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망제
그의 정원은 '정원'이라 부르고 있지만 좀처럼 정체를 알기 어려운 장소였다.
영웅은 자주 환시를 보고, 들릴 리 없는 목소리를 듣고, 뜻하지 않은 장소로 이동하고는 했지만 그 길은 늘 모호한 무의식 틈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어느새 입구의 자갈길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닿은 장소의 모습 또한 번번이 알던 풍경과는 전혀 다를 때가 많아서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장난스레 웃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며 투덜대는 일 역시 일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의 정원은 과연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 참, 방문하여 유감이라 해야 할지, 안타깝다 해야 할지…"
창백한 광원이 동그랗게 검은 공간을 잘라낸 듯한 가로등의 아래, 긴 코트를 갖춰 입은 익숙한 남자가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진한 붉은빛 스티치가 금색 자수와 함께 우아한 포인트가 되는 긴 코트는 허리가 잘록하게 조여지는 스타일로 몸에 꼭 맞게 떨어지는 실루엣이라 늘상 구부정하여 잊고 있었던 '아, 이 사람 생각보다 체격이 좋았지.'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목을 감싼 검은 폴라와 테일러 칼라 위로 암적색 목도리를 느슨하게 감아 늘어뜨린 멋부린 모양새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애시당초 이 남자가 다른 옷을 입는 일 자체가 정말이지 드물었다. '관측자가 가장 익숙하게 구상하는 지표를 모아서 만들어진 형태'…라던가?
쭈뼛대며 쉬이 다가가지 못하는 영웅의 앞으로 나긋한 걸음의 남자가 다가가면 그 걸음마다 빛이 번지듯 고요한 도시의 골목이 드러난다. 그물망같이 섬세하게 짜인, 석재도 금속도 아닌 재질감의 가로등이 머리 위에서 은은하게 밤의 길을 비추었다. 이어진 양옆으로 높은 건축물과 에테르 전도체들이 나선을 그리며 숲을 이룬다. 영웅은 순간 높이감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들은 그 자신에게 맞추어진 크기였던 것이다. 심해의 아모로트와 달리.
별 하나 없이 캄캄한 하늘 꼭대기에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만월만이 떠 있었다. 아모로트의 시가지는 달빛과 별빛에 의존할 생각이 없다는 양 건물 전체가 어스름히 빛을 내고 있어서 어쩐지 두렵지는 않다. 그런 생각에 조금 경계를 풀 즈음 사방의 조명 덕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가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민다.
"이런 날에도 나를 못 잊겠던가? 너와 함께하고 싶어 눈을 빛내던 녀석들이 모조리 실망에 눈물짓는 날이겠어."
얄밉게도 웃음 섞인 말을 건네는 남자의 내밀어진 손은 맨손이다. 영웅은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생각하고 만다. 이 남자가 분명 아주 즐겁게 자신을 가지고 놀 계략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누구시냐고 묻고 싶은 짓을 똘똘 뭉친 채 나타날 리가.
그런 자가 진단과 상관없이 붙든 손은 아주 따뜻했다. 부드럽게 당겨 나란히 곁으로 몸을 반바퀴 돌리는 짧은 순간에도 가볍게 손바닥을 스친 손끝이 손가락 틈을 파고들어 깍지를 껴 쥔다. 손바닥의 간지러움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조금 건조한 체온이 감싸 코트의 주머니로 감추어버렸다. 꼼질대는 자그마한 손의 움직임에 한참 높은 어깨가 조금 기울며 서늘한 뺨이 다가온다.
"너는 늘 내가 작정을 하면 그렇게 경계를 해. 기왕 이곳을 선택했다면 그냥 즐기는 게 어때?"
눈썹 근처를 스치는 입김이 시야를 하얗게 흐린다. 웃음 섞인 말끝이 한껏 내려앉은 귓가로 입술이 닿은 덕에 흐려진다. 간지러움에 파다닥 귀를 털어내면 금방 고개를 들어버린 남자가 개구쟁이같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내려보고 있었다. 선전포고까지 당한 이상 더 고민할 이유가 없다. 영웅은 기세 좋게 잡히지 않은 손을 휘둘러 활기를 되찾았다. 파트너의 역할을 자처한 남자는 유감스러울 정도로 기운이 넘치는 영웅의 걸음에 휩쓸려 조금 휘청이고서야 간신히 품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조금 걷자 자그마한 사거리가 나왔다. 중앙에 심어진 오색의 가로수의 가지마다 부드러운 빛이 매달려있어 천연의 지붕이 되어주고 있었고, 그 아래에 꽃이 가득 담긴 수레를 놓은 채 앉아있던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곁에 두었던 자그마한 바구니를 건네어주었다. 들고 다니기 나쁘지 않은 크기의 바구니에는 손톱보다 작은 하얀 꽃이 노란빛 꽃을 레이스처럼 감싸 귀여운 모양이다. 예쁘지만 성망제와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웅은 당연한 의문을 가졌다. 그 호기심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별빛 같은 작은 등불이 매달린 가로수 아래를 거닐며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아직 어렸던 시절의 어느 밤, 어른들이 연말의 회의로 바쁘던 때에 아젬이 별을 보자고 하더군. 바다를 건너는 새들이 알려준, 별이 해안선까지 쏟아진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서. 나는 말렸고, 휘틀로다이우스는 아주 쉽게 알리바이를 만들어왔지. 두 녀석을 알면서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한밤중의 모험을 하게 되었다. 밤의 숲은 틀림없이 익숙한 길일텐데도 처음 보는 곳 같았어. 우습게도 그런 어둠 속에서도 나와 휘틀로다이우스는 그 녀석의 에테르를 볼 수 있으니 괜찮았지만 아젬은 아니었지. 우리는 금방 흩어졌고, 모이기도 전에 아젬의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그 녀석도 '볼' 수 있는 빛을 부족한 실력으로 만들었다. 수선화과의 모습을 한, 빛을 쫓는 꽃. 나는 오래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휘틀로다이우스가 멋대로 등록을 해서는 가지고 오더군.
그 밤, 작고 엉성하게 피어난 황금빛 꽃을 양손 가득 쥔 어린이들은 언덕 아래에 하늘보다 검게 일렁이는 바다 위로 쏟아진 별빛을 보았었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그 온기와 목소리로 졸음을 이기면서."
나직한 이야기가 끝날 무렵 꼭 맞춰놓은 것처럼 둥근 무대가 놓인 광장에 닿았다. 건축물의 양식은 분명 고대의 것인데 로브가 아닌 지금의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한 인파가 달가우면서도 어쩐지 이질적이기도 하다. 곁에 선 남자 역시 갈레안족의 얼굴로 정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 설정인 것일까. 영웅의 시선에 닿은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게 보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붐비는 불편만은 느낄 수 없는 간격으로 거리를 두었다. 무대 위에서는 막 새로운 마법을 고안한 사람이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쯧, 못 봐주겠다는 듯 찌푸린 남자가 근처의 노천 서점에 시선을 돌려버린다. '술식에 장식으로 넣은 도안이 너무 많고 균형도 올바르지 않아. 훨씬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멋 부리는 데에 집중한 모양이지.' 라고 말하는 심드렁한 옆모습이 마치 진짜로 언젠가의 그가 이랬을까 싶어서 영웅은 웃고 말았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집어든 이국의 책을 넘겨보던 남자가 입을 연다.
"도시에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고안하는 이들이 많아서 이 광장은 아직 심사받지 않은 마법이나 창조물을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보이고 의견을 나누는 곳이었어. 그런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바깥의 물건을 들이는 상인들도 모였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늘 가장 컸기 때문에 우리는 으레 모이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
그러니까…고대 시절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야?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막으려는 것처럼 입술 위로 챡, 손잡이가 달린 납작한 사탕이 덮었다. 다시 심드렁한 표정이 된 남자는 '레몬과 체리 맛 사탕.' 하고 짧게 말했을 뿐이지만 어쩌면 이것 역시 과거의 그와 그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무엇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심사받아 완벽하게 고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술식을 보이지 않는 성격이었고, 휘틀로는 만드는 일에 도무지 흥미를 가지지 않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저 무대에 오르는 사람은 늘 아젬이었다. 항상 이상하고, 가끔 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만들어서 뜻하지 않게 우리가 휘말려 함께 뒷정리를 해야 했어."
예를들면 이런 소란이었다. 남자가 맞잡지 않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한 채 손가락을 튕겼다. 짙은 마력이 바닥에서부터 하늘로 화살같이 날아가고 곧 새카만 하늘 위로 윤슬의 눈부심이 파도처럼 쏟아지더니 그대로 광장 전체를 휩쓸고 거대한 고래의 형태를 이루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한 바퀴 돌고 흩어졌다. 허공에 흩어지는 반짝임이 손에 닿으면 따스한 온기만 남기며 꺼지고, 바닥에 소복이 쌓인 자리는 밟으면 발자국 형태로 잠깐 장하게 반짝이다 사라진다. 보기에 아름답지만 도무지 쓸모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 호응은 별로였다고 말하는 표정은 말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가 기억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질 수 있는 마법이라면 그 나름의 쓸모가 있었던 게 아닐까? 영웅이 무심코 말하자 순식간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워버린 남자가 아주 떨떠름하게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보라색 가로수가 늘어선 넓은 길에는 사람들이 편안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고 종종 지나는 이와 합류하거나 떠난다. 그늘 한 점 없는 활기는 한겨울밤의 가운데에서도 지울 수 없다는 듯 어른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여러 사람이 다툼없이 어울렸다. 육체노동이 창조로 해결되고 유기 생물의 결핍을 모두 극복한 생명이란 이다지도 평화로운 것일까. 아니면 이것 역시 옛 추억의 아름다운 착시일까.
생각에 잠긴 영웅의 반걸음 앞으로 나선 남자가 둥근 나무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다른 건물들과 생김은 비슷했지만 아담한, 그리고 훈훈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내부로 들어가자 그제야 내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준다. 조금 저릴 정도로 붙잡고 있었던 터라 갑자기 놓여진 손이 허전해 까닥까닥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영웅은 도착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벽난로, 두껍게 깔린 러그와 정돈된 쿠션은 딱 세 사람분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크지 않은 창문 대신 필요한 곳에만 광원을 놓은, 책으로 가득 찬 집. 훈훈한 공기에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섞여 꼭 도서관 같다. 안쪽 구석으로 이 공간의 주인이 홀로 일할 때 사용하는 책상이 벽면 그늘 속에 숨어있었고 벽난로의 빛이 닿는 벽면에는 주전자와 찻잎 같은 다기들이 잘 정돈되어 놓여있다. 말을 잃고 둘러보는 상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어쩐지 민망해진 남자는 겉옷을 벗어 버릇처럼 반듯하게 정돈했다.
"아젬은 아모로트에 집을 가지지 않았다. 휘틀로다이우스의 집은 도저히 세 사람이 앉을 수 없는 지경일 때가 종종 있었고. 하필 의사당에 가까운 위치에 내 집이 있던 탓에 녀석은 돌아올 때마다 여기에 멋대로 둥지를 틀었어. 당연하게 다른 한 녀석도 눌러붙었고."
벽난로 위에는 주변의 정돈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로 번잡했다. 작은 동물의 머리뼈, 다듬지 않아 돌 부분이 그대로 남은 원석, 반사광 빛깔이 이상한 금속조각… 그런 잡동사니는 벽난로 위를 점령하고도 넘쳐 세 사람분의 자리가 놓인 주변에 쌓여있었다. 부지깽이 옆으로 낡은 가방이 제멋대로 열린 채 늘어져 있고 그 위로 엉성하게 무두질 된 여우 가죽이 몇 장이나 올려져 있다.
주전자와 다기가 놓인 곳에도 어쩐지 절대 이 집의 주인이 두었을 리 없어 보이는 차통이나 절임 병이 산만하게 늘여져 있었지만 남자는 그것이 익숙한 듯 대충 줄을 맞춰놓고는 주전자에 물을 채워 난로 위에 올렸다.
"원한다면 네 운을 시험해봐라. 경험상 세 번 중 한 번 정도는 먹을 만한 찻잎을 가져오더군."
영웅은 결연한 표정으로 놓여있는 찻잎 통을 노려본다. 일부러인지 모르겠지만 향조차도 전체적인 혼돈의 아우라로 덮여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으므로 정말로 '운을 시험하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실패한 차를 마셔도 당신은 괜찮아? 영웅의 샐쭉한 목소리에 남자는 눈썹만 치켜올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한사람분의 자리를 무마해 정돈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뾰족한 침엽수 화분을 만들어 화려한 장식들을 허공에 빚어내듯 장식을 만들어 걸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영웅은 운명의 차를 내렸다. 다행히도 포트 안에 풀어지는 색과 향은 아주 괜찮았기 때문에 득의양양해진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장식을 마친 남자가 가벼운 담요를 가져와 차를 내려놓는 영웅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거슬리지 않게 적당한 높이로 부유하는 탁자가 손짓 한 번에 각자의 곁에 머물고, 같은 모양의 담요를 어깨에 걸쳐 난롯가에 앉는 모양이 늘 홀로 흔들의자에 잠들어있던 사람을 새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레몬이라도 띄워야겠어."
찬성. 영웅은 입을 가린 채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찻잎은 실패작이었던 모양으로…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맛이 났기 때문에 레몬과 민트를 넣고서야 겨우 마실만한 물건이 되었다. 울상이 된 앞으로 진저맨 쿠키들이 허공을 종종거리듯 떠올라 영웅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고, 어느새 찻잔 옆으로 놓인 접시 위로 아이싱으로 장식된 과자와 설탕에 절인 꽃 젤리가 놓여있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역시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길을 지나는 내내 이야기를 했으면서, 난롯가에 앉은 남자는 마치 몫을 다 끝냈다는 것처럼 영웅도 익히 알고 있는 제목의 대중서 따위를 펼쳐서 읽기 시작한다. 간간히 찻잔을 채우고, 과자의 구성을 바꿔주려 시선을 들기는 했지만. 같은 모양의 담요를 덮고 조금 떨어진, 하지만 벽난로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말없이 자신의 시간을 함께하는 공간. 생각해보면 언제나 영웅이 방문한 그의 장소는 이런 모양이었던 것 같다. 함께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지만, 경계를 침해하면 내쫓기고 마는.
성망제의 밤이 저문다. 어른거리는 불꽃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졸음에 눈을 감으면 분명 다음 순간은 기상이겠지만, 어딘가에서는 구원의 별이 노래한 날이라던 축일의 꿈은 오래 남겨질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에, 기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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