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소재

리퀘스트


금랑은 스스로를 사랑한다. 금랑은 스스로를 아낀다. 금랑은 대개 하고싶은 일만 하려 하고, 하고싶은 일을 위해 감내한다.

‘이제 됐나.’

금랑은 피가 흐르는 검지를 보고 생각했다. 포켓몬들을 꺼내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처는 얕았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면서, 금랑은 봉투를 왼손으로 잡아 테이블 위로 내용물을 쏟아냈다. 잘린 커터칼 조각들과 일회용 면도날들이 우수수 나왔다.

조잡하게 오려붙인 문구는 흔한 협박이었다. 너는 이제 필요없으니 배틀타워에도 새 챔피언에게도 집적대지 말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금랑은 손가락을 퉁겨 로톰에게 사진을 찍고 신고하도록 지시했다. 대개 이런 류의 사람들은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 신구 챔피언들에게도 위해를 가한다.

가라르의 대사건이 수습되고도 두 달 정도, 금랑은 백여명에 달하는 실행범을 신고하고 고소해서 탈탈 털어댔다. 민형사소송에 얽혀 실형을 받거나 보석금으로 전재산이 털린 이들은, 두 번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금랑만을 원망할 것이다.

손가락을 뱉어내고 해독제와 물을 준비하는 사이에도 이상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독도 바르지 않은 날붙이 테러는 가장 온화한 축에 속했다. 금랑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로.’

금랑은 숨을 깊게 내쉬고 부엌에서 뒤돌아 제 집을 돌아보았다. 가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짐은 그동안 천천히 정리해서 삭막해졌다. 금랑은 손가락의 상처를 다시 살폈다. 그동안의 경향을 생각했을 때 이 테러를 저지른 녀석은 소심한 놈 같으니까 기간을 두는 게 그에게 좋을 것이다.

금랑은 손가락의 상처가 낫고도 모든 소송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와일드에리어로 향했다.

“헤이, 로톰.”

로톰은 대답하지 않고 빙글 떠올랐다. 역린호수를 보며 금랑의 포켓몬들은 모두 그의 시야에 들기 위해 안절부절했다.

“임시 저장 메일 모두 발송해줘.”

그건 금랑이 처리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한 것이었다. 누구든지 꽤 긴 내용을 읽어야만 추신을 읽을 수 있을테니 시간은 아직 있다. 금랑은 로톰을 스마트폰에서 꺼내며 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직접 초기화시켰다. 로톰에게 부탁해 스파크를 먹이고, 전기가 가라앉은 다음 역린호수에 던져넣었다. 누구든 자료를 복원할 순 없을 것이다.

“볼에 들어가 있을래? 아마 금방 발견될 테니까..”
“...아니, 로톰.”

로톰은 얌전히 두랄루돈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금랑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한,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보고 있어서 좋을 거 없을 텐데.”

금랑은 칼을 꺼내들었다. 금랑이 아니라면 시도할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두랄루돈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내 금랑을 주시했다.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미끄래곤이 구슬프게 울었다. 금랑은 그녀를 쓰다듬는 대신 두 손으로 칼을 잡았다. 손잡이를 깍지껴 잡고 날을 목에 겨눈다.

“너희 모두 볼에서 해방시켰으니까,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아. 금방 발견될 테니까 마음에 드는 녀석 있으면 가고. 싫으면 야생에서도- 음, 잘 살아야 돼.”

와일드에리어까지 데려올 생각도 없었다. 금랑이 이들을 해방시킨 건 꽤 된 일이고, 이들을 설득해온 건 그보다 오래된 일이었다. 포켓몬들은 그저 금랑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었다.

금랑은 두 눈을 감고 턱을 치켜들었다. 피부이 와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숨을 길게 내쉬고, 금랑은 숨을 멈춘 채로 단숨에 밀어넣었다.

금랑은 스스로를 사랑한다. 금랑은 스스로를 아낀다. 금랑은 하고싶은 일을 위해 감내한다.

금랑은 배틀이 좋았다. 단델에게 도전하는 것을 사랑한다. 금랑은 새로이 등장한 강자를 좋아했다. 더 타오를 수 있다. 더 강한 트레이너, 더 힘든 배틀, 금랑은 스스로를 갈고닦을 수 있는 기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상으로 금랑은 스스로를 사랑한다.

쓰러지는 몸을 포켓몬들은 끝까지 시야에 담았다. 물기어려 흐려지는 모양으로 금랑이 부서지는 것을 그들은 계속해서 보아왔다. 금랑이 개의치 않더라도 그 모든 적의들은 뾰족하게 금랑을 갉아왔다. 얼마나 작은 흠이라도 분명히 금랑의 표면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왔다.

금랑은 단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가 사랑한 그대로 남아있지만, 분명히 처음보다 헤지고 지치고 남루해진 것을 알았다. 금랑은 더이상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않기로 했다.

금사슬나무는 열매를 익히지 못하고 졌다. 그 풋열매에는 독이 있다고 한다. 가라르는 독에 잠겼다.

금랑이 발송한 모든 메일은 무거운 업무연락이었다. 모두가 피곤한 상태로 눈을 마사지하며 읽었다. 여행이라도 갈 모양인지 부재시의 대응 매뉴얼 따위가 잔뜩이었다. 위원장에게 간 메일에는 차기 관장 임명에 대한 서류도 잔뜩 있었다. 계약갱신을 하지 않아 애닳고 있던 스폰서측엔 법무법인의 도움을 바라는 협조요청서가 있었다.

관장들에게 보낸 메일의 추신에는, 포켓몬들이 떠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데려왔으니, 적절한 트레이너를 찾아주던가 야생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위원장 단델은 관장 임명 서류를 읽자마자 추신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온점을 확인하고 비명처럼 숨을 내쉰 그는 리자몽을 불러내며 뛰쳐나갔다. 그래도 단델이 처음 금랑의 곁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몸은 차가웠다. 단델은 그 날 이후 웃지 못했다.

가라르는 독에 잠겼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워질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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