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가사니] 시작

치가네마루x모치즈키

꿈에서 그 얼굴을 본 탓에 다시 잠들 수가 없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동녘으로 밤의 연안선이 후퇴하는 이른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한 모치즈키는 뚜렷한 눈빛을 하곤 먼 곳의 빛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별빛을 헤아렸다.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백지 상태로 홀로 넋을 놓는다. 멀리서 깜박이는 저 별빛처럼, 내 꿈 속 얼굴도 아침해를 맞아 사라져버린다면 좋을 텐데.

잠옷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였으나 방에서 가지고 나온 담배를 물었다. 텁텁한 입안에 끈적한 연기가 눌러붙었고, 숨과 함께 내뱉었으나 모두가 하얗게 흩어 사라지진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일출 속에서 연기는 곧장 흐르며 사라지지 않았고 눈앞을 뿌옇게 가리는 작은 안개 너머로 환하게 빛나는 지평선이 보였다.

꿈 속 얼굴은 이제와 흐릿하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것이 잊히지는 않았고 조각조각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웃으며 벌어진 입술의 근처에서 흔들거리는 땋은 머리라던가, 다정하게 접힌 속눈썹 안에서 총총히 빛나던 눈동자, 노릇노릇 탐스럽게 익은 피부와 같은 것들 말이다. 보려고 하면 언제든 볼 수 있고, 피하려고 하면 손쉽게 피할 수 있는 그런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이. 모든 것이 하룻밤 꿈으로 날아가 사라졌음에도 그 작은 것이 통 뇌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모치즈키는 계속해서 담배를 물처럼 마시고 뱉었다. 그녀의 주변이 삽시간에 온통 뿌얘졌다. 흔들리지 않는 금안이 말없이 밝아오는 지평선만을 바라본다. 하얗게도 보이고 샛노랗게도 보이는 세상의 끝에 누군가의 신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그가 눈에 밟혔던 때를 고이 기억하고 있다. 불길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무더운 여름날. 당장에라도 쩍 벌어질 것만 같이 바싹 익은 땅 위에서 물을 뿌리며 웃던 모습. 소매 없이 얇은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늘 숨기고 있던 속살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쫄딱 젖은 채로 크게 웃던 그 모습은, 귀는 잊는다 해도 눈이 잊을 수는 없었다.

그 때부터 대책없이 순하기만 한 얼굴을 나도 모르게 쫓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기억을 더듬고 목소리가 들리면 자연히 발길이 향했다. 솔직한 욕망 자체는 부정치 않겠다. 다만 모치즈키를 얽매는 것은 그와 자신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간단명료한 사실이다.

언뜻 사소해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너무 멀어서 마치 벼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 손에서 벼려지고 사람에게 쓰임 당한 세월이 긴 물건이 이제와 사람처럼 걷고, 말하며,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한들 진정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도검남사를 정의하는 단어는 신이었고, 도구이고, 부하이다.

부러지면 어디 전시하지도 못할 투박한 강철이 어여쁜 가죽을 입고 다정하게 행동한다고 하여 마음이 동한다니, 짐승과 마음이 통하는 먼옛날의 설화 같았다.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라는 점에서 교훈도 감동도 없이 우스울 뿐이지만 말이다.

물건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감탄하는 것은 그래 뭐 상식 선의 일이다. 그러나 그 물건에게 사랑 받고 싶고, 손길과 눈길을 원하며, 다정한 입맞춤을 바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좀 미친 것 같았다.

그들의 외형이 무척 매력적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그것과 이것은 좀 다른 문제다. 도검남사에게 연심을 품은 사니와를, 그와 가약을 맺는 사니와를 깔보거나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모치즈키는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폐쇄적인 환경에 맹목적으로 따르며 친절하기까지 한 미남이라니. 이런 날이 안 오는 게 이상할 지경이긴 하지.’

 

이따금 설렘은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과 얼굴이 빨개지는 순간은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만 모치즈키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눈이 가고 자꾸만 곁에 두고 싶은 충동이 든 적이 처음이기에. 인간 사회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이 기묘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사람도 아닌 것에게 느끼고 있었다.

충심에서 오는 친절과 배려가 아닌 더 많은 것을 받길 원한다. 내게만 친절하고, 내게 감정적으로 순종하며, 내게 애정을 담아 대해주길 원하게 되었다. 주종 관계 상의 ‘유일’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특별’을 원했다.

모치즈키는 회랑의 기둥에 기대며 작게 웃었다.

혹시 좋아한다 고백한다면 어떨까. 곤란해하거나, 단호히 선을 긋거나. 가장 최악은 제 감정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로 우물쭈물 내 마음을 받아 섬기는 것이다. 차라리 어떤 형태로든 거절 당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역시나 난생 처음으로 가지게 된 이 마음이 거절 당한다는 건 얼마나 괴롭고 슬플지 차마 상상할 수가 없었기에, 모치즈키는 고백하지 않기로 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이 난처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남에게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이 정도가 좋다. 그냥 좋아하고,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고자 한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지금이.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 상황이 아직까지는 다른 선택들보다 더 완벽해보였다.

본질이 도구라고 한들 어쩌나. 이미 사랑해버렸는데. 모치즈키는 입을 벌려 담배 연기를 쏟아내며 슬쩍 눈웃음을 쳤다.

감정은 유한하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다 시간이 흐르면 잔잔해지는데 사랑이라고 뭐가 그리 다를까. 이것 또한 세월을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식어갈 것이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그러니 굳이 전할 필요 없다. 영원하지 않고 변덕스러운 이 마음을 굳이 입으로 꺼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홀로 삭히고, 조용히 나만 사랑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리라.

그리 마음을 정리하니 긴장이 풀어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말없이 내쉰 한숨조차도 깃털처럼 가벼운 것만 같았다. 하늘은 점점 밝아져 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눈이 부셨다. 모치즈키는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기둥에 비스듬히 기댔던 어깨를 떼 바로서고 회랑의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맨발로 걷는 치가네마루는 머리가 땀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었고 열이 다 식지 않은 건지 얼굴과 살며시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슴 등 드러난 맨살 곳곳이 발갛게 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샛노란 차림이었지만 갑주를 입지 않고 한결 가벼운 모습으로 나타난 치가네마루의 동그란 눈동자가 크게 뜨이더니 깜박였다.

 

“응? 주인? 빨리 일어났구나. 아침 산책이라도 하는 거야?”

“안녕, 치가네마루. 조금 눈이 일찍 떠버려서.”

 

네 얼굴이 꿈에 나와 잠이 달아났다고 말하면 어떨까. 산책이 아닌 너를 만나길 기대하며 이곳에 서있었다고 하면 어떨까. 네가 가끔 새벽에 홀로 대련장에서 수련한다고 말했으니까,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서, 하필이며 오늘 꿈에 네가 나와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걸어나왔다고 하면… 어떨까.

모치즈키는 웃을 뿐 말하지 않았다. 열이 식지 않은 제 모습이 신경쓰이는 건지 더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진 치가네마루에게 폴짝폴짝 다가가 그의 팔뚝을 쿡 찔렀다. 사실은 땀 같은 건 괜찮으니 팔짱을 끼고 몸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도망칠 것 같아 손가락 하나로 참았는데 그럼에도 실실 웃음이 났다.

 

“아침부터 열심히하네. 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거야? 잠을 자기는 해?”

“하하하, 아마 신시… 쯤에 일어났으려나? 시계를 안 봐서 말이야. 잠은 잘 자고 있어. 주인이야말로 잠을 설친 건 아니지? 조금 피곤해 보여.”

“세수를 안 해서 그래. 신시가, 어, 음, 5시? 였나? 엄청 빨리 일어나네. 할아버지야?”

 

난 세월로만 따지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부족하긴 하지. 5시에 일어나는데도 하루를 평범하게 보낼 수 있다니. 이게 바로 근육의 힘인가. 이 옹골찬 근육이 모두 체력이 되어주는 건가. 부럽다…. 나눠달라고 하고 싶다.

모치즈키가 천천히 앞을 향해 걷자 치가네마루가 적당히 걸음을 좁게하며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혼자서 수련하면 심심하진 않아?”

“글쎄. 별로 그렇게 느낀 적은 없네. 그리고 가끔 다른 검들이 어울려주니까.”

“음~ 그래? 나 치가네가 수련하는 거 보고 싶다.”

“치가네?”

“너무 기니까 3글자로 줄여봤어. 싫어?”

 

어리둥절해하던 치가네마루의 얼굴이 방긋 접혔다. 환하지만 희미한 아침햇살이 베일처럼 덮힌 소년의 부드런 얼굴을 모치즈키는 빤히 바라본다. 내일이 되어도, 모레가 되어도, 그 날에도 기억할 수 있도록.

 

“으응. 괜찮아.”

“우리가 더 친해진 것 같아서 완전 좋지!”

“아하하! 그렇네. 주인과 허물 없어진 것 같아서 기뻐.”

“음, 음! 더 기뻐하거라! 혹시 싫다고 했으면 피엔━, 이었는데 다행이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정말 아무 일 아니었는데도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목구멍에서 기어올라오며 울대를 툭툭 때렸다. 기분이 좋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너무 행복해서 사랑을 몰랐던 지난날을 손해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치즈키는 다시 한 번 장난스레 치가네마루의 팔뚝을 쿡쿡 찔렀다. 뭐하냐고 말하는 치가네마루가 평소와 같이 말갛게 웃는다. 햇살이 담긴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빛이 나 도리 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친해지고 싶어. 말로만 친해지지 말고, 지금보다 더. 손을 잡는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서로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별명이나 이런 거리를 재는 장난 말고. 너와 정말로 깜짝 놀랄만큼 친해지고 싶어.

골반 아래에서 흔들거리던 모치즈키의 손이 실수인 척 치가네마루의 손등을 쳤다. 손 잡고 싶어. 이렇게 같이 걷는데 손도 못 잡는다는 게 너무 억울해. 난 널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넌 그걸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너무 괘씸해.

 

“이제 씻을 거야?”

“응, 씻을 거야.”

“같이 들어갈래? 나도 아직 안 씻었는데. 우리 치가네가 등을 얼마나 잘 미는지 볼까?”

“하? 뭣….”

 

당황해선 입도 벌어지고 얼굴까지 빨개진 치가네마루를 보고 모치즈키가 깔깔 웃었다. 아침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고 근처에서 다른 검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모치즈키가 제쪽으로 고개를 돌린채 얼빠진 치가네마루의 볼을 양 손의 검지로 꾹 찔러 눌렀다.

 

“농담, 농담~! 물론 나도 방금 수련을 끝낸 치가네의 근육이 보고 싶지만! 이렇게 부끄러워하니까 마음 넓은 모찌 쨩이 이해해줘야지, 그치?”

“뭔,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인! 넌, 너는…!”

“같이 씻자고 말한 것 뿐이잖아? 따라 들어가지도 않았고, 옷도 안 벗었는데 뭐가 문제일까나? 혹시, 엉큼한 생각 했어? 치가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으아아! 아냐! 아니야! 주인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니까!”

“초! 피엔━, 이야!”

“왜?!”

“피엔하니까 먼저 가버릴 거야! 어서 씻기나 해! 그리고 밥 먹어! 많이 먹어! 주명이야!”

“으에━?! 주인?!”

 

후다닥 치가네마루에게서 떨어진 모치즈키가 깔깔 웃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빠져나갔다. 얄미워서 조금 찔러본 것인데 저렇게나 유쾌한 반응이라니! 저래서 막내구나. 이해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뭔가 오늘 하루는 재수가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막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 빛이 나고 좋은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몇몇 검들과 인사를 하다가 초기도 카슈에게 붙잡혀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오라며 등쌀이 떠밀린 모치즈키는 별채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침 히메츠루와 고코타이를 마주했다. 문득 이 검에게도 묻고 싶어졌다.

 

“안녕, 히메츠루. 지금부터 씻을 건데 같이 씻을래?”

“응? 좋아. 등 밀어줄게. 고코도 할래?”

“네, 네? 그, 저…, 주인님은 여성… 분이시니까 그런 짓은, 그,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흐음? 그런가. 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히메츠루의 하얀 얼굴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언뜻 보면 여자 같은 얼굴이라 정말 같이 들어가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무리다.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벗으면 근육질에 아래에 무언가가 달려있는 것이다. 아무리 본질은 검이라고 하나 남성체의 형태를 한 히메츠루와 사이좋게 알몸이 되는 건 아웃이었다. 모치즈키는 잽싸게 말을 바꿨다.

 

“뭔가 고코타이가 이렇게 말하니까 나도 뭔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없던 일로 하자.”

“아아, 그래?”

“다, 다행이에요.”

“그럼 둘 다 이따 보자!”

 

히메츠루와 고코타이에게 손을 흔들고 헤어진 모치즈키는 별채의 문을 열 때까지 피식피식 웃으며 걸었다. 수줍음 많은 고코타이도 볼이 살짝 빨개진 정도에서 그쳤는데 그 아이는…. 무슨 사춘기 동정처럼 목 아래까지 다 빨개져서는. 사랑스럽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렇게 귀여워도 괜찮은 건가. 이렇게 속절없이 계속 좋아해도 정말 괜찮은 건가. 따뜻한 물에 발끝까지 젖어들며 모치즈키가 히죽거리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하지만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게 내 잘 못인가? 치가네가 먼저 귀여웠는데? 안 귀여웠으면 될 일이잖아! 모치즈키는 남탓을 아주 잘했다. 남탓을 좀 해야 인생 살기가 수월해서 그렇다. 뭐든 다 본인 탓이면 부담스러워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다 씻고 나와 옷장을 열었을 땐 이미 모든 게 치가네마루의 탓이 되었다. 치가네가 먼저 몸으로 날 꼬셨어. 귀여운 짓을 하면서 날 부추긴다고. 이게 내 탓이야? 당연히 내 탓이 아니지.

장난스럽게 모든 문제를 치가네마루에게 넘기면서도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모치즈키는 분홍색과 하얀색, 무채색 일색인 옷장을 바라본 후에야 표정이 얌전해졌다. 가끔씩 보라색과 파란색 옷도 보인다. 노란색은 없었다.

 

‘노란색 원피스 사볼까.’

 

분명 어울릴 거다. 모치즈키는 왕리본이 달린 분홍색 블라우스를 꺼내 걸치며 거울 앞에 서서 언젠가 스치듯 보았던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방긋 웃는다.

역시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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