닼던

추수를 기다리는 보리밭처럼

부연설명: 코르토와 페코즈는 자캐개념임. 성전과 노상 디폴트가 레이널드와 디스마스라는 건 앎. 그리고 씨바 이거 썼을 때가 10년도 전에 한창 정신상태 맛가있던 시절임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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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통, 통, 통통통. 여느 축복받은 땅에서 햇빛이 그러하듯 시야를 뿌옇게 메우며.

땅 끝 중의 땅, 바다 끝자락 중의 끝자락, 땅과 바다가 한 데 맞물려 교차하는 가운데 뭍과 물을 오가는 행랑자 그 누구도 오가는 법을 모르고 오려 하는 일조차 없었다. 이 영지를 가장 분주하게 누비는 것은 오직 바람이었으며, 창을 두들기며 텅 빈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은 왁자지껄한 빗줄기 뿐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내리꽂혔다. 겉껍질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하얀 속재가 드러나고, 그 속재가 다시 흙탕물과 검은 때를 타며 더러워지기를 반복하며 움푹 패인 문틀에. 눈도 코도 없이 바람은 빗방울을 몰고 골목과 골목 굽이 사이사이, 지붕과 지붕을 왁자지껄하게 타넘고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쏜살같이 지나간 빈 자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두터운 암막같은 빗줄기와 오랫동안 갈지 않아 썩어들어가는 나뭇널을 우박처럼 때리는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을씨년스러운 마을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모두 한 지점에서 만났다가 흩어지게 된다. 맨 가장자리, 묘비처럼 섬뜩하게 들어선 저택. 가장 새것같은 건물이지만 영지 어느 장소보다 조용한 건물 외벽을 타고 자란 담쟁이 덩굴을 바람바람마다 한 번씩 훑고 지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빗줄기들은 뒤쳐질새라 달려지나가며 잎사귀들을 통, 통.

추수철은 다가오고 있었으나 아무도 반기지 않았기에 광활한 보리밭은 황폐하게 버려진 채였다. 잡초가 우거진 보리밭은 그러나 쪼아먹으려는 새조차 없었기 때문인가, 잡초보다도 끈질기게 번성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장소에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처럼 지독한 생명력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바람은 모두 영주의 저택에 모였다가 사방으로, 광활하게 퍼진 삭막한 보리밭을 훑으며 달려나가 사라졌다. 웃자란 이삭들이 장대비를 맞고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꿈자리 사나운 고양이의 수염처럼 가달거리며. 설익은 보리이삭이 모이고 모여 누우런 물결을 이루었다. 퉁, 퉁퉁.

그리고 또 팅, 팅팅.

"엎었다! 홀? 아니면 짝!"

뿌옇게 흐린 맥주잔이 쾅, 철없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수정처럼 튀어다니는 주사위를 품고 두터운 술집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두터운 목재 테이블을 때리며 난 굉음이 허름한 술집 안에 괴괴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썩어가는 덧창이 조금씩 부서져가며 탁하게 우는 소리가 빈 자리를 메꾸며 들어왔다. 카운터에서 술잔을 닦던 우락부락한 주인은 두꺼운 눈썹 한 쪽을 쓰윽 올려 소리가 난 쪽을 노려봤다.

주인장의 시선 끝에는 기세도 등등하게 두터운 술잔을 붙들고 주변에 앉은 인물들을 돌아보는 인상 더러운 남자가 있었다. 인물들이라고 해 봤자 단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그 중 한 명인 외눈박이 늙은이가 썩은 나무둥치처럼 의자에 기대어 멀거니 술잔을 쳐다봤다. 그리곤 잠자코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려, 거기서 새끼손가락을 하나 펴서 남자에게 겨눴다.

"야. 그거 유리 아니냐?"

"그게 뭐요?"

턱에는 덜 깎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고, 오른쪽 입가에는 입술을 가로질러 세로로 쭉 찢어진 벌건 칼자국이 선명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아, 다 보인다고. 등신아."

남자의 옆에 앉아있던 긴 금발머리가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그녀의 앞에는 높은 챙모자가 쟁반처럼 얌전하게 테이블에 얹혀있었다.

입가에 상처가 난 남자는 눈을 모자의 챙보다 더 크게 뜨고 꿈뻑거렸으나, 곧 오리입을 하곤 맞받아쳤다.

"안 보여. 그래서 걸 거야 말 거야? 홀, 짝!"

"흑 6, 백 1."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금발 미녀는 툭, 내뱉었다. 노인 쪽은 잠시 안대를 들췄다. 그러다 자신에게는 사실 한 쪽 눈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석해했다.

"에라, 모르겠다. 흑 6, 백 1."

남자는 콧등에 주름을 자글자글하게 잡고서 둘을 번갈아 노려봤다. 그러곤 잡고있던 맥주잔을 팍 들어올렸다.

"...씨팔."

주사위를 내려다본 남자의 콧등이 더 쭈글쭈글하게 구겨졌다.

"페코, 우리 날강도야. 코르토 안 돌아온다고 우리 붙잡고 주접 좀 떨지 마, 제발. 그거 시끄럽고, 피곤하고. 그리고 하나도 안 웃겨."

썩은 마대자루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엎어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여자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개 맨날 똑같은 시간에 돌아오잖아."

그리곤 너무 매정하게 몰아붙였다고 생각한건지 양 어깨를 쓱 움츠리며 덧붙였다. 테이블 위로 쭉 뻗어버린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게 그녀의 버릇이었다.

"...내가 언제 그새낄 기다렸다고."

네가 언제 그 새끼 돌아오는 시간을 신경썼냐고, 내가 지금 주접떠는 걸로 보이냐고, 술에 꼴아박더니 내가 날강도가 아니고 광대새끼로 보이느냐고...반박하고 싶은 구절은 한두군데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뭐? 코르토가 어째?"

테이블 너머에서 아직 노망이 나기에는 한 끗발 못 미치는 늙은이가 생뚱맞게 목소리를 높여 끼어들었다.

"친하잖아요."

여자는 까만 점이 하나 박힌 섹시한 턱을 들어 엎드린 남자를 가리키며 얼버무렸다.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친해. 무덤 도굴꾼의 말을 듣자마자 페코즈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곤 문득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둔한 그의 머릿속에서 사실과 사실이 맞부딪히며 불꽃같은 의문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그의 입도 도로 닫혔다.

볼 장 다 본 사인데.

같이 갈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있으나 페코스는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절대 실행에 옮길 생각이 없었다. 노상강도에게 성당이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비록 강도짓을 하지 않은지 꽤 되었지만 성지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부정한 존재이기에 더욱.

축복이라면 남들이나 많이 받으라지. 속죄란 자신의 죄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자비를 구해봤자 용서받지 못할 놈은 별 도리가 없는 곳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맥주잔 속에서 동의를 구하듯 새하얀 해골이 고개를 비틀며 그를 마주보았다...

페코스는 소스라쳐 일어나 앉았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도굴꾼을 애써 무시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오한이 들어 양 팔을 쓸어올렸다.

이번 봄이 다 되어가도록 기름 한 번 친 적 없는 술집 입구의 오래된 경첩이 부조리한 근로환경에 항의하듯 삐그덕, 삐그덕 요란스레 울리는 소리에 동료의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피던 도굴꾼, 의미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노장이 고개를 돌렸다. 페코즈만 빼고.

술집의 입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가 갑작스런 시선 세례에 당황이라도 한 건지 발을 내딛으려다 만 것 같은 자세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담소중이셨습니까?"

코르토가 가눌 곳 없는 왼팔을 어색히 들어올리며 운을 뗐다.

"아니? 안녕 자기."

카트린은 왼손바닥을 활짝 펼쳐보이며 나머지 한 손으로 페코스의 등을 가볍게 톡 쳤다. 페코스는 양 팔을 감싸안은 채 식탁에 콧잔등을 붙이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자고...도박하고 있었는데."

늙은 바우커만이 맞장구를 쳤다.

"차라리 자고 있었다고 하지, 영감님. 성전기사 앞에서 도박했다고 그러는 사람이 어딨어?"

"아니, 저 놈이 그런 거 가지고 늙은이를 막 대할 놈이야?"

대답대신 실없이 웃으며, 그러나 웃음기 없는 눈초리로 카트린이 눈치없는 성전사를 재차 불렀다.

잠시 안색이 좋지 않은 페코스를 향해 뻗었던 팔로 차마 감싸줄 수는 없어 거두고 팔짱을 끼고 만 것은 웃으며 이제 농담을 주고받을 수는 있어도 아직은 그 이상 들어서지 못하는 그들의 불편한 동지애 때문이리라.

그리고 코르토와 카트린의 사이는 농담마저 오가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관계였다. 비록 그게 카트린이 눈알을 진자처럼 데룩데룩 굴려가면서 한 두어번 더 눈치를 준 후에야 겨우 알아차린 코르토를 위한 변론은 될 수 없었으나.

페코스는 둔중한 쇳조각이 절그럭 절그럭 부딪히며 다가와 곁에 설 때까지, 빗물에 젖어 눅눅하고 살갖처럼 미지근한 철제 손갑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때까지 구덩이의 깊이를 재는 무덤지기처럼 구부정하게 테이블 위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가?"

"아니."

코르토는 짧게 대답만 하고 여전히 올려다 볼 생각도 하지 않는 페코스를 가만히 기다렸다. 노상강도의 입은 재간 좋은 손가락과 발놀림 만큼이나 재빨랐기에. 그보다 한참 느린 그의 장기는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 뿐이기에.

"너무 마셨어."

무법자는 그제야 고개를 가볍게 털고 일어서면서 덧붙였다. 의자보다 길어 바닥에 질질 끌리던, 지저분한 도둑의 행색에 걸맞지 않게 윤이 반들반들 나는 가죽코트를 집어 팔을 꿰었다.

성전사는 술자리를 나설 준비를 하면서도 여전히 어두운 동료의 안색을 살폈다.

기운없이 일어선 페코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도굴꾼이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페코, 주사위는 안 가져가?"

노상강도는 대답 대신 카트린을 향해 가운뎃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홀을 나서도록 카트린이 주먹감자로 응수하는 것도 보지 않고.

노인과 금발 미녀가 계단막이 저 편으로 사라질때까지 말없이 강도를 부축하던 기사는 해묵은 목조 통로로 들어선 뒤에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혼자 있고 싶은가?"

오랜 동료는 뱁새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르토의 꽉 막힌 투구를 흘겨봤다.

"...그걸 물어봐도 되게 생겼냐? 내 꼴이."

보이지는 않아도 점잖은 성당 기사의 얼굴이 목뿌리까지 시뻘겋게 물든 꼴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페코스는 시선을 거두며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이다."

"사심이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라..."

"누가 궁금하댔냐. 그런 말을 하면 더 구차해지지."

코르토는 멈춰서서 목졸린 닭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날강도는 그 꼴을 보며 비실비실 웃었다. 고결한 기사 나으리께서는 결혼까지 해 본 주제에 이런 농지거리에 도무지 면역이 없었다

복도에 머무르며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것도 괜찮았지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라고 하면 참회실에 하루종일 틀어박혀있는 것 밖에 모르는 이런 샌님을 언제까지고 놀려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방,"

혼자 있기 싫어.

그렇게 말하려다 페코스는 퍼뜩 입을 닫았다.

혼자 있기 싫어요, 외로워요...무슨 3류 통속소설 낭독꾼이 뭣만 하면 읊어대는 뻔한 수작질같은 소리 아닌가. 그런 의도는 전혀 없는데. 그리고 전직 강도는 옆의 철밥통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적어도 알량한 자존심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기 전까지는.

더 그럴싸한 말을 몇 가지 입 속에서 굴려보다 빠르게 내뱉었다. 상대방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침대 좀 빌리자."

페코스는 돌머리였다.

"...직설적이군?"

"썅, 그게 아니...닥치고 쳐가자 좀."

갑옷이 덜컥거릴 정도로 동요하는 코르토를 외면하며 페코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식한 게 딱히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지금만은 알파벳이라도 배울 걸 그랬다고 절실하게 생각했다.

글자를 읽지 못해서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럴싸한 수작질 하나 배운 적 없어서 그 여자에게 낭만적인 소리도 한 마디 못해줬다.

이런, 페코스는 입가의 상처를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한 번 떠올리니 자꾸 좆같은 쪽으로 사고가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업보가 돌아온 셈이지.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애를 써도 노상강도의 기억은 자꾸만 밑으로, 밑으로 끌려내려갔다. 우중충한 그 날, 부서져 땅에 나동그라진 역마차가 있던 곳으로.

박살난 마차 안에는 총에 맞아 숨이 끊어진 여자, 그리고 그 품 안에는 페코스와 꼭 닮은 사내아이의 시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죽어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사적이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너무하잖아, 내게만 분풀이하면 됐잖아. 버리고 달아난 옛 여자까지 휘말려들게 할 필요는 없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두 구의 시체가 쪼그라든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페코스를 쳐다보았다. 애인을 쏴죽인 남자는 넋을 놓고 그들의 얼굴을 마주봤다.

군데군데 쪼개지고 갈라져 썩은 낙엽처럼 짙은 갈색 목재가 비치는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장례 예식이 끝나고 나서 열릴 마호가니 관짝의 뚜껑처럼. 과거의 망령과 청산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업보에 목이 졸려 익사해가던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코르토는 딱딱한 싸구려 침대에 앉혀놓아도 여전히 힘이 쭉 빠진 것처럼 늘어져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단짝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투구를 벗었다. 무거운 철갑에 눌려 납작하게 누워있던 들쭉날쭉한 밤색 머리카락이 숨이라도 들이마시듯 들떠올랐다.

"무슨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건지는 내 모르겠네만, 일단 자네에게 감사하고 싶어. 성당에서 돌아오는 내내 말을 몰면서 오늘은 쉽게 잠들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투구를 거치대에 걸어둔 후 머리보호대를 벗고,

손갑을 벗지도 않은 손으로 숨이 죽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어 헤집으며 성전사는 입을 놀렸다. 뒤이어 흉갑의 이음매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페코스는 유령처럼 쳐다보았다.

"도와줄까."

"아니, 이 정도야 나 혼자서...억!"

손사래를 치던 기사는 그러나 어깨 너머로 손을 뻗다가 뼈라도 부러졌는지 비명을 지르며 어깻죽지를 잡았다. 페코스는 가만히 한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리곤 막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조난자처럼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어냐, 그걸 혼자 벗게..."

전직 노상강도는 어깨를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선 친구의 흉갑에 손을 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힘들면 말을 해, 혼자 지랄 좀 하지 말고."

기사는 겨우 단짝의 능숙한 도움을 받아 무거운 흉갑에서 벗어났다.

그 와중에 혼잣말을 들은 건지, 크기만큼이나 무거운 쇳덩어리를 투덜대며 거치대에 걸어두는 모습을 가자미눈을 뜨고 바라보던 성전기사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할 말이지."

딱히 작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들으라는 것마냥.

한바탕 일을 끝내고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던 노상강도가 그 한 마디에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이자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친애하는 또라이자식을 노려봤다.

"뭐?"

"그것때문 아닌가? 자네의 골동품 로켓."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질세라 눈썹을 세모꼴로 치켜올리며 성전기사는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이제는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이해자이지만 더럽게 말수 적고 재수없는 불한당을 꼬아봤다.

페코스는 대답 대신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코르토를 외면했다. 눈치없는 성전기사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팔짱을 끼고, 결국 말했다.

"자네가 이 꼴이면 항상 그게 문제더군."

둘 다 '문제'가 그냥 골동품 로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있었다.

오래 전에 강도질을 그만 둔 불한당의 가죽 자켓 속 낡은 로켓 안에는 사진이 한 장 들어있다. 원래는 노상강도의 것이 아닌 로켓. 그의 것일 수도 있었지만 오래 전에 포기해버린 가족사진 단 한 장.

코르토는 단짝이 품 안에서 꺼내질 못하는 싸구려 로켓에 도대체 어떤 사연이 얽혀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여자와 꼬마가 어떻게 되었는지, 단짝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호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가족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차이라면 성전기사는 그들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놓기 위해 이 먼 땅까지 왔다는 거고, 그의 단짝은 가족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달아나고 또 달아나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장자리까지 도망쳤지만 노상강도는 여전히 자신의 죗값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도 그러할 것이다. 페코스는 그 사실조차 외면하려고 기를 썼지만 종종 현실에게 따라잡히고, 그리고 깨닫곤 했다.

공허한 나비의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마주하는 진실. 자신이 절망의 거대한 수렁에 얼마나 깊이 빠져있는 건지, 안개처럼 사방에 깔린 죄악은 얼마나 짙은지, 그리고 그 지경까지 내몰리게 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잘못때문이라는 것까지.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불쑥, 손갑을 벗느라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성전사가 말했다. 페코스는 생각에 잠긴 채 입술을 가로질러 세로로 얇고 길쭉하게 난 흉처를 매만지다가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무룩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가..."

...이게 아닌데. 코르토는 단짝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려고 했다. 노상강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음울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코르토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손을 뒷통수로 돌려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깨는 꽤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그게, 내가 못미더운 건 나도 아네만,"

"그래, 손버릇."

"어...맞아..."

"흡혈귀 이야기라면 됐어. 이미 지난 일이고..."

"...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알고 지냈는지 기억하나?"

골백번도 넘게 우려먹은 흡혈귀 이야기가 또 튀어나올새라 손버릇 나쁜 성전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사실, 도벽은 한참 전에 없어졌다. 요즘은 오히려 반짝이는 것만 보면 뒷걸음까지 치게 됐을 정도다. 끔찍하게 죽을 뻔 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 이야기 하려던 게 아닐세. 얼마나 됐지? 기억하나?"

"...됐지, 꽤."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다. 노상강도는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우리가...어...이렇게 되고 나서는?"

"...몰라."

어색한 침묵. 둘 다 귓뿌리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제법 됐지. 코트야드, 그래, 그 쯤부터."

"...음, 꽤 됐군."

"그래...생각해보니 꽤 됐군, 음."

성전사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날 믿어줄 때도 됐다고 생각하네만."

페코스는 멍한 얼굴로 코르토를 바라봤다.

"믿고 있잖아."

"아니잖아."

"개소리, 아니면 내가 내 등짝을 어떻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계속 말하고 있지 않은가, 힘들면 의지하라고."

그 말을 듣자 페코스는 다시 입을 꾹 닫아버렸다.

코르토는 고집 센 단짝의 얼굴을 보고, 아직 벗지 못한 자신의 다리갑옷을 내려다봤다.

"코트야드, 그래.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네가 나를 감싸줄 줄은 몰랐네. 그 후에 있었던 일은...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고."

"너 때문이 아냐. 네놈 좆되면 나머지 셋까지 좆되니까 그런거지."

"그래, 그렇다고 치지. 하여간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태까지 자네는 내가 힘들 때마다 도와주고, 위해주고, 그리고...어쨌든 곁에 있어줬네. 놀라우리만치 헌신적으로."

"동료니까..."

"단순하게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나도, 자네도."

오랜 동료는 말이 없었다. 코르토는 벽 한 켠에 놓인 낮은 수납장에 걸터앉았다. 육중한 갑옷과 성전기사의 몸무게에 나뭇장이 소극적으로 저항하듯 끼익, 울었다.

"자네가 없었으면 내가 모기인간에게 물렸겠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이만큼 오래 버틸 수도 없었을테고. 큰 상처 없이 살아남은 것도..."

"집어치워."

강도는 불그죽죽한 귓바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난 끈적끈적한 거 안 좋아해."

"그래서 거리를 두는 건가?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혼자 삭이면서?"

"난...누가 그랬다고?"

"난 아직도 자네가 왜 영지로 왔는지 몰라."

네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자랑스러운 이유가 아니거든. 전직 강도는 말을 속에서 삭였다.

"자네가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잘 그러다가 문득 표정이 어두워지고, 오늘처럼. 그리고 거북이처럼 입을 딱 다물어버리면, 글쎄."

성전을 찾아 가장 어두운 땅 끝까지 진군해 온 성전기사는 가만히 발치를 노려봤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자네 옆에 멍하니 붙어있다가...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나 걸어보고...자네가 나아질 때까지. 그럴 때마다 난 무력한 기분이 드네. 자네에게 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게 아닌가, 하고...그리고.."

코르토는 고개를 들어 페코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정말 자네라는 사람을 알고 있기는 한 건가, 싶네. 이럴 때의 자네는 보이는 것보다 한참 더 멀리에 있는 사람같네."

코르토는 기대어있던 수납장에서 몸을 일으켜 페코스가 앉아있는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둔중한 무게를 받아내며 침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페코스는 깍지낀 손에 힘을 주었다. 코르토는 고개를 푹 숙인 페코스의 얼굴을 비맞은 자이언트 슈나우저같은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그 날, 부서진 역마차 한 대가 뒹굴고 있는 황량한 교외에 난 마찻길에 성전기사가 들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찾아헤메는 명예도, 정의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알더라도 성전기사는 거기 있으려 할까.

있으려 할 것이다. 페코스는 잘 알고있었다.

"아내와 아들에게서 도망쳤다고 했지."

기사는 마치 칼에라도 찔린 것처럼 경련했다.

강도는 꾹 맞잡은 손아귀에서 플린트락 권총의 묵직한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방금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총신의 열기도 또한.

"...달아났지,"

세상 끝까지 도망쳐온 기사는 마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부정하지는 않겠네."

성전기사의 목소리는 마치 총알처럼 페코스의 가슴팍에 후벼들어와 꽂혔다.

언젠간 나에게서도 달아나겠지. 비대한 자책감으로 짜맞춘 가학의 수레바퀴는 나락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따라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단 한 번, 가볍게 밀어주기만 한다면. 페코스를 멈추게 만든 건 친구의 다음 말이었다.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했네. 우리 모두 알지 않나,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이런 땅 끝까지 달아난 끝에야."

코르토는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잡힌 것 없는 손등에 푸르죽죽한 힘줄만 튀어올랐다.

"...요리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성벽에 불을 놓는 술탄의 군대가 떠올랐네. 목검을 휘두르는 아들이 대검을 든 이슬람 기마병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들을 후려치기도 했어. 난 내가 두려웠네.

울면서 땅바닥을 구르는 아들에게서 언젠가는 칼을 들고 아내와 아들에게 덤벼들 내 모습이 보였네. 그래서 달아난 거라고 생각했어. 그들에게서 나를 떼어놓는 게 올바른 일이라고. 내가 사라져주는 게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페코스는 부서진 마차 바퀴를 보았다.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난 운명.

"나는...그들은 다 죽었네.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이것보다는 훨씬 나은...그런 방법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어. 너무 멀리 왔어. 이젠 돌이킬 수도 없네.

코르토는 꼭 쥔 손을 펴 굳은살 박힌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그렇게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고개를 들어 페코스를 쳐다보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꽉 쥐었다.

페코스는 눈을 감았다. 두 구의 백골이 마차 안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성전기사가 마냥 온전하게 페코스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오래 전에 사라진 가족을 보는가. 사실 페코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페코스 또한 우중충한 그 날의 교외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문제였다. 페코스는 자신의 오랜 짝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부서진 마차 속에 널부러진 두 구의 시체를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부정하고자 해도 상반되는 두 가지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페코스가 죽을 때까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 속에서 오직 자신의 손을 움켜쥔 코르토의 단단한 손과 가슴 속에서 맥박치는 심장만이 온전하게 존재했다. 페코스는 눈을 뜨고 성전기사를 바라봤다.

날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말해줄게."

코르토는 대답대신 놀란 토끼처럼 단짝을 빤히 쳐다봤다. 그 맑은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워 코르토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코르토는 페코스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었다.

"고마워."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가. 페코스는 코르토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코르토는 낡은 로켓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페코스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코르토가 페코스를 사랑하는 한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하리라.

그 때가 되면 이 무거운 짐도 사라지겠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짐이라는 건 페코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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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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