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순무는 그것이 벌이라 느껴졌고 나누는 그것이 죄라고 느껴졌다.
본인의 주제도 모르고 나누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진 벌일까. 하지만 이래도 쉽게 눈을 돌릴 수 없다.
본인은 곧 떠날 몸인데 누구보다 순무와 가까워진 죄일까. 이제는 순무를 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놀란 순무는 나누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 침착하던 나누가 물건까지 집어 던질 만큼 화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리고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것에 한 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나누가 화난 이유가 순무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위로받고 싶은 걸까, 싶어서 순무는 팔을 들어 나누의 등에 올리려 한다.
나누는 떨어질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다. 게다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기도 했다. 품 안에서 온기를 느끼던 나누는 갑자기 가만히 있던 순무가 팔을 등에 돌리려 하는 움직임을 느꼈다. 나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순무에게서 멀어졌다. 순무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손길을 거부당해 상처받은 것처럼도 보였다. 가련한 순무의 얼굴을 보며 어떤 말부터 꺼낼지 고민한다. 사과의 말? 괜찮냐는 말?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확신하듯, 확인하듯 물어보기로 한다.
"……순무. 나를 믿어?"
이번에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누를 쳐다봤으나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자 턱 밑까지 차올랐던 뜨거운 감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간다. 믿을 수 없는 어른들에게서 순무를 보호하고 위로해 주며, 순무가 나누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쁜 감정이 느껴졌다.
화났다가 안았다가 밀어냈다가 진정했다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나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순무는 나누의 손을 잡았다. 나누는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살짝 흠칫거렸다. 괜찮다는 말 대신 나온 몸짓 같이 느껴지고 붙잡은 손이 따뜻해서 더욱 차분해진다. 그러자 자신의 손에서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고동을 의식하게 된다.
이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나누는 손에서 손을 빼고 묻는다.
"다시 안아도 돼?"
이것은 괜찮아졌다는 대답의 뜻이었다. 자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나누의 물음을 들은 순무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할 말이 있는 걸까, 고민하는 걸까. 싫으면 안 할게, 라고 덧붙이려 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그를 안았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양손을 등에 돌리고 살짝 몸끼리 닿을 정도로만. 잠시만 그러고 있다가 몸을 떼고는 서로 마주 보며 싱그레 웃었다.
순무는 갑자기 왜 그랬냐고 물었고 나누는 네가 알면 상처받는다고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나누는 순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듣고 온 얘길 하면, 순무가 겪었던 아픔을 자신이 알게 되었다고 하면 독이 되지 않을까. 그것을 먹고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 일단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순무는 나누가 본채에서 무슨 얘길 들었길래 상처받을 거라고 하는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나누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다. 게다가 나누가 안아 주고 위로까지 해 주었다. 싫은 소리가 나와도 이렇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누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그머니 일어선 나누는 던졌던 재떨이를 줍고 방바닥에 두었다. 어색해진 기분으로 공부나 할까, 하며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 있는 순무는 자신의 식스테일처럼 나누의 행동을 눈으로 좇고 있다. 눈이 마주치면 순무가 쿡 웃었다. 나누는 웃을지 말지 고민하다 웃지 않았다. 저렇게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순무를 좋아하게 된 건지 떠오르지 않는다. 명석한 나누는 이제서야 순무를 향한 감정이 애정인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저 앞길이 막힌 순무에게 어울려 주며 그를 조금이라도 웃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랬을 것이었는데 무슨 심술인지 순무에게 빠져 버렸다. 역시나 그것은 죄스럽게 생각된다.
순무는 나누를 좋아하고 있음을 가슴으론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었던 사정을 알고도 자신을 배려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 마치 듬직한 형 같아서 자꾸만 의지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동경하는 마음은 외적인 부분에도 눈을 가게 했다. 잔흉터가 많은 자신의 몸과 달리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깨끗한 피부와 균형 좋은 몸. 신비한 느낌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 나누의 모든 것에 신경 쓰이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나누는 껄끄러워진 기분으로 새 담배를 손에 들고 다시 별채의 입구로 향했다. 방문이 닫히자 순무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 벽에 등을 기대며 추욱 처진다. 나누의 진지한 눈동자와 안겼던 팔의 감각을 떠올리자 애틋한 마음이 자라난다. 이것은 울고 싶은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슴속이 가득 찬 것처럼 먹먹해지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듯한 감정. 더는 나누가 자신 때문에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 만약, 아까 눈을 쳐다보던 나누가 포옹이 아니라 입맞춤을 줬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순무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혼란스러워진다.
나누는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분명하다. 분명히 이건 순무를 좋아하는 감정이다. 그렇게 생각한 뒤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었다. 다시 차근차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동생뻘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가업 때문에 꿈도 희망도 겨우 붙잡고 있는 순무가 안타까워 같이 어울려 주었다. 그래, 이때까지는 동정심과 같은 마음이었다. 잘 웃고 잘 우울해지는 순무에게 나쁜 말을 했을 때는 죄책감으로 인한 책임감이 생겨났다. 허리에 올라타 피로를 풀어 주었을 때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보석 같다는 말에 그만 귀엽다고 말해 버렸다. 얼굴을 마주하며 잠들었고, 불안에 빠진 순무를 위로하고, 눈을 마주하며 잠들었고. 아까 온천탕에서 나왔을 때는 정말 그 몸을 만지고 싶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결국 만져 버렸다.
순무를 안고 진정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나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다시 방으로 돌아간 나누는 이제 예전처럼 순무를 볼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좌식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뒷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깔끔하게 깎은 뒷머리 아래의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면 그 만지는 감촉이 좋은 허리가 있다. 유난히 튼실한 하체는 가장 상상하기에 적합한 부분이었다. 나누는 이렇게나 순무에게 성욕을 느껴버리는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이미 알아버린 머리는 멋대로 외설스런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쩐지 비가 창문을 톡톡 때리는 소리에 집중하면 다시 이성을 찾게 될 것 같아 그쪽에 귀를 기울인다. 잡념을 버리자고 생각하며 순무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아 공부할 각을 잡았다. 그러나 맞은편의 순무가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나누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걸까, 그런 척을 하는 걸까.
계속 책을 봐도 막 성에 눈을 뜬 사춘기 아이처럼 머릿속은 순무로 가득했다. 귀엽게 웃는 얼굴,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빛, 땀 흘리며 달아오른 얼굴, 비에 젖어 가련해 보였던 그 얼굴. 필기시험 점수가 낮게 나올 가능성은 이미 걱정할 수준이 아니었다. 순무를 품에 안고 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싶다. 등을 쓰다듬으며 골격을 느끼고 싶다. 입을 맞추며 맨살을 부대끼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순무에게 빠져버린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나누는 연애 감정을 우습게 취급하며 그것이 쓸데없는 감정과 자본의 낭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자신이 순무와 이런저런 걸 하는 상상을 하다니, 이때까지 멸시한 연애 감정에 의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직접 당해보니 이해가 된다.
또 한편으로는 잘만 구슬리면 나누가 원하는 바-순무를 품에 안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만 하느라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못 해 봤을 거라 추측하자 그것이 또 귀엽게 느껴져서 나누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너무 좋아서 무심코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뭘 하든 나누가 처음이라는 생각에 가슴속이 일렁인다. 나누는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다. 순무 덕분에 그동안 성질을 죽이고 있었으나 이제 깊은 잠에서 깬 성질머리가 그를 지배하려 한다. 그런 나누는 순무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틔웠다.
만약 애지중지하며 가업을 잇게 할 청년으로 키워온 저들 모르게 순무를 낚아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차례의 평화가 지나가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복수와도 같은 것에 나누는 뒷감당도 고민하지 않고 그들에게 엿 먹일 궁리를 한다. 오로지 순무를 지켜 주겠다는 마음에서부터 발생되어 버린 독점욕은 애정을 만나 지독한 성애를 낳아 버렸다. 순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 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다시 안정감을 느낀다.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순무이기에 이런 것이다.
외부로부터 순무를 지키며 혼자서만 그를 취하고 싶다. 아무도 믿고 싶지 않은 순무에게 나누는 그의 모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먼 훗날엔 제 발로 걸어들어와 나누의 품에 안기리라. 순무를 껴안고서 죄스럽게 생각되었던 나누는 사람의 감정이 이리도 쉽게 변하는 것에 잠깐 고찰해 본다. 변했다기보단 역시 원래로 돌아온 것이라 결론짓는다.
본채에서 직원들 틈에 섞여 저녁을 먹으면서도 나누는 순무를 어떻게 구슬릴지 생각해 본다. 심지어 그 옆에 순무의 아버지가 앉아 있어도 말이다. 그는 순무에게 오늘 나누의 첫 휴일인데 뭘 했는지 묻고 있다. 순무는 어딜 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고 있었다. 나누에게도 재밌었는지 묻길래. 호연에는 가끔 놀러 왔었는데 용암마을은 처음이라 새로웠다고 대답했다. 순무에게서 사당에서 운세를 뽑았던 일에 대해 들은 주인장의 표정을 살피면 그래도 나름 재밌는 일이었으니 만족하는 것 같다. 순무를 위하는 만큼 잘해 주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 자세를 유지하면 될 것이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눈치가 없다는 거겠지.'
거의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이곳에서 일만 해 온 순무는 숙맥이었기에 직설화법이 적절해 보였지만 무작정 좋아한다고 하면 놀라서 도망쳐 거리감만 늘 것 같기도 하다. 야생 포켓몬을 잡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가는 것처럼 차근차근 거리를 줄여야 좋을 것 같다. 나누는 맞은편에 앉아서 와구와구 식사하는 순무를 쳐다보았다. 저 오물거리는 입술이 이리도 귀여웠는지 몰랐다. 나누와 달리 편식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점 또한 나누의 기준에서 보면 신기하지만 귀여운 편.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되자 이런 사소한 점들마저 크게 다가온다.
별채로 돌아간 뒤에 나누는 미뤘던 공부에 몰두하기로 한다. 순무는 낡은 책을 읽으며 가끔 곁눈질로 나누를 훔쳐보곤 했다. 나누의 집중하는 얼굴이 꽤 멋들어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누는 순무에게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른하고 침착한 분위기, 어른스러운 면, 냉정한 판단력. 나누가 자신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하는 만큼 순무도 그러고 싶다. 나누라면 뭐든 다 내어 줘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생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마음은 같지만 그 방향성이 다른 것은 재밌는 점이었다.
열한 시가 넘어가고 나누는 고개를 들었다. 순무가 아직도 책을 읽나 했더니 벽에 머리와 어깨를 기대어 자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는 자세에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고 구석에 깔끔히 개어 놓았던 여름 이불을 방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순무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잠에서 깬 순무는 졸린 상태로 겨우 기어가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나누는 순무를 제대로 베개에 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런 뒤에 순무의 자는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나누의 속도 모르고 잘도 잔다. 이윽고 피곤함이 몰려온 나누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비가 그친다 했으니 단화를 다시 씻어 햇볕에 말려야겠다. 오랜만에 순무와 배틀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든다.
순무가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새벽이었다. 어느새 비가 그친 건지 밖이 조용하다. 책을 읽다 잠들어 버렸는데 나누가 깨워서 잠자리에 누운 것이 떠올랐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나누는 아직 잘 자고 있다. 순무는 가까이서 그 옆얼굴을 보고 싶어진 마음에 베개를 조용히 끌고 나누의 곁까지 다가간다. 눈동자가 달빛에 의지해 콧대와 작은 입술을 지나 목까지 훑었다.
어째서 같은 나이인데도 이렇게 다를까. 동경하는 마음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변질되어 거의 숭배에 가까워진다. 영리하고 준수한 외모에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았어도 모두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 순무에 관해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고 어울려 주며 위로해 주는 좋은 마음씨까지. 그런 나누가 떠나야 하는 것이 싫었다. 돌아가서도 계속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한때의 용돈벌이에서 만난 아이로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졌다. 지금도 가깝지만 더 가까워져서 나누에 관한 것들을 알고 기억하길 원한다.
하지만 먼저 다가갈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혼자 신나서 들이대면 나누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쉽사리 다가갈 수 없어져 애달파진 마음을 안고서 살짝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나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 이 감촉을 머릿속에 박아둘 것이다. 떠난 뒤엔 알 수 없는 감촉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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