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3

underneath by 시그
1
0
0

면접을 본 다음 날, 나누는 신세를 진 친척 집에서 도망치듯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부모는 당연히 기나긴 잔소리를 했고 친척들은 나누의 진짜 속마음도 모르고 그를 응원했다. 또다시 용암마을로 가는 길이 벅차긴 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짐이 든 보스턴백과 친척들이 챙겨준 것들이 너무 무거워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지만 이 고통만 참으면…… 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뒤, 카운터 바로 뒤에 발이 주렁주렁 달린 방으로 고개를 쑥 내밀면 생각보다 넓었다. 접객을 담당하는 직원의 휴게실인지 안에는 텔레비전, 소파, 탁자, 냉장고 같은 것이 있었다. 인사를 하면 어제 만난 여성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누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고는 방에서 나와 나누를 데리고 주인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널찍한 부엌 쪽으로 가자 주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들 분주했다. 많은 인원의 점심 식사를 준비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칼질하는 소리, 조리기구끼리 부딪치는 소리, 말소리,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있다.

부엌에서 일을 하던 주인장은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뒤 인사했다. 그는 나누를 데리고 부엌의 제일 끝으로 가서 마당으로 이어진 뒷문을 연다. 우선 별채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것이다. 부엌 뒷문을 통해 마당으로 나가면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길을 따라 낮은 오르막길을 오르자 작은 숙소 같은 것이 나타났다. 주인장은 2~3인실밖에 안 되는 공간이라고 덧붙인다. 원래는 예약을 통해 별채를 원하는 손님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생각보다 위치도 안 좋고 예약도 적어 아들이 지낼 수 있도록 별채를 내주었다고 설명한다. 그 말대로 이제는 손님이 묵는 방이 아니라 그런지 본채와 달리 외관이 수수했다. 화분 하나 없고 사람이 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장식물 같은 것이 없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작은 현관이 나타났다. 나누는 단화를 벗어서 가지런히 정리했다. 현관과 방을 잇는 짧은 복도를 걸으면 열 오른 발바닥이 시원했다. 벽 오른쪽에 어떤 문이 있었는데 그곳은 화장실 혹은 욕실로 보였다. 그 문을 지나 주인장이 끝에 있는 방문에 노크한다. 곧바로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린다. 주인장의 어깨너머로 본 방은 원래 객실이라 그런지 크기는 꽤 컸다. 다다미 깔린 바닥, 큰 창문 하나, 벽에 설치된 에어컨, 잘 개어진 여름 이불, 옷장, 서랍, 좌식 책상, 옷걸이, 개인 물품이 들었을 상자들, 그리고 사람 한 명까지 있어도 넉넉했다.

"인사하렴. 오늘부터 너랑 같이 일하며 삼 주 정도 일을 도와줄 분이야. 어제 말했던 분, 기억나지?"

주인장을 꼭 닮은 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나누에게 다가온다. 키는 나누보다 조금 더 작았고 주인장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천으로 된 전통복을 입고 있는, 약간 순해 보이는 그는 함박웃음을 짓고 오른손을 내민다. 나누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는다. 어쩐지 얼굴에 근면 성실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누의 추측보다 많이 어리지 않아서 의외였다.

"순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낮은 울림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나누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나누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손을 놓은 뒤에 생각했다. 여관 이름도 순무이고 이 사람 이름도 순무……? 주인장의 이름 짓는 센스가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요리 담당인 주인장은 바쁘기에 먼저 부엌으로 돌아갔고 나누는 순무의 안내를 받아 보스턴백을 내려놓는다. 그제서야 어깨가 가벼워진다.

"가방은 여기 놓으시면 돼요. 옷은 옷장에 여러 벌 있으니까 맞는 걸로 입으시고…… 본격적인 일은 점심 이후부터 하게 될 거예요."

순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은 땀을 씻고 싶었다. 맞는 사이즈를 찾아서 순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옷을 손에 들었다. 복도에 욕실이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방을 나서면 에어컨 바람이 복도까지 따라 나온다. 아까 보았던 문을 열면 욕실이 나타났다. 땀을 씻어내고서 전통복 형식으로 된 검은색의 유니폼과 허리띠를 착용한 나누가 방으로 돌아왔을 땐 주인장이 다시 와 있었다. 그는 나누에게 본채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말했다.

셋은 별채에서 나와 길을 따라 내려간다. 순무는 아직 어색한 건지 아버지인 주인장과 잡담을 했고 나누는 둘의 뒤를 따라갔다. 본채 내에 있는 식사처에서 밥을 먹으며 다시 할 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밥을 먹은 뒤에는 부엌일을 도와야 했다. 식탁을 정리하고 음식물도 분리해서 버리고 설거지나 잡일을 도우면 된다는 것이다.

나누는 순무와 함께 움직이며 일했다. 보통은 객실까지 밥상을 나르지 않냐는 질문에 순무가 그건 옛날 방식이고 요즘은 다 이렇게 별도로 식사처가 있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한다. 식사하는 장소가 따로 있으면 관리도 편하고 손님들도 방에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 편안해한다고 덧붙인다. 역사와 전통이 깃든 곳치고는 업계의 변화에 발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무는 낯선 가재도구의 위치와 사용법, 객실마다 다른 특징,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단순히 잡일만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잡일도 잡일 나름이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종일 바빴다. 나누는 순무가 알려 준 것들을 기억하려 애썼으나 아직은 무리였다.

여기저기 순무의 뒤를 쫓아다니며 객실과 욕탕을 정리하고 마당도 청소하고 못의 잉어킹들에게 밥도 뿌려 주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돌아다니다 보니 나누도 순무도 금방 녹초가 된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자유였기에 허드렛일은 저녁 식사 전까지 하면 되었다. 첫날이라 시간이 꽤 빨리 갔다고 느끼며 저녁을 먹었다. 음식도 입에 잘 맞았는데,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별채의 방으로 돌아온 둘은 창문을 열자마자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바람에 땀을 식히며 모로 누운 나누의 눈앞에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순무의 옆얼굴이 보인다. 까만 머리칼과 짧은 이목구비를 따라 내려가면 튀어나온 울대가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제 구실할 만큼 나이를 먹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봤자 나누보다 키도 조금 작고 손도 작으니 어릴 것이 틀림없다.

그런 고지식한 생각을 하는데 순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나누 쪽을 향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 어땠냐고 질문한다. 처음이라 많이 헤맸지만 순무 씨 덕분에 별 탈 없이 끝났다고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일손을 도운 건지 순무는 일머리도 있었고 손놀림도 노련했으며 싹싹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두한 나누와는 정반대였다. 순무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별 거 아닌 일이지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용암마을은 장수촌이라 중장년층이 많은 데다 직원들 중에서도 또래가 없었는데 나누가 와서 좋다고 덧붙인다.

어쩐지 쑥스러운 듯한 미소가 귀엽게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쑥스러웠는지 순무는 벌떡 일어나서 나누가 잠옷 삼을 옷을 찾아 준다. 옷장에서 익숙한 전통복 형식인 옷들을 꺼내 어떤 색이 좋은지 묻는다. 나누가 진한 회색을 고르자 순무는 감색에 하얀 줄무늬가 새겨진 것을 골랐다. 딱 이맘때쯤 입는 것들이라 만지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나누는 머쓱하게 웃고 있는 순무가 했던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풀숲을 돌아다니며 야생 포켓몬들과 배틀을 벌이고, 나이를 먹은 후엔 학교와 학원에 다니며 늘 주변에 사람이 있던 나누와 달리 순무는 철들 무렵부터 여관 일을 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잘 지내보자고 다짐하며, 나누는 먼저 씻겠다고 말했다.

땀을 씻어보낸 나누가 방에 돌아오자 순무가 갈아입을 것을 들고 방에서 나갔다. 이미 방바닥에는 두 사람분의 여름 이불이 깔려져 있다. 나누는 얇은 천으로 된 옷의 허리띠를 묶으며 순무의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열어둔 큰 창문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이 보이며 여름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용암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좌식 책상에는 포켓몬을 돌보는 방법이나 온천에 관련된 낡은 책들이 놓여 있다. 어릴 때 사놓고 이젠 읽지 않는 유치한 소설들도 있었다. 용돈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둔 나옹의 형상을 한 저금통도 있다. 이부자리에는 매일 아침을 열어주는 자명종 시계가 두어져 있다.

벽시계가 여덟 시를 넘은 시간을 가리키며 돌아가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 순무와 주인장 내외가 어딘가로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 앨범에 걸려 있다. 이 시절의 어린이 순무도 지금처럼 귀여운 미소로 활짝 웃고 있다. 시계 바로 밑에는 달력이 걸려 있다. 순무의 글씨로 보이는 글씨체로 단체 손님이 몇 명인지, 언제 잔디를 깎아야 하는지, 일과 관련된 메모들이 듬성듬성 적혀 있다.

책상 옆에 놓인 서랍을 열면 필기구와 가위, 테이프, 공책, 비상시에 쓸 수 있는 응급처치 도구함 등이 있다. 굉장히 수수하고 재미가 없다. 바빠서 취미 생활마저 향유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상 서랍은 총 두 개였는데 위 서랍을 닫고 아래 서랍을 열어 봤다. 거기엔 일기장처럼 보이는 공책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구미가 당긴 나누는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집어 들어 촤라락 훑어본다. 그러나 그것은 일기장이 아니라 훈련 일지 같은 것이었다. 나누는 순무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포켓몬을 소지하고 있고, 함께 훈련하고 있음을 알았다. 야생에서 어떤 포켓몬을 만났는지, 어떤 기술과 도구를 썼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수기로 작성되어 있다.

굉장한 노력파다. 서랍을 뒤지면 이런 공책이 몇 권씩 더 있었다. 순무의 꿈은 아무래도 호연 리그에 출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훈련 일지에는 텔레비전에서 시청한 리그 배틀에 대한 감상들도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순무는 호연 지방과 가업의 영향 때문인지 불꽃타입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는 더 많은 불꽃타입 포켓몬을 소지하길 원하고 있다. 뜨거운 소년. 나누는 그렇게 생각하고 일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서랍을 닫았다. 사춘기 청소년의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 조금은 우스워진다. 그 비밀이 성인용 잡지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어도 말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