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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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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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나누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인 것처럼 방에 있던 밥상을 펴놓고서 연필을 굴리며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누가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쳐다봐서인지 순무는 깜짝 놀라버린다. 아직 다른 사람이 방에 있는 것이 낯선 모양이다. 그러고는 무슨 책을 읽냐고 물으며 이불 위에 털썩 앉는다.

"사실 비밀인데 한 달 뒤에 시험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았으니 자신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호연까지 왔다고 설명하자 순무는 눈썹을 올리고 흥미로워 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시험인지는 말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순무에게 다짐을 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순무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다. 나누가 잘 거면 방의 불을 꺼 주겠다고 하자 괜찮다고 대답한다. 순무는 왼손을 올려 이마를 짚는다.

"나누 씨가 갑자기 대단해 보여요."

"제가 선택한 길인데요, 뭘."

나누가 대답하면 순무는 왼손을 떼고 고개를 그에게 향한다.

"시험 떨어지면 여기로 일하러 와요."

"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섭네요."

둘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뒤 웃어 보인다. 어색한 분위기가 한풀 꺾인 것 같다. 그러던 나누는 순무의 손에 자잘한 흉터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일하며 생긴 자국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누 입장에서 보면 순무가 더 대단하게 보였다. 그러나 고등 교육까지 마치고서 여기에 머무르는지, 나누처럼 방학을 맞아 일손을 도우러 온 건지는 묻지 않기로 한다. 이런 사사로운 사정 같은 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몸을 쓰는 노동에 지친 나누는 이만 책을 덮고 여름 바람을 맞으며 순무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하기로 한다. 일어서서 불을 끄면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와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나누는 순무의 옆에 드러누운 뒤 베개를 고쳐 베고 안녕히 주무세요, 한 마디를 건넨다. 순무도 대답을 하며 눈을 감았다. 둘은 등을 돌린 채 곧장 잠들어 버린다.

순무가 맞춰놓은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알아서 눈이 뜨였다.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나누는 피곤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 순무는 없었다. 세수와 면도를 끝낸 나누는 옷을 갈아입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순무를 찾기 위해 별채를 나섰다. 방을 둘러봐도 아무런 메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해를 맞으며 본채로 걸어 내려가면, 점심에 쓸 식재료를 실은 차에서 식재료를 내리고 있었다. 주인장과 직원 몇 명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실을 것에 실어 부엌으로 운반 중이다. 그들의 포켓몬도 열심이었다. 거기에도 순무는 없었다. 본채 안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려도 없다. 나누는 혹시나 싶어 부엌으로 가 보았다. 직원들이 밖에서 옮겨온 식재료들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도와달라길래 나누는 얼떨결에 그들을 돕게 되었다. 정리가 끝날 즈음, 순무가 복잡한 부엌으로 달려와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 나누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 계셨네요. 찾았어요."

"저도 순무 씨가 안 보여서 찾고 있었는데 정리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잡혀 버렸네요."

손의 물기를 툭툭 털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아침에 어딜 갔었는지를 물었다. 순무는 약간 우물쭈물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실은 아침마다 제 포켓몬이랑 훈련을 하고 있어요."

그건 어제 서랍을 뒤져봤으니 알고 있지만 나누는 흥미롭다는 듯이 한쪽 눈썹만 올려 보였다.

"부모님은 제가 가업을 이어가길 바라시지만 솔직히 전 싫거든요. 저는 포켓몬 배틀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워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또래도 없이 일만 하며 살아온 순무의 유일한 친구는 그의 포켓몬일 것이다. 순무는 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나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줄 사람도 없었을 순무를 위해 이야기를 들어 주기로 한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전 그래서 제 발로 도망쳤지만요."

나누는 불과 얼마 전까지 머물렀던 신세 졌던 친척들을 떠올렸다. 순무는 아랫입술을 깨문다.

"트레이너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해 주세요. 이것도 방법이 있을까요?"

가련해 보이는 그 얼굴에 나누는 할 말을 잃는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면 복잡해지는 법이다. 대답을 잘 해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려 본다.

"충분히 리그에 나가도 될 만큼의 실력이란 걸 증명해 보이면 인정해 주시지 않을까요."

고심 끝에 나온 대답은 겨우 이거였다. 하지만 나누는 최선을 다했으리라 믿는다. 순무가 꿈을 이루든 말든 열심히 응원할 마음은 없지만 일단은 그렇게 그를 위로한다. 순무는 고개를 숙였다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씁쓸한 미소가 떠 있어서 나누는 혹시나 상처를 준 것인지 가슴이 덜컥했다.

"그래서 아침마다 훈련하면서 나름 노력하고 있어요. 나누 씨 말대로 됐으면 좋겠네요."

그러고는 어제 하루 종일 보였던 밝은 웃음을 짓는다. 그걸 본 나누는 생각했다. 순무의 웃음이 모두 진실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둘은 식당에 가서 식탁을 닦고 수저통에 물기 마른 수저를 꽂으며 의자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래도 한 번 일해 봤다고 시계를 보면 점심시간 전까지 시간이 남아버렸다. 몸에 열이 올랐기에 부엌으로 얼음물을 얻어 마시러 가면 순무의 모친이 일을 하고 있었다. 순무가 달려가서 나누를 소개한다. 처음 뵙는 거라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자 일할 동안 잘 부탁한다고 대답한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순무와는 웃는 얼굴이 약간 비슷해 보였다. 여주인장은 약간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주인장과 순무는 약간 마른 편에 속하는 체형이다. 그러나 나누는 곁눈질로 본 순무의 튼실한 다리가 어디에서 유전된 건지를 깨닫는다.

나누는 멀찍이 떨어져서 얼음을 동동 띄운 찬물을 마시며 순무를 보았다. 순무는 어머니에게 달라붙어 본인이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나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동에서 왔고 어제부터 일했지만 일 처리 솜씨가 대단하다고 주절주절 떠든다. 또래 친구가 생긴 것이 그렇게나 신나는 걸까. 나누는 다시금 순무에게 동정심 비슷한 애틋함이 생긴다.

그러나 그 애틋함도 잠시였다. 밥을 먹으며 순무가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묻길래 대답을 해 주었는데, 자기도 스물한 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누의 나이를 듣고는 위로 빗어 올린 앞머리가 살짝 떨 만큼 놀라길래 나누도 덩달아 당황했다. 방학을 맞이한 청소년인 줄 알았던 순무가 동갑임을 알게 되자 한 편으로는 안심됐다. 격식 차리며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에 시간이 지나면 말을 낮추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순무가 곧바로 말을 낮춰 나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은 뒤 다음 일을 하기 전에 둘은 별채의 방에서 쉬기로 했다. 나누는 가방에서 음악 테이프와 포켓탭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옷장에 등을 기대어 책을 읽으며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나누. 그거 뭐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순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나누의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나누는 귀에서 이어폰 한 쪽을 뺐다.

"포켓탭. 테이프를 넣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휴대용 기기야."

순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기기를 들어 자세히 살펴본다. 산골 마을에 살아서 뭐가 유행하는지도 잘 모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누는 가까이 있는 탓에 살짝 벌어진 옷 사이로 순무의 몸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게 괜히 신경 쓰여 눈을 아래로 깐다. 쳐다보면 실례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누는 순무가 관심을 가지길래 귀에서 뺐던 이어폰 한 쪽을 순무에게 건네주었다. 순무는 나누의 옆에 앉아 그것을 귀에 꽂았다. 가림막 사이로 들어오는 여름 햇빛,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 시원한 공기, 조용한 방 안, 옆에 앉아 있는 체온, 거기에 어울리는 카랑카랑한 음악 소리. 나누는 바로 옆에 있는 순무 때문에 어쩐지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상황까지 된다. 그 상태로 나누는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일할 시간까지 버텼다. 순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약간 신경 쓰이기도 했다. 동갑이라. 같은 나이인데도 둘은 왜 이리 다를까. 둘은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동안 눈으로 같은 문장만 여러 번 쫓던 나누가 먼저 기기를 끄고 일하러 가자고 말했다. 순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나누는 책과 기기를 정리하고 순무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둘은 손님들이 다녀간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도왔으며 쓰레기통도 비웠다. 마침 체크아웃을 한 객실이 생겨서 청소를 거들어 주었다. 어린아이가 포함된 가족이 머물다 간 곳이라 조금 난장판이었지만 어질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면 끝이었다. 청소 담당자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나누와 순무는 꾸벅 인사를 하고 또 체크아웃한 객실이 없는지 본채를 한 바퀴 돌아본다. 맨발로 시원한 마룻바닥을 턱턱 밟으며 복도 사이를 오가는 바람을 맞으니 이것 참 시원하다.

둘은 본채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아직 객실이 차 있거나 빈 것을 확인하고는 부엌으로 가서 또다시 얼음 띄운 물을 얻어 마셨다. 갈증을 채운 나누는 순무의 입가와 턱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덮여 있지만 마음만큼은 새하얗고 순수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둘을 찾던 주인장의 부름으로 둘은 함께 온천탕을 청소했다. 손님들이 쓰고 수거함에 놔둔 수건들을 모조리 빨래 바구니에 담았다. 순무는 나누에게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둘은 사이좋게 작은 빨래 바구니를 하나씩 손에 들고 온천탕을 나왔다. 세탁실로 가는 길에 나누는 자신도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계속 이렇게 일하다간 몸살이 날 것만 같아서다. 순무는 온천탕 청소를 하기 전에는 이용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쁜 시기라 빨리빨리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고 덧붙인다. 다음에 한가해지면 온천물에 몸을 담그자고 하길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걸어가며 둘이서 온천탕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해 본다. 술, 그래, 어른이니까 술 한 병도 곁들이면 좋겠다. 데운 술을 걸치며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옆에 앉아 있는 순무는 얼굴이 빨개진 채 나누를 보고 웃을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다. 세탁실에 와서도 나누는 순무가 알 수 없도록 등을 진 채 흐뭇한 표정으로 빨래 바구니에 있던 것을 빨래통에 옮겨 담았다.

저녁 식사 준비를 도운 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둘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별채의 방문을 연다. 더워도 밥이 잘만 넘어가니 신기했다. 나누가 옷의 허리띠를 풀며 순무에게 왜 이리 지쳤냐고 물어보니 여름철에 일하는 건 누구나 힘들다고 대답한다. 둘은 잠시 방바닥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열을 식혔다.

이윽고 각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순무가 잠자리에 이불을 펴는 것을 도왔다. 순무는 벌러덩 자리에 드러누웠지만 나누는 옷장에 등을 기대고 책을 폈다. 이 상태로 시험을 친다면 맛보기로 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실망을, 부모에게는 원망을 살 것만 같아서 조금이라도 공부하려 한다.

한참을 조용히 집중하다가 뻐근해진 고개를 들어 목 운동을 하는데 순무가 잠든 것을 발견한다. 모로 누워서 포켓몬처럼 몸을 둥글게 하고 조용히 자고 있다. 나누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책을 덮고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움직여 순무가 깨지 않도록 자명종 알람을 켜놓는다.

방의 불을 끄고 달빛에 의지하여 가방을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나무로 된 창틀에 엉덩이를 내리고 걸터앉아 불을 붙인다. 창틀에 등을 기대고, 한 모금 빤 뒤에 숨을 내쉬면 바람결에 담배 연기가 밖으로 날아간다. 그 방향을 따라 눈길을 주면 숲 아래에 듬성듬성 불 켜진 용암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선가 풀벌레 포켓몬의 소리가 들려와 꽤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름, 달이 뜬 밤, 어두운 숲, 바람, 담배, 노곤함. 나누는 이 모든 것이 좋았다. 여기로 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그러나 담배 필터에서 느껴지는 나무 열매의 단 향과 연초의 구수한 향은 여름날 밤처럼 입안을 마르게 하며 갈증을 촉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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