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벌써 일을 한 지 6일째가 되었다. 순무가 돌아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나누는 일어나서 첫 휴일을 맞이하여 그동안 필요했던 것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우산은 순무와 큰 우산을 같이 쓰면 되니까 사지 않는다. 옷도 딱히. 가져온 것들은 한 번도 안 입었다. 담배.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 자주 피우게 되는 것 같다.
순무가 샤워하는 동안 또 뭐가 필요한지 골똘히 생각하는데 포켓내비의 전화벨이 울렸다. 나누는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표정이 굳는다. 친척 아저씨였다. 나누는 떨떠름하게 전화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나누의 안부를 물어왔다. 신세 지기도 했고 친척들 덕분에 이곳에 있는 것이기에 그의 질문들에 성실히 대답했다. 통화를 끝낸 나누는 문득 친척 집에서 빠져나온 뒤로 그들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 버렸다.
잠시 후, 순무가 돌아오자 나누는 밤새 수염이 조금 난 턱을 매만지고는 금방 끝내겠다고 한 뒤 샤워를 하러 갔다. 다녀와서 방문을 열면 순무는 벌써 사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나누의 눈동자처럼 탁한 붉은색의 반팔 티셔츠 아래는 면으로 된 크림색 반바지를 입고 있다. 순무는 티셔츠를 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면 다리가 조금 길어 보이는 효과를 자랑한다. 늘 유니폼이 정강이까지 내려와서 일할 때 잠깐잠깐 걷은 게 다였으나 이번에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약간의 흉터 자국들과 역시나 튼실한 다리. 털도 듬성듬성 나 있다. 두툼한 발목과 가지런한 모양의 발가락까지 훑어본 나누는 옷장을 뒤져 자신의 사복을 찾았다. 첫날 여기에 쑤셔 박아 넣은 뒤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나누는 하얀 셔츠에 회색의 긴 면바지를 입고 가죽 벨트를 찬 뒤, 오랜만에 신는 단화에 발을 넣었다. 슬슬 비가 그칠 것 같아 우산은 쓰지 않기로 한다. 본채 쪽으로 걸어 내려가 마당을 지나고 출입구로 향하는 도중에 여주인장이 순무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면 여주인장은 식스테일을 한 마리 안고 있었다.
"어디 있었어?"
순무가 다급하게 물어보며 식스테일을 품에 받아든다. 나누는 재주 있게 왼쪽 눈썹만을 올리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한다. 재빨리 품에 안고 살펴보는 반응으로 보아선 순무의 포켓몬인 것 같다. 여주인장이 웃으면서 또 어딜 싸돌아다녔는지 지저분했는데 아까 말끔히 씻겼다고 하자 순무는 식스테일을 꽉 안는다. 식스테일은 반가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안겨 있었다.
"뭐 하는 애야?"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누가 묻자 순무가 나누 쪽으로 몸을 돌린다.
"내 포켓몬이야. 근데 너무 제멋대로인 애라서…… 항상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알아서 돌아오곤 해."
참 골치 아픈 포켓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스테일은 순무의 품에서 나누를 인식하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밥은 먹였어?"
"오자마자 밥부터 찾길래 벌써 먹였지."
순무의 물음에 여주인장이 대답했다. 이만 가보겠다고 한 뒤, 나누와 순무는 여관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용암마을 쪽으로 걸어간다. 식스테일은 돌아오자마자 밥을 먹고 씻은 뒤라 나른한지 안겨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무겁지 않냐 물어보니 웃으면서 무겁고 뜨끈하다고 한다. 당장 식스테일의 몬스터볼이 없으니 다시 돌아갈 때까지는 이러고 있어야 했다.
"어디부터 갈까?"
"생각해 봤는데, 급하게 필요한 건 없더라구. 이따 돌아가는 길에 담배나 사야겠어."
나누는 첫날이기에 우선 근처만 둘러보고 싶다고 한다. 순무는 관광객이 잔뜩 있는 상점가로 나누를 데려간다. 비가 살살 내리고 있지만 여름휴가를 맞아 놀러 온 관광객과 포켓몬이 거리 곳곳에 가득 차 있다. 나누는 순무의 뒤를 따라간 식당에 가서 끼니를 해결했다. 맛은 뭐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러고는 소박한 단맛으로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도 가 봤다.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진 곳이라 상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순무의 권유에 나누는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단맛이 강하지 않아 인기가 있다는 말에 결국 아무거나 골라 버린다. 맛은 역시나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관광객을 붙잡으려는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는 온천 여관들의 앞을 지나가지만 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걸어다니자 습한 날씨에 나누의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손목으로 이마를 슥 닦고는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물과 담배를 샀다. 순무와 물을 나눠 마시며 비에 젖어 풀냄새 가득한 길을 걷는다. 순무가 이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사당이 있다고 한다.
그때, 기운을 차린 식스테일이 답답한지 내려가려고 끙끙대자 순무는 허리를 숙이고 식스테일을 땅에 내려준다. 나누는 무심코 둥글고 각이 진 무릎에 눈길이 갔다. 식스테일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뒤를 따라 걷는다. 나누는 순무가 말한 사당으로 가기로 한다. 예로부터 윈디를 신의 사자로 모시는 사당은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입구 양쪽에 윈디의 형상을 한 석상이 고고한 자태로 서 있다. 오래된 목조 건물에는 규칙적인 무늬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지붕을 받치는 두꺼운 돌기둥에는 어떠한 주문 같아 보이는 문자들이 고전풍의 서체로 적혀져 있다.
사당은 기도를 올리러 온 사람들-주로 어르신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가디와 윈디를 모티브로 한 기념품을 구경하거나 밖에 설치된 운세 뽑기 가판대에 줄을 서 있다. 둘은 먼저 기념품을 구경하러 갔다. 용암마을에서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직접 만든 갖가지 상품들이 있었다. 가디를 동료로 삼고 있는 순무는 특히 더 눈을 빛냈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온 후, 운세 뽑기 가판대가 뭔지 궁금했기에 호기심에 그 줄에 선다. 순무는 식스테일이 사람들 발에 치일까 봐 다시 품에 안는다. 나누가 자기도 안아보자며 팔을 벌리지만 식스테일은 아직 나누가 낯선지 순무의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애교가 많은데 맨날 어딜 그리 돌아다니냐고 장난치듯 말하자 순무가 웃었다. 차례가 되자 순무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 식스테일을 땅에 내려 주었다. 둘은 각자 현금을 내고 고심해서 운세가 적힌 종잇조각을 뽑았다. 나누는 길이 나왔으나 순무는 흉이 나왔다. 얼빠진 순무를 본 나누가 낄낄거리며 그를 놀리는데, 갑자기 식스테일이 뛰어올라 순무가 들고 있던 종이를 물고 달아난다. 그러고는 작은 불덩이를 내뱉어 그것을 태워 버린다. 워낙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스테일이 네 흉을 없애준 거 아냐?"
나누의 말에 순무는 쪼그려 앉은 뒤 자신을 바라보는 식스테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누는 이런 건 그냥 재미로 보는 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 준다. 새해도 아닌데 뽑아봤자다. 나누도 길이 나온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서서히 비가 그치는 것 같았으나 사당에서 나오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나누와 순무는 화강암으로 포장된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를 피할 곳을 찾는다. 사람들도 저마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흩어진다. 결국 쫄딱 젖은 채 아무 건물 입구에 서서 비를 피한다. 순무가 안고 있던 식스테일을 내려두자 식스테일은 몸을 털며 빗물을 흩뜨린다. 일어선 순무는 문득 나누의 흰 살결이 비치는 것에 눈이 간다. 하얀 반팔 셔츠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빗물에 젖으니 몸에 딱 들러붙어서 그의 몸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순무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나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빗줄기가 얇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고 중얼댄다.
"어떡하지? 그냥 돌아갈까?"
갑자기 나누가 고개를 휙 돌리고 묻자 순무는 화들짝 놀란다. 동시에 나누도 젖어있는 순무를 바라본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칼 끝,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얼굴, 이유는 모르겠지만 놀란 표정. 늘 보던 모습과 달리 어딘가 처량해 보여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바라본다. 순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바로 돌아가자고 한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둘은 다시 길을 따라 걷는다. 식스테일은 순무의 발치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누는 꽤 즐거웠다. 여름 장맛비를 맞으며 순무와 돌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는 지금이 무척이나 행복하게 느껴진다. 순무는 나누의 몸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같이 한 방에 묵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몸은 본 적이 없어 더욱 신경 쓰였다.
길을 지나고 더욱 올라가서 본채의 출입구를 통과한 뒤, 마당을 지나쳐 별채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비 때문에 망했다며 함께 웃었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다. 순무가 방에서 식스테일의 몬스터볼을 찾는 동안 나누는 먼저 욕실에서 옷을 벗었다. 흰 셔츠는 비에 젖어 투명한 색에 가까웠고 회색 면바지도 진한 회색이 되어 버렸다. 벨트도 물을 먹었다. 단화는 비가 그치면 세탁해서 햇볕에 말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온통 젖어서 척척한 탓에 살이 시려웠다.
나누는 속옷만 입은 채 젖은 옷가지들을 손에 들고 방문을 열었다. 순무가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며 바로 고개를 돌린다. 나누는 같은 남자끼리 뭐 어떻냐고 농을 던진다. 그리고 옷장을 뒤져 새로운 속옷을 꺼냈다. 나누가 다시 샤워하러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순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왕 젖은 김에 온천탕에 가보자는 것이다. 나누는 좋다고 대답한 뒤, 우선 몸을 씻는 일부터 한다.
따뜻한 물에 빗물을 씻고 나서 얇고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허리띠를 묶었다. 각자 눅눅해진 옷들을 들고 함께 우산을 쓴 채 본채로 내려갔다. 세탁실의 직원용 바구니에 옷들을 넣은 뒤 주인장을 찾았다. 그는 탕비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스케줄을 적은 수첩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순무가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급히 돌아왔다고 하자 크게 웃는다. 온천을 이용하고 싶다는 순무의 부탁에 오늘은 평일에다 비가 와서 손님도 별로 없을 테니 좋다고 말해 준다.
둘은 탈의실로 간 뒤 옷을 묶고 있던 허리띠를 풀었다. 등을 지고 옷을 벗는 소리가 조용하고 좁은 공간에 크게 울렸다. 보관함에 옷을 개어 넣고 방향을 틀면 서로의 맨몸이 슬쩍 눈 끝에 들어온다. 나누는 순무를 보지 않기 위해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순무는 눈만 밑으로 내리깔아 바닥을 보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어쩐지 부끄러웠다.
나누는 저번에 순무와 온천탕에 들어가 있던 상상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잘못하면 열이 올라 몸에 위험할 수 있기에 뜨끈하게 데운 술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피로를 풀 생각으로 척척 걸어간다. 순무는 앞서가는 나누의 등을 보았다. 매끈한 흰 피부를 따라 내려가면 둥그런 둔부가 보였다. 순무가 쳐다보든 말든 나누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누야말로 순무의 맨몸을 볼 용기가 없어서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노천탕이 나타났다. 온천수가 튼튼밀크처럼 뿌연 색을 한 것이 꼭 따뜻해 보였다. 둘은 비를 맞으며 천천히 탕 안으로 발을 넣었다. 돌바닥에 앉으면 온천수의 색 때문에 목 아래로는 몸이 보이지 않게 된다. 나누는 저절로 나오는 콧김을 뿜으며 실로 오랜만인 온천탕을 맛본다. 마지막으로 호연에 놀러 온 게 언제였더라? 기나긴 노동 후에 맞이하는 따끈한 물에 바로 잠이 들 것만 같다. 나누는 양손으로 온천수를 떠서 세수하듯이 얼굴에 내리 떨어지는 빗물을 씻었다. 그래도 빗물을 맞는 것은 같았다. 순무도 절로 풀어지는 안면 근육에 눈을 감는다. 비록 먹구름이 껴 있지만 저 멀리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천의 증기와 안개가 함께 어우러진 것을 바라보는 신선놀음은 나름대로 절경이었다.
한동안 둘은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모른 채, 짧은 휴식을 취한 나누가 이만 나가자고 말한다. 아쉽지만 천천히 일어서서 미닫이문을 열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면 둘 다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웃겨서 서로 한바탕 웃고는 실내에 비치된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는다. 나누는 수려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종아리를 닦고는 허리를 편다. 그 순간, 등을 돌리고 있는 순무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흉터 자국들은 등에도 있었다. 다부진 어깨와 탄탄했던 허리, 그리고 유난히 튼실한 다리를 붉은 눈동자로 천천히 훑는다. 나누는 점점 느낌이 이상해져 와서 바로 눈을 돌려 버린다.
옷을 갖춰 입은 뒤 온천탕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복도를 걷는 도중, 나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순무의 등을 보며 느꼈던 것은 뭘까. 분명하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이윽고 순무의 두 손을 벽에 짚게 한 뒤 허리를 약간 숙이게 하고 날개뼈부터 천천히 손가락으로 맛보는 상상을 한다. 뇌에서 꼭 그러라고 시키는 것만 같아서 거부할 수 없게 된다. 머릿속에 멋대로 그런 장면이 떠오르자 나누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별채로 돌아가면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온천수 때문에 피부에서 철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났다. 나누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의 냄새를 킁킁 맡고 얼굴을 찌푸리자 순무가 피식 웃었다. 피부는 조금 매끄러워진 것 같다. 용암마을은 온천이 특히 유명하기 때문에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나누는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뒤 재떨이를 들고 별채 입구로 향했다. 내일도 둘은 휴일이었기에 정말 느긋하게 쉬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담배 필터에서 달달한 나무 열매와 구수한 향을 동시에 느끼며, 텔레비전이 없으니 날씨 예보를 알 수 없었기에 우산을 펴들고 재떨이도 비울 겸 본채로 향한다. 그곳엔 매일 신문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당에 놓인 철제 쓰레기통에 꽁초들과 재를 털어낸 뒤 본채로 들어갔다. 나누가 첫날에 만났던 카운터의 직원이 농담으로 오랜만에 본다며 카운터에서 그를 맞이했다. 나누는 웃으며 인사한 뒤에 오늘자 신문을 펼쳐 날씨를 확인한다. 다행히 비는 내일 안에 그친다고 되어 있었다.
"나누 씨 소문이 자자해."
"네?"
직원의 말에 나누는 신문에서 고개를 돌려 그쪽으로 쳐다보았다. 또 순무네 어머니가 이상한 얘길 하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일 잘하지, 성실하지, 똑똑하지. 관동에서 왔다며? 관동 사람이라 그런가."
"그럴 리가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멋쩍은 미소를 짓고 신문을 접었다.
"무엇보다 순무가 활기차서 다행이야."
구미가 당기는 말에 나누는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별 건 아니구, 여기서 일하기 싫다고 한 적이 있었거든. 그랬더니 사장님이 화를 내갖구."
나누는 주인장의 말이 떠올랐다. 밝은 성격이긴 했지만 나누가 오기 전에는 잘 웃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 후부터는 말도 안 하는 거야."
"그게 언제쯤이었나요?"
애써 침착하게 물어봤다. 몇 달 전-즉 올해 초쯤이라고 대답한다. 혹시나 순무가 일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기 위해 직원 모집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을 재며 순무 또래인 사람을 채용해 함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순무도 차츰 일에 재미를 붙일 거고……. 거기까지 생각하게 되자 나누는 갑자기 냉정함을 되찾게 된다.
"가업이 있으면 가업을 잇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일했는데 순무는 애가 아직 세상을 몰라."
직원의 말에 나누는 잠깐 화가 치밀었으나 괜한 말싸움을 일으키기 싫어서 속으로만 화를 삼켰다.
"그렇죠. 날씨 확인도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나누는 그 말을 하고 바로 등을 돌려 재떨이와 우산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본채에서 나갔다. 미닫이문을 닫자마자 작은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마당을 지나 별채를 오르는 길은 또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화가 가슴까지 차오른 나누는 우산도 거칠게 놔두고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순무가 나누를 맞이한다. 순무는 좌식 책상에서 포켓몬을 돌보는 법에 관한 책을 읽는 중이었다. 나누가 홧김에 재떨이를 휙 던지자 벽에 부딪힌 재떨이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순무는 나누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뜬다. 뭐라 물어볼 틈도 없이, 나누는 그대로 순무에게 걸어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순무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나누는 두 팔을 들어 순무를 품에 안았다. 아, 너무 뜨겁다.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놀란 순무는 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나누의 포옹을 받는다. 나누는 이 충동을 죽일 방법과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도 들었고 품에서 놓고 싶지 않다는 욕망도 생겼다.
나누의 순수한 애정이 독점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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