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텽들] 좋아한다고 中

짝사랑공 배우 X 밴드맨 For 익명님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잠에서 깬 태영은 눈도 뜨기 전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 베시시 웃었다. 몸에 감겨오는 이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민희의 얼굴이었다. ......민희? 태영은 너무 놀라 방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태영이 겨우 중심을 잡았다. 깨자마자 크게 놀란 탓에 펄떡펄떡 뛰는 심장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맞다 민희 형 자고 간댔지... 다행히 민희는 그 소리에도 깨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마지막쯤엔 술이 깨서 민희가 자고 간다 한 건 아는데, 그 이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혹시 말실수 한 건 아니겠지. 예를 들어 고백이라던가... 떠올리려고 애써봤지만 쓸데없이 자신이 민희의 맨몸을 보고 꼴린 것만 생각났다. 애꿎은 머리를 쥐어잡던 태영이 부산스러웠는지 뒤척거리는 민희에 동작을 멈췄다. 덜 풀린 성대로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아파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히 일어났다. 아픈 목구멍에 물 한 잔 들이부은 태영은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씻고 나왔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다 먹을 게 없어 요리는 포기하고 나름 자신있는 라면을 끓였다. 여즉 자고 있는 민희를 깨웠지만 좀처럼 일어나질 않았다. 이 형은 술도 안 마셨는데 왜 이렇게 못 일어나.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댄 후에야 부스스 일어난 민희는 머리에 까치집을 진 채 눈도 못 뜨고 있었다. 씻지도 않고 퉁퉁 부은 눈으로 어기적 걸어와 먹기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 뭔가 결혼한 것 같아서 설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이 아직 제정신 아닌 것 같다고 태영은 생각했다. 

  미친 생각을 끝내준 건 몸을 부르르 떠는 태영의 핸드폰 덕이었다. 어제 종방연 전에 보고 처음 킨 핸드폰엔 매니저님의 연락이 가득 쌓여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생겼나 당황한 태영이 제일 위로 올려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있었다. 어젯밤 웬 여성과 자신이 집에 들어가는 걸 포착했다는 열애설 기사. 라면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집은 채 얼빠져있던 태영은 때마침 걸려오는 매니저님의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지금 어디서 누구랑 있어?]

  "집에서 민희 형이랑요."

  [사진 보내줄 테니까 너 맞는지 봐봐. 맞다면 옆에 누군지도.]

  전화를 끊고 받아본 사진 속 옆 사람에게 기대어 있는 건 분명 자신이었다. 이게 어젯밤 사진이라면 내가 술에 취해 있을 때고,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민희 형일 수밖에 없지 않나..? 어두운 사진 속 자신을 부축하는 사람은 카멜색 코트를 입고 어깨에 닿을락말락한 기장의 흑발을 하고 있었다. 설마...? 태영의 눈이 소파에 널려있는 민희의 겉옷으로 향했다. 사진 속의 코트와 같은 카멜색 코트가 거기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무리 민희형 머리가 장발이어도 어떻게 남자랑 여자를 헷갈려? 태영은 다시 매니저님께 전화를 걸어 해명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민희에게도 설명해줬다. 누구 하나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 했다. 

  "이참에 머리 잘라야겠다." 

  "...안 자르면 안 돼요? 긴게 더 좋은데."

  "그래? 그럼 귀찮은데 놔둬야지."

  왠지 모르게 그 말에 기분 좋아진 태영이 웃었다. 오늘의 헤프닝은 술자리에서의 좋은 안줏거리가 될 예정이었다. 아침부터 개콘이 망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민희의 말에는 마냥 웃지 못하고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 진짜 그런 사이였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태영은 언젠가 그 기사가 사실이 되길 바랐다. 나갈 준비를 마친 둘은 각자 기획사와 연습실로 출근했다. 

  민희는 밴드원들에게 하루종일 놀림받았다. 민희가 태영과 친한 걸 알아서 태영에게 더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태영이 요즘 워낙 핫한 신예라 열애설 기사를 못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본 밴드원들은 단번에 그 코트를 알아봤다. 민희는 가을이 되면 단벌신사처럼 그 코트만 입었으니까. 김태영 열애설 상대방, 강민희잖아? 코트가 아니더라도 머리도 그렇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틀림없었다. 야 강민희, 이거 기사에 찍힌 사람 너지? 아 맞으니까 그만해... 웃겨 죽으려던 밴드원들은 이때만 기다린 사람들처럼 민희를 놀리다 못해 새로운 별명을 붙여줬다. 김태영 일반인 여자친구. 

  김태영 일반인 여자친구 강민희 씨, 열애를 들킨 심경이 어떠세요? 드럼을 맡은 원진이 역시나 소파에 붙어있는 민희를 살살 긁었다. 민희가 참다 못해 발끈하려던 찰나 누군가의 우렁찬 감탄사가 빨랐다. 모두의 시선이 작곡을 맡은 우빈에게 쏠렸다. 야, 우리... 차트인 했어... 허무맹랑한 소리에 다들 탄식했다. 저 저 또 웁피셜이라며 관심을 끄려는 순간 우빈이 진짜라며 자신이 보고 있던 음악차트 어플을 내밀었다. 일렉을 맡은 정모가 속는 셈 치고 화면을 들여다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진짠데?! 

  민희가 속해있는 레디올낫 밴드의 음원 순위가 갑자기 급등했다. 비록 앞자리가 8이었지만 그 순위가 얼마나 들기 힘든 건지 다들 잘 알았다. 차트 100위 안에 있는 자신들의 노래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리가 한 거라고는 강민희 놀린 것밖에 없는데. 순위가 오른 이유를 찾던 우빈이 원인을 찾아냈다고 다시 한 번 외쳤다. 뭔가 하니 다름아닌 태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영의 인터뷰. 태영은 좋아하는 음악 있냐는 질문에 '아이유, 박효신, 그리고 크래비티요'라는 밈처럼 DPR, 더 로즈, 그리고 레디올낫 밴드요-라며 민희가 속한 밴드를 언급했다. 추천곡은? 레디올낫 밴드의 러브파이어. 태영이 추천한 러브파이어는 차트에 든 세 곡 중에도 가장 높은 순위였다. 김태영, 생각보다 슈퍼스타였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태영의 언급을 시작으로 레디올낫 밴드의 특색 있으면서도 듣기 좋은 음악과 어디 내놔도 뒤쳐지지 않는 밴드원들의 미모 덕에 밴드의 음원은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알려지면서 다른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추가적인 언급도 한몫 했다. 실력과 얼굴로 인정받은 밴드는 말 그대로 한순간에 빵 뜨게 됐다.

  덕분에 레디올낫 밴드는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러브콜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됐다. 민희가 라이징 밴드로서 중요한 공연을 앞둔 날은 태영도 현장에 가려고 했다. 문제는 새로 찍게 된 영화 스케줄이 애매했다.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은데... 태영은 민희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하고 싶어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빡빡한 일정을 쪼갤 수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민희에게 전화를 건 태영의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형... 나 못 갈 거 같아..."

  "안 됐군. 이 핫가이의 폭룡적인 신곡 무대를 못 보게 되다니."

  "형은 아쉽지도 않아?"

  "안 되는 걸 어떡하냐. 일은 해야지." 

  "그치..." 

  "잘 하고 다른 공연 보러 와. 또 초대할게."

  "알겠어..."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게 고작 한 시간 전이었다. 행운 뒤엔 불행이 따른다고 하던가. 공연이 현장 상황으로 취소되었다. 거기까진 조금 많이 아쉬웠지만 애써 괜찮은 척 할 수 있었다. 김태영 안 오길 잘 했네 그런 생각도 한 번 하고. 그런데 오랜만에 통화하는 것 같은 지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취소된 김에 요즘 바빠 소홀한 게 미안해서 같이 맛있는 거 먹자 하려고 연락했는데. 솔직히 조금 위로받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지나는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희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툭 늘어뜨렸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칙칙하던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공연 취소와 차임으로 연속 어택 당한 민희는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괜찮다며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사기를 북돋는 밴드원들 사이 홀로 센치했다. 창문에 흐르는 빗줄기와 그 우울한 분위기가 민희를 더 슬픔에 잠기게 했다. 

  연습실에 도착한 민희는 밴드원들과 악기를 정리했다. 먼저 간다는 두어 명을 배웅한 민희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술 마셔줄 사람? 누가 봐도 무슨 일 있는 표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주량이 이슬톡톡 한 캔인 민희와 술을 마셔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문자 F인 원진이라면 불쌍해서라도 같이 마셔줬을테지만 그는 이미 간지 오래였다. 그럼 한 사람밖에 없군.

  그냥 씻고 빨리 자라는 우빈의 말을 뒤로 하고 연습실을 나선 민희는 편의점에서 무려 이슬톡톡 네 캔과 술안주 삼을 조청유과를 사서 태영의 집으로 향했다. 태영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계속되는 초인종 소리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민희는 술 취한 태영을 들처업고 왔을 때 알게 된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그 문제의 코트 대신 새로 산 검정색 코트를 소파에 벗어둔 민희가 조청유과를 대충 까서 펼쳐놓고 홀로 마시기 시작했다.

  태영은 운좋게도 생각보다 일찍 끝난 촬영에 바로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쯤이면 공연 끝났을 것 같은데. 하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 민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봐도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뒤풀이 중인가 싶어 어디냐는 문자 하나 보내놓고 집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는데 거실이 환했다. 말로만 듣던 사생인가 싶어 조심스레 복도를 지난 태영의 눈에 보이는 건 왠 무단침입한 취객 한 분이었다. 취했는지 자세가 흐트러진 민희의 옆에는 빈 이슬톡톡 한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태영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민희가 마시고 있는 이슬톡톡 한 캔, 그리고 아직 따지 않은 이슬톡톡 두 캔. 민희가 사온 이슬톡톡은 총 네 캔이었다. 그 중에 두 캔을 마셨고.

  "민희, 미쳤어?"

  "왜 이제 오냐..." 

  "두 캔만에 이미 정신 못 차리면서 남은 두 캔은 뭐야." 

  "아니 이건 네 거..." 

  네 거라며 실실 웃는 민희를 기가 막히다는 듯 보던 태영이 남은 두 캔을 집어들어 멀찍이 놓았다. 혹시라도 민희가 더 마실까봐. 일단 씻고 나온 태영은 민희와 격리해놨던 이슬톡톡 한 캔을 따면서 옆에 앉았다. 아니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왠일로 술이야? 심지어 이슬톡톡 두 캔이라니 과음하네. 태영의 말에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트린 민희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영아, 나 차였다... 말투만 젖은 게 아니라 얼굴도 젖기 시작하는 민희에 당황한 태영이 얼른 달랬다. 아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 형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추태야... 

  태영은 들고 있는 캔을 원샷하고 찌그러트렸다. 아니 조청유과 안 먹는다니까 또 이거 사왔네. 얼굴이 벌개져서 주정부리는 민희는 괘씸해서 울도록 놔두고 새 캔을 따려던 태영이 들고 있던 걸 다시 내려놨다. 이슬톡톡 그거 간에 기별도 안 가서 먹어봤자 이 답답한 속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태영은 냉장고에 있던 4개입 맥주를 꺼내왔다. 

  "나도 울고 싶다 강민희..."

  "왜...?" 

  "그런 게 있어."

  "그럼 우리 같이 울까..?"

  민희는 태영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그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보고 있자니 열이 올랐다. 그 여자랑 아주 세기의 사랑 하셨나봐요. 어이없는 꼬라지에 튀어나올 뻔한 욕을 술과 함께 삼켰다. 그래, 술이나 마시자. 술이 아주 술술 들어가네. 그래서 술인가. 그딴 생각하며 안주도 없이 새 캔을 따고 들이키는 걸 반복하던 태영이 문득 자신의 주량을 떠올린 건 순간 머리가 빙글 돌고 시야가 어지러워진 때였다. 아 맞다 나도 잘 못 마시는데...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

  눈을 뜬 태영은 손에 얼굴을 묻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게 하는 민희의 다 벗은 등짝이 눈앞에 있었다. 당연한 건진 몰라도 태영 역시 걸친 거라곤 속옷 뿐이었다. 아 제발, 아니라고 해줘. 다 망했어. 이렇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울고 싶은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무는데 어제의 기억 한 조각이 불쑥 떠올랐다. 

  태영은 민희와 키스했다. 먼저 입을 맞춘 건 태영이 아니라 민희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들이대는 입술에 등신처럼 좋다고 받은 자신도 생각났다. 왜 등신이냐면, 민희는 키스 이후 지나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태영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잠든 민희를 한참 바라보다 침대에 눕혔다. 그 이후 이미 취한 상태로 몇 캔 더 마신 것까지.

  옷은 원래 벗고 자는게 습관이라 술김에 벗은 것 같고, 침대도 민희를 눕혀둔 걸 잊고 기어들어온 것 같았다. 결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민희가 전 여친과 태영을 헷갈려서 한 최악의 키스 빼고. 이 형은 왜 벗고 있어서 날 헷갈리게 해. 아무래도 민희는 술김에 열이 올라 더워서 벗은 듯 했다. 게다가 당황해서 볼 생각을 못 했는데 이불을 내려보니 하의는 입고 있었다. 

  태영은 이 모든 상황에 큰 현타를 맞았다. 여자친구랑 헷갈려서 키스? 아 진짜 짜증난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눈물 날 것 같았던 태영은 재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메모 한 장 남기고 태영은 자신의 집을 나섰다. 진짜 접어야 하는데. 형은 나 좋아할 일 없는 거 알잖아......

  뒤늦게 태영 없는 태영 집에서 깬 민희는 일 있어서 먼저 간다는 메모를 확인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같이 해장할 사람? 밴드 단톡방에 보내니 오직 원진만이 콜을 외쳤다.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 주량을 넘긴 탓에 지난 밤의 필름은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언뜻 귀가한 태영을 맞이했던 것 같기도 하고. 민희는 한참 밍기적거리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씻고 태영의 집을 나갔다.

  바로 그 날 이후였다. 태영이 민희의 연락을 피하는 게. 처음엔 민희도 태영의 촬영 일정이 바쁜 걸 알기에 연락이 없어도 그러려니 했다.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든 건 못 본지 두 달이 좀 넘었을 때였다. 만날 시간 없는 건 그렇다쳐도 이렇게까지 연락도 안 될 일인가? 그저께 태영에게 보낸 살아있냐는 문자의 1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것만 남아있으면 다행이게. 그 문자 위에 1을 달고 있는 일방적인 말풍선들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민희가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사라지지 않은 1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원진이 들어왔다. 점심 뭐 먹을 거냐는 질문에 아무거나라고 대충 대답했다. 지금 점심이 중요해? 김태영이 내 연락을 죄다 무시하는데. 전화를 걸어봐도 늘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음성으로 끝났다. 원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여자친구랑 헤어진지 좀 됐다며? 응. 성의없게 대답한 민희의 이마에 빠직 마크가 새겨졌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김태영이 내 연락을 죄다 무시하는데!!!

  민희가 열내든 말든 메뉴를 정한 원진이 닭갈비를 외쳤다. 그리고나서 하는 말에 민희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여기 며칠 전에 태영이랑 갔는데 맛있더라고. 고개를 번쩍 든 민희가 원진을 붙잡고 물었다. 언제 갔는데? 언제 그렇게 둘이 친해진 거야? 누가 먼저 약속 잡았어? 쏟아지는 질문에 어버버하던 원진이 민희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기다려. 

  원진의 말에 의하면 태영이 원진과 닭갈비를 먹은 것은 그저께. 민희가 그저께 보낸 문자는 아직도 안 읽었으면서 원진과는 만나서 밥을 먹었다? 연락할 시간 있는데도 나한테는 연락을 안 했다는 거 아닌가. 좀 서운한데? 심지어 원진과는 통성명 한지 세 달밖에 안 됐으면서 3년을 본 자신의 연락만 무시했다는 게 속이 상했다. 민희는 애써 괜찮은 척 하며 다시 태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이슬톡톡 한 캔을 산 민희는 편의점 테라스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캔뚜껑이 민희의 마음과는 다르게 시원한 소리를 내며 따였다. 한 모금 넘기는데 무언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태영의 연락이 끊긴, 두 달도 넘은 그 날의 기억이. 민희는 마시던 걸 뿜어내고 콜록거렸다. 나 왜 김태영이랑 키스해? 뭐지, 이거 기억의 오류 아니야? 이게 뭐야? 진심으로 당황한 민희는 당장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민희가 애꿎은 머리만 부여잡고 있다가 급한 손길로 타자를 눌러댔다.

<-   영래이

1 야 중요한 거니까 받아

1 안 받으면 너 나랑 키스했다고

1 인터넷에 올린다

  꽤 파격적인 내용의 문자를 보낸지 얼마 안 되어 태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미리보기로 보고 있었는지 문자의 1은 여전했다. 그런 태영이 괘씸했던 민희가 약간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김태영. 이래야 전화 받냐? 그때 내가 너한테 키스한 거 맞는 거지?"

  [...없던 일로 해요. 어차피 형 저 안 좋아하잖아요.]

  본인 할 말만 하고 툭 끊는 태영에 민희가 황당한 얼굴로 끊어진 화면만 바라봤다. 아니 뭐 너는 나 좋아하는 것처럼 말해? 그리고 싸가지 없게 형보다 먼저 끊냐? 꼰대 발언 해보지만 이미 듣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튼 자신이 태영에게 키스한 건 맞는 모양이었다. 나 같아도 아는 형이 술김에 키스해놓고 기억 못 하면 기분 나쁠 것 같긴 한데 좀 너무하네. 우리가 3개월 본 것도 아니고 3년을 봤는데.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태영의 말이 틀릴 건 없었다. 민희 자신도 태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지나로 착각해서 그런 것 같고. 그러고보니 태영과 지나는 생긴 게 꽤 닮았다. 쌍커풀 진한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술김이라면 확실히 착각할만 할지도. 태영이 들으면 자리 박차고 일어날 생각을 했다.

  근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따지고 보면 먼저 키스한 건 자신이기에 제 잘못인데 태영이 먼저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럼 다 괜찮은 거 아니야?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김태영이랑 키스... 했다는 거잖아... 아니 근데 얘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아무렇지 않지 않으니까 나를 피하는 건가? 혼란스러워진 민희는 다시 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영래이

너 지금 나 피하냐?

네. 그러니까 연락하지 마세요.

  의외로 단번에 온, 단칼에 잘라내는 단호한 대답에 민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 참 나 참. 미안하게 됐다. 근데 없던 일로 하자며. 그럼 피할 필요 없잖아. 생각한 그대로 다시 한 번 보내니 또 답이 없었다. 태영이 보낸 문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근데... 그러고보니 얘 왜 갑자기 존댓말 해? 형 소리도 지 좋을 대로 뗐다 붙였다 제멋대로였으면서 어이없네. 나는 T라서 이런 거 하나도 안 서운하거든?! 하나도 안 서운한 민희는 입술을 꾹 물고 잠잠한 핸드폰을 확 뒤집어 엎었다.

  민희를 서운하게 했던 태영의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새벽 즈음이었다. 뭐야 연락하지 말라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급한 손길로 전화를 받은 민희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핸드폰에선 익숙한 태영의 목소리 대신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태영이 친한 형 맞으시죠? 얘가 취했는데 혹시 데리러 오실 수 있으세요?]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애가 왜 술집에 있는 건지. 어이가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투덜거리면서도 당장 알려준 가게로 달려갔다. 태영은 이미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뭔가 데자뷔인 거 같은데. 민희는 태영을 들처업고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태영은 민희의 어깨에 기댄 채 깰 기색이 없었다. 잠든 태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같이 자더라도 늘 태영이 먼저 일어났기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민희는 태영의 집 앞에 도착해 기억하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당연히 열릴 거라고 생각한 도어락은 삐 삐 소리를 내며 불이 꺼져 버렸다. 이거 맞는데? 당황한 민희가 다시 한 번 같은 번호를 눌러 봤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태영을 쳐다본 민희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야 너 비번 바꿨냐? 내가 들어올까봐? 어이없네..."

  "......"

  잠든 태영은 답이 없었다. 태영의 집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진 민희는 결국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늘어진 태영을 침대에 눕히려던 민희가 중심을 잃어 태영과 함께 침대에 쓰러졌다. 하... 듣기만 해도 피곤 가득한 한숨 소리가 퍼졌다. 태영에게 깔린 팔을 빼려던 민희가 태영과 눈이 마주쳤다. 반쯤 뜨인 풀린 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렸으면 좀 옆으로 가 봐." 

  "......강미니."

  "형은 어따 팔아먹었어." 

  형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일단 팔을 빼는 게 먼저이긴 했다. 깔린 팔이 슬슬 아파왔다. 팔을 빼보려고 힘을 줄수록 더 아프기만 했다. 민희가 혼자 애쓰는 동안 한참을 답 없이 보기만 하던 태영이 피식 웃었다.

  "이거 꿈이지?"  

  "뭐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한 소리를 내니 태영의 손이 민희의 얼굴로 다가왔다. 민희의 볼을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린 태영이 그대로 뒷목을 끌어당겨 입맞췄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한 민희가 얼어있자 태영의 뜨거운 몸뚱이가 밀착해왔다. 어느새 태영의 밑에 깔린 자세가 된 민희가 웅얼거렸다. 잠깐... 고개를 뒤로 빼려 해도 민희의 뒤통수는 침대에 닿아 있어 침대를 뚫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낯선 감각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지나와 할 때도 이렇게 좋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숨이 차서 어깨를 세게 밀어내니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흔들리는 동공이 태영의 젖은 입술로 향했다.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각한 민희의 얼굴이 온통 불타올랐다.

  "야, 야 정신차려. 너 지금 내가 그랬다고 복수하냐?"  

  "그 누나보다 내가 더 예쁜데." 

  "그 누나? 누구 말하는 거... 설마 지나?" 

  "나 닮은 여자는 되고, 나는 안 돼?" 

  다른 말은 안 들리는지 본인 할 말만 하던 태영이 다시금 민희의 볼을 감쌌다. 점점 가까워지는 태영의 얼굴에 귓가에 경보음이 울렸다. 술을 마신 건 태영 뿐인데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열이 올랐다. 굳어버린 몸에 그냥 눈을 질끈 감은 민희에게 열기가 쏟아졌다. 자신의 얼굴을 지나쳐 끌어안듯 쓰러진 태영에 상황 파악을 하던 민희가 슬그머니 제 위에 늘어진 몸을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나는 태영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민희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이게 뭐야? 김태영 얘 나 좋아해? 헐 그런가 봐. 태영이 원진과만 밥을 먹은 게 서운하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런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자야하나 머리 싸매던 민희는 새벽이 다 된 시간이라 귀찮은 마음에 별 일 있겠나 싶어 그냥 바닥에 대충 이불 깔고 잠을 청했다. 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버렸는데 같이 자기는 조금 그랬다. 아주 취객이 상팔자여. 집주인을 내쫓고 침대 차지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애써 외면하고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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