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담긴 자리

끼적 by 메엨

우리는 바다에서 태어나

파도를 안고 하늘을 항해한다.

눈동자에 별의 궤적을 담아 헤며 도달한 종착점에 몸을 뉘이는…

세상의 끝,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곳에 별의 바다를 이룬 우리의 여정은―

아모로트의 거리는 도시의 시민들만큼이나 단정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다. 성실한 시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오후가 되면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기울기 시작한 즈음의 거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활기로 한층 밝게만 느껴진다. 검은 로브들의 사이를 지나는 하얀 로브의 주인은 주변의 사람들보다 조금 체구가 작았다. 소년과 청년 그 어디쯤의 나이가 느껴지는 이의 얼굴을 덮은 가면의 색은 빨강.

그 모습이 뜻하는 자리에 존경을 표하듯 인사를 건네는 연속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 청년-엘리디부스는 걸음을 빨리했다.

언제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면 늘상 이렇다. 누구든 이 하얀 로브의 주인이 어떤 새로운 일을 하려 하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도시 밖으로 나가 자리를 비웠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호기심이 동한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다니엘의 집무실이 있는 연구소. 파견 나가는 인원이 많은 이 물질계 탐구자들의 전당은 조용하지만 혼잡하고, 바로 문 바깥의 정돈된 도시를 잊게 할 정도로 다채롭다.

"잠깐 괜찮을까?"

밀봉된 샘플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던 직원이 그제야 고개를 든다. 깜짝 놀라 쌓여있던 샘플 더미를 쏟아버린 탓에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대화할 수 있었다.

혹여 자신들의 직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에게 '개인적인 일로 파다니엘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라고 진정시키자 대번 표정이 흐려진다. 파다니엘이 정기 회의 이후 돌아와 지금까지 개인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민한데다 식사나 간식을 즐기지 않고 말수도 적은 편이라 직원들은 걱정하면서도 무어라 더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의 상담 끝에 안쪽의 긴 복도를 지나 그의 사무실로 향한다. 저녁으로 향하는 따뜻한 빛이 하얗게 카펫에 자국을 남기는 모습에 엘리디부스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함께 일하지는 않더라도 동료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었으면. 그런 마음들이 합쳐져 지금의 자신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열 번의 노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방의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온 이유를 걱정이라고 변명해 두겠다.

파다니엘의 집무실은 커다란 창이 나 있는 서쪽 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책장으로 덮여있었다. 흔한 그림 한 점 걸려있지 않은 것이 그답다고 해야 할지. 주 조명 장치를 모두 꺼둔 방은 어두웠고 어느 시간에도 태양 빛을 피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상처럼 창에서 먼 자리에 놓아둔 책상에는 흐릿한 에테등만이 종이와 책의 산을 쌓아둔 채 몰두한 남자의 모습을 어스름히 비추고 있었다.

"파다니엘."

책과 양피지, 목간, 파피루스. 온갖 지역에서 수집된 문헌과 동, 식물 구분 없이 채집한 생물의 표본과 크리스탈등이 늪처럼 고인 바닥의 빈 곳만을 조심스럽게 짚어 책상으로 향한다. 몇 번을 부르고, 끝내는 코앞에 불쑥 손을 내밀어 책상을 툭툭 두들기고서야 책상의 남자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비취색 눈동자에 느리게 빛이 돌아오고 멍한 표정에 놀라움이 드리울 때까지, 엘리디부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엘리디부스?! 이런, 미안하다…열중하고 있던 참이라."

"알고 있어. 너를 나무라려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파다니엘."

부탁을 받았거든. 느긋하고도 평온하게 화두를 열었지만, 갑작스런 방문자를 맞이한 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지 책상머리의 남자는 허둥지둥 일어나다 책상 모서리에 찧이는 바람에 신음을 토하며 웅크렸다. 당혹한 엘리디부스가 말리려 입을 열기도 전에 바닥의 물건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비틀비틀 나아간 남자는 겨우 그 존재만 높이로 가늠이 되던 창가에 가까운 응접용 탁자 주변을 치우기 시작한다. 맞이한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보다도 그것이 먼저라 생각되었던 모양이라, 별수 없이 엘리디부스도 그 정리에 동참했다. 물건이 물건의 위로 쌓여 이동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방식의 정리를 통해 겨우 두 사람 분의 공간을 만든 남자는 그제야 함께 정리를 하고, 이제는 깨끗해진 탁자 위에 들고왔던 물건을 내려놓고 있는 상대방에게 몹시 겸연쩍어하며 늦은 인사를 건네었다.

"어쩐 일이야? 지난번 회의에서의 의견이라면 더 떠오른 것이 없는데…"

"오늘은 개인적인 용무야. 부탁을 받았거든. 여러 명의 부탁."

개인 집무실에 있었던 파다니엘은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였던 탓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방문자를 마주 보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는 점이 그의 허술한 부분이지만 그 사실을 짚어내지 않은 엘리디부스가 조용히 자신의 가면을 내려 얼굴을 보였다.

아차 하는 기척에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가로저은 청년이 느긋이 올려놓은 물건들을 확인한다. 크리스탈이 장식된 둥근 포트와 잔은 세트로 디자인되었는지 섬세한 세공이 아름다웠고 찻잎이 든 통을 열어보면 상쾌한 향이 방 안의 종이와 양피지의 냄새를 밀어낸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포트의 뚜껑을 열고 찻잎을 털어 넣는 청년을 불안한 듯 바라보던 헤르메스는 거름망 가득 담겨버린 찻잎을 보고 말을 잃었다.

"아젬이 만든 작품이야. 어디서든 편하게 뜨거운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하면서 찻잎과 함께 줬거든. 꼭 파다니엘이 마셔줬으면 한다더라."

"아젬이…?"

되묻고 만 이유는 헤르메스에게 아젬은 회의 때나 겨우 얼굴을 비추는, 항상 바깥을 떠돌고 있는 좌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늘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듯 몫의 일을 하러 자취를 감춰왔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이 불편해한다고 느낀 것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응. 그는 에메트셀크와 친밀해서 종종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새로운 파다니엘이 너무 성실한 탓에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다. 아젬, 너는 그 반의 반이라도 닮아봐라! …같은 이야기 말이지."

에메트셀크의 말투를 흉내까지 내어가며 전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여 헤르메스는 무심코 입에 담으려던 사과의 말조차 잊고 만다. 그렇다. 자신과 달리 다른 이들은 서로 인연을 맺고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방인의 감각에 움츠러든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자신이 무리하게 파다니엘의 좌를 권한 탓에 당신을 몰아붙여 사고가 일어난 게 아닌가 자책하고 있거든. 휘틀로다이우스도 적잖이 신경을 썼어. 아젬까지 세 사람은 굉장히 친한 사이니까 함께 너를 도울 방법을 궁리했던 모양이지."

"그렇지 않아…그건 나의 실수였고, 폐만 끼치고 말았으니까. 내 쪽에서 사과를 해야 할 일이다."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 너는 그 사역마를 굉장히 아꼈다 들었는데 그 이후 거의 곧바로 낯선 장소로 와 새로운 직함을 맡았으니 역시 부담이 크겠지."

엘피스의 일을 떠올려 낯빛이 어두워진 헤르메스의 앞으로 놓인 잔에 붉은빛이 선명한 차가 채워진다. 상쾌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지만 역시 찻잎을 너무 많이 넣었다. 그리 생각한 헤르메스는 웃었고, 영문을 모르는 엘리디부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니 너무 자신을 혹사시키지 않았으면 해. 이건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위원회 전원과 너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의견이야."

빙긋 웃는 청년의 얼굴은 막 성인이 되어 앳된 기운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행동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가 조정자-엘리디부스이기 때문일까? 그는 한 번도 헤매어 본 일이 없는 걸까. 헤르메스는 동경과 경외, 그리고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열등감에 찻잔을 들어 올려 마시는 것으로 시선을 피하고 만다. 차는 혀가 아릴 만큼 썼다.


어렴풋한 꿈은 악몽이었던 것 같다. 몹시 슬프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만이 깊게 남아 긴 한숨이 되었다.

적당히 푹신한 소파의 감촉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뜬다. 길게 방 안을 침범해 오는 저녁놀의 붉은 빛을 느끼면서 헤르메스는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덜 깬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혼자가 아니었는데.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에라도 데인 양 벌떡 상체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성급하게 불러일으켜진 뜻 모를 실망감과 죄책감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려는 찰나 조금 떨어진 창가에서 기척이 났다. 조금 난처한 기색의 엘리디부스가 창틀 모양의 저녁놀을 밟으며 다가왔다.

"미안해. 아젬은 분명 긴장을 완화 시켜준다-정도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효과가 좋은 물건을 준 모양이야. 갑자기 잠들어서 놀랐지?"

"아니…나는 괜찮지만, 도대체 얼마나 잠들었던 것인지. 정말 미안하다."

"영문도 모른 채 잠들었는데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는 방이면 쓸쓸할 것 같아서. 일단은 설명도 해두어야 할 것 같았고…"

아젬에게는 차의 성능을 조절하라고 일러두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헤르메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엘리디부스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상대의 안색을 살핀다. 조금은 혈색이 돌았다고 생각되었는지 호기심과 걱정이 기쁨으로 바뀌어 웃음지었다.

저녁놀을 등진 청년의 하얀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선명한 테를 두른 가운데 맑게 바라보는 하늘색 눈동자만이 다정한 빛을 띠어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파다니엘의 집무실이 황혼녘 무척 아름답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으니,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어."

헤르메스는 문득 가늘고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찌르고 지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선득한 그 감각은 마치 심장을 한 땀 뜬 것처럼 짧은 고통을 남기고 자신이 사랑했던 파랑을 이어 붙였다. 하늘을 녹인 색을 입혀 날렸던 새의 무구한 눈빛은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간절함 사이에 오늘의 파랑이 더해졌다.

내용을 잃은 간절함이 내내 그를 붙잡아 내몰았다. 맑은 날의 하늘은 어느 순간 끝없이 깊은 해구 밑바닥, 심해의 빛을 띠었고 방황하는 걸음에 목적은 없다. 그렇지만 나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한다.

어쩌면 저 하늘이 나아갈 길을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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