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윱] 同床異夢 (동상이몽)

같은 자리에 자면서 다른 꿈을 꾸네.




 새하얀 눈에 떨어지는 선홍빛의 핏방울은 탐욕스레 순백색을 먹어 치우고 피어난 꽃과도 같았다. 눈밭에 흩뿌려진 꽃들은 지독하게 화려해서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 종종 그 선홍빛에 저까지 먹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도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던 유비는 점점 고개를 돌리는 것이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뿐이랴, 기세를 굽힐 줄 모르는 바람을 핑계로 눈마저 질끈 감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뺨에 닿아오는 무언가에 다시 눈을 떠야 했지만.

 "바람이 매섭다. 이만 들어가야지."

 공손찬은 그리 말하며 유비의 뺨을 문질렀다. 아무 말 않았지만 제 뺨을 칠하고 있던 것은 투명한 물방울도 거뭇한 먼지도 아닌 검붉은 빛의 피였을 것이라고,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묻은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속은 어쩐지 돌덩이가 얹힌 듯 무거웠다. 어찌하여 모르고 있었을까? 그 물음이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잡아끌었다. 사람의 피는 한 방울 한 방울이 생명의 온기를 품고 있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북방에서 그 온기는 유비의 살갗에 닿아올 때마다 언제나 무겁게 그를 짓눌러 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어찌하여. 이번에도 바람을 탓할 셈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족쇄처럼 발목을 붙잡았다.

 공손찬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 뒤에서 쌓인 눈을 밟던 발소리 하나가 점차 느려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방금 전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을 때 잠시 나타났다가 금세 녹아버리는 눈송이처럼 사라지던 웃음을 생각했다. 근래에는 군말 없이 잘 지내는 것만 같더니 또 무슨 일인지. 뺨에 닿았던 손을 꽉 쥐고선 나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비야."

 제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유비는 푹 숙였던 고개를 급히 들고선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짝 벌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공손찬의 손짓 하나에 금세 좁혀졌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순순히 제게 다가오는 유비를 보고서야 말아쥐었던 주먹을 다시 폈다. 평소 유비에게 하던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띈 그는 큰 귀를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손수 넘겨주고선 허리를 숙였다. 귀 가까이에서 숨소리가 들려오자 간지러운지 크게 움찔했지만 유비는 별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공손찬은 만족스러운 듯 뒤쪽에서 제게 건방진 시선을 보내오는 두 장수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비야, 부러 숨소리를 섞어 이름을 내뱉고는 어색한 듯 몸을 뒤트는 반응을 즐겼다.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야 투정 섞인 목소리로 작게 성을 낸다.

 "뭐, 뭔데 이리 뜸을 들이십니까…!"

 "해가 저물거든 내 막사로 오거라. 둘이 나누고픈 얘기가 있으니."

 저기 아우들에겐 별일 아니라 말해주고. 그 말에 고개를 돌려보자 관우와 장비가 차마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하다 느끼시진 않을까, 놀라며 공손찬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오히려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속내는 도통 모르겠다만 노한 듯 보이시진 않으니 된 건가.



 "술이요?"

 "그래, 몸도 녹일 겸."

 싫니? 장난스러운 말투에 눈꼬리마저 접혀 있었으나 이는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미리 자리에 앉아 술병까지 들고 있었으니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넉살 좋게 답한 유비는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공손찬은 유비의 잔을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요즈음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말이야."

 술을 들이키기도 전에 유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큭큭거리며 웃는 공손찬에 유비는 또 작게 성을 냈다. 웃지 마십시오…! 과거에는 잊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함께 있었다. 유비가 얼굴을 붉힌 이유는 그 두 사람 때문이었다. 둘은 다디단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눴다.

 "그때도 항상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철이 덜 들어서 말하진 못했지만."

 그러나 철이 든 지금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인 듯 말을 끝내자마자 잔을 비웠다. 공손찬은 미소를 띤 채 빈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유비는 천천히 취해가고 있었다. 공손찬이 원하던 대로. 옛날얘기가 하고 싶어서 불렀다, 물론 그 말도 사실이라 하겠으나 그는 유비의 속내를 들춰보고 싶었다. 현재 정 많은 유현덕이 같은 스승을 두고 호형호제하던 공손백규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고, 북방 귀신 공손찬이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듣도보도 못한 유비라는 놈을 과분하게 아끼며 싸고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었으나 그때 유비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손에 넣었다 생각하는 순간 눈송이처럼 녹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함께 옛 추억을 회상하다 보면, 정에 약한 유비가 좀 더 확고히 제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술잔을 계속해서 채워주고,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지켜보면서, 공손찬은 속내를 파고들 기회를 엿보았다. 대화 주제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근데 저어, 백규형님… 몽롱한 눈으로 제 앞의 공손찬을 바라보던 유비가 운을 띄웠다. 백규형이란 호칭이 나오면 언제나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반갑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그 호칭만 이리저리 영악하게 피해 선을 그어가며 눈치를 보다가 저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를 내비치는 것이 퍽 귀엽기도 하고. 그래, 비야. 어디 말해보거라. 말투와 낯빛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혹여 속내를 조금이라도 내보인다면 놓치지 않겠다는 기색이 눈빛에서 엿보였다. 그래, 어서 말하거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는 정녕 내 사람으로 남을 것인지…

 "저… 사실, 형님을 연모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한마디는, 공손찬의 예상을 상당히 벗어난 말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향긋한 술을 입 안에 머금으면서도 쉴 새 없이 굴러가던 머리가 잠시 멈췄다. 자꾸 숙여지는 고개가 힘들었는지 턱을 괸 채로 웅얼거리는 유비의 말도 그 잠깐은 들리지 않았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데 이걸 무어라 해야 하나. 유비는 방금 공손찬이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패를 거저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응당 기뻐할 일이 맞았으나, 단순히 기쁨이라 치부하기엔 그것은… 가슴께를 간지럽히던 하나의 실이 갑작스레 가슴을 꽉 묶고 조여오는 듯하니 심장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요동쳤다. 그래, 어찌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있을까? 공손찬은 오래 묻어두었던 제 본심을 다시 파헤쳐 보았다. 방향을 잃어 텅 빈 눈동자를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 그 눈동자에서 한순간 빛났던 총기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 그 총기를 되찾아주고 싶다는 작은 열망, 언제나 저를 밀어내던 그 손이 제 손을 잡아 왔을 때 느꼈던 온기, 이별의 순간에 닦아주었던 그 눈물. 고이 간직해 놓았던 하나하나를 모아 만들어진 것은 유비가 내민 본심과 같은 것이었다. 순간 심장을 조인 실이 단숨에 풀린 듯 후련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머리와 함께 잠시 굳어버린 표정을 보고선 무안함이 솟았는지, 유비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달이 더 기울기 전에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공손찬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억지로 발걸음을 떼려는 이의 팔뚝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괜찮습니다. 그리 취하진 않았습니다…."

 "도로 앉아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채로 계속 괜찮다, 이만 가보겠다 고집스레 웅얼거리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아 공손찬은 그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자리에 풀썩 앉혀 버렸다. 놀라 새어 나온 신음과 함께 들린 고개가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취기 때문인지 방금 전 저가 무심코 뱉은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깨 위의 두 손은 아직 떼어지지 않은 채였다.

 "나를 연모했다 하였지."

 민망해 하면서도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았던지 고개는 착실히 끄덕이는 모양이 마음에 들어 빙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한층 부드러워졌으면서도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질 만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어떻니?"

 움찔 몸을 떨고서 흘깃 눈을 마주한 유비는 금세 다시 눈을 피해버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담긴 다정함이 달큰한 추억의 맛을 다시금 입 안에 고이게 하는지라 침과 함께 삼켜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무어라도 내뱉어야 할 입은 꾹 다물려 꼴딱꼴딱 침만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목은 자꾸만 탔다. 물음을 바꾸어 볼까, 공손찬은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싹 가까이 하였다. 제 무릎 위에 두었던 손을 꽉 쥐는 유비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 손등을 어루만졌다.

 "지금 내가 이 손을 맞잡으면."

 어떨 것 같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쥐었던 주먹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손등을 덮고 있던 다른 손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파고들어 손가락을 얽었다. 이제 유비는 정말로 제 귀를 때릴 정도로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두 뺨을 넘어 온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듯도 했다. 그래서 유비는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비야."

 욕심을 더 내고 싶었다. 적어도 제 눈에 보이는 이 발간 얼굴은, 어쩐지 물기가 어린 채로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진짜였으니까, 그냥 제 멋대로 믿어버리고 싶었다. 공손찬은 비어있는 다른 손을 올려 엄지로 유비의 꾹 다물린 입술을 지긋이 누르고는 이마를 맞댔다. 닿은 곳 중 어디 하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불이 옮겨붙듯, 공손찬은 제 몸도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내가 너한테, 입을 맞추면."

 어떨 것 같니.

 이마가 맞닿았을 때도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던 유비는 그때 비로소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공손찬은 그대로 유비의 턱을 받치고 있던 제 손으로 고개를 잡아끌어 입술을 맞댔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공손백규는 어떻게든 원하는 것은 얻어냈으니. 혀를 얽어 입 안에 고였던 달큰한 추억들을 맛보고 양껏 탐했다.


 유현덕은 공손백규의 막사에 들어섰을 때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보고 눈치챘다. 불안하십니까.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저는 지금 정말로 제 윗사람이 불안해 할만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맞았으니. 옛 인연과 연락이 닿아 유주로 온 뒤에 본 것은 예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백마장군, 아니 북방귀신.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으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과연 귀신을 직접 눈으로 보면 누구나 까무러치게 놀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제 그만 돌아가자며 저를 바라보는 그의 뺨에 살짝 패인 보조개는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붉은 빛을 띄고 있었지만, 반대쪽 뺨에 묻은 핏자국이 찬 바람을 맞으며 검붉게 식어가는 동안에도 그 보조개만은 과거에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던 이름 모를 꽃의 붉은빛을 머금고 있어서. 심장에 박힌 것은 검붉은 공포의 화살인가, 이름 모를 꽃처럼 붉은 연모의 씨앗인가. 무어라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유비는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의 뒤를 따랐더랬다.

 그러나 진정으로 공포를 느꼈던 때는 바로 그때였다. 제 뺨에 매달렸던 생명의 마지막 온기를 어째서 느끼지 못했는가. 유비는 유주의 한기에 무뎌져 가는 자신이 두려웠다. 찬 바람에 굳어버린 검붉은 핏자국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제 뺨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만 같아서. 공손찬의 유주는 너무나도 추웠고 매서운 바람의 기세에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식어버렸다.

 이러한 유비의 생각은 아직 무질서하게 흩어진 조각에 불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딱히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혹여 괜스레 화나 돋구지 않으면 다행이지. 넉살 좋게 눈꼬리를 접어 보이며 유비는 생각했다. 최대한 취하지 말자. 그러나 유비는 술자리 내내 저 공손장군께서 저를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든 술수를 부려 빠져나가 보려 했지만 결국 유비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술수는 그저 제 허벅지를 꼬집어 죽기 살기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인생사가 항상 생각한 대로 되느냐 하면, 그럴 리가 있나. 특별한 안주도 뭣도 없었지만 그 놈의 추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달짝지근하면서도 말하고 나면 입안이 텅 빈 듯 씁쓸해지는 것이 자꾸만 술을 부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술잔이 비기만 하면 나긋나긋하게 웃어주며 다시 잔을 채워주는 저 공손장군을 만류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렇게 마시고, 또 한 잔 마시고, 다시 채워지면 또 마시고, 어느 순간부터 제 앞에 있는 동문 선배의 모습도 점점 흐려지더니만…


 누군가 입김을 후 불어 꺼진 성냥처럼 한순간에 끊겼던 의식은 또 갑작스레 누군가 킨 성냥처럼 제빛을 되찾았다. 아직 떠지지 않는 눈을 꾹 누르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자 메아리처럼 하나의 문장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릿속에 울렸다.

 '사실, 형님을 연모했습니다…'

 아무리 비벼도 떠지지 않던 눈이 한순간에 번쩍 떠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그 문장을 읊어준 목소리는 분명히 유비, 유현덕의 목소리였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그림처럼 남은, 제 코앞에 있던 공손찬의 얼굴이었다. 유비는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제야 낯선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내 막사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코를 박을 접시가 간절하게 필요해졌다. 그러나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조각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어났니?"

 왜 더 자지 않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심장이 두 번 떨어지는 것도 유비에겐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경험자의 의견을 첨언해보자면, 아마 세 번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 것이다. 유비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쩜 저리도 다정하게 말씀하시는지 누가 들으면 어젯밤 연모의 정을 나눈 연인 사이인 줄로만 알 것 같은 말투였다. 아직 여매지 않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조각 같은 근육이… 뭐가 어째? 유비는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 봐야만 했다. 이불도 제 것이 아니고,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아하니 여긴 분명 공손백규의 막사렸다, 거기에 어제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 기억이 끊겼으나 뜨문뜨문 올라오는 기억을 맞춰보면 저는 분명 어제 과거에 품었던 연모의 정을 고백했겠다, 마지막으로 지금 눈앞에서 저를 보고 있는 공손찬은 언제 일어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옷가지도 다 여매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를 굴리면서도 최대한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으나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인지 답은 한 곳으로만 향하는 것이었다. 사고, 그것도 아주 큰 사고. 평소에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제 속내를 살포시 가려놓는 유비가 대체 얼마나 당황한 건지, 제 머릿속을 얼굴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에 공손찬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호탕한 웃음을 뱉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슬슬 붉어지는 모양새는 또 어찌나 귀여운지….

 "비야, 다 잊어버렸나 보구나."

 그래, 이리 하면 기억이 날까? 공손찬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있는 유비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위를 향한 시선과 아래를 향하는 시선이 마주했는데도 어쩐지 묘한 기분만 들뿐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눈을 맞춰주는구나. 나직이 중얼거린 공손찬은 살풋 웃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유비는 몸을 뒤로 하고 싶었으나 순간 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껴 몸을 굳혔다. 서로가 내쉬는 숨이 서로에게 닿자 곧이어 이마가 맞닿았다. 그리고 그제야, 머릿속의 안개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눈동자와 붉어지는 뺨이 고스란히 눈앞에 보이자 공손찬은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야 기억나니."

 고개를 홱 돌리며 이젠 뺨을 넘어 온 얼굴이 붉어진 제 모습을 가리려는 유비에 공손찬은 순순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입을, 입을 맞췄다고? 믿기 어려웠지만 한 번 눈에 닿은 기억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입에, 손에 차례로 닿아와 그때의 감촉을 생생히 전해주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상상조차 가지 않았지만, 설마 그에 대한 기억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또 눈에 빤히 보이는 생각을 하는 유비가 새로워 웃음을 지은 공손찬은 생각했다. 이쯤 할까, 귀여운 짓은 충분히 봤으니.

 "눕혀주었더니만 옷끈도 풀기 전에 잠들어 버리더군."

 "예?"

 "재우려고 눕혀준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쉽게 되었어."

 노골적인 말을 뱉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어 보이는 공손찬에 유비는 결국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는 중얼거렸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우려했던 일은 없었다는 말에 마음은 놓였지만 심장은 진정되지를 않았다. 장난기가 담겨있던 그 말을 유비는 농이라고 포장해주었지만 끈을 풀면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그날 밤 이후로 공손찬은 그 끈을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냉기를 머금은 유주의 바람은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날이 차다, 그 한마디와 함께 손을 덥석덥석 잡아 온다던가, 옷가지를 더 입혀준다던가, 그것도 꼭 유비가 하게 두지 않고 제 손으로 입혀준다. 그러면 유비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공손백규는 유현덕이 유주에 처음 온 날부터 그를 유별나게 아꼈기에 어깨에 손을 두른다거나, 유비에게 뭔가를 더 챙겨준다거나 하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으나, 당연하게도 손을 맞잡는 것과 어깨에 손을 두르는 것은 천지 차이의 일이었다. 유비는 저가 댈 수 있는 유일한 핑계는 남들이 봅니다, 혹은 아우들이 봅니다, 이 두 가지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이 유주에서 백마장군에게, 그리고 백마장군이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에게 뭐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아우들이라는 세 글자만 꺼내도 얼굴에 띈 그 미소가 삐뚜름하게 바뀌는 것이 안 되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둘만 남게 된다면 그때는 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고 자꾸만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다가 입술까지 맞대오려는 것을 피하느라 애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피하지 못한 적도 많지만은. 제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뺨에 대고 있던 손으로 귓불이나 귀 주변 머리칼을 만져주는 손길의 따스함에 점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은 유비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심장에 박혔던 공포의 화살은 어느새 서서히 피어나는 꽃들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옛부터 묻혀있던 씨앗은 비를 맞자 기다렸다는 듯 물을 먹었고 따스한 햇살이 비춰오자 정신없이 꽃을 피워냈다. 어느 새부턴가 유비는 말없이 먼저 손을 겹쳐오기도 했고, 얼굴을 가까이 해오면 얌전히 눈을 꾹 감아왔다. 그럴 때면 마주 닿는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웃음에 귓불이 발개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저도 말아 올려지는 입꼬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살살 눈치를 볼 때만 나오던 호칭도 이젠 스스럼없이 부르게 되었다. 백규형님,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그때 공손찬은 모두의 앞에서 크게 웃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화살을 완전히 빼낸 것은 아니었기에, 가끔씩 유비는 꽃들 속에 슬쩍 내밀어져 있는 그 화살의 끝을 살며시 만져보곤 했다. 빼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유비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은 하나의 붓이 되어 행복한 미래만을 그려내었고 유비는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화살은 마치 벼락처럼 유비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 비유에 불과했다. 그가 쏜 화살은 실제로 한 사람의 심장을 파고들었고 들려오는 소리는 비명이 아닌 그저 무언가를 버리듯이 땅에 던져놓을 때 들어보았던 것만 같은 둔탁한 소리였다.

 새하얀 눈에 떨어지는 선홍빛의 핏방울은 탐욕스레 순백색을 먹어 치우고 피어난 꽃과도 같았다.

 유비는 쓰러진 사람의 형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하얀 주변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붉은 물은 저 이의 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되레 큰소리를 치며 썩 물러가라 했을 때 밝아지던 그 표정을 유비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적에게 베푸는 자비는 네 등 뒤의 화살과도 같다."

 공손찬은 텅 빈 눈을 한 유비에게 그리 말했다. 살이 얼어붙게 추운 겨울을 버티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을 씹어가며 버틴 그가 추구한 한 가지 가치는 강함이었다. 어째서 강함이냐 묻는다면 그 답은 살아남기 위해서요 지키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는 자비라는 이름의 그 어쭙잖은 것이 무엇이 되어 돌아오는 지를 두 눈으로 봐 왔다. 유비도 그것을 일찍 깨달았으면 했다. 제 사람이니까. 자비라는 것은 강함의 걸림돌인 것만 같았고 유비의 앞길에서 치워주고만 싶었다. 이만 가자, 공손찬은 손을 내밀었고 유비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붙잡았다.

 내민 손은 퍽 다정함이 묻어났지만 이젠 그것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연인으로서의 다정함인지 상관으로서의 다정함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비는 그 손을 잡았다. 이 역시 그 손이 연인으로서 내민 것인지 상관으로서 내민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손장군이 저에게 했던 말을 듣자 유비는 무언가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맞잡고 있었으나 둘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막사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달은 휘영청 밝게 떠 있었고 풀벌레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대화를 나누었으나 의미 없는 말들만 오갈 뿐이었다. 낮의 일은 교묘히 피해 가며 이야기하던 공손찬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비야, 너라면 내 뜻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유비가 만약 제가 한 짓을 죄악이라 생각한다면 이 말이 면죄부가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러리라 생각했다.

 유비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말을 속으로 삼키느라 바빴으니.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제 뜻을 모르시는데 어찌 제가 형님의 뜻을 이해하겠습니까. 백규형님, 어째서 모르십니까? 뒤를 돌기 전에는 그것이 화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적에게는 칼과 화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피와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저가 그에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내가 그에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를 바꾸려 했나. 오만했다.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절망감이 몸을 짓누르는 듯해 잠시 눕고 싶었다.

 둘은 같은 침상에 누웠다. 유비가 먼저 제안했고 공손찬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지 않아 보이는 표정의 유비를 달래려 그는 다시 옛이야기를 꺼내었다. 살풋 웃음을 띄운 유비는 생각했다. 이날들도 곧 그저 달콤한 추억으로 남겠구나…. 어쩐지 입안이 써 유비는 저보다 품이 큰 옷자락을 잡고선 눈을 맞췄다. 공손찬은 그 손을 잡아 손가락을 얽음과 동시에 혀를 얽어 단맛을 즐겼다. 이제 되었다, 공손백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하는 것은 죄 얻고야 만다는 공손백규가 간과했던 것은, 그때 그가 탐했던 것은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지만, 그것은 그저 고여있던 추억일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둘은 같은 단 맛을 맛보았고 같은 침상에서 잠이 들었지만 다른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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