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난무

회고록

300자를 위한 헛소리

드림계 by 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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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 여름, 아니. 봄이었나?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달력은 안 뜯은지 한참 돼 보나마나한 상태였다. 그 때의 나는 어둑하고 비좁은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제 삶을 방치하고 있었다.

19살. 투명인간 취급하던 집안에서 빠져나와 원룸을 구해 독립했던 나이. 어찌저찌 돈을 벌며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살아갔던 때. 아르바이트를 하다 직장을 가지고, 회사를 다니고… 가뜩이나 좁은 집에 가구 하나 둘 들이고. 그렇게 몇 년 잘 살다 어느 순간부터 일하러 갈 때 빼곤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쉬는 날이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새벽이 되면 눈을 감았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었다. 일 조차 나가지 않게 되었을 때는 조금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퇴직을 했었나? 몽롱한 정신을 애써 끌어모아 바닥에 구르던 통장을 집어들었다. 일정한 숫자들의 나열을 죽 흝다 퇴직금이 눈에 들어와 그러려니 했다. 하루가 굉장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데 몇달은 순식간에 흘러지나갔다. 피곤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살고싶다는 욕구는 분명해서 편의점에 음식을 사먹었다. 쓰레기가 점점 늘어났다.

좁아터진 집에서 쓰레기와 바퀴벌레들과 함께 동침하는게 일상으로 굳어졌을 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내가 여는데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남들은 이렇게 쉽게 여는구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집으로 침입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문을 연 불청객들은 집안 상태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쓰레기의 바다를 헤치며 내게로 다가왔다.

“─씨? 시간 정부에서 왔습니다.”


시간 정부는 역사를 수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라고 한다. 그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내가 이 역사수정자들을 막기에 적합한 힘이 있다고 판단되어서라고 한다. 뭐… 물건의 마음을 깨우는 힘이라나 뭐라나. 나중에 말하길, 실은 내가 아닌 윗형제를 먼저 찾아갔으나 부모님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고, 앞날이 창창한 제 혈육 대신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딸을 데리고 가라고 성질을 냈댄다. 그 말을 듣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가족의 모습에 웃어야될지 말아야될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 때 난 웃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시설로 끌려가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도구들을 만져댔다. 이 영문모를 행동을 몇 번 반복하고 지들끼리 몇번 웅성거리다 대뜸 눈 앞에 종이를 건냈다. 계약서같아 보이는 글자들을 빤히 바라보다 같이 건넨 펜을 쥐었다. 빈 칸 옆에 ‘이름’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앞에 앉은 직원이 여러가지 주의사항을 말해줬는데 꼭 본명을 쓸 필요는 없다는 설명 뒤로는 아무것도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싸보이는 펜을 몇 번 똑딱거리곤 손 가는대로 빈칸을 채웠다. 마음과 다르게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펜촉의 감각이 불만스러웠다.

제 이름에서 한 자, 그리고 우물 정 자.

왜 우물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화에서 우물이 나왔었는데, 그 곳에서 기어나오던 귀신이 문득 스쳐지나갔다는 시덥잖은 이유였다. 그 영화에서는 저주받은 비디오를 보면 일주일 뒤 귀신이 찾아와 본 사람을 죽여버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대로 망명당하는 나도 찾아올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른 그 물음은 무게를 갖추지 못 하고 그대로 흩어졌다. 그 영화를 본지 일주일보다 길고 아득한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동안 귀신의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못 봤기 때문이다. 찾아올거라면 진작에 찾아왔겠지. 아무런 의미 없는 잉여 시간대로 가고 나서야 마음이 바뀌어서 나타날리가.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널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머릿속에 울리는 말에 침묵하며 나머지 빈칸들을 천천히 체워나갔다.


“키리이씨.”

태어나서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넓은 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안 오고 뭐하세요? 안내하던 시간 정부 직원이 금세 한눈을 팔았냐는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역사의 안전을 맡겨도 되냐는 불신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그의 눈에는 근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아. 예. 갑니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여서 불만을 보이기보단 다리를 움직이는 걸로 답했다. 쓰레기의 소굴에서 기어나온 멍 때리는 미친년도 굳이 고용하는 걸 보면 시간 정부도 일손이 부족한가보다.

혼마루라는 이 곳은 겉으로만 봐도 교과서에서나 보던 옛날 성이었고, 내부 역시 그 외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툇마루로 시선을 떨어뜨리곤 앞서가는 자의 뒷꽁무니를 쫓아갔다. 머리를 비우려고 나무결을 흝어보며 마루가 만들어진 시기를 가늠해볼려고 했으나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새로 만든건지, 옛날부터 있던건지 모르겠는 목리의 형태. 우습게도 그제서야 제 상황이 실감이 났다. 역사수정자들의 추척을 피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하다 발견한 변수가 될 수 없는 시간대. 영향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뚝 하고 끊겨진 흐름에 갑자기 던져진 제 처지를. 나는 지금 곧게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단면을 걸어가고 있다. 어째 제 방에서 나던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직원이 미닫이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정좌로 앉은 다리를 풀었다.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기지개를 쫙 폈다. 지금부터 당신을 보조해줄 도구를 가지러 오겠습니다. 어디 가지 마시고 얌전히 계세요. 가지 말라니. 애초에 여기 말고 달리 갈 곳이 있나? 멀리 나가봤자 성 안일텐데. 역사를 지키라며 제 시간을 거세한 녀석들한테서 나온 말이라 그런지 곱게 들리진 않았다. 궁시렁거리며 다다미로 된 바닥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좀처럼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개자식들. 누구한테 향한건지 모를 욕을 내뱉었다. 네 개의 음절은 과거에 놓고 온 좁아터진 방보다 넓은 공간을 헤메이다 이내 흐려졌다. 전에 살던 원룸보다 큰 주제에 어째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의 잔상이 깨끗한 벽을 타고 기어다녔다. 손을 놓았음에도 그들은 기어코 쫒아왔다. 그것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의 형태가 아닌, 제일 익숙한 형태로. 컵라면. 머리카락 뭉치.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쓰레기로 가득 찬 원룸. 바퀴벌레알이 굴러다니고 썩은내가 진동하던 나의 집. 나의 일부. 나의 삶의 궤적. 나의. 삶. 나. 삶… 나……

그렇구나.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근원지를 깨닫자 더 이상 생각하는 건 무의미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좁아터진 아파트가 성으로 변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쓸모없이 하루하루 썩어가던 삶을 수단으로서 이어갈 뿐이다.

그래. 수단으로써…

스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에 묶인 끈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같은 처지끼리 잘 지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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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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