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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건케이]흔적

MOMMO by M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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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주관적 캐릭터 해석으로 작성된 글로, 캐주의 해석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가 오겠군."

오전부터 흐리던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멈추자 시공이 멈춘듯 고요했다. 시선은 건너편의 낡은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등받이 천이 헤져 솜이 튀어 나와있는, 이 집을 인수할 때부터 있었던 전 주인이 남겨놓은 의자. 후우- 천천히 내뱉는 숨 사이로 인영 하나가 비췄다 사라졌다.

케이가 사라졌다. 떠났다는 표현이 정확할까. 비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에 건이 깨어났을 때, 케이는 창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둠에 먹힌 시야 사이로 그 앞에 놓인 재떨이가 이미 가득한 게 보였다. 얼마나 저기에 앉아 있었을까. 그 모습이 뭔가 이상하단 걸 알았지만 건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으나 그저 다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케이는 훌쩍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떠난다는 말조차 없이 사라졌다. 케이가 늘 앉아 담배를 피우던 2층 테라스의 낡은 의자가 비어 있는지 나흘이 되서야 건은 받아들였다. 케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난날 수없이 상상했었다. 워낙 들쑥날쑥한 녀석이니 정착 생활을 언제든 싫증을 낼 것이다. 미움을 받고 살았으니 근처 어디에선가 칼에든 총에든 맞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음에 맞는 이를 찾아 떠날 수도 있겠지. 수많은 상상 속에 정답은 없었으나 준비한만큼 덤덤하게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가 나지도 속상하지도 않았다. 그가 살갑게 인사를 하고 떠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지우고 살아가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급작스레 떠난 듯 급작스레 돌아오리란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대도 세 달을 넘어갈 때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일 년. 케이가 사라진 사이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마당에 심었던 나무가 건의 키를 조금 웃돌만큼 컸다. 룬누도 눈에 띄게 자랐다.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서 케이가 떠났던 날과 맞대어 본다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시간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건의 시간은 그가 떠나던 날 밤에 멈춰있었다. 처음엔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시간과 발을 맞춰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상은 늘 같았고, 케이를 인생에서 덜어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낡은 의자와 마주 앉아 있고는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러다 사나흘에 한 번, 이틀, 하루…. 간격이 조금씩 얕아졌다. 이래선 안 된다며 의자를 버리려 나가서는 박힌 듯 서 있다가 돌아오기를 여러 번. 건은 그제야 인정했다. 자신의 일상은 케이가 사라졌던 밤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걸.

꿈에 가끔 그날의 풍경이 그려지곤 했다. 방 안을 뿌옇게 메운 담배연기와 그 사이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선 인영. 시끄러운 빗소리에 깨어난 건은 있는 힘을 다해 케이를 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팔을 뻗으려해도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르르 사라지는 의식의 끝에 케이가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꿈은 끝났다.

잡고 싶었던 거란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늘 위태로운 그는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했지만 혹시나 제 부름에 하루라도, 반 나절만이라도,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머물러주지 않을까. 그런 옅은 기대. 하지만 이제는 모두 소용 없는 가정이었다. 어디에 있을까. 살아있기는 할까. 돌아올 수 있을까. 질문들은 목구멍 아래로 쑤셔넣었다. 잡지 않았으니 돌아오길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형편 없는 자기 위로와 함께.

쿠구궁. 하늘로부터 낮은 소리의 울림이 몇 번. 곧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건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보이지 않는 저 끝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한 가닥 한 가닥 세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또 지겹게 쏟아지겠어."

건조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건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창을 닫았다. 주인 없이 놓인 낡은 의자를 바라보며 비가 앗아간 것들을 떠올렸다.

피로 새긴 웅덩이 위로 쏟아지던 물줄기. 사방에서 들리는 요괴들이 우는 소리. 낙차가 쏘아올린 핏방울이 발끝을 적시던 그 날, 그 때. 어린 건의 세상은 조각났다. 낙하한 유리잔처럼. 지난 삶은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과정이었다.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된 삶을 흙에 이겨 억지로 이어붙였다. 어설프게 성긴 삶은 이리저리 긁고 피를 냈다. 상처로 이어붙인 삶은 이전의 모양을 이미 잃었지만 그럼에도 건은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다. 너덜너덜해진 품으로.

비가 싫었다. 한 편 두렵기도 했다. 비가 베어낸 삶의 흔적 때문에. 삶을 조각냈던 비가 이제는 케이까지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공기에 물기가 어리면 자연히 떠오르던 핏빛 풍경. 이제는 거기에 누군가의 담배연기가 피어올라 가득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 위로 미세한 빗금이 졌다. 거친 손 끝을 엄지로 매만지던 건은 몸을 움직였다. 고작 세 걸음 거리를 마치 천년처럼 천천히 걸었다.

이것은 미련이다. 건은 다 헤진 등받이를 매만지다가 의자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제법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제는 버릴 때가 됐다. 이전에는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의자는 다리와 안장의 이음새가 헐겁고, 지나온 세월을 증명하듯 나무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였다. 건에게 케이가 그렇듯. 창문을 부술 듯 내리는 거센 빗속에 내놓으면 낡은 의자는 금방 망가질 터였다. 그러면 다시 주워 들어오는 미련한 짓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조각난 세상을 또 마주해야겠지만.

끼익, 끼—익. 불쾌한 소리를 내는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오면서 건은 입술을 물어 감췄다.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가 세게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그래, 긴 복수를 끝내고 애니츠를 떠날 때의 느낌과 꼭 닮아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까. 이제는 빛바랜, 줄 곳이 없는 마음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그래,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그거 버릴 거냐?”

문 손잡이를 돌리던 손이 우뚝 멈춰섰다. 내가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낡았네. 그래, 그냥 버려라.”

“…….”

“…이 새끼 상태 왜 이래? 약이라도 쳐먹었어?”

퉁명한 말투며 버석한 목소리, 매캐한 담배 향. 모든 것이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선명해서 오히려 거짓처럼 느껴졌다.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아니면 악마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돌아서 얼굴을 마주하고 목을 틀어쥐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이 쳤다. 하지만 건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가슴깨에서 시작한 파동이 머리속까지 둥둥 울려대고 있었으니까.

우스운 일이었다. 방금 모든 미련을 떨쳐내겠다며 비장하게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목소리 한 절에 벌벌 떨고 있다니.

케이의 목소리에 주방에서 달려나온 룬누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뻥긋거리다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괜찮아? 하는 맑은 목소리에 물에 빠진 듯 먹먹하던 귓속에 트이는 것 같았다.

눈 앞에 케이가 서있다. 마치 지난 일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미간을 좁히며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잠깐이지만 의문이 섞여들었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가 일년만에 얼굴을 드러낸 남자에게 무슨 표정을 지어보여야 할지, 건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들어오며 비를 맞은 듯 약간 젖은 머리칼을 쓸어주고 싶었다.

건은 들고 있던 의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뭐야?”

이 마음을 정의하기에 사랑이란 단어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건은 한 걸음, 케이에게 다가섰다. 좁혀지는 거리가 불편한 듯 케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물러서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케이 다운 행동이었다.

흔적. 그래, 그런 단어라면 어울릴테지. 비가 내린 땅 위로 움푹 패인 상처가 드러나듯이. 바람이 불면 뒤이어 나뭇잎이 들썩이듯이. 말없이 떠난 이에게 상처를 입어도 놓지 못하고 미련을 떨 듯이.

그래도 돌아온 이의 어깨를 끌어안듯이.

케이. 그는 사랑이자, 상처이자, 흔적인 것이었다.


조와하는 커플 훔쳐다 쓰기 2탄

가볍게 시작한 것에 비해 고생을 좀 했다

퇴고를 안 했기 때문에 엉망이더라도

대충 봐주세요

대충쓰진 않았지만..

>아래에 아무것도 없어요 결제 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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