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100일 챌린지

3일차

나는 앨라이입니다

  “나 사실, 레즈비언이야.” 이 대사를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친구가 내게 성적 지향성이나 성 정체성을 밝힌다면 녹차 케이크가 좋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대답하고 싶다. 너무 정체성에 초점을 맞춰 파고들거나, 너무 가볍게 말해서 그 친구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음식을 알게 된 것처럼 기억해 두고 있는 그대로의 친구를 받아들이고 싶다.

‘앨라이를 찾습니다’를 쓸 때 정작 앨라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앨라이를 찾고 있던 건 이야기 속의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글을 적은 나도 포함이었다. 글 속의 동성 커플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를 위한 작은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앨라이를 찾은 것이다.

앨라이는 특정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동맹(국)’, ‘조력자로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사람: 지속적인 노력, 활동 또는 투쟁에서 도움과 지원을 제공하는 개인 또는 그룹’이란 영단어로, 현재는 ‘성소수자 인권 지지자’를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내가 쓴 앨라이도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니 ‘앨라이를 찾습니다’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함께 소리 내주는 사람을 찾는다는 의미였고, 나를 앨라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사지가 튼튼해 생활의 장애물이 없는 사람도 있고, 신체 어딘가가 불편해도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성소수자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데 혐오자들은 자신에게 지대한 피해를 끼칠 거라는 망상이라도 하는 것 같다. 실상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왜 그렇게까지 부정하려 드는 걸까?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걸까? 무엇이 매년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에 쫓아가 혐오 시위를 하게 만드는 걸까?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게 들리면 그러는 걸까?

지난 글에서 강세연과 유화영은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레즈비언 부부가 딸을 출산했다는 기사와 7월 13일 기준으로 접수된 동성 부부가 33쌍이라는 내용은 실제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레즈비언 부부의 딸 출산은 김규진 씨와 김세연 씨의 사례고, 33쌍의 혼인신고는 인터넷 창에 동성 혼인신고를 검색하면 기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고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나를 드러내놓고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나 또한 성소수자다. 지향성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지만, 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포함되지 않는 논바이너리다. 어린 시절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하는 세상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논바이너리라는 개념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LGBTQ+를 알게 된 것은 내게 있어 일종의 구원 같았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 볼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주변에 커밍아웃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사회의 시선보다 주변의 시선이 더 두렵다. 사회의 시선은 연대해서 타파하면 되지만 주변의 시선은 내 인간관계를 한순간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느껴진다. 나는 커밍아웃을 해도 괜찮을 사람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이성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내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나는 앨라이지만 주변에 또 다른 앨라이는 찾지 못해 외로울 때가 있다. 사랑보단 맘 편히 얘기할 곳을 더 원한다. 이걸 얘기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마음 놓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앨라이로서 다른 앨라이를 찾고 있고 한 사람의 성소수자로서 나를 배척시키지 않을 사람을 찾고 있다. 앨라이를 찾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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