건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심장의 고동이 선연한 느낌이 새롭고 불편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말로써 전달하고 싶은 감정이었다. 너는 늘 내게 확실하게 전해주었으니까. 나도 조금은 솔직해져야겠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내쉬면, 아이카는 놀라우리만치 안정된 긴장감을 느꼈다.

“나는, 분명... 타로짱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함부로 너와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부디 허락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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