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누는 당황한 것을 감추기 위해 일어서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비가 와서 창문을 열지 못하자 재떨이를 손에 들고 별채 입구로 향한다. 고무 재질의 슬리퍼를 신고 입구에 서서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어둠에 잠긴 채 비를 맞는 용암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되자 나누는 아까 들었던 순무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통쾌함을 호소하던 목소리. 그것이 어쩐지 색정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 탄탄한 허리를 기억해낸다.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꾹꾹 누르던 감촉. 나누는 자신의 손바닥을 지그시 바라보다 연기를 내뿜었다.
얼마간 순무에 대해 생각하며 담배를 다 피우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에 꽁초를 올려둔 채 방으로 돌아간다. 순무는 나누의 교재를 보고 있었다.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며 웃는다.
"벼슬아치 되기가 쉬운 건 아니니까."
나누는 재떨이를 창문 아래 방바닥에 놔두고 자리에 앉았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보통 일 끝나고 자기 전까지 뭐해? 텔레비전도 없는데."
"음…… 혼자 훈련한 것에 대해 기록을 쓰고 다시 나가서 훈련했어."
요즘은 바빠서 그냥 쉬는 중이지만, 하고 덧붙인다. 나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모든 트레이너가 너처럼 수련하면 좋겠네."
그 말에 순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나누는 그 찬란한 미소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책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너 눈이 예쁜 것 같아."
그만! 이라고 속으로 외친 나누는 잽싸게 고개를 들고 순무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나누의 눈은 눈꺼풀이 처져서 나른한 인상을 주는 데다 눈동자는 탁한 붉은색을 하고 있다.
"……전혀 아닌데."
"빛에 비치면 보석 같아."
순진한 감상평에 나누는 입을 닫는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부모나 친구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혹자는 이 탁한 붉은색이 불길하다고도 했다. 흐리멍덩한 얼굴에 힘 좀 주라고 나무라기도 했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부모 아래서 자란 나누는 그런 시적인 칭찬이 익숙지 않았다. 쑥스러워져서 순무에게 네가 내 엄마냐, 그런 소릴 하게, 하고 말해 버렸다. 순무는 생글거리며 웃었고 민망해진 나누는 입을 꾹 다문다. 나누도 칭찬 한마디 해야 될 것 같아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다. 그러니까, 꿋꿋한 그 열정과 웃으면 귀여워지는 얼굴과 튼실한 다리와 탄탄한 허리…….
"넌 참 귀여워."
그 모든 것이 종합되어 한 마디를 똑 짜낸 것이 이 모양이다. 아차, 하고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순무의 표정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고 볼 수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 간지럽지도 않은데 뒤통수만 벅벅 긁는다. 살짝 눈을 흘기면 순무는 같은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처음이라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 고마워."
순무는 웃음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나누는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어져서 장난스레 역시 촌사람이라 하는 짓이 순진해서 귀여울 뿐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 농담은 순무에게 통하지 않았다. 순무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져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누는 미칠 지경이었다. 왜 순무가 얼굴을 붉히는지도 모르겠으며 무슨 말을 해야 이 분위기가 깨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순무가 그것을 해결했다.
"귀엽다는 말, 어릴 때 이후로 못 들어봐서 잠깐 부끄러웠어."
"그래…… 다 큰 사내놈이 뭐가 귀여워."
나누는 어색하게 하하, 웃고는 이만 다시 공부할게, 하고 고개를 책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누는 당황으로 인해 자신의 얼굴이 벌게진 것과 순무가 그것을 보고 있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밤에 나누와 순무는 처음으로 마주 보며 잠들었다. 순무가 저번에 들었던 음악을 듣고 싶다기에 나누는 그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포켓탭에 테이프를 넣고 사이좋게 이어폰을 하나씩 나눴다. 여름밤의 빗소리와 잔잔한 음악 소리에 휘감긴 둘은 말없이 천장을 보며 똑바로 누워 있었다. 순무가 먼저 나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것을 의식한 나누는 할 말이 있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순무가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누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해 절대 눈동자를 쳐다보지 않기로 한다. 그저 눈을 둘 곳이 없어서 순무의 눈썹 모양이나 얼굴 형태를 관찰한다.
뭘까, 이 감정. 가슴속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순무이기에, 순무라서 이런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자신을 말로써 압박해 달라는 저돌적인 면이나, 무표정일 땐 예리하지만 웃으면 귀여워지는 미소나, 무슨 일이든 팔 걷어붙이고 해 보려는 열정, 순수한 호의. 나누에게는 없는 부분들이다. 조금만 신경에 거슬리면 도망치고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사회에 적응한 척하던 나누는 그런 순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부지런히 일하며 명석한 머리로 이런저런 제안도 해 보고 순무를 신경 써 주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너에 의해 변하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게 된 나누는 복잡한 머리를 쉬게 하기 위해서 먼저 눈을 감아버린다.
다음 날 아침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자 오늘은 포켓몬 배틀을 하지 않기로 한다. 비가 와서 온통 눅눅했다. 나누는 어젯밤처럼 재떨이와 담배를 챙겨 갖고 별채 입구에 서서 담배를 태웠다. 일할 준비를 마친 둘은 우산 하나를 같이 쓰며 본채로 걸어갔다. 내일은 휴일이므로 마을로 나가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사 볼 생각이다. 순무에게 길을 알려 달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비가 오자 손님들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객실에만 머물렀다. 몇몇은 마당에 나와 못을 들여다보며 잉어킹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누와 순무는 습한 공기에 땀을 흘리면서도 부지런히 점심 식사 준비를 돕고 쓰레기도 정리하고 간식도 얻어먹었다.
별 탈 없이 하루가 가는 것 같았으나 쓰레기장에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갔다 온 순무가 좋지 못한 표정을 하고 나누를 찾았다. 나누는 설거지를 막 끝낸 참이었고,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자 가슴속이 덜컥했다. 마당으로 이어지는 부엌 뒷문을 열고 나와 그쪽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아까 마당에 나와 잉어킹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손님 중 한 명이 몬스터볼로 잉어킹을 하나 잡아간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순무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누는 먼저 순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네가 목격자니까 괜찮다고 달래 주었다.
그러고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에 주인장을 불러 부엌의 뒷문으로 이끌었다. 주인장은 이야기를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사람이 온천물 먹은 잉어킹은 어떻냐고 물어봤기에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해 왔다. 그러다 어수선한 식사 시간을 틈 타 결국 하나를 잡아가다니, 나누는 엄연한 절도죄니까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편히 쉬러 오는 곳에 이런 소동을 벌이는 것도 좋지 않다는 의견이 나오자 나누는 답답해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며 열을 올렸다. 그랬다가도 스스로가 격앙되어가는 것에 당황한다.
결국 주인장은 그 손님을 찾아가 사실을 확인했다. 나누와 순무는 본채 건물 밖에서 주인장을 기다렸고, 그동안 나누는 계속 순무를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큰 고함이 오가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여주인장이 순무를 찾으며 본채 밖으로 나왔다. 이제 괜찮으니 불안해하지 말라며 아들을 품에 안아 주었다. 나누는 불안에 떠는 순무를 처음 보고는 자신도 긴장되어 배가 쿡쿡 쑤셨다. 아무도 몰래 심호흡을 몇 번 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끝내 잉어킹은 무사히 마당의 못으로 돌아왔으나 순무의 미소는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맨방바닥에 드러누워 벽만 쳐다보고 있자 보다 못한 나누가 주인장과 여주인장을 데리고 왔다. 나누는 자리를 피해 담배와 재떨이를 들고나와 별채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말 뭐 같은 기분이다. 담배를 다 피운 뒤 돌아가면 좀 나아진 건지 자리에 앉은 순무가 나누를 보았다. 주인장 내외는 일어서서 잠깐만, 하고 나누에게 손짓을 했다. 셋은 별채 입구로 향한다.
"순무가 이런 일이 처음이라 겁을 많이 먹은 것 같네. 우리가 달래긴 했는데 계속 저러면 얘기해 줘."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말할게요."
"순무가 딸이었으면 나누 씨 사위 삼았을 텐데."
"또 그런 소릴."
갑자기 톡 튀어나온 여주인장의 말에 나누는 눈을 크게 떴다. 주인장은 당황해하며 부인을 나무랐다. 여주인장은 뭐 어때서,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또'라고 하는 걸 보아하니 둘이서 그런 얘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주인장은 허튼소리 해서 미안, 하고 사과했다. 나누는 달리 할 말이 없어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러고 싶네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아무튼, 다시 부탁할게. 나는 우리 순무가 나누 씨처럼 당당하게 행동했으면 좋겠거든."
문득 주인장이 마당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나누 씨랑 얘기 많이 하다 보면 배우는 게 있겠지. 나누가 오기 전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으니 이런 걸 두고 한 말이었나 싶다. 주인장과 여주인장이 부탁해, 하고는 본채로 사라졌다. 별채로 들어간 나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문을 열었다. 순무가 나누를 보았다. 불안함은 지워지고 어느 정도 진정된 얼굴이었다. 나누는 순무의 옆에 털썩 앉았다.
"괜찮아?"
"너무 놀랐어. 시간 지나니까 괜찮아지네."
순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누는 참 별별 사람 다 있다고 일부러 화를 내며 말해 보았다. 그래도 평소처럼 웃지 않자 나누는 엉덩이를 들어 순무에게 더 바싹 다가간다. 그러고는 억지로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뉘었다.
"잠깐 이러면 괜찮을 거야."
나누는 닫혀 있는 큰 창을 통해 아직 비 내리는 바깥을 보았다. 내일은 휴일이지, 참. 마을에서 볼일을 보고 와서 하루 종일 공부나 해야겠다. 그런 잡생각을 하던 나누는 순무가 잠이라도 들었나 싶어 살짝 눈을 깔았으나 아직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보았다. 좀 더 진정될 때까지 그대로 있기로 한다.
갑자기 순무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나누뿐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파렴치한 행동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모든 사람이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현실에 상처를 입은 순무. 늘 밝게 웃던 순무가 방바닥에 들러붙을 정도로 독이 침범했을 때, 그 독을 희석할 수 있는 것은 나누였다. 굳이 순무의 성장을 위해 독설을 하지 않아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외부에서 받은 상처를 아물도록 해 주는 것 또한 어리숙한 순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인 셈이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순무가 피곤함에 잠긴 목소리로 어깨 아프지,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누는 괜찮냐고 다시 물었고 순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차례로 샤워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이불을 깔고, 나누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포켓탭을 꺼내 순무와 음악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마주 보며 누워 있었는데 어쩐지 어제보다 거리가 더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 나누는 순무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눈은 나누의 가슴속을 후벼팠다. 이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졌다. 겨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붙어 있다 보니 이젠 곁에 없으면 이상할 정도다. 적어도 나누는 그랬다. 순무도 같은 마음일까.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나누는 순무의 아픔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친구인 것이다.
그러고 있다가 졸린 건지 순무가 먼저 말없이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나누는 잠이 오지 않아 계속 음악을 들으며 순무의 얼굴을 바라본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순무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잘 보이게 되었다. 나누는 천천히 손을 올린다. 그 손은 부드럽고 얇은 여름 이불을 지나 시야에 들어올 만큼 올라왔다. 그 손은 점점 뻗어진다. 그 손은 맞은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떨어진다.
다음날엔 순무가 먼저 눈을 떴다. 나누가 깨지 않도록 슬그머니 일어나 세수와 면도를 했다. 오늘은 둘 다 휴일이기에 느긋하게 쉴 생각을 한다. 순무는 나누와 자신이 입었던 유니폼을 손에 들고, 본채의 세탁실에 갖다 두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 문득 나누의 까만 단화가 눈에 들어왔다. 여관에 온 날 이후로 신지 않게 된 그것은 얌전하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별안간 그쪽으로 눈이 가서 한 번 신어 보고는 자기 발보다 한 사이즈 정도 큰 신발에 크네…… 하고 중얼거린다. 순무는 똑같이 생긴 두 켤레의 슬리퍼도 번갈아 보며 크기를 비교해 본다. 대충 보면 사이즈가 같아 보이는데 나누의 것이 조금 더 크다.
슬리퍼를 신고는 맞을 정도로만 비가 오기에 그냥 맞으면서 본채를 향해 길을 내려간다. 순무는 옷가지에 코를 갖다 대 본다. 매일 둘 다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기에 그리 지독한 냄새라곤 나지 않는다. 그래도 땀을 흡수했으니 빨래를 해야 했다.
본채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순무를 불러 세웠고 이젠 괜찮은지를 묻는다. 어제 그 손님이 오늘 아침 부리나케 체크아웃하고 떠났다고 하자 순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는 목에 걸친 하얀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오늘 나누 씨랑 마을로 나갈 거지? 간 김에 좋은 곳 좀 소개해 줘. 재밌어할지 모르겠지만."
순무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즐거운 마음으로 세탁실로 향했다. 나누와 용암마을 어디를 갈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용암마을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나 가족들이 주 고객이라 나누가 재미없어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순무는 관동에 가 보고 싶어졌다. 나누가 살아온 곳의 발자취를 쫓아 나누의 추억을 들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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