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란] 그날 인퀴지터는,
6,834.
* 드에베 스포 만땅.
* 드에베에서 인퀴지터가 적게 나온 데에 한이 맺혀서 끄적인 글. 그래서 쓰고 싶은 부분만 썼다.
* 드에베의 인퀴지터와는 다른 말을 내뱉음. 마지막에 솔라스랑 대화 안 통하려나 < 이건 너무 내 캐해석이랑 안 맞았다.
인퀴지터. 그는 처음부터 그 호칭이 무겁다고 생각했었다. 모두의 앞에 서서 칼을 들어올렸을 때부터 그는 어깨에 그 무게를 느꼈다. 그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원주처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그의 발걸음은 묶였다. 두 갈래로 찢어진 하늘을 향해 칼을 치켜들으며 그는 말했다, 코리피우스를 무찌르자고.
인퀴지션은 해산됐다. 하지만 세상에 ‘인퀴지터’라는 호칭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세 분할로 나뉘어졌던 올레이는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코앞에 칼이 들이밀어지고 나서야 인퀴지터의 말에 따라 퍼렐던에 손을 내밀었고 퍼렐던도 드디어 온갖 정치적 상황을 뒤로 하고 인퀴지터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기로 결단했다. 대재앙에 무너지는 레드클리프, 그리고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보호지 스카이홀드, 인퀴지터 라벨란은 또다시 스카이홀드로 돌아왔다.
“인퀴지터이기 전에 당신도 한 사람이었던 거지?”
루크의 말이 맞다. 그는 인퀴지터이기 전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퀴지터이기 전의 시절은 그에게 다른 사람의 기억이라도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할라를 돌보던 그 시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키퍼의 손짓이, 부족을 위해 사냥을 나갔던 그 사소함이, 기억에는 분명 남아있지만 마음으로는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을 인퀴지터라고만 부르죠. 인퀴지터도 한 사람이라는 걸 잊고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내 앞의 당신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나조차도 내가 한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 거 아닐까, 책상에 기댄 채 그는 낮게 심호흡을 했다.
“인퀴지터.”
하지만 최후의 보루에 선 이상 이런 감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령의 목소리에 인퀴지터 라벨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인퀴지로 있어야만 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전령의 옆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다.
“모리건. 무슨 일이죠?”
“상황이 바뀌었어, 인퀴지터. 당장 루크가 있는 쪽으로 와야 해.”
갑작스러운 통보였지만 모리건의 말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이유는 이동하면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퀴지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퀴지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전령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지금도 전선을 지키기가 벅찬데 인퀴지터까지 자리를 비운다면 남부는 모조리 몰살당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대로 모리건을 따라나서려던 인퀴지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렇지만 남부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인수인계할 시간을 주세요.”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인퀴지터. 너라면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좋아. 인퀴지터 라벨란은 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전령에게 부단장을 부르라고 명령한 뒤 그는 전선 지도를 살폈다. 그는 자신이 올 때까지 남부의 군대가 버틸 수 있도록 진영을 짜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테빈터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식은 하딩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의 당신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아찔해지는 시야에 인퀴지터 라벨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정찰 보고를 듣다가 가볍게 농담을 치면 어이없다는 듯이 반박하면서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배릭의 죽음조차 아직도 믿기지 않은데 하딩마저 죽었다니 발이 지면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공중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내가 더 빨리 인수인계를 할 수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만약 솔라스를 믿지 않았다면….
“아마투스, 괜찮아?”
물이 턱밑까지 찬 것마냥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인퀴지터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상실감, 죄책감, 후회, 절망, 분노,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감정들을 치우고 그는 목표만을 바라보았다. 도리안이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대재앙으로 붉어진 민라투스를 올려다보았다. 섀도우 드래곤을 돕고 있다고 들었으니 저기 어딘가에 솔라스, 아니, 공포의 늑대 펜하렐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들은 모든 것이 끝나고 마주해도 될 테다, 그 감정에 익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베일점퍼들과 함께 뚫고 들어간 민라투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안티바의 까마귀단, 부의 군주들, 네바라의 슬픔의 감시자들, 그리고 회색 감시자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인퀴지터를 알아본 몇몇의 회색 감시자들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가 스쳤다. 아다만트 요새에서 일어난 일로 자신을 미워하는 워든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시선을 직접 마주하니 감정을 비운 줄 알았던 마음이 쓴 맛을 머금었다. 인퀴지션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가? 옳은 줄만 알았던 인퀴지션은, 결국 대체 무엇을 이뤄냈는가? 인퀴지터의 단검이 다크스폰의 살을 갈랐다. 오염된 피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인퀴지터는 정말 최선을 다했나? 정말 그게 최선이었나? 그의 화살이 다크스폰의 머리를 꿰뚫는다.
“조심해, 베난.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앞에만 집중해.”
“그렇지만 네 표정이….”
화살에 맞고 쓰러진 다크스폰의 뒤로 우려가 가득한 도리안의 회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화살로 길을 만들며 인퀴지터는 그에게 억지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난 정말 괜찮아, 도리안. 하지만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정말로 괜찮아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다치지마.”
인퀴지터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도리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항상 다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는 걸 잊었어? 넌 정말 최악의 사고뭉치 애인이야, 아마투스.” 초록색 마법 방어막이 인퀴지터를 공격하던 다크스폰의 팔을 막았다. 그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그의 거친 숨소리에는 애인에 대한 걱정과 망가진 고향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인퀴지터는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가 놓았다. 인퀴지터의 손짓에 도리안의 경직되어 있었던 어깨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문득 레드클리프에서의 그가 떠올랐다. 적들을 상대하느라 서로의 등이 맞닿았을 때마저 긴장을 풀지 못했던 서로가 떠올라버렸다. 설마 그 날마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인퀴지터는 쓴 미소를 지었다. 인퀴지션은 더 이상 없다.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전부 한 장소에 모인다고 하더라도 결속감이 아니라 빈자리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배릭, 하딩, 배릭, 하딩….
넌 할 수 있어, 치크(chick).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당신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요, 인퀴지터. 하지만 전 알아요, 당신도 나와 같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헉, 하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인퀴지터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밀어줬던 거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다크스폰들과 사람들뿐이었다. 정신차려!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금은 그런 감정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당장도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있다고! 화살이 다크스폰의 머리를 꿰뚫는다. 다크스폰에게 죽을 뻔했던 사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죽음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사람의 눈동자에 공포와 분노가 차오른다. 모두를 집어삼킨 광기가 크게 일렁인다. 그리고 인퀴지터는 그들에게 자신의 등을 보였다. 여태까지 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었든, 그의 등을 본 순간 그건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은 인퀴지터를 따른다, 눈속에서 인퀴지션의 모두가 인퀴지터의 등을 따랐던 것처럼.
드디어 인퀴지터가 루크를 찾았다. 그가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젊은 사람의 패기일까? 하지만 젊은이의 혈기라고만 보기에는 그의 불길은 몸집과 다르게 잔잔했다. 인퀴지터는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루크를 응시했다. 그라면 정말로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주셨군요!” 인퀴지터와 살아남은 동료들을 알아본 루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드디어!”… 그는 여전히 진지함에는 재주가 없었다.
“전쟁 회의에 늦은 건 미안합니다. 저희는 베일점퍼들과 함께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베나토리에게 반격할 기회를 잡았지.”
흘낏 돌아본 도리안의 회색 눈동자에는 무너져내린 민라투스만이 맺히고 있었다. “반격할 거야. 반드시.” 낮게 읆조린 인퀴지터의 말에 도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반드시, 그가 강조해서 말한 그 세 음절에 어느 정도의 의지가 들어있는지 인퀴지터는 알고 있었다. 인퀴지터에게 라벨란 부족이 돌아갈 곳이라면 도리안에게는 민라투스가 돌아갈 곳이었다. 싸움의 결말이 어디로 흘러가든 결국 도리안은 민라투스에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인퀴지터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숨을 죽인 채 자신이 다시 부족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키퍼와 부족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그립다.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인퀴지터의 금안에 도리안이 맺혔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도리안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의 예쁜 미소 뒤에 있는 비통함이 인퀴지터 라벨란의 발목을 잡는다. 도리안과 시선이 마주친 인퀴지터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를 마주했다.
“아마투스?”
“…루크는 잘 해결할 거라고 생각해.”
도리안의 눈썹이 꿈틀였다.
“루크‘는’? 저번부터 말했지만 솔라스는 너만의 잘못이 아니야. 게다가 당신도 잘 해결했고.”
내가 무엇을 잘 해결해? 찢은 하늘을 봉합하는 것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인퀴지터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어깨만 으쓱였다. 루크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작전실에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인퀴지터는 자신의 멍청한 친구 놀이만 아니었어도 루크가 저 자리에 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배릭도 죽지 않았을 테고 하딩도 죽지 않았겠지. 당신은 내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인퀴지터.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 때문에 확신이 섰습니다. 솔라스의 말이 그의 머리에 울린다. 적어도 내가 그에게 영감을 주지 않았더라면. 인퀴지터, 짧더라도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내가 그의 기만에 당하지 않았더라면… 인퀴지터는 밑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는 여전히 솔라스의 죽음을 상상하면 비통해지는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에 지금 얼마나 죽었는데! 그는 그를 반드시 멈춰야만 했다, 그때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를 죽여서라도.
당신이 옳길 바랍니다, 인퀴지터.
…그를 죽여서라도.
“괜찮은 거야, 아마투스? 네가 그런 용감한 표정을 지을 때면….”
용감한 표정?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가는 숨긴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아서 인퀴지터는 정면만을 응시했다.
“괜찮아, 도리안. 정말로. 약속할게.”
그를 죽여서라도. 그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마음속 깊이 깨달았을 때부터 되뇌이던 말이다. 그는 이미 선을 넘었다. 인퀴지터는, 모두의 시선을 등으로 받고 있는 인퀴지터는, 사사로운 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미 처절하게 당했잖아,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베일에 묶기 위해서는 고대엘프신의 피가 필요해.”
“고대엘프신이라면 솔라스가 있잖아.”
루크는 가짜 리륨 단검을 꺼내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엘가난을 죽이고 솔라스의 피로 영계의 균열을 닫으면 되는 거라고 말했다. “솔라스가 싫어할 거 같은데.” 그 말에 그는 호기와 복수심이 맺힌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손으로 돌렸다. “오히려 그러길 바라.” 인퀴지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솔라스를 막아야 합니다. 지상의 일은 제게 맡기세요, 루크.”
“…솔라스를 죽여서라도?”
루크의 금안과 인퀴지터의 금안이 마주쳤다. 그와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고, 그에게 편지를 많이 보낸 것도 아닌데 루크는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은 듯한 말을 던졌다.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도리안도, 모리간도,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도 도리안이나 모리간은 그를 맹렬하게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당신을 깊이 존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퀴지터.
“네, 솔라스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인퀴지터의 대답에 루크가 씩 미소를 지었다. “시험해본 것처럼 말해서 미안해요. 요 근래에 사기를 하도 당해서. 아! 최근에만 당한 건 아니긴 한데.” 가볍게 재잘거리던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당신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괜찮아요, 루크. 지금은 확신이 필요할 때지요. 당신이 왜 그 질문을 던졌는지도 알고 있고요.” 쿨하게 받아들이는 인퀴지터의 모습에 더 멋쩍어졌는지 루크는 헛기침을 얕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인퀴지터.”
“…당신은 잘 해낼 거라 믿어요.”
“으하하, 그 말을 들으니 진짜 잘 해내야 할 거 같은데요.”
과장스러운 웃음을 마지막으로 다시 자신의 동료들에게 돌아간 루크의 뒷모습을 인퀴지터는 말없이 응시했다. 손에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졌다. 시선을 빗기니 도리안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석양이라도 보면서 잔을 기울이자고.”
“이기는 데에 내기를 건 거야?”
도리안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퀴지터는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으로 그의 엄지를 끌어안았다.
“네가 내 곁에 있기 시작한 후부터 내가 불가능한 일에 내기를 거는 버릇이 생겼다는 거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 승률은 완벽했지.”
“그럼 난 네가 또 이긴다는 데에 걸어야겠다. 애인과의 석양 구경을 대가로.”
잘 생각했다며 도리안이 픽 웃었다. 인퀴지터는 결전에 앞서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마치고 다시 작전 책상으로 돌아오는 루크를 똑바로 마주했다. 마주친 두 사람의 금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준비됐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인퀴지터의 얼굴을 확인한 루크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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