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빛

BG3 포스트 아포칼립스 AU 더지아스

“순진한 집주인은 눈보라 폭풍이 몰아치는 날 조난자와 산장에 갇혔지. 바로 그때, 일급 살인 탈옥수가 돌아다닌다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야. 이 이야기의 교훈을 알겠어?”

“윌 레이븐가드는 설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 샌님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해봐.”

“그런 얘기에 몰입하기엔 날이 너무 덥잖아!”

두 사람은 나란히 서 능선 너머의 석양을 바라본다. 카를라크가 보호구를 들어올리며 이마의 땀을 훔치고, 윌은 불만스레 안고 있던 장총을 어깨에 걸쳐 메고 걷는다. 곧 그들은 장벽의 대문 앞에 도달한다. 진입로를 지키던 대원들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카를라크의 장화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킨다. 카를라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에 묶어둔, 가죽을 벗기지 않은 토끼를 보여준다.

‘최후의 빛’ 캠프의 순찰대가 귀환한다.

역사는 그것을 판데믹 종말이라고 불렀으나 그것은 엄연히 병이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식물종이 탄생해 행성의 지배종이 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감염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숲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인간종의 멸망은 마땅한 일이었다. 확산이 지나치게 빨랐고, 종말을 예방하기에는 구원에 값을 매겨 팔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재난이 일어나고 일 년 안에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과 모든 기술은 붉게 피 흘리듯 녹슬어 쇠락했다. 죽음과 상실은 이토록 만연한 시대가 와도 여전히 슬프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들에 미련하다. 25년째, 세상이 끝나고도 죽지 못한 이들은 작은 쉘터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세상의 끝에서 윌과 카를라크는 조난자를 주웠다. 그게 지난주였다.

그들이 주운 사내는 회복이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놀라웠던 넝마 같은 몸은 몇 번의 조잡한 수술을 거치더니 오늘은 의식이 온전히 돌아왔다. 조난자에게 침대를 둘러싸고 감시하듯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 어쩌다 부상을 입었는지, 어떤 무리와 함께 살아왔는지 따위의.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답은 사실이다. 머릿속에 있는 뇌가 한입에 넣을 만큼 작은 살점의 조각들로 분해된 듯이 조난자의 기억은 모조리 이어지지 않는 편린이고, 하나같이 핏빛이었다. 누군가 이름을 물었지만, 그는 잠시 머뭇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들 지니는 그 이름, 그 자리가 공란인 채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본능은 그가 이 양떼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속삭였다. 극심한 두통과 불안 속에서 그는 망가진 기억 일부를 주워섬겼다.

“이름은, 카시프. 성은, 모릅니다.”

기억하는 장면 속에서 명찰은 검붉게 얼룩져 그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큰 실수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원래 입던 옷은 수술을 위해서 잘라냈고 환자복이라고 준비한 것 외에는 변변한 옷이 없었으므로 캠프에서 그에게 의복을 준비해 주려 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아스타리온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소개의 첫마디는 원래 이런 일까지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카시프는 일전부터 그의 주시하는 시선을 느껴왔으나 처음 보는 사람의 의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아스타리온이 커튼을 치고 먼저 말을 붙여 왔다. 뜻밖이었다.

“날 알지? 당신이었어. 그때 날 봤잖아. 그렇지?”
카시프는 그의 곱슬거리는 흰 머리카락이나 햇빛 아래서 속눈썹이 나풀거리며 그늘을 만드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런가 보죠.” 다소 멍하게.
“……. 아닌가? 자기,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아무것도 모른다며. 정말 기억 안 나?”
“그것도…… 아마 그런가 봅니다.”

정말 바보인가? 그런 뜻으로 아스타리온이 혀를 찼다. ‘덩치만 무식하게 크고 어디 나사가 빠진 사람이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카시프는 이제야 전에 이런 사람을 봤다면 저가 알아보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누가 말해 주기로는, 아스타리온은 본래 이곳 사람이 아니랬다. 생존자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살았지만 모두 꼭 최후의 빛 쉘터 같지는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다가, 학대자가 죽고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발을 잘못 디딘 곳에서 다시 붙잡하거나 해를 당할까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물도 마시지 않고, 오직 언덕을 넘어서 오는 빛을 따라 걷기만 했다고 한다. 살아남으려는 일념으로.

단지 한 번 그를 만나고 나서, 카시프는 아스타리온과 자신이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꼭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고 단지 그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랬다.

하지만 아스타리온과 달리, 그는 망설이면서 뱉은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존재였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곧장 캠프 일을 도왔다. 어떤 역할로 자신을 채우려는 것처럼 말이다. 몸 쓰는 일은 뭐든 제법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데다 군말 없이 무난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최후의 빛 쉘터는 연방군의 통제 아래 있는 다른 큰 격리구역과는 다르게 생존자들의 자치 지구였다. 재난이 시작된 해에 사태 종식을 명목으로 중앙 집권 체제로 전환된 연방군에게 반발해 저항군이 조직되었는데, 지금 이 캠프를 이끄는 자헤이라 역시 한때는 저항군의 얼굴 중 하나였다. 수년이 지나 연방군이 지지를 잃은 만큼 저항군은 힘을 불린 부패 세력에 가까워졌고, 자헤이라와 그의 동료들은 저항군이 야기한 혼돈으로부터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빛을 독립시켰다. 이곳은 독자 노선을 타면서도 옛날 군대 방식으로 운영되곤 했다. 캠프는 혈기 왕성한 새 인재들을 배출했지만, 그들은 종말 이전을 기억하는 아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윌 레이븐가드는 연방군 체제를 갱생할 수 있다고 믿었고—이전 세대의 정치 지도자이던 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인근에 도사리는 위험들, 약탈자들이나 통행자를 무차별 살해하는 컬트에 대해 강경하게 척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비치곤 했다. 자헤이라나 다른 리더십이 윌을 신뢰했지만, 순찰대원 이상의 역할은 줄 수 없는 이유는 그랬다.

과연 이런 때에 백지 상태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란 귀중했던 모양이다. “네가 우리의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르지.” 카시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속도로 주변의 신뢰를 얻고는 머잖아 정찰대에 배정되자, 자헤이라에게 숨겨둔 아들이 더 있었던 게 아니냐는 농담도 나왔다.

“자헤이라가 괜찮다고 했다면 괜찮은 거야.” 보급 담당 틸리가 이야기를 종결하고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카시프는 반짝이는 것을 찾아 둥지로 가져오는 까마귀처럼 순찰을 나갈 때면 흥미로운 물건들을 주워 왔다. 열쇠고리, 고장 난 기계, 책. 이제 웬만큼 중요하지 않은 문서가 아니면 인쇄하지 않았으므로 문학은 귀했다. 생존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시대가 되자 범람하던 문화와 예술은 흔적기관처럼 도시에 남아 있었다. 배낭에 중요한 물자 외에 잡동사니를 밀반입하는 일은 정찰대원만 가지는 특권이었는데, 그는 그것들을 아스타리온에게 줄 선물로 썼다. 일종의 구애였을 것이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주변을 어정대는 숫기 없는 청년 같았다.

“우리 정말 전에 본 적 있나?”

“아, 내 삶에 구세주처럼 등장하셨지. 모르면 됐어. 이런 건 올 때마다 가져올 필요 없어, 맘에 들긴 하는데.”

“그러면?”

“뭐가 ‘그러면’이야? 그냥 있어.”

아스타리온은 정교한 함정이나 기계 따위를 손보는 일을 맡아서 했는데, 낡고 망가진 물건을 버리는 법이 좀처럼 없다. 카시프는 그의 손이 하는 섬세한 일들을 가만히 앉아 관찰하곤 했다. 오래전에 가치를 잃은 물건들은 그 손안에서 귀하게 다뤄져 생명을 입는다. 가끔은 아스타리온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 때면 카시프는 온순한 동물이 되어 차가운 손바닥 위에 뺨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밀밭을 달리는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이나 바다의 물결이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꼭 이렇게 그를 스치고 갔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반드시 그런 어린 시절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면서. 그때마다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다. 정말로 그가 어떤 사람으로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계절이 몇 번 지났다. 쉘터는 꽤 반복적인 일상을 주었고 그는 새 친구를 사귀기도 하며 이 생활에 정을 붙였다. 그가 길고 험한 외출을 끝내고 오면,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냥 있어’, 아스타리온은 별 이유를 대지 않아도 그가 있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마치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사람이 되어 계절을 처음 맛보는 듯이 그는 한낮의 뜨거움이나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같은, 평범한 날들을 즐겼다.

기름칠하고 수리하는 일, 땀 흘리고 바쁘게 보내는 모든 일과의 끝이 잠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카시프는 잠을 공유하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자신이 다 큰 장정임을 잊은 것처럼 재워 달라 청하며 그의 침대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그러면 그들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잠을 잤다. 아침이 오기 전에 서로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수준의 접촉은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것 같았으므로, 종종 잠결에 가물거리는 눈을 떠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밤중에 그러한 동작을 하다가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한다. 세상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사람이 덜된 그의 생에서는 가장 그에 근접할 그 무언가. ‘신선하고 촉촉하며 자라는 중에 있는 그것을’.*

*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수록, <숲속의 집>에서: ‘집에 돌아와 죽은 듯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혀로 달을 만질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달은 신선하고 촉촉했으며 자꾸 커졌다. ⋯(후략)’


그러나 불안은 때를 모르고 나타나는 불청객처럼 그의 문을 두드린다. 빚을 받으러 오는 자들이 있었고 이번에 카시프가 치러야 하는 값은 몰락이었다. 그의 영혼은 다시금 들개처럼 굶주려 거리를 쏘다닌다.


덜 썩은 살점, 노랗게 더러워진 백골. 죽은 이는 연구소의 흰 가운이었던 것을 걸치고 썩지 않은 플라스틱 명찰을 목에 걸고 있었다. 명찰의 증명사진 속에서 바래지 않은 웃음이 여태 남아 있다. 윌은 이 사람의 이름을 소리내 발음해 보았다. 아무도 듣지 않은 그 소리는 유리창에 돌을 던진 것 같은 파열음으로, 겨우 붙들고 있던 평온을 산산조각내러 불려 온 죽음처럼 들렸다. 그러자 윌의 마음에 불쑥 분노가 솟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용광로에 담긴 쇠가 된 듯이 온통 증오가 넘실거렸다.

“카시프!”


허용되지 않은 곳까지 나가 바깥일을 보고 온 윌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표정이 굳은 채였다. 그날 밤에 캠프 사람들은 플란넬이나 미니 드레스를 차려입고 빙글빙글 돌거나 건배를 하고 있었다. 모처럼 멋을 낸 조명 아래에서 피가 말라붙어 엉망인 윌의 모습은 최악의 부조화였다. 바깥에서 동행한 사람들에 관해 한 소리를 하려고 자헤이라가 다가섰지만 윌은 먼저 카시프와 해결해야 할 용건이 있다고 말했다.

파티를 멈췄던 사람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다시 댄스 플로어를 즐기려고 애썼다. 아스타리온도 반쯤 취한 동료들의 손을 잡고 돌면서, 종종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바를 힐끔거렸다.

윌과 카시프는 상체를 숙이고 몸을 바 테이블에 괸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이 그들 중에서 새어 나왔다. 순간 제 언성이 높아지자, 윌은 주변의 시선이 몰릴까 봐 얼굴을 붙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말은 씹어 뱉은 분노 같아서 아스타리온에게 그의 입 모양이 아주 쉽게 읽혔다. ‘네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내가 자헤이라와 사람들에게 알리겠어.’

음악에 맞추어 돌면서 아스타리온은 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카시프의 뒷모습은 거기에 남아 있었다. 아스타리온의 춤 상대가 다시 바를 가리기까지 순간은 지나치게 짧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야 했다.

아스타리온은 그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제 그는 춤을 멈추고 바에 다가서려고 한다. 인파 사이를 비집고 나왔지만, 막상 거기엔 마시다 만 잔만 남아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아스타리온의 손을 붙잡아왔다. 그건 아주 생경한 감촉이어서 아스타리온은 공격을 당한 듯이 움츠러들며 손가락을 당겨 빼냈다. 카시프가 어느새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가 미미하게 서글픈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거뒀다.

“집에 가자.”

그들은 돌아와서 아껴둔 술을 한 병 가까이 마시고, 전축을 틀어 놓고 춤을 췄다. 레코드판이 낡아서 자꾸 잡음이 섞이는 걸 두고 아스타리온은 전축을 고쳐야겠다고 투덜댔는데, 카시프는 아랑곳 않고 기분을 냈다. 아스타리온이 그의 발등을 밟고 올라선 채로 뒤뚱거리며 돌게 하는, 펭귄 왈츠도 췄다.

“자기는 이런 춤 같지도 않은 장난을 좋아하더라. 꼬마 아니랄까 봐.”

카시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취한 사람처럼 마냥 웃었다. “…….”

“왜? 기념할 거리라도 있어?” 아스타리온은 내심 그간 묵혀온 이야기가 여기서 꺼내지고 파티가 완전히 끝났으면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우리.” 아스타리온의 어깨 뒤로 턱을 댄 채 카시프는 추격자들이 능선 넘어 어디쯤 와 있을지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싱겁네.”

그는 밤에 몰래 침대를 벗어났다. 발소리를 죽이고 차고에 가서, 주둥이가 긴 저격용 총을 조립하고 조준경을 붙였다. 말라 있던 화약 냄새가 다시 생생하게 피어올라 카시프를 온통 덮고 코와 눈을 온통 먹먹하게 했다. 꼭 머리가 다 마비된 것 같았다.

문을 나서기 전에 그는 찬물에 얼굴을 씻고 깨진 거울 속의 제 낯설고 갈라진 모습을 들여다봤다. 가로등 불이 없는 앞마당을 지나칠 때 다른 한 사람의 걸음이 따라붙었다.

시린 바람 때문에 제 팔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그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카시프, 너야?”

푸르스름한 새벽빛 아래서 둘은 서로의 어두운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 어떤 예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영영 서로의 윤곽을 겨우 가늠하는 미래만 주어질 거라는 것.

아스타리온이 다시 묻는다. “아침에 돌아올 거지?” 그러자 숨가쁜 슬픔이 카시프를 엄습했다. 지금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서글퍼서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내면 자신임을 들킬까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윌 레이븐가드가 밖에서 어울리던 새 동료들은 저항군의 다음 세대 소년병들이었다. 이들은 상황을 뒤집을 개혁을 간절히 원했다. 모든 무리가 생존을 위해서 온건한 선택을 내리는 건 아니다. 이들 집단은 연방군이나 컬트와 목숨을 걸고 싸워 온 역사가 길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컬트가 점령 중인 옛 연구소를 완전히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카시프의 얼굴을 안다. 카시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를 언제까지고 쫓아와 사냥할 셈이었다. 윌의 지식은 카시프가 가짜라는 걸 아는 데 미쳤지만 이들과 확실히 손을 잡게 되면 조만간 그에게 등을 돌릴 것이 자명했다. 윌, 자헤이라, 이어서 최후의 빛 캠프 전부. 그의 사랑스러운 달링마저도.

그러므로 카시프는 그들과 다른 계획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발 빠르게 실행해야만 했다. 그는 난간에 총을 고정해 놓고, 몸을 낮춘 채 컨테이너 항구에 오가는 사람들의 수를 셌다. 얼굴을 기억하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완전히 숫자를 파악한 다음에는 조준경에 눈을 맞추고 동그란 머리를 하나 골라 십자선의 중앙에 놓았다. 습관적으로 거리를 계산하는 동안에는 목표물이 얼마나 앳된지조차 몰랐다. 이 모든 일을 해야 했던 이유를, 아스타리온의 입가 주름이나 웃음 섞인 말투 같은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결국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죄스러운 자리였다. 미치광이처럼 입안으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되뇐다. ‘아무도 남아선 안 돼.’ 손가락이 무정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탕!

그의 안에 금빛으로 빛나는 밀밭을 달리던 소년이 있었다면 소년은 이곳에서 총성과 함께 죽는다. 다음, 그다음. 카시프는 머릿수를 하나씩 역으로 세 내려간다. 컨테이너 사이에서 또 한 사람이 피거품을 뿜으며 죽을 때 청량한 푸른 물결로 뛰어들던 소년도 죽었을 것이다.

탕! …… 탕!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쥐새끼 같은 녀석은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겁쟁이 자식! 카시프는 그를 죽이려고 찾아다녔다. 부질없는 숨바꼭질이 우습기도 하고 바짝 속이 타서 열이 받기도 했다. 높은 컨테이너 사이를 느린 박자로 거닐 때, 걸음마다 피웅덩이가 신발 밑창을 적셔 찰박이는 소리가 난다. 문짝 뒤에 숨어 있던 왜소한 녀석이 볼품없이 벌벌 떠는 손으로 단검을 쥐고 그를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 그 무력한 시도에서 카시프는 자신을 죽이려던 소년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느꼈다. 녀석은 맥없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너저분히 늘어진 시체들 사이에서, 카시프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웅크렸다. 온통 피로 젖어 엉망이 된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그는 허탈해 웃고, 웃음은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두려움은 끝나지 않고 그를 추격해 올 것이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단지 돌아가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도 이제는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