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바다
3,749. 부산에서 바다 보면서 떠올랐던 장면 끄적.
“자기, 우리 발등에 지금 불이 떨어지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 시기에 굳이 단둘이 바다에 와야겠어?”
“좀만 걸으면 바로 다른 애들도 있는 야영지인데?”
“그 뜻이 아니잖아.”
빌어먹을 정도로 복잡한 서로의 가족사를 해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뇌에 기생충처럼 박혀있는 올챙이를 해결한 것도 아니고, 눈을 감을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는데 이자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바다에 데려왔다. 아스타리온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밤하늘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는 바다를 노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육지보다 바다에 환상을 갖는다. 육지에 바다보다 몇 백종이 넘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아쉽게도 아스타리온에게 바다는 로망이 아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물이라면 몰라도. 바람 소리밖에 안 들리는 적막한 곳에 자박자박 모래 밟는 소리가 울린다. 루시안은 멍하니 바다와 하늘 중간 사이 쯤을 응시하며 바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뒤를 쫓았다.
“로맨틱한 분위기라도 즐기고 싶었던 거야? 흐음, 시기는 안 좋지만 그래도 자기치고는 로맨틱했으니까 그정도는 봐줄게.”
“바다는 여러 색깔이야.”
어… 그렇지? 아무래도 빛에 반사된 색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거니까? 왜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아스타리온의 눈썹이 꿈틀였다. “하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던데. 다른 말로 하면 혼자만의 색깔을 가질 수 없는 거지.”
“그럼 난 지금 무슨 색깔일까.”
플러팅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서 눈치를 살폈건만 흔들리지 않는 녹안을 보니 그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듯 싶었다. 다른 사람이 이 질문을 던졌다면 ‘내 색깔이겠지.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잖아.’ 따위의 값싼 플러팅으로 마음을 샀겠지만 역시 그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자신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간질간질하다. 낯설어서인지 좋아서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아스타리온은 그의 시선을 좇아 바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잔잔하게 몰아치는 잔물결은 한폭의 그림처럼 유연하게 이어져 있었다.
“글쎄. 자기가 자기 아버지를 닮긴 했지만… 완전히 닮은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새로운 색이겠지. 이 세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유일무이한 색.”
이 세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유일무이한 너. 카사도어의 스폰들이 자신을 잡으러왔던 밤이 떠올라버렸다. 그날도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이 세상에 너는 너밖에 없다고 말했었다. 나를 정말로 신경써주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말하는 아스타리온에 루시안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는 널 신경써주는 사람은 분명 더 있을 거라고 반박했었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봐도.’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단둘밖에 없는 해안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봐, 내 옆에는 너밖에 없잖아, 루시안.
“그렇게 말하니까 재밌네. 그러면 난 그 색에 아스타리온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
“왜 자기 색깔에 내 이름을 붙여?”
“그야 네가 처음 발견한 사람이니까.”
다들 그러던데? 뭔가를 기리는 게 아니라면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땅땅 박아버리던데. 이게 뭐라고 코끝이 찡해지는지, 아스타리온은 어깨를 움츠리고 코끝을 찡그렸다.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있던 루시안이 그에게 춥냐고 물었다. 바닷바람은 세니까, 라는 아스타리온의 대답에 그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툭 손을 내밀었다.
“그럼 손 잡을래?”
툭 손을 내민 것치고는 조심스러운 발언,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을 응시했다. 200년 넘게 살았는데도 아스타리온은 뭐가 좋은 건지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손 잡는 거 좋지, 다른 사람 말고 너랑 손 잡는 거, 그렇지만 그 자체만 좋은 건 아니란 말이지. 지금 이 순간을 일컬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어리숙하게 굴지 않고 제대로 네게 전해줄 수 있을 텐데. 아스타리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렇게나 내 손을 잡고 싶었어?” 아스타리온의 말에 루시안이 가볍게 웃었다. “언제나.” 루시안의 손도 다른 사람들의 손보다는 차가운 편이었지만 아스타리온의 손보다는 차갑지 않았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그의 손이 좋았다.
바다를 따라 걷는 건 그저 단순한 행위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단순한 행위에 특별함을 느끼는 건지, 아스타리온의 적안에 바다가 담겼다, 물론 나조차도. 곁눈질로 본 루시안은 아슬아슬하게 물결의 가장자리에서 걸으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겁냐 물으니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게 그렇게도 우습단다. 아스타리온은 과장스럽게 혀를 찼다. “역시 자기, 성격 안 좋다니까.” 닿을 뻔한 물결에 후다닥 발을 옆으로 빼며 루시안은 씩 웃었다.
“이정도에는 안 잡히지.”
“그래? 나 정도에는 잡히고?”
아스타리온은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제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 “너 정도?” 재밌다는 듯 루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너라서 잡혀준 거지.”
“아하, 잡혀준 거다?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내가 불러줬던 달콤한 자장가들은 다 잊어버린 모양이네?”
“뭐, 이 세상에 너를 위한 완벽한 피조물이 있다면 나라든가 그런 사탕발림을 말하는 거야?”
와, 얘 입으로 이렇게 들으니까 조금 수치스러운데. 아스타리온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처럼 과장된 어조와 우아한 제스처로 달콤한 말들을 읊었다. 그날과 달라진 거라면 딱 하나, 진심. 그 하나가 바꼈을 뿐인데 루시안의 심장은 쿵쿵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안에게 아스타리온은 “이렇게 하는 거야, 자기. 자기처럼 하는 게 아니라.”라고 속삭였다. 생기 하나 없는 입술이 한번 더 움직인다. “차이점을 알겠어?”
“네가 좋아.”
아스타리온의 입술이 멈췄다. 루시안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네가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쿵, 쿵, 200년도 넘게 안 뛴 심장이 이제 와서 뛸 리가 없는데 어쩐지 심장 박동 소리가 몸 전체에 울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 잡는 거, 너랑 손 잡는 거, 손 잡는 거 그 자체는 아닌 그 무언가…
“아. 닿았다.”
발목에 느껴지는 차가움에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괜히 바닷물을 발끝으로 휘저었다. “너 때문이야.” 네가 좋다는 뜬금없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누군데, 아스타리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안은 허리를 숙이더니 손바닥 하나에 바닷물을 담았다. 손바닥 안에 바다가 잠겼다. 하늘이 담겼다. 붉은색이 아닌 색이 담겼다.
“입수하려고?”
붉은색이 아닌 색에 온몸이 흠뻑 젖고 싶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없이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축 늘어진 옷이 물결에 따라 흔들린다. 그리고 루시안은 낄낄 웃었다. 아스타리온은 옷을 벗어 한쪽에 곱게 접어놓았다. 모래가 묻긴 하겠지만 물에 젖는 것보단 나으니까. 찬 물살이 그의 몸을 끌어안는다. 똑같은 색에 감싸안아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스타리온이 속옷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는데도 그를 바라보는 루시안의 눈은 흥분 하나 없이 따스하기만 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야영지 돌아가자.”
루시안은 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또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보니 두 사람이 있는 바다의 색깔은 그들의 그림자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검게 물든 바다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걷는다.
…그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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