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 뒤
달싹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들은 자신을 날카로운 검으로 잘라내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긴 시간 동안 속앓이를 하는 사람처럼, 검은 놓았음에도 마음속에는 그 어느 하나 날카롭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달리 몸 밖이 아닌 마음속에 있기에, 어쩌면 그는 그 날카로운 것들에게 매일 도려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장에서 처음 마주한 그의 행보는 단단한 돌다리 걸음인 줄 알았으나 스스로 난도질 하여 구멍이 뚫린 위태로운 다리 위에 서있는 것과도 같았다. 적어도 콜린은 그렇게 느꼈다. 또한 그것은 짙은 죄책감들이 망령처럼 붙어있는 것들을 이겨내지 못한 모습처럼 보였다. 그가 잘못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음에도. 비극의 시작이 그 손에 쥐어있지 않았음에도 너무 무거운 것들을 들고 짊어진 것이었다. 미하일의 손이 다소 강하게 떨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무의식중에 뻗어가던 제 두터운 손이 말에 우뚝, 막혔다.
“저도 제가 알아야 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제게 너무 다정하지 마세요⋯.”
허공을 휘적이지도 못한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이내 미하일의 눈가를 문지른 손을 적시며 나오는 물기가 샹들리에 빛을 받아 살짝 반짝이며 보였다. 그것을 보고는 어찌할 새도 없이 멈췄던 손길이 조심스레 당신의 어깨에 닿았을 것이다. 조금 강하게 미하일의 어깨를 쥔 채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올랐던 취기는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그의 눈물이 아주 오래전, 늦은 새벽에 들었던 누군가의 눈물과 닮았던 탓이다. 여전히 부드러운 낯으로 눈썹을 누그러트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놓아주신 다리가 없었으면 저희는 그 길고 험한 물살에 쓸려 그마저도 온전히 보전할 수 없었을 테지요.”
한 손만 올렸던 당신의 어깨에 나머지 손을 얹어 부드러운 손길로 쥐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흘러나온 진심이 묻어나온 당신의 살갗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그 색이 다른 흑요석과 석영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깨지기 쉬운 광물이지만, 잘라내는 것들에 따라서 모양을 쉽게 바꾸기도 한다. 어디에서는 그것들을 벼려 검처럼 도구로 쓴 적도 있다고 들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담긴 것을 느끼는 것에 쓰일 줄은 몰랐다.
“다정하지 말라시니 진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잠깐 멈춘 채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방패로 지켜낸 것 뒤에 남아있던 것들을 목도한 때가 문득 기억났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저희 기사단이 무사히 지켜냈기에, 자작께서 영지에서 안전히 계셨다는 말씀에 말입니다.”
“모든 것을 지켜낼 수는 없는 노릇이더랍니다, 자작님.”
술기운이 가신 줄 알았으나 뚫린 입 사이로 줄줄 새어 나오는 심상은 취기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음을 알렸다. 그래도 더 이상 눈앞에 있는 이가 날붙이를 자신의 마음에 향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 누구에게도 감히 말할 수 없었던 속마음을 정제하는 데에는 심호흡이 필요했다. 숨을 고르며 바닥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가, 다시 미하일의 눈을 응시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제게 생긴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특히 그 버릇이 강해졌었지요.”
“모든 것이 끝나고 방패를 내린 채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 무사한 것들만 있진 않았습니다.”
빛을 등지고 조금 슬프게 웃는 금빛 눈동자가 그림자 속에서 일렁였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을 것 같았던 굳건함은 지금 순간, 아주 짧은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흔들렸다.
“제가 해낼 수 없어 무너진 것들을 목도하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악착같이 버텨내고, 어쩔 때는 목숨이 강가에 왔다 갔다 하는데도 살아남으면 안도 뒤에 찾아오는 것은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더더욱. 그러한 다리들이 적어도 제게는 필요했습니다. 방패를 넘어가는 것들은 마법과 화살이 도와주고, 밀어내는 힘이 부족하면 전우들이 나서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아심이라, 폐하께서도 자작과 같은 분들을 이 연회에 불러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내 다시 흔들렸던 눈빛은 돌아왔다. 취기가 남아있어 아직은 살짝 흐려져 있으나, 이내 곧 멀끔히 원래처럼 굳건히 버틸 눈동자로.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충분히 잘 도와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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