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 서방님 기분 풀어주기
아직은 좀 부끄럽지만
* 혼인한 지 1~2년 됐을 때 이야기.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청연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씩씩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고, 타닥타닥 불티가 튀는 소리까지 들렸다. 언제나 호쾌한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오랜만이라 호는 깜짝 놀랐다.
“청연 님?”
“호야!”
청연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열렬한 기세에 호가 잠시 주춤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신……이자 서방님인 청연이 진심으로 힘을 쓰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
호는 평소처럼 대답하고 잠시 눈치를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저…….”
“생을 바친다면, 당연히 다른 잡신이 아니라 나한테 투신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운만 띄웠는데 청연은 곧바로 대답했다. 분위기로 보건대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입니다.”
호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걸 본 청연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평소 보여주는 활기찬 웃음은 어디 갔는지,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그가 답지 않게 새침한 표정으로 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청연의 손에 뺨이 더욱 닿게 했다. 신이 흥분한 탓에 손이 아주 뜨거웠다. 뺨이 익어버릴 것 같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움찔움찔 떨리지만 참을 만했다.
“그래, 내 범은 현명하기도 하지.”
서방님이 내리는 칭찬은 늘 달았으나 이번만큼은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목소리에 아직 진노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방님.”
호가 조금 애교 부리듯이 청연을 불렀다. ‘청연 님’이 아니라 ‘서방님’이다. 혼인한 지 몇 달이 지났어도 부부다운 호칭을 부끄러워하는 호로서는 다소 힘을 낸 호칭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청연을 화나게 한 이가 있다면 자신이 얼마든지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신을 위한 창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짐승으로서든, 그 손에 들린 무기로서든 나서서 봉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청연을 화나게 한 상대라면 얼마든지 창으로 꿰뚫어 그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걸로 청연의 기분이 나아진다면야.
“흐음.”
잠시 고민하는 기색.
그러나 곧 청연이 뺨을 쓸던 손을 떼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떨어져 나가자, 얼굴에 닿는 공기가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호가 잠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됐다. 내 휘하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죽일 수는 없지.”
“서방님……의 위엄을 알릴 수는.”
“내가 너무 뜨거워서 싫다는구나. 동해의 용왕에게 갔다. 내 기운을 잔뜩 품은 네가 가봤자 불타죽을 것 같다며 시끄럽게나 굴겠지.”
“…….”
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불꽃을 두고 숨막히고 칙칙한 심해를 선택하는 존재가 있다니. 눈이 삔 게 아닌가?
도리어 청연을 연모하여, 이미 반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해 다른 쪽을 선택했다고 하면 믿길 터였다. 생각해 보면 역시 그쪽이 더 타당하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뜨거운 연정을 식히도록 내버려두자.
호는 그게 엄청난 콩깍지를 동반한 판단이란 걸 모르고 결론을 내렸다.
청연이 무서워 아무도 호에게 네 콩깍지가 심하다고 지적해 주지 못했기에, 그의 사랑에 기반한 숭배는 제법 심한 편이었다…….
“조금이라도 우아하게 꿈틀거리려고 노력하는 뱀 자식이 뭐 그리 좋다고. 미끈미끈해서 기분 나쁘기나 하지.”
아무튼 호는 그렇게 경쟁자가 사라졌다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혼례를 올린 상대기는 해도, 청연이 자신만 쭉 사랑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인간 중에서도 첩을 여럿 들이는 이들이 있지 않던가. 청연 정도면 두셋 정도는 거느려도…….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아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미뤄두고. 어쨌든 청연이 기분 상한 상태인 건 문제였다.
“서방님.”
호가 다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떨리지 않고 토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그가 흉지고 투박한 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청연의 손을 붙잡았다.
“기분 전환…… 어떠십니까.”
여전히 뜨거운 손에 닿으면 벌써 그 열기에 취할 것 같다. 호가 느릿느릿 청연의 손바닥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그것만으로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진다. 그게 전해진다고 생각하면 조금 기쁘기도 하고, 역시 쑥스럽기도 했다.
청연을 화나게 한 상대를 죽여서 데려올 수도 없고, 설득해서 끌고 올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대처라곤 이게 전부였다.
“…….”
타오르는 손가락이 호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분노 어린 손가락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반투명한 살구색 막 안에서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청연은 웬만한 일을 그냥 웃고 넘기기에 자주 보지 못하는 광경이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 신, 도깨비라는 걸 자각하게 해주는 모습. 그러나 조금도 섬뜩하지는 않다. 그저 신비롭고 고상하게 보일 뿐이다. 적어도 호의 눈에는 그렇다.
“그럴까?”
대답이 돌아왔다는 걸 눈치채기도 전에, 호는 어느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강하게 떠밀린 탓에 등이 얼얼했다. 호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청연이 바로 유혹에 넘어왔다는 것이 기뻤다.
“내 색시가 이렇게 재롱을 부리는데 들어줘야지.”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부디 신의 기분이 나아지면 좋겠다고, 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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