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 홍시와 늦가을

혹시 무서우냐?

* 시간대는 둘이 사귄 이후.

* 대봉 감은 원래 다 익기 전에 따는데요? 라고 하신다면: 그냥 눈감아주십시오.

청연은 마루에 누워 가을 하늘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유독 푸르른 하늘,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 나풀나풀 떨어지는 낙엽까지, 여유를 즐기기는 딱 좋았다. 청연의 눈길이 바람에 팔랑팔랑 날리는 낙엽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높은 가지 위에 몇 개 달린 감이 보였다. 익을 만큼 익어 홍시에 가까워 보였다. 달콤해 보이는 빛깔에 입맛이 돌았다.

“호야.”

청연이 자신이 베고 있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예.”

“저건 왜 안 따고 그냥 두었느냐?”

호의 시선도 반질반질한 홍시 쪽으로 향했다. 웬만해서는 사람의 손길이 닿기 힘들 정도로 높이 달린 감이다.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저런 것까지는 보통 따지 않는다.

“저건 까치밥입니다.”

“까치? 키우려고?”

완전히 틀린 답변에 호는 속으로 조금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에게 청연은 언제나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그런 그도 인간의 문화에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다 자연에서 받는 것이니 날짐승들 몫도 조금 남겨주는 겁니다.”

“호오, 인간들도 기특한 짓을 하는구나.”

청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저건 먹으면 안 되겠는걸.”

“드시고 싶으십니까?”

“눈에 보이니 마음이 동해서 말이다.”

호는 청연의 눈에 살짝 아쉬운 기색이 스치는 것을 눈치챘다. 신을 실망하게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가, 따오겠습니다.”

“응? 까치 줄 거라며?”

“마당에 있는 감은 다 수확했지만, 뒷산에는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청연에게 허벅지를 내주고 있으면서, 마음만 급한지 호의 몸이 들썩였다. 자신이 바란다고 하면 뭐든지 내어주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청연이 씩 웃었다.

“그럴까?”

“예.”

청연이 머리를 들자, 호가 곧바로 범의 모습으로 변했다. 거대한 흑호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가 기합을 넣듯 울부짖으며 담을 넘어 뛰어올랐다. 호랑이 모습이라면 뒷산이야 금방 다녀온다.

“너무 급하게 굴진 말고.”

청연이 날아서 호의 등에 털썩 착석했다.

“혼자 다녀오라고 하진 않았다만?”

“죄송합니다.”

“괜찮다. 내가 같이 있고 싶은 거니까.”

“……기쁩니다.”

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수줍음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이전이라면 과분하게 여기거나, 신이 자신을 배려해 준다고 생각해 도리어 더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호는 청연과 정인 사이였고, 그래서 솔직하게 행복해할 줄도 알았다.

호는 몇 번 훌쩍 뛰어오르는 것으로 금방 산을 올랐다. 그는 청연이 쉬이 난다는 걸 알면서도 내려오기 편하도록 몸을 숙였다. 걸어 내려오든 날아서 내려오든 편히 선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청연은 그런 정인이 귀여워 북슬북슬한 털을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처, 청연 님.”

“간지러웠느냐?”

“아닙니다.”

청연이 호의 위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곧 호가 인간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쪽입니다.”

호가 가리킨 곳에는 과연 주홍빛으로 곱게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둘 남아 있던 까치밥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청연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가을이란 좋구나.”

“예.”

큰 키의 장점은 역시 어느 곳이든 손이 잘 닿는다는 점이다.

호는 7척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손을 척척 뻗어 홍시를 땄다. 이미 물러져 있는 덕분에 조심히 따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리낄 게 없는 손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호도 손이 안 닿는 곳이 있긴 했는데, 거기서는 청연이 활약했다. 그는 가뿐히 날아올라 높은 곳에 있는 홍시까지 수확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몇 개는 남겨두었다.

“내 아기 호랑이. 몇 개나 먹고 싶으냐?”

청연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물었다. 호는 순간 깜짝 놀랐다가 금방 표정을 추슬렀다.

“저는 청연 님이 드시고 남을 걸 먹겠습니다.”

“고작?”

먹보라는 걸 안다는 듯한 태도에 호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홍시는 간식이니까요. 끼니처럼 든든하게 챙겨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이 정도로 충분하겠구나. 돌아갈까?”

“예.”

호가 다시 범의 형상을 취했다. 청연이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 올라탔다. 청연이 호를 쓰다듬어 주자, 그가 낮게 가르릉거렸다. 주인님의 손길을 만끽한 후, 그가 높이 뛰어올랐다. 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돌아갔다.

신이 나서 돌아온 호는 마당에 돌아온 후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저. 홍시는.”

주인님이 예뻐해 주는 게 기뻐서 날뛴 바람에 무른 홍시가 엉망진창이 됐을지 모른다. 호가 당황해서 바구니를 확인했다.

“뭘 그런 걸 다 걱정하느냐?”

귀여운 모습에 청연이 킥킥대고 웃었다.

“네 정인이 누군지 잊었어?”

“아…….”

청연이 내민 바구니에는 홍시가 전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분명 청연이 가져오면서 어떤 조치를 한 모양이었다. 역시 청연은 호의 전지전능한 신이었다. 그 사실이 기쁘고, 벅찬 동시에.

“죄송합니다.”

“뭐가?”

“성가시게 해드렸군요.”

“직접 따러 온 건 난데 뭐가 성가셔? 됐으니까, 숟가락이나 가지고 오너라.”

“예.”

호는 널린 하인을 두고 직접 식기를 가지러 다녀왔다. 주변에서는 호의 그런 태도를 살짝 부담스러워했지만, 정인의 일만은 스스로 챙기고 싶어 하는 태도가 확고해서 말릴 수도 없었다.

“청연 님.”

“앉아라.”

청연이 자기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호가 청연의 옆자리에 앉아 홍시 껍질을 살살 벗기고, 무른 과육을 숟가락으로 크게 펐다. 그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붉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홍시를 청연의 입가에 가져다 주었다. 청연이 씩 웃었다.

“귀여운 녀석.”

“감사합니다…….”

청연이 날름 홍시를 받아먹었다. 호는 부지런히 모시는 신이자 정인의 입으로 과육을 날랐다. 청연의 입가가 곧 붉게 물들었다. 뜨거운 혓바닥이 입술 주변을 핥았다.

“이제 내놔라.”

그리고 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 드셨습니까?”

“먹을 만큼 먹었다.”

“좀 남은 듯한데.”

“이제 네가 먹어야지.”

호가 건네주기도 전에 청연이 숟가락을 홱 낚아챘다. 이번에는 청연이 홍시를 크게 떠 호에게 내밀었다. 호의 목덜미가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직접…… 먹을 수 있습니다만.”

“싫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호가 덥석 홍시를 받아먹었다. 달콤했다……. 푹 익은 감은 늘 달았지만, 여느 때보다도 훨씬 달콤한 맛이었다. 청연은 홍시를 푹푹 떠 호의 입가에 밀어 넣어 주었다. 다소 세심하지 못한 힘 조절이었으나 호는 튼튼한 무인이라 버틸 만했다.

“그런데 말이다.”

“예.”

호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평소랑 다르게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귀여운 모습을 보고 청연이 생글생글 웃었다.

“네가 곶감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구나. 홍시는 먹어도.”

“아, 그건.”

남동생인 근이 곶감을 좋아해서 그쪽에 양보하기 때문에……. 호가 그렇게 말하려 할 때였다.

“혹시 무서우냐?”

“…….”

……?

곶감이…… 무서워? 호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멍해졌다. 무슨 맥락으로 나온 말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호는 홍시나 곶감이나 딱히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주는 대로 잘 먹는 먹성 좋은 호랑이였으나 아무튼 둘 다 맛있다. 달고 쫀득쫀득해서 겨울의 별미였다.

무서울 이유가 없…… 는, 게 아니라.

‘호랑이라서?’

…….

농담, 이었구나.

“……죄송합니다.”

재밌자고 한 말인데 못 알아듣고 그만 묘한 정적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호가 시무룩해졌다.

청연은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담을 넘어서까지 퍼졌다. 청연이 매운 손으로 호의 팔을 퍽퍽 두들기며 즐거워했다.

“처, 청연 님.”

“뭐가 그리 심각해? 넌, 정말 귀엽다니까.”

“…….”

귀엽다니……. 눈치 없고 둔한 것이? 어느 부분에서 칭찬받은 건지 몰라서 얼떨떨했지만, 신께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조금 쭈뼛거리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홍시나 먹거라.”

“예.”

그래서 호는 입을 크게 벌리고 홍시를 받아먹었다. 여전히 홍시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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