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호두 파이

오두막 by 온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있던 호두 파이를 꺼냈다. 접시에 올려놓은 뒤 비닐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30초 간 돌렸다.

데워진 파이를 방으로 가지고 와 조용히 포크를 집었다.

파이가 혀 끝에 닿자마자 진한 시나몬 향이 곧바로 파고들어왔다. 호두가 무심히 씹혔다.

정말이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한 입 삼킬 때마다 자꾸만 누군가의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까맣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억 조각이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아무리 조금씩 잘라 먹어도 떠오르는 기억들은 시간이 갈수록 잔인하리만치 선명해졌고, 제멋대로 뭉쳐대 일그러진 형상을 만들어냈다.

포크에 얹힌 호두에서 가을 산을 헤매던 누군가가 느껴졌다. 접시에 흩어져 있는 부스러기가 그 사람에게서 풍기곤 했던 시나몬 향을 올려보냈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한때는 그토록 익숙했건만 이제는 무엇보다 낯선 그것을 더 이상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접시를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고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은 쳐다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대략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다시 천천히 포크를 집어 파이를 입에 갖다댔다.

파이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텁텁한 맛이 났다.

남은 조각을 크게 잘라 한껏 욱여넣었다. 지나치게 강한 시나몬 향에 잔뜩 거부감이 들었지만 억지로 삼켜냈다.

이젠 부스러기밖에 없는 접시에서 씁쓸한 가을 향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쓰러지듯 눕고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베개 밑은 유난히도 짠 어느 가을의 흔적으로 꽉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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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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