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마

[하람] 언젠가의 독백

어머니

백업용 by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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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물이 겪는 디스포리아와, 이로 인한 자살 사고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소재에 민감한 분은 열람을 재고해주세요.

자바르와 나는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다. 초원 한복판에 버려진 나를 그가 주워다 길렀다고 한다. 갓난아기에게는 위험할 정도로 열이 무척이나 높았는데, 다행히 재회시장에서 케스티르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운 좋게 지금까지도 별다른 후유증이 남지 않았다나. 자바르는 일 년 정도 나를 키우다가 적당한 곳에 맡기려 했다. 살아갈 이유도, 의지도 없는 자신이 아이를 키워낼 수 없다고 여겼다. …이제 와 추측건대, 그는 나를 떼어놓고는 스스로 삶을 놓으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우울을 잘 안다. 머릿수가 곧 세력인 아짐에서 식구가 늘어나는 것을 기피할 부족은 없을 터. 아이를 거둘만한 곳은 많았을 것이다. 정 안 되면 볼라크족에게라도 맡기려 했다던가. 어느 곳에 아이를 맡겨야 좋을지 고민하던 순간. 여느때처럼 옹알이를 하던 어린 나는 그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억하냐고? 농담도. 그럴 리가 있나. '어머니'는 연신 어미를 찾아대는 나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 작은 아이가 자신을 부른 것이.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부정당하지 않은 기억이었다고.

자바르는 자신이 잘못된 육체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뼈대와 목소리가 굵어지고, 밤마다 성장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제 몸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만 갔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주변의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 그리고 그 의문을 죽마고우에게 늘어놓았던 날, 자바르는 더러운 것 취급을 받으며 오랜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 자바르는 죽지 못해 살았다. 죽었다 깨면 올바른 몸을 갖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귀한 목숨을 버렸다고 아짐과 나아마의 분노를 사지는 않을까. 혹은 이미 그 둘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 그들이 존재하긴 하나.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 것인가.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어린 나를 주우며 번뇌가 잠시 멈추었지만. 어느 정도 커가는 것을 보니 다시 온갖 생각이 치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는 이 핏덩이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핏덩이가. 자바르의 있는 그대로를 바로보고 그대로 불러준 것이다.

자바르는 비로소 내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후회라는 뜻의 고어. 나를 버린 이가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후회하리라. 그런 기원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기원이 자바르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걸까-하고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버려진 아이를 가엾게 여겨 기르고 거두어준 것은 감사해야 마땅할 일이고 당연히 그런 마음이 가장 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운명이 대체 무엇이길래, 하는 마음이 고개를 처드는 것이다. 자식으로서 어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나 싶다가도, 그와 나는 결코 평범한 가족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종종 있다. 아, 이건 자바르에게는 비밀이다. 어머니는 심성이 여려서. 내게 하지 못할 말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충분히 많을 것이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관심을 달라고. 애정을 달라고. 거창한 운명 같은 게 아니어도 당신과 나는 가족이지 않느냐고.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내 쪽이었을지도 모르지.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고 그 우연을 잡은 것은 나와 당신이지, 손으로 막을 수도 없이 들이치는 운명따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아짐에 선조들의 이야기가 잠들어있듯,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종종 재회 시장을 찾는 외지인들은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과 나에게 꼭 맞는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없어도 괜찮다. 우리가 운명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는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나를 그리고 생각하고 기다려달라.

운명이 아닌 우연을 찾으며. 그렇게 나는 초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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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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