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음날, 나누는 여전히 피곤했지만 그래도 일찍 일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자 옆에 누워 있던 순무도 일어나 앉는다.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났냐 묻길래 나누는 이유를 둘러대기 위해 턱을 매만진다. 어제 자기 전, 순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록 이틀이 지났지만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순무를 생각하는 마음이 변한 것 같았다. 처음엔 그저 어리숙한 동생뻘인 줄 알았으나 실은 나이도 같았고, 순무는 남 몰래 꿈을 이루지 못한 아픔도 떠안고 있었다. 나누는 꿈을 위해 달려가는 중이지만 순무는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중인 것이다.
어른들의 주변을 맴돌며 그들의 지시대로만 움직여 살아왔을 순무를 생각하니 동정심이 생겨 정말로 잘해 주고 싶어졌다. 그런 순무를 위해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함께 어울려도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호연을 떠난 뒤에도 연락이나 주고받는 좋은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솟았다. 게다가 나이도 같고 일도 같이 하다 보니 둘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리하여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은 순무의 아침 훈련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훈련 일지를 몇 권이나 작성한 순무의 실력도 그의 포켓몬도 한 번 보고 싶었다. 나누는 한참 동안 밖에 나오지 못한 자신의 포켓몬을 떠올리며 자신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순무보다 약간 더 빨리 일어난 것이 그 이유다.
나누는 이 긴 과정을 생략하고 입을 연다.
"혼자 배틀하면 외롭지 않을까 해서."
무표정을 치장한 나누와 달리 순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떨며 얼굴 한가득 기쁨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고는 빨리 준비하겠다며 부랴부랴 씻을 준비를 한다. 나누는 창가에 두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손에 들었다가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길래 흡연을 참기로 한다. 창문에 가림막을 쳐서 햇빛을 차단하고 순무가 돌아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잠시 후, 땀에 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벌씩 갈아입는 유니폼을 새로 또 꺼내 입고 허리띠로 옷을 졸라맨 뒤 순무를 따라서 방을 나선다. 나누도 오랜만에 가방에서 몬스터볼을 챙기며 씩씩하게 나섰다.
순무와 나누는 본채로 향하는 아랫길이 아닌, 별채 뒤쪽의 숲속으로 올라가며 양산을 함께 나눠쓰고는 잡담을 한다. 키가 조금 더 큰 나누가 양산을 들고 순무와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순무는 나누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나누가 먼저 다가오니 기쁜 건지 부끄럽지만 잘 부탁한다고 말해왔다.
도착한 곳은 벌판이었다. 평소에 순무 혼자 훈련하는 곳이라 그런지 땅이 여기저기 울퉁불퉁 고르지 못했고 나무들은 불에 그슬린 흔적들이 있었다. 주변을 한 번 슥 둘러본 나누와 순무는 거리를 두며 멀어져 간다. 햇빛을 받은 두 검은 머리카락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시간 없으니까 짧게 하자."
"좋아."
둘은 몬스터볼을 허공에 던진다. 나누의 포켓몬은 깜까미였고 순무의 포켓몬은 가디였다. 기세등등한 가디를 보자 순무와 어울린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누의 깜까미는 어릴 적 호연에 놀러 왔을 때 잡은 것이었다.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예측하기 힘든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여곡절 끝에 잡긴 했으나 한밤중에 혼자 돌아다닌 것에 대해선 부모에게 혼이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제공격을 퍼붓는다. 깜까미도 오랜만의 배틀에 신이 나서 저 답지 않게 빠른 몸놀림으로 가디의 공격을 피해 빈틈 사이로 공격을 넣고 있다. 나누는 겉보기엔 배틀에 썩 흥미를 갖지 않는 얼굴이지만 모의 배틀이라도 한 번 붙으면 붉은 눈동자 속에 숨은 예리함이 번쩍이곤 했다. 그런 점은 그의 깜까미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공격과 방어가 오가며 서로의 체력을 깎아내렸고, 둘 다 점점 오르는 열정에 지칠 줄 몰랐으나 열기와 공기가 만나자 급격히 더워진다. 일단 무승부를 짓기로 하며 포켓몬들을 몬스터볼에서 쉬게 한다.
"아침부터 땀이나 진탕 뺐네."
나누가 더위에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다시 씻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근무 시간에 늦진 않았을지 걱정을 하면서 다시 양산을 펼치고 길을 따라 본채로 내려간다. 순무는 나누의 깜까미에 대해 칭찬을 하고 나누도 순무의 실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해준다. 배틀 전문 트레이너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포켓몬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나누라도 알 만큼 순발력과 위기 대처 능력이 훌륭했다. 순무가 이런 산골 여관에 갇혀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렇게 말하자 표정이 굳는다.
"정 안 되면 관동으로 도망 와. 내가 있으니까."
농담조로 말하자 순무가 웃었다. 그리고는 본채에서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찬물로 목을 축인 뒤에 바로 일을 시작한다.
나누는 순무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한다. 어제처럼 나눠낀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옆에 앉아 있는 순무의 몸짓이 신경 쓰였다. 눈치 좋은 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결국 나누는 곁에서 꼼지락대는 순무가 신경 쓰여 책을 탁 덮는다. 그리고 기기를 잠시 일시 정지시킨다.
"무슨 할 말 있어? 아까부터 가만있질 못하네."
나누가 화났다고 생각했는지 순무가 연신 사과한다. 딱히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신경 쓰였다고 대답한다.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물어보고 싶은데 방해될까 봐 참고 있었어."
그 말에 나누는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러나 그의 쑥스러워하는 표정과 몸짓이 나누를 부추긴다.
"어떤 걸?"
순무는 길게 길러 삐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검지로 어루만지며 말한다.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뭐야?"
예상도 못 한 질문에 나누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고 보니 왜 그랬더라. 어느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기에 무작정 그 길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 목적을 이룬다면? 그냥 요직에 몸담은 채 여생을 보내게 될까? 나누는 순무처럼 거창한 꿈이 없다. 경찰관이 되면 주어지는 일을 처리하고 그 자리에 안주할 것이다. 하지만 순무는 호연 리그를 제패하는 걸로 끝이 아닐 것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강한 자들과 맞붙고 싶어 할 것이다.
문득 나누는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데에 영향을 준 부모님 생각이 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모두 잔소리를 했는데, 어머니는 네가 선택한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투로 말했었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해 봤더니 슬슬 너도 자립할 연습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 했었다. 서로 말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궁금해?"
대답처럼 순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쓸어 올린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나누는 순무에게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뒤에 입을 뗐다.
"난 사실 꿈이 없어.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그냥 나도 장래 희망에 공무원을 써내곤 했거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서 편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학창 시절 내내 그랬더니 어느새 이게 진짜 꿈이 된 것 같아."
나누는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본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벽시계의 시침들이 돌아가는 모습뿐이다.
"딱히 스스로 결정해서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말을 마친 나누가 고개를 돌려 순무를 보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나누는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가 보기에 나누 너는 완벽해 보이는데…… 그런데 꿈이 있어도 진짜 바라는 꿈이 아닌 게……."
"……안타까워?"
그렇게 묻자 순무는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위로해 주고 싶어진다. 왜인지 그런 충동이 들었다.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이젠 이 길 말곤 달리 갈 길이 없다고 말하고 안심시켜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순무 입장에서 보면 퍽이나 배부른 소리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가업 때문에 청춘이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만끽하지 못하는 순무가 행여나 나누에게 열등감 같은 걸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그런다면 나누는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궂은 상황에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는 그 강한 정신력을 유지하길 바란다.
그래서 순무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누보다 순무가 더 나은 게 있다면? 난 오히려 순무 네가 더 안타까워. 넌 여기서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잖아. 하지만…… 하지만 넌 나와는 다르게 정말로 바라는 꿈이…….
"난 네가 오히려 안타까워."
나누는 하려던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넌 여기서 계속 이러고 살아야 할 거잖아."
정말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위로 같은 건 하지 말 걸, 하고 생각했다. 순무가 그 말을 듣더니 눈썹을 꿈틀대며 깊게 상처받았다는 걸 표현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나누가 한 마디 더 얹어버린 셈이었다. 순무는 뒷말도 듣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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