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사

. by 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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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 마, 니파이언, 참지 마.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하지만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 살인자는 효율주의자고 현자이며 성인이다.

너무 오래 참아주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아. 죽잖아. 착한 사람들은 죽어.

효율주의자고 현자고 성인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며 간편하다. 세 번 참을 것을 한 번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무엇이 살인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아, 눈 앞에 있는 식칼은 어떨까?

사실 죽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도!

귀에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럽다. 니파이언은 식칼을 들고 아버지의 침실로 향하면서 자꾸만 간질거리는 뒷목을 한 손으로 쓸어 내린다. 몽롱한 정신은 칼을 들고 있는 팔을 두 번이나 휘청거리게 만든다. 니파이언은 하마터면 제 발등으로 떨어질 뻔한 칼을 위태롭게 들고 방 문을 열었다. 자신을 방으로 인도한 흰 후드는 이미 제가 다 준비해놨다는 듯 두터운 천에 묶여 있는 남자를 가르켰다. 남자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창백하고 곧 다가올 죽음에 몸부림 치느라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좋아, 니파이언, 자.

“ 찔러! ”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눈앞의 흰 남자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니파이언에게 상상 친구란 약 여섯 살. 알파벳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그 나이 때의 상상 친구는 그가 좋아하던 동화책에 나오는 말하는 오리 인형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잊고 지내던 창의력이란 존재가 (아니 어쩌면 창의력이란 좋은 말로 포장하지 않는다면 망상증이라는 끔찍한 병세가) 어째서 나이를 스물 넘게 먹은 지금 재발한 것일런지는 몰라도, 니파이언은 흰 가운의 수상쩍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쭈욱, 그가 인간은 아닐 거라고 확신해 왔다.

먼저 남자는 그림자가 없었다. 걷는 발걸음 소리도 조용조용해 거의 들리지 않다시피 했고 거울에도 비치지 않았다. 언젠가 우연히 방의 대거울 앞에 그와 나란히 섰을 때 니파이언은 남자가 귀신이나 뱀파이어 같은 영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의심했지만 의료와 과학 체계가 무섭도록 발전한 20세기 사회인 답게 곧 그보단 제 정신상태나 시력 문제를 먼저 의심해 보기로 했다. 남자는 귀신이 아니었다. 그보단 환상이었다. 놀랍도록 제대로 구현된 환상. 환상은 매일 지겨울 만큼 니파이언에게 말을 붙였으며 종일 그를 따라 다녔다. 어젯밤도 그랬다. 니파이언은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베개를 찌른 지난밤 스스로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제 방으로 도망쳐 나왔다. 흰 후드 역시 니파이언을 부추기던 것을 멈추고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 썩을 놈! 하마터면 아버지를 찌를 뻔 했잖아! 날 놀렸어. 날 속였어! ”

“ 속인 게 아니야. 너야말로 이상하네. 도로 찌를 것이지 왜 돌아온 거야? ”

남자는 별로 죄의식이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방금 전까지 저 치한테 홀려서 아버지의 방에 칼을 든 채 끌려 갔던 게 믿을 수 없이 사특하게 느껴져서 니파이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섯 살 때 만났던 상상 친구는 어머니 몰래 하녀들에게서 초콜렛을 받아먹는 방법이나 식당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일러줬었다. 그도 아니면 따분함에 잠긴 니파이언을 형의 침실로 데리고 가거나 ……. 여하튼 결국 상상은 욕망에 기반된다. 여섯 살의 니파이언의 욕망은 고작해야 초콜렛 몇 개였지만 스무 몇 해가 더 흐른 지금에선 죽음이었다. 두려웠지만 두려울 일은 아니었다. 놀라웠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니파이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깊은 미궁을.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같은 욕망을. 그저 궁금한 것은 단 하나였다.

왜 내 욕망은 형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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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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