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H

꽃 한송이의 무게

동화도 타인도 믿지 않는다.

내 세상은 그만큼 한가하지 않았기에. 용사가 단지 정의와 용기만으로 사악한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한다던가, 진정한 사랑만이 왕자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다던가. 진부함과 유치함을 넘어 위선적이까지 하지 않나. 현실에는 선한 의지를 응원하는 마법도 영원불멸한 사랑도 없다.

그저 생존을 위해 가면을 쓰고 등 뒤를 노려 칼을 꽂을 뿐.

“아가씨~ 또 그렇게 멋대로 나가시고...”

“에헤헤...”

집사는 허둥거리며 자신이 모시는 이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안경 너머의 금안이 일순 날카로워져선 길거리를 훑어낸다. 동냥하던 노숙자가 빈 깡통에 든 지폐다발을 본 후 화들짝 놀라 이쪽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돈이 많은 건 사실인가 보군. 남자는 건조한 감상을 남긴 채 입가에 미소를 짓곤 제 작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네필라 아르텐. 자동차 사업부터 시작해서 이 나라 주권의 기둥 하나를 받치고 있는 대기업 아르텐의 외동딸. 아버지는 경제를, 어머니는 정계를 주름잡고 있으니 말 그대로 공주님이라고 해도 좋겠지. 남자의 임무는 이 작은 소녀의 신임을 받아, 그걸 배신하는 것. 정확히는 그녀를 납치해서 부모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전형적인 악당의 역할이다.

‘생사의 여부는 상관 않으니...’

“혼자 나가버리시면 여차할 때 제가 지켜드릴 수 없으니 외출할 일이 생기시면 저와 꼭 동행해 달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머릿속에 떠올랐던 명령의 세부사항을 떠올리며 그는 자연스럽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뒤에서 조용히 그녀가 길거리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 둔한 온실 속 화초에게는 들키지 않은듯 했다. 철이 없는 건지 단순히 호기심이 많은건지... 네필라는 거리를 천천히 걷다가 구석에 핀 들꽃을 구경하거나 산책하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등의 쓸데없는 일을 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하굣길의 감시를 피하고 하는 일탈이라기엔 지극히 사소한 것들.

그리고 지금, 구걸하는 거지에게 자기 지갑에서 지폐다발을 뭉텅이로 꺼내선 그대로 건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딱히 그의 입장에선 어찌되든 좋았지만 일단 사용인은 주인이 과오를 저지르는 것을 보기만 해선 안되니까. 여기서 애써 꾸며놨던 집사의 자질이 들통나면 끝장이다.

“... B는, 내가 저 분한테 돈을 준 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해?”

“제가 말려도 어차피 아가씨께선 듣지 않았을 거잖아요?”

“헤헤... 들켜버렸네.”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가증스럽다. 겨우 길거리의 거지에게 자신의 푼돈을 던져준 것 가지고 칭찬이라도 해주길 원했던 건가.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남자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네필라의 진한 분홍빛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하지만... 저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잘하셨어요, 아가씨.”

“아... 그..”

네필라의 붉은 눈동자가 땅바닥을 향하더니 슬쩍 B의 금안과 마주쳤다. 우물쭈물거리며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입술만 우물거리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아차, 거리감을 너무 갑작스레 좁혔나? 실수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얼른 손을 떼어냈다.

“우아아악!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고마워!”

훅 끼쳐오는 달큰한 냄새. 순간 그는 몸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커진 안경 너머의 눈동자 안에서 소녀의 붉은 적안이 반짝이며 뒤섞였다가, 이내 눈꺼풀을 닫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당황했다는 걸 감추기 위해 호흡을 잠시 멈추면 자신의 손을 네필라가 꼭 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거리감에 당황하면 어쩌자는 거냐. 속에서 욕짓거리처럼 튀어나온 생각을 애써 삼켜내곤 그저 어색한 미소만 띄워대니 저쪽에서 먼저 떨어져 나갔다. 코끝에 감도는 사과향이 자신이 여지껏 감지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찌르는 것 같아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냈다.

“... 별 말씀을요.”

빙긋이, 아직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리고 있던 네필라가 저만치 앞서 걷더니 몸을 돌려선 자신을 바라보았다. “B는 참 다정하구나.” …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었다. 급조한 가면에 속아 넘어가는 네가 이상한거야.

“저기… 집까지 좀 걸어가도 될까? 오늘은 햇님도 기분 좋아 보이고!”

“어쩔 수 없네요. 오늘만입니다?”

천천히 소녀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번져갔다. 저런 여유도 풍족할때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죽거리는 마음과는 반대로 그는 눈 앞의 작은 주인을 따라하듯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정중히 한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아가씨?”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작은 손을 B는 굳이 힘주어 맞잡지 않았다.

🌺

집사로서 잠입해 두어달 지낸 결과, 부잣집 자제분이라는 것들의 생활도 그들의 부모들만큼이나 바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지내는 공간은 늘 경계가 삼엄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이 생일 파티만 해도 그랬다. 화사한 꽃들과 풍선들로 꾸며진 호텔의 옥상 정원 곳곳마다 서 있는 까만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감시 카메라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부자들에게 알랑이나 떠는 번견들 주제에. 뭐, B도 오늘 같은 날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네필라의 클레스 메이트의 아버지는 연방경찰청의 부청장이다. 한낱 조직의 끄나풀에 불과한 자신의 얼굴까지 그들이 알진 못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건 없겠지. 오늘은 평소대로 저기서 나비나 구경하고 있는 맹한 아가씨를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아가씨~ 배는 안고프세요?”

“나는… 음… 어떠려나? 배고픈가…?”

자신이 배고픈지도 모르는 거냐. 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의 배에 손을 문질러보는 네필라를 보며 B는 한숨을 푹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부터그녀는 이 파티에 오길 내키지 않아 했다.

-왜, 주인님이 쭉 경찰청과 손을 잡고 싶어하잖아. 아가씨의 약혼자도 그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아가씨는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결혼이라니… 불쌍해라.

어제 메이드들이 수군거리던 게 떠올랐다. 자신도 아는 걸 본인이 모를 리는 없겠지.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어 보이는 이 꼬마에게도 이제 정해진 삶의 족쇄가 채워지는 것일까.

‘어쩐지 어제 저녁부터 식욕이 없어 보이더라니…’

하지만 그것이 딱히 자신과 관계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조직에 잡히게 되면 결혼 같은 건 이제 꿈도 못꾸게 되겠지. 살아서 되돌아간다고 해도, ‘하자’가 생긴 신부를 데려가려는 가문이 어디 있겠는가. 그 정도는 하층민으로 평생을 살았던 B도 알고 있는 고위층들의 세상이었다.

“그렇지만 저기 맛있는게 엄청 많은걸요? 아, 제가 좀 담아와 드릴게요! 아가씨는 여기 계세요.”

“그렇지만…”

“제가 먹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요. 조금 나눠 주실거죠?”

그 말에 네필라의 붉은 눈동자가 생기를 띠며 입꼬리가 슬 올라갔다. 이어 작게 쿡쿡 울리는 웃음소리. 언제나의 밝은 미소에 B는 술렁거리던 머릿속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소녀가 웃는 얼굴은 매번 알만 두터운 가짜 안경의 렌즈에 여러 색깔로 비춰졌다. 그건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와도 닮아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예배당을 비추던 오색 찬란한 빛 아래서, 그는 소매치기한 돈을 세곤 했었다. 신을 비웃을 여유도 가난한 자에겐 존재하지 않았기에.

“B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니까… 부탁 좀 해도 될까?”

부탁은 무슨.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데려온 사용인에게 당연하게 명령하는 이들 뿐이다. 집사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눠줘도 된다는 생각은 아마 너밖에 안할거다. B는 그런 네필라가 제법 웃기다고 생각했다.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면 바보처럼 붕붕 마주 손을 흔들어 준다. 저것의 어디가 아르텐 가문의 외동딸인지.

파티는 쓸데없이 화려했다. 유명한 오케스트라며 별 몇개를 단 셰프며 B의 입장에서 보면 순 돈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연예인도 왔다고 했던가? 덕분에 여기저기서 꺅꺅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런 얼굴에 환장하는 건 부잣집 녀석들도 똑같은가 보네. 그도 얼굴은 알고 있는 배우의 옆에 있는 자가 쩔쩔 매고 있었다. 매니저인가. 목에 건 명찰을 보니 그런듯 했다.

초대받은 자와 함께 온 이는 모두 신분을 증명하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B는 자신의 명찰을 내려다 봤다. ‘아르텐 네필라 님의 사용인.’ 조잡하긴. 자신의 동료 중에는 이런 카드 쪼가리를 5분이면 위조해 낼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저 검은 덩치들을 신뢰하는 건가. 아니면 경찰청 부총장인 자신의 위치를 과신하는건가.

접시에 핑거 푸드와 다과 몇 개를 집개로 담아내고 있으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주인공이 납신 것이다. 뺀질거리며 웃는 부총장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B는 메이드들이 수근대던 내용을 헛소문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괜히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곤 그가 강단에 서서는 뭐라뭐라 말을 하는 사이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네필라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여기… 마실 것도 좀 갖고 올까요?”

“우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 뿐이네? 헤헤… B 고마워~”

생글거리며 접시 위를 보던 네필라가 손가락으로 버터 쿠키 하나를 집더니 B의 입가로 가져갔다. 안경 너머의 금안이 동그랗게 커져선 소녀를 바라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네필라를 보자 B는 두 눈만 끔뻑거리며 어리둥절해졌다.

“아, 아가씨?”

“B… 쿠키 싫어해?”

금세 가넷 같은 눈동자가 실망을 품고 눈썹이 축 쳐지면 B는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이 술렁거렸다. 결국 입술을 벌려 건내준 쿠키를 먹으면 뺨이 화끈거려서… 짜증이 났다. 그래, 이건 멋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위선을 부려 생기는 짜증이다.

‘젠장, 왜 내가…’

“에헤헤… 쿠키 맛있지? 마카롱도 먹을래~?”

“저는 됐으니, 아가씨도 좀 드세요.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음… 알았어! B가 날 위해 가져와 준거니까, 열심히 먹을래.”

네필라가 접시 위의 음식들을 보고 고민하는 동안,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고 진행하기에 바빴다. “자~! 다음은 율리안 도련님에게 생일 선물을 전달할 사람을 추첨하도록 하겠습니다!” 별걸 다 추첨하네. B가 콧방귀를 뀜과 동시에 네필라가 카나페 하나를 집었다. 그녀가 입을 아-하고 벌리며 그걸 입 안에 넣으려고 할때 무대 위의 조명이 네필라 위에 쏟아져 내렸다.

“네필라 아르텐 님! 축하드립니다!”

“흐에…?”

멀뚱히 두 눈을 깜박거리는 네필라를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이 모시곤 무대 위로 데려갔다. 덕분에 B는 접시만 든 채 덩그러니 관객석에 남았다. 자신이 같이 올라가려고 하자 저 덩치 중 하나가 자신을 슬쩍 밀어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허어…”

별로 상관은 없지만. 네필라는 여기서 바로 보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 설마 오늘 같은 날에 무슨 일을 저지를 간 큰 놈은 없을 것이다. 진짜, 상관은 없지만. 애초에 자신의 진짜 임무는 저 애를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와삭! B는 접시 위에 있던 크레커를 가루가 될 정도로 세게 씹어 먹었다. 율리안이라는 자식이 으스대며 네필라의 어깨를 감싸 안을땐 와드득, 단단한 초콜릿이 희생당했다.

탁, 탁…. 구둣발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묘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저놈의 축사는 언제 끝나는 거야. 부글부글 끓는 속에 못이긴 B는 주변 탁자 위에 접시를 놓고는 무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건 임무를 위해서였다. 경찰부총장의 아들과 친해져서 후에 있을 납치극에 방해라도 되면 어떡할건가.

B가 무대 앞까지 오자, 휙- 관객석에서 무언가를 무대 쪽으로 던졌다.

“…! 아가씨!”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 네필라의 드레스에 닿더니 팍 깨지면서 끈적한 액이 흘러내렸다. B가 황급히 무대 위로 올라가기도 전의 일이었다. 금새 주변이 웅성거리고 경호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덩치들이 앞을 막던 말던 B는 우악스래 양팔로 그 사이를 가르며 네필라에게 다가갔다. 꼴에 남자라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앞으로 나와 있던 도련님 자식을 홱 밀쳐버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응- 나는 괜찮아.”

실없이 웃는 꼴에 B는 이를 악물었다가, 금세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바보 같은 꼬맹이. 드레스에 질펀하게 묻은 것은 달걀이었다. 이것이 다른 것이었으면, 행여 머리에 맞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러니 지금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듯 엄습했다가 물려나는 불안과 안심은,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다. 임무가 실패해버릴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이 여자가 살아있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그런 강박을 숨기려는 듯이 손수건을 꺼내 네필라의 드레스에 묻은 날달걀을 닦아내는 B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직원처럼 보이는 여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아, 죄송합니다. 입장할때 위험한 물건은 다 압수를 했음에도… 기자로 위장한 자의 소행 같아요. 아르텐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당신 눈에는 이게 괜찮은 걸로 보여?”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네필라가 B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곤란함을 숨긴 미소에 그는 당황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녀가 아는 어벙한 집사인가?

“저는 괜찮아요. 율리안 씨도 괜찮으셔야 할 텐데요…”

침착함과 교양을 겸비한 목소리. 자신은 닿지 못할 세게의 것을 저 어린 소녀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야.’

직원이 갈아입힐 옷을 준비하겠다며 그녀를 탈의실로 데리고 갈 때까지, 그는 그저 무능한 집사에 불과했다. 원래 그가 연기하려고 했던, 서툴고 미숙하기 그지없는 사용인. 의도했던 대로이고, 저 여자가 달걀에 맞던 돌덩이에 맞던 아무 상관 없어야 맞는 일일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

경호원들이 범인을 찾아내 잡아 심문을 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네팔라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막연히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는 것이니 오래 걸릴테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 통화를 해도 받지 않자 B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는 네필라가 치장을 하는데 통상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지 못했다. 어차피 흉내만 내는 집사 일이었고, 부잣집 아가씨에겐 으레 메이드들이 붙어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저어, 네필라 아르텐 님의 사용인인가요?”

“…그런데요.”

“여기, 율리안 님께서 사과의 표시로 준비하신 새 드레스 입니다. 이번일로 인해 아르텐 님에게 피해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

여자가 사죄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B는 홱 그녀의 목에 걸린 카드 명함을 만져보았다. 아까 전 네필라를 데려가던 이의 것과 똑같은 얼굴과 이름…

“젠장할!”

B는 그대로 주변에 있던 검은 덩치의 멱살을 잡아선 낮게 으르렁거렸다. “보인실. 어디야.” 외부인은 들어갈수 없다는 뻔한 매뉴얼에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지금 이 같잖지도 않은 생일파티 때문에, 내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희들은 다 죽을 줄 알아.”

서늘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목에 걸린 ‘네필라 아르텐 님의 사용인’이란 명함 덕분이었는지, 그는 금방 보안실로 갈 수 있었다. 속은 부글부글 초조하기만 한데 이상하게 머리는 빠르게 식어갔다. 감시카메라 영상에서 네필라를 데리고 가던 여자가 그녀를 기절 시키고 접시를 옮기는 카트 안에 숨기는 걸 발견했을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누구지? 우리 쪽의 인간은 아니었어… ’

그대로 데려가지 않고 우선 창고에 숨겨놓았다는 게 증거였다.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이었다면 우선 네필라의 숨통부터 끊어 놨을 것이다.

‘생사의 여부는 상관 않으니...’

“… …”

“지금 창고 앞으로 경호원 배치시키겠습니다.”

“아니, 얌전히 기다려봐요.”

그렇다는건, 네필라가 살아있어야 한다는게 저들에겐 중요할 것이다. 조심히 옮겨야 할테니 신중해야 되겠지. 지금 잡으러 간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쳤다 생각하고는 바로 네필라를 인질로 이용할지 모른다. B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시카메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영상 안에서 경호원의 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그녀를 흰 천으로 가린 카트를 꺼내더니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8층, 식당, 복도… 뒷문으로 가는 걸 한발 먼저 파악하자. B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출입구 다 봉쇄시켜요.”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1층으로 갈 때까지, 그는 자신이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영상 속의 네필라는 쓰러진 채로 카트 안에 넣어진 이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뒷문으로 가는 바깥 골목 그림자에 몸을 숨기자 감시카메라에 나오던 검은 덩치가 카트를 끌며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울커하고 뜨거워진 피가 뒷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B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참아냈다. 덩치가 문이 잠겨있음을 확인하자 동료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든다. 그가 카트에게서 눈을 떼고, 손을 떼고, 발걸음을 조금 떨어트린…

지금.

퍽! 단숨에 달려나간 검은 덩치의 머리통을 벽으로 밀어 박았다. 상대가 상황을 파악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움직임보다 그가 반댓손으로 복부를 가격하는 것이 빨랐다. 배를 부여잡고 허리가 고꾸라진 틈을 타 뒤로 가서는 팔 힘만으로 목을 졸라 기절 시켰다. 버둥거리는 것에 뺨에 손톱이 긁혀 약간 따금거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뺨을 닦아냈다. 3분도 채 안되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B는 마음이 급했다. 얼른 카트 안을 들여다보니 아까 그 날달걀이 묻은 드레스를 입은 네필라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는듯 했다. 목덜미의 맥을 짚는 손이 떨려왔다. 둥, 둥, 둥… 작게 규칙적으로 뛰는 생의 박자감을 확인하고 나서야 B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살아있어. 살아.. 있었어. 목표물을 뻇기지 않았다기엔 과도한 안도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사실을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으음…”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파르르 나비같은 속눈썹이 떨리면 이윽고 붉은 꽃은 담은 투명한 두 수정에 B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그 두 눈을 마주하니 그제야 B는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조심스레 카트 안에서 네필라를 안아 들면, 아침잠에서 깨어난 것 마냥 나른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서서히 찡그려졌다.

“아가씨…? 어디 불편하신가요? 젠장 저 자식을…”

꽉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던 것이 네필라의 손끝이 뺨에 닿자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B가 당황한 모슴 그대로, 네필라와 시선을 맞추며 안경 너머의 눈을 깜박거리면 그녀가 엄지로 그의 뺨에 난 얇은 생채기를 건들였다.

“B… 다쳤잖아. 괜찮아? 아프지 않아?”

“… 아, 아하하하!”

B 그도 모르게 터진 웃음이었다. 자신은 죽을 뻔했는데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사용인의 상처를 걱정하는 꼴이라니. 순진하고 순박한걸 너머서, 너무 바보 같지 않나? 자신은 여태껏 살면서 남의 이렇게 속편한 걱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제 뺨을 쓰다듬는 작은 손. 이번엔 조심스럽게 안경 안쪽으로 들어와서는 눈가를 훑어냈다.

“많이 아팠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니, 아니요 아가씨…”

이건,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이니까. 네가 이토록 어이없게 착하고, 사랑스러워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이라는 것이 튀어나올 정도로 자신이 방심했다는걸, 그는 자신의 아가씨가 평생 모르기만을 빌었다. 그리하여 이 작은 소녀가 저의 웃는 가면을 진짜라고 착각해 주기를. 그 속의 진짜 모습에 상처받지 않기를. 단 한번도 믿지 않았던 그때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성모상에게… B는,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부디 이 품안의 온기를 지킬 자격을 주소서.

🌺

“아가씨! 또 이렇게 멋대로 나오시면 어떡해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에헤헤… 그치만~ 이것 봐 B!”

자신을 손을 잡곤 끌어당기는 힘을 B는 견딜 수가 없다. 기우뚱 넘어가는 몸에 금방 중심을 잡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이젠 부정하지도 않으리라고 다짐했으니.

“채송화가 활짝 피었어! 예쁘지 않아?”

해사하게 웃으며 그대로 풀석 앉아선 조심스레 꽃을 꺾어 향을 맡는 네필라를 B는 오랫동안 눈 안에 담았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과 하얀 뺨을 훑는 바람이 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닿고 싶은 손길마냥 부드럽고 섬세했다.

“네… 무척 아름답네요.”

“그렇지? 이걸 B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이전의 납치 사건이 지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소녀는 자신이 괜찮다는 걸 증명하여 악당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다. B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작전을 실행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는 걸. 허나 이젠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아니지. 달라진 것은 어쩌면 하나 뿐.

“ 기뻐요. 아가씨.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 B, 꼭… 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고개를 숙이던 네필라가 B의 옷자락을 꽉 잡고는 울망거리는 시선을 마주쳐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문채로 우물거리던 것이 몇번 벌려졌다 닫히며 망설이더니 순간의 향기를 삼키려는듯 다급하게 열렸다.

“안 가면 안돼? 쭉… 내 곁에 있어주면…”

소녀로서는 익숙치 않은 고집이겠지. 스스로도 제 나이엔 맞지 않은 어리광이라 여기고 있을 터였다. B 또한 그녀를 여지껏 지켜봐 왔기에 알고 있었다. 이 잔디밭의 푸름이 돋아나고, 그 위에 작고 여린 다홍빛들이 피어나는 동안…

그는 단지 네필라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니, 이제 진정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게 되고 싶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그렇지만,”

B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네필라를 바라보았다. 동화도, 타인도 믿지 않았기에 그저 흉내만 내는 기사도는 아마 분명히 볼품없고 흉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는 용기라는 것을 꾸역꾸역 만들어 감히 공주님과 눈높이를 맞추고 고결한 손등을 살며시 잡아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를 한다.

“반드시 아가씨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정말?”

물음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는 자신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을 키워줬던 조직을 등지는 일이다. 위험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더 이상 네필라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 지금의 저를 본다면 멍청하다고 비웃었겠지. 왕자도, 용사도, 기사도 아니면서 공주를 구하겠다고 소리친다.

아마 이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네필라가 들고 있던 채송화를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꽃향기가 B의 코끝에 머물렀다. 섞이는 사과의 냄새, 아가씨의 체향.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고 느끼면 어느새 귓가에 그녀가 들고 있던 채송화가 꽂혀져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의 금발과 분홍색 꽃잎을 같이 흔들었다. 자신은 초라한 기사에 불과했는데도, 작은 주인은 기꺼이 제게 무거운 왕관을 씌워준다.

“약속… 해줘.”

꼭 내 곁에 돌아온다고. 밝히지 못할 소원을 요정에게만 전하듯 소녀의 목소리는 작고 간절하게 울렸다. 네필라는 늘 B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을 했고, 그것은 기이하게도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행여 부서질까 두려워 조심스레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점점 힘주어 잡는다. 귀 끝까지 올라오는 열기를 참고 고개를 숙여 어느 동화의 번듯한 역할처럼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예… 예. 반드시, 돌아올게요.”

자신은 히어로라는 것들을 잘 모르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장면에서 이렇게 덜덜 떨거나 하진 않았겠지. 마지막까지 우스꽝스럽고, 어벙한 집사 그대로였다.

훅 끼쳐오는 풀잎과, 햇살과, 노릇한 사과향… 아.

소녀가 그를 껴안고 있었다.

“절대로야! 나… B가 올때까지 쭉, 기다릴테니까!”

가녀린 어깨를 으스러질듯 껴안다가도, 제 작은 주인의 숨이 막히면 어떡할까 하여 반사적으로 팔에 힘이 살짝 풀렸다. 이래서야 완전히 길들여진 번견 아닌가. 그러나 B는 상관 없었다. 목줄이든 뭐든, 네필라가 자신을 쥐고 있어 준다면 이젠… 이젠.

“꼭 돌아올게요. 아가씨가 기다려 주신다고… 해주셨으니까요.”

동화든 타인이든 신이든

그 어떤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허풍도 B는 믿을 수 있었다.

🌺

네필라 아가씨의 홍차는 아침엔 다즐링. 지금 우려놔야 그녀가 마실 때 적당한 온도가 된다. 커튼은 처음부터 확 펼쳐서는 안된다. 따가운 아침 햇살도 부드럽게 이용해야 하는 것이 집사의 기술이니까. 트레이를 미는 속도는 일정하게,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리지 않도록. 긴장한 나머지 새벽에 일어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습하는 걸 본 메이드들은 여전하다며 웃어댔다. 제기랄. 이번 건 연기가 아니었음에도.

하지만 네필라도 자신을 그렇게 봐주었으면 했다. 띨빵하고 모자란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헤실거리며 자신을 챙겨주려는 아가씨는 오로지 자신만의 특권이었다. 아니지, 사실… 기억이나 해주고는 있을까…? 또 다시 차오르는 긴장에 문을 두드리려는 손에 땀이 찼다. 몇 번 바지에 장갑 낀 손바닥을 비비고 나서야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똑똑.

“아가씨, B 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티세트 트레이를 밀며 들어 가는 와중에도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다. 진정해라 나! 오늘 복귀한다는 건 미리 전달드린 사항이니까! 그리고 아가씨께선 아직 주무시고 계실…

“B!”

“우아아악! 아가씨! 체통! 체통을 지키셔야죠오~ 안돼..호, 홍차! 아직 뜨겁다고요!”

“헤헤헤… 그렇지만~”

홱 달려들어 자신의 허리부터 껴안는 아가씨를 집사는 밀어내지도 못하고 쩔쩔매며 받아들었다. 부비적거리는 작은 온기를, 그리 그리워했음에도 여전히 함부로 손댈 수는 없다.

“돌아와 줬는걸… 기뻐… 고마워.”

“아가씨…”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언제나 이렇게 선수를 빼앗겨 버리니, 자신이 멋지게 활약할 장면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B는 문득 들었다.

“앞으로는 절대…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그러기 위해 돌아왔으니까. 이젠 그때처럼 함부로 껴안을 수 없는 고귀한 몸에 겨우 손만 댄 채로 그렇게 속삭이니 네필라가 고개를 들고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서서히 아침 햇빛처럼 번져드는 미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B 자신이 저 웃음에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응. 약속이니까!”

이 얼굴을 평생 지키기로 다짐한 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동화의 일원이 된 오늘을.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HL
추가태그
#BN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