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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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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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가 태어나기 전에는 호연 지방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탓에 관광객도 줄어서 굴뚝산과 용암마을은 행여나 놀러 온 사람이 있으면 극진하게 대접을 해 주었다. 순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여관이 대성하길 바라며 여관 이름을 따서 태어난 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순무는 어릴 때 어머니의 본가가 있는 잔디마을에서 조부모와 어머니와 넷이서 살았다. 아버지는 바쁘지 않을 때만 돌아와서 순무와 놀아 주었다. 그러나 조부모들이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순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어머니는 잔디마을의 집을 처분하고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용암마을로 떠났다.

이른 나이에 철이 들었지만 여관에 갇히다시피 하며 자라 온 순무는 사람을 덥석덥석 잘 믿었다. 직원들이 순무를 예뻐했고 쉬러 오는 손님들도 먹을 것을 주며 같이 놀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떠나는 손님일 뿐이었다. 여전히 친구라곤 없었다.

좀 더 큰 후에 청소년이 된 순무는 학교에서 교육 차원으로 데려간 호연 리그장에서 포켓몬 배틀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을 안고 포켓몬 트레이너로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고등 교육을 마치기 전에 부모에게 말해 보았으나 그때의 부모는 순무가 어렸기에 부드럽게만 설득했다. 순무는 자신이 이어야 하는 가업을 생각해 금방 포기해 버렸다. 고등 교육을 마치자마자 본격적으로 여관에서 지내며 일을 돕게 됐다. 그래도 포켓몬 배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도 포켓몬 배틀에 관련된 내용만 찾았다.

성인이 되자 아버지가 예전부터 골칫덩이로 여기던 별채를 내주었다. 별채에서는 포켓몬 배틀을 볼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항상 카운터 너머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포켓몬 시합을 꼬박꼬박 시청하였다. 부모는 자식이 말썽도 피우지 않고 일도 성실히 해내며 텔레비전을 보았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무엇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업무들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일 년을 보내며 스무 살의 끝을 맞이한 순무는 여관의 내부 수리 공사로 인한 휴무를 틈타, 부모를 졸라 혼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호연 지방을 돌아다니며 추위에도 지지 않고 파트너로 삼을 포켓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송화산까지 가서 겨우 잡은 것은 가디와 식스테일이었다. 가디는 순무를 잘 따랐으나 식스테일은 순무의 말을 잘 들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순무는 그 둘이 너무나 좋았다.

아침마다 일하러 가기 전에는 포켓몬들과 겨울의 숲을 누비며 야생 포켓몬을 만나 배틀을 벌이고 특훈을 했다. 순무의 머릿속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는 불과 함께 타올라서 사라지곤 했지만, 열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봄이 찾아오고 신문에서 호연 리그에 관한 기사를 볼 때면 저절로 슬퍼졌다. 더 이상 여기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꿈을 꾸기만 하지 않고 그 꿈이 사라지기 전에 쫓아가고 싶었다.

지친 순무가 말을 꺼냈을 때 아직도 그런 소릴 하냐며 아버지에게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별 시답잖은 소릴 하길 좋아하는 어머니마저 아무 말 없었던 걸 보면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결국 순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꿈이 저 멀리 날아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웃어도 진심을 담아 웃을 수 없었고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혀 누워 있기만 했다. 방에 텔레비전이 없는 점이나 휴대기기인 포켓내비를 사 주지 않는 점 또한 부모가 내리는 벌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저녁에도 몰래 별채의 윗길을 올라 가디와 식스테일과 숲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늦깎이 트레이너들은 많다. 언젠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휴일에 용암마을로 가서 공책을 몇 권 샀다. 자신의 배틀 성향을 알기 위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가디는 너무 의욕이 앞서서 상대의 급습을 피하지 못했다. 식스테일은 순무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마음대로 기술을 부려 야생 포켓몬이 도망치곤 했다. 그래도 개성 넘치는 자신의 포켓몬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오자 저녁시간에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연의 여름은 유난히 덥다. 여관 일을 돕는 것만 해도 지쳤던 것이다. 그나마 기온이 오르기 전인 아침에는 포켓몬들과 잠깐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네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며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구해 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순무는 혼자 일하는 것보다 같이 일할 사람이 있으면 재밌을 거라 대답했고, 얼마 후에 나누가 찾아왔다. 카운터의 접객 담당자가 나누와 함께 부엌으로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저절로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나이가 비슷해 보이자 빨리 친해지고 싶었다.

면접을 본 아버지는 나누가 관동에서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의 첫인상은 관동에서 온 새침데기 같은 느낌이었다. 까만 머리칼에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일할 때 적극적으로 머릿속에 넣으려 하는 걸 보자 첫인상이 바뀌었다. 똑 부러지는 모습에 몇 살인지,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곳까지 일하러 온 건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좀 더 친해지면 많은 이야길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순무는 오랜만에 넘치는 의욕으로 나누를 이끌었다. 확실히 일손이 느니 같은 일을 해도 덜 수고로웠다. 방으로 돌아와서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었다. 나누는 처음이라 많이 헤맸지만 순무 덕분에 별 탈 없이 끝났다고 말해 주었다. 순무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늘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여기로 저기로 쏘다니는 것을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으며 별거 아닌 일이지만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장수촌인 데다 직원 중에서도 또래가 없었는데 나누가 와서 좋다고 말했다. 약간 부끄러워져서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나누가 샤워를 하러 사라졌을 때 그의 보스턴백을 뒤져 보았다. 하면 안 되는 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갖가지 어려워 보이는 책과 입을 옷, 그리고 작은 기계와 음악 테이프들이 들어 있었다. 책의 제목을 훑어보면 그것들이 경찰관 시험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순무는 나누가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과 달리 확실하고 거창한 꿈이 있어서 부러웠다.

순무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나누는 이미 짐을 다 정리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누의 사정이 궁금해져 일부러 무슨 책을 읽느냐 물어보았으나 어떤 시험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길래 그러겠다고 했다. 어른들은 모르는 둘만의 비밀이 생기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부러 충격받은 척하며 나누가 갑자기 대단해 보인다고 과장하자 그는 자기가 선택한 길이라고 말해왔다. 속으로는 스스로 경찰관이 되길 선택했다니 역시 장난 아니다, 같은 단순한 감상들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시험에 떨어지면 여기로 일하러 오라며 농담을 나눴다. 그 말에는 반쯤 진심이 담겨 있었다.

며칠 전에 또 멋대로 집을 나간 식스테일 대신 가디와 아침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나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서 본채로 내려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기웃거렸다. 부엌에 가면 벌써 익숙해진 뒷모습이 보여서 달려갔다. 나누가 어딜 갔다 왔는지 묻자 이걸 말해도 될지 말지 고민했다. 나누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낮추고 아침마다 포켓몬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나누가 한쪽 눈썹을 올려 보이자 순무는 결국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해 버렸다. 부모님은 제가 가업을 이어가길 바라시지만 솔직히 전 싫거든요. 저는 포켓몬 배틀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워요. 경찰관을 꿈꾸는 나누가 보면 정말 웃길 거라는 생각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나누는 자신도 순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제 발로 도망쳤다고 말해 왔다. 순무는 약간의 기대감과 희망을 품고 어른스러운 나누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나누는 어려운 질문을 받은 탓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라고 생각하는데 나누가 입을 열었다. 리그에 나갈 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으면 되지 않겠냐는 해결책을 내주기까지 한다. 순무는 몇 달 전 아버지에게 혼났던 사실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억지로 미소짓고 나누의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어색해지기 싫어서 웃으며 일을 하러 가자고 한 뒤에는 현실을 잊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시간이 남아 얼음물을 얻어 마시러 가면 부엌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순무는 초면인 나누를 어머니에게 소개해 주었다. 나누는 인사만 올리고 조리장에게 물컵을 받으러 가 버렸다. 순무는 새로 잡은 포켓몬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어머니에게 나누의 이야기를 했다. 관동에서 왔고 어제 처음 일을 배웠지만 일처리 솜씨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친하게 잘 지내보라고 했다.

밥을 먹으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나누는 순무와 같은 스물한 살이었다. 분명 형일 거라 생각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자기도 스물한 살이라고 답했다. 나누가 피식 웃으며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말을 낮추자고 해 왔다. 그것이 너무 기뻐서 곧바로 그래, 라고 대답하자 나누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누를 웃게 했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행복감이 터져 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저번에 나누의 가방을 뒤져 보았을 때 발견한 음향 기기에 관해 묻고, 그가 건넨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악기 소리와 담담한 가수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 요란하지 않고 너무 잔잔하지도 않은 것이 나누의 취향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부탁으로 온천탕을 청소했다. 나누가 온천을 이용하고 싶은 건지 그것에 관해 물어왔다. 대답하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순무도 나누와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맡기며 쉬어보고 싶어졌다.

"혼자 배틀하면 외롭지 않을까 해서."

순무는 나누의 무표정함과 반대되는 친절한 대답에 울 뻔했다. 입술이 떨리고 눈이 크게 떠지는 걸 막지 못했다. 나누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웃지 않고 오히려 어울려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햇빛을 막기 위해 함께 양산을 쓰고 가며 잡담을 했다. 나누가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며 호연 지방에 오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약간 두근거렸다. 자신의 고향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누의 포켓몬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깜까미였으나, 그건 그대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국가직에 한자리 꿰차실 몸이라 그런지 초보 트레이너 순무보다 실력이 월등했다. 난생처음 다른 사람과 배틀을 해 본 것이라 잘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누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순무는 평소엔 볼 수 없는 열정적인 나누의 얼굴을 생각했다. 붉은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이며 보석처럼 빛을 냈다.

그리고 나누는 쓰디쓴 말을 했다. 이런 여관에만 있기엔 아깝다는 것이다. 순무는 금세 기운이 빠져버렸지만 정 안 되면 자기가 있는 관동으로 도망 오라는 농담에 웃었다.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뿐이다.

휴식을 취할 때도 음악을 나눠 들었으나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누는 어떤 계기로 그 꿈을 가지게 된 건지 궁금했다. 결국 나누에게 물어보기도 전에 질문당해 버려서 솔직하게 물었다. 나누는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더니 공무원인 아버지 때문에 무작정 그런 꿈을 키워왔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순무는 나누가 자기가 선택한 길이라고 대답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나누가 자기 손으로 마지못해 고른 선택이었다. 딱히 스스로 결정해서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순무는 나누의 상황을 헤아려 보았다. 나누도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해 봤을까? 그리고 부모님에게 혼났을까? 나누에게 동정심이 일었고 지난 과거가 반추되어 울고 싶어졌다.

그 동정심은 나누의 한 마디에 박살 나 버렸다. 충격으로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저절로 눈물이 흘렀고 별채의 뒷길로 올라서 나누가 찾지 못하도록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순무는 몬스터볼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포켓몬이었다. 위로받고 싶었지만 순무를 위로하는 것은 녹음이 낀 대자연뿐이었다.

일터로 돌아가서 정신을 거기에 쏟다 보니 점점 마음이 풀려와서 다시 감정을 정리했다. 나누의 현실적인 말에 상처받은 자신이 너무나 무르고 실망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누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누는 순무를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었다고 한다. 뒷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오해를 해 버려서 미안했다. 나누는 그런 애가 아닌데.

순무는 약해지면 안 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나누에게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나누는 곤란해하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상처가 쌓이면 독이 될 것 같아서야. 그 상처는 오롯이 순무의 마음을 파고들어 독이 될 터였다. 하지만 나누만이 줄 수 있는 상처라면 그가 상처를 거둬 줄 수도 있었다.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일 거야. 온 세상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뿐이다. 어떤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제일 잘 아는 너밖에 없다. 그런 뜻을 담고 말하면 결국 나누는 순무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네가 날 견딜 수 있다면 나도 너에게 맞춰 줄게.

괜찮아.

그 후, 순무는 점점 더 나누의 관심을 원하게 되었다. 애정 결핍으로 인해 집착하게 될 것 같았지만 그러면 나누가 멀어질까 봐, 어차피 다가갈 방법도 몰라서 그대로 있기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눈을 뜨면 눈을 감을 때까지 함께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속은 행복으로 꽉 찼다. 나누는 충분히 침착하고 나이에 맞게 어른스러웠다. 직원들은 모두 나누를 칭찬했다. 그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순무는 그런 나누에게 동경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라났다.

어깨가 아프다는 나누를 빌미로 은근슬쩍 팔도 잡아보고 어깨도 주물러 봤다. 새우등을 하고 다니는 나누가 걱정되어 허리를 꾹꾹 눌러 주었다. 시원하다는 말에 보람을 느꼈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도 나누에게 인정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누도 안마를 해 주겠다고 하자 예상하지 못한 일에 당황해 버렸다. 눈치 못 챈 나누는 순무가 한 것처럼 팔을 잡아 엎드리게 하고는 그 위에 올라타서 열심히 허리 근육을 풀어 주었다. 순무는 저절로 나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부끄럽게 느껴졌으나 다행스럽게도 그즈음 나누가 먼저 허리에서 내려와 주었다. 다시는 이런 수태를 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나누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에 그가 공부하는 것들을 보았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가득했다. 모든 트레이너가 너처럼 수련하면 좋겠네. 잡담을 나누다 나온 칭찬을 듣자 기뻤다. 그래서 순무도 보답으로 나누에게 무언가 칭찬을 하고 싶어서 외적인 면을 칭찬했다. 나누의 반응을 보니 아차, 싶었다.

그런데 나누는 순무가 참 귀엽단다. 순무는 귀여움으로 나누에게 인정받자 부끄러워졌다. 같은 남자애가 귀엽다고 느껴질 만큼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었나?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이 느껴지자 쑥스러웠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릴 때 이후로 못 들어봐서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나누도 민망했던 모양인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나누는 점점 얼굴에 붉은색을 퍼뜨리고 있었다. 나누도 당황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잠자리에서 마주 보며 빗소리와 함께 음악을 나눠 듣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순무는 나누의 얼굴을 바라보며 벌게졌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렇게 냉정해 보이는데 아깐 오히려 나누가 더 귀여웠다. 나누도 순무의 얼굴을 보고 있긴 했으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누는 피곤했는지 먼저 잠들어 버렸고 순무는 눈이 감길 때까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음날, 순무는 생생하게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떤 손님이 비를 맞으며 마당의 못에서 떠나지 않길래 숨어서 지켜보았는데, 가지고 있던 몬스터볼로 잉어킹을 하나 잡아가 버렸다. 눈앞에서 절도를 목격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놀랐으나 곧바로 경찰을 꿈꾸는 나누가 떠올랐다. 부모님이 그 손님과 말다툼을 하는 동안 나누는 순무를 계속 달래며 안심시켜 주었다. 어쩐지 나누가 안아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대신 그의 손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진정하고 싶었는데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서도 울적해져 방바닥에 드러누워 벽을 쳐다봤다.

나누는 부모님을 데리고 온 뒤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순무에게 괜찮다고, 다 해결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하라며 위로했다. 나누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정신을 차렸다. 돌아온 나누는 어깨를 내어 주었다. 순무는 심리적으로 편안해졌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방 안에서 어깨를 기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샤워할 때엔 나약해지지 말자고 머릿속에서 주문을 걸었다.

또다시 마주 보며 잠자리에 든 것에 더할 나위 없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나누는 순무의 눈동자를 똑바로 봐 주었다. 피하기만 하던 시선이 맞닿이자 순무는 더 가까이에서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그 대신에 오늘은 먼저 눈을 감았다. 얼굴에 무언가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깬 뒤에 옷을 들고 세탁실에 갖다 놓으려 했다. 문득 순무는 나누의 단화가 눈에 띄었다. 발 크기가 어떻게 되는지 호기심에 왼발을 넣어 보면 조금 컸다. 본채로 내려가는 길에는 코를 가까이 대고 옷 냄새를 맡았다. 매일매일 씻고 있었기에 살결과도 같은 냄새가 났다. 순무는 나누의 몸에 관심이 생겨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누의 첫 휴일은 비가 와서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부슬비를 맞으며 오랜만에 돌아온 식스테일과 거리를 걷는 것은 재밌었다. 첫날 이후로 처음 보는 나누의 깔끔한 차림에 역시나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다. 혹시 자기처럼 달달한 맛을 좋아할까 싶어 디저트를 파는 상점에도 데려가 보았지만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순무는 뭐라도 해서 나누가 기분 좋아질 수 있도록 설득해서 마침내 나누가 무언가를 사서 맛보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표정은 무덤덤했다.

산책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길을 걷다가 문득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사당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기념품을 구경하고 재미삼아 운세를 뽑았으나 흉이 나왔다. 당황해하자 나누가 놀렸고 식스테일이 그것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나누는 길이 나온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모든 일에 어쩐지 신성하고 영험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일에 대한 암시 같기도 했다.

빗줄기가 굵어져 흠뻑 젖어버렸다. 건물 입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나누의 몸을 쳐다봤다. 하얀 셔츠가 젖어서 나누의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무는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같이 한 방에 묵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몸은 본 적이 없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런 감정은 온천탕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별채로 돌아온 뒤 속옷만 걸친 나누의 몸이라든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앞서가는 나누의 뒷모습이라든가, 온천수 안에 알몸이라는 생각이라든가.

그에 대한 벌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본채에 가서 날씨를 확인하고 돌아온 나누는 재떨이를 휙 내던지고는 순무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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