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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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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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는 나누가 변명하기도 전에 잽싸게 방을 나가 버렸다. 나누는 그 뒤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째서 말주변도 없는 자신이 그런 잔인한 말을 위로라고 꺼낸 건지 도통 이해되지 않아서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창문을 열어 담배만 두 개비를 태웠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절로 욕이 나오며 한숨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오해해 버린 순무도 원망스러웠다.

일할 시간이 되어 본채로 간 나누에게 눈길도 말 한마디도 주지 않고, 순무는 묵묵히 일만 했다. 나누도 머쓱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만 했다. 그러자 이틀 동안 좋았던 둘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에 대해 순무의 부모는 그것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자기들끼리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갈등이 빚어지면 참견해 볼 요량이다.

생각보다 빨리 일이 해결된 것은 당일이었다.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밥그릇만 보며 밥을 먹은 둘은 방으로 돌아가 또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나누는 슬슬 사과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가 좋을지 몰라 눈치만 살핀다. 나누가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서 공부를 하는데, 마찬가지로 샤워를 마친 순무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나누의 앞에 풀썩 앉는다. 대충 걸친 탓에 얇은 천으로 된 옷 사이가 벌어져 순무의 허연 가슴께가 보이자 나누는 눈을 돌렸다.

"낮엔 내가 미안했어."

나누가 할 말인데 순무의 입에서 나오자 나누는 눈을 크게 뜬다. 순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 말이 맞는데 나는 그게 싫어서……."

이때다. 나누의 머리가 그렇게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차마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순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손댈 수 없다는 자제력이 휘몰아치며 나누를 진정시킨다.

"아냐, 내가 잘못했어. 널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망쳐 버렸네."

나누는 대신 자신의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네가 못 들은 뒷말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그렇게 덧붙이면 고개를 든 순무가 휙휙 고개를 가로젓는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에 나누는 그 얼굴을 품에 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현실을 지적당해서 화난 내가 실망스러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순무의 말에 나누는 입을 닫는다.

"저기……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말해도 괜찮아."

"그러면 너는 꿈을 짓밟힐 수밖에 없잖아."

"그건 아니야. 난 나를 좀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어."

순무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순무가 해이해지지 않도록 나누가 일깨워 달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그토록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순무가 존경스럽다. 어서 빨리 자극받아서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하고 싶겠지. 나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럴 수 없어. 네게 나쁜 말을 한 건 오늘로 족해."

나누가 눈썹에 힘을 주며 말하자 순무는 코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누에게는 그 행동이 마치 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 같이 보였다. 나누는 울고 싶으면 맘껏 울라고 자신의 팔을 내어 주고 싶었다. 등을 두드리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상처가 쌓이면 독이 될 것 같아서야."

나누는 너를 위한 거라며 위로해 본다.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너뿐일 거야."

어느새 의지가 가득 담긴 순무의 눈빛에 나누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나 강하다. 상처받아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설 방법을 알고 있다. 나누는 새삼 순무의 부모가 부러워진다. 자신의 부모는 그저 공무원에다 평범한 회사원이라 꽉 막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면은 자신의 부모와 똑같았다.

한참 동안 나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순무는 나누를 보고 있었다. 결국 순무의 열정에 진 나누는 한숨을 내쉬었다. 순무를 밀어서 떨어뜨렸다가 다시 올라올 수 있게 손을 내려 줄 수 있는 건 그래, 순무의 말대로 나누밖에 없다. 순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나누뿐이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한 성격이 아니라서 오늘처럼 네게 못 할 말을 할 수도 있어. 네가 다 감당하겠다면, 네가 날 견딜 수 있다면 나도 너에게 맞춰 줄게."

"괜찮아."

바로 나온 대답에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나누는 또 창틀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먼저 잠이 든 순무의 둥그런 뒤통수를 보며 어째선지 책임감이 생겼다. 아마 순무가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순무는 나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도시에서 속 편히 자라온 아이? 곧 떠날 친구? 그런 것치곤 순무가 나누에게 많은 정을 주고 있고 너무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누는 마지막 연기를 내뱉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머리를 긁으며 고민에 빠진다. 앞으로도 순무는 그의 충성스러운 가디처럼 나누를 바라볼 것이다. 그런 순무에게 모진 말을 함부로 있을까? 그러고선 아무렇지 않게 위로할 수 있을까?

나누는 저답지 않아진 성격에 살짝 눈썹을 찌푸린다. 왜지, 왜 순무를 마주 볼 때면 본래 성격이 죽는 걸까. 남의 호의를 거부하고 멸시하는 속마음을 감추며 살아온 나누는 평생 지을 미소를 여기서 다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순무가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다 보니 영향을 받는 걸지도 모른다. 활짝 웃을 땐 그래, 귀여워 보이는 것 같다. 뭐든 열심히 하기에 나누도 맞춰서 따라가려 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밝은 달이 눈에 들어온다. 어두울 때만 나타나는 달이 자신이라면 순무는 태양일까. 모든 빛을 나누어 주는 태양과 태양의 빛이 있어야 보이는 달은 이질적인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그 둘이 없으면 둘의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밤이라 감성적이게 된 자신을 비웃으며 나누는 슬슬 창틀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도 나누와 순무는 사이좋게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는 순무에게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네면 순무도 인사를 한다. 순서대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제처럼 뒷길을 올라 포켓몬 배틀을 벌인다. 여름 아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땀을 식힌다. 이곳의 장점은 본채와 떨어져 있기에 소리를 마구 질러도 되는 점이었다. 아침부터 나누는 저도 모르게 격앙되어 가디를 몰아붙였고 아차 하는 순간에는 가디가 비틀대고 있었다. 이만하자, 하고서 잔뜩 흥분한 깜까미를 진정시키기 위해 몬스터볼에 넣는다.

"나중에 센터에 데려갈까?"

나누의 제안에 순무도 고개를 끄덕이고 가디를 볼에 넣었다. 양산을 쓰고 길을 내려가다가 순무가 너 샌님인 줄 알았는데 좀 하네, 라는 말을 해서 크게 웃는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말을 쓰는 애는 처음 봤다고 놀리자 순무가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며 열을 냈다. 티격태격 대며 본채의 부엌으로 가서 일을 돕던 도중, 주인장이 나누를 살짝 불러낸다. 그는 혹시 순무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나누는 얌전한 얼굴로 그럴 일 없을 거라며 주인장을 안심시킨다. 정말 그럴 것이다. 갈등의 파도를 지나 잠잠해지자 순무와 하루 종일 붙어 지내는 것이 참 즐겁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순무와 용암마을로 내려가서 포켓몬 센터로 향했다. 순무는 꽤 오랜만에 나가는 것이라며 신명 나게 말했다. 바쁜 시기이다 보니 줄곧 여관에만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가디를 치료하고 하는 김에 깜까미도 치료해 주었다. 그러고는 간식을 한 봉지 사서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깜까미와 가디에게 나눠 주었다. 깜까미도 가디도 서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뒤에서 장난을 치며 따라온다. 그 모습을 보고 둘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나누는 처음 이곳에 왔던 때가 떠오른다. 불과 나흘 전이지만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순무가 없었다면, 하는 생각까지 해 본다. 아니, 순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지내며 일을 했다면, 하고 생각을 고친다. 그리 착하지 않은 성격이기에 상대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아들이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뭐든 혼자 척척 해내 온 나누는 남과 부대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그런 성격인지라 남에게서 뭘 받는 것도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옆에 있는 순무는 달랐다. 나누의 말에 상처받았다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 오는 점에선 충분히 재밌었다. 어떤 점이 재밌었냐면, 가시 돋친 말을 오히려 도약으로 삼아 더욱 매질을 해 달라고 부탁한 점, 상처받아도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나누뿐이라고 말한 점, 이상하게 그런 순무에게 책임감 같은 것을 느낀 점이 그러했다. 나누는 순무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자신은 약 이 주 후면 떠나는 몸이지만 정말로 친구가 필요했는지 순무는 온갖 정을 쏟아 주고 있었다. 게다가 나누도 순무의 사정을 이해하며 함께 어울려 주고 있었다. 남이 보면 이런 우정이 또 어딨겠냐 싶을 정도다.

숲길을 지나 본채로 바로 돌아가 일할 채비를 갖춘다.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그에 따른 준비를 한다. 비가 들어오면 골치 아프니 열려 있는 창문이 없는지 살펴보고 본채 안에 있는 화분들이 비를 맞을 수 있도록 마당에 내놓았다.

"비가 많이 오겠네."

꾸물거리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나누가 휴식을 취할 겸 마당 구석에 놓인 철제 쓰레기통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 주인장이 옆에 와서 한마디 했다. 나누는 왜인지 머쓱해져서 그렇네요, 라는 말만 하고 만다. 그는 나누가 아들과 나이가 같아 어느 순간부터 말을 낮추고 있었다.

"나누 씨는 형제 있어?"

"예? 아뇨. 저 혼자에요."

그 말에 주인장은 버릇이 든 동작으로 박수를 한 번 친다. 그래서 그런가, 하는 혼잣말이 들린다.

"왜 그러세요?"

"아니, 순무 말이야. 나누 씨가 온 뒤부터 엄청 밝아졌거든. 둘 다 외동이라 통하는 게 있나 싶어서."

"그전엔 안 그랬어요? 엄청 잘 웃던데."

"원래 밝은 성격은 맞는데, 지금처럼 많이 웃지는 않았어."

나누는 순무의 속 사정을 떠올린다. 트레이너로 진출하고 싶지만 가업 때문에 막혀버린 꿈. 나누는 씁쓸한 마음으로 다 피운 담배를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순무가 제게 잘해 주니 저도 잘해 줘서 그런 거겠죠."

웃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만 예의상 댁네 자식 교육 잘 받았다는 미소를 지으면 주인장도 흡족해한다.

"혹시 관동으로 돌아가도…… 순무랑 계속 친하게 지내줄 수 있어?"

역시나,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군. 나누는 여전히 듬직한 표정을 짓고서 당연히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고마워. 실은 순무가 너무 어리숙해서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걱정이었거든. 나누 씨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누 씨랑 얘기 많이 하다 보면 배우는 게 있겠지."

그리곤 저 뒤에서 주인장을 찾는 목소리에 그는 본채로 사라진다. 순무가 나누에게서 무얼 배우길 바라는 걸까. 그냥 머쓱해져서 나온 빈말이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졌다. 나누와 순무는 방의 창문을 닫고 쉬고 있었다. 빗방울이 투둑투둑 창문을 치고 가는 소리와 에어컨 바람이 도는 실내에 약간 쌀쌀해진다. 나누는 낮에 무거운 걸 옮겼더니 어깨가 아파서 주먹을 쥐고 아픈 부위를 탁탁 두드렸다. 좌식 책상에 앉아서 훈련 일지를 쓰던 순무가 그 소리에 일어서서 나누에게 다가온다.

"안마해 줄까?"

"뭐? 아니, 됐어."

"여기로 와 봐."

막무가내로 나누의 팔을 이끌어 앞으로 기어 나오게 하자 기운이 없던 나누는 쉽게 끌려가 버린다. 순무는 나누의 뒤에 앉아 삼각근을 살살 주물러 준다. 생각보다 손아귀에 힘이 있었기에 어깨 통증이 짜릿한 시원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어깨 안마를 해 준 뒤에는 엄지로 등을 누르며 압박한다. 순무가 넌 평소에 새우등을 하고 다니니 허리를 쫙 펴야 한다고 잔소리한다. 등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나누는 시원하다고 대답한다. 상체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됐다고 한 뒤에 나누도 보답으로 순무의 어깨를 매만져준다. 오랫동안 일을 해 온 탓인지 많이 뭉쳐 있어서 순무가 고통에 찬 소리를 낸다. 어느 정도 어깨 근육을 풀어 주고 순무를 엎드리게 한 뒤 그 위에 올라타서 양손으로 허리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해 준다. 가끔 허리가 아픈 아버지에게 이렇게 해 주곤 했다.

아픈 건지 시원한 건지, 순무가 앓는 소리를 내자 나누는 그 소리가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려 위화감을 느낀다. 더는 하면 안 될 것 같아 급히 마무리 짓고 끝낸다. 자신이 이렇게나 한심했는지 생각해 본다. 순무는 그것도 모르고 고맙다고 한 뒤에 책상으로 돌아가 훈련 일지를 마저 작성한다. 나누는 당황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그냥 평범하게 시원한 느낌에서 나오는 소리인데 어째서 그렇게 들렸을까 싶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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