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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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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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를 맞이하는 아침이 되었다. 저절로 평소와 같은 기상 시간에 눈이 떠진 나누는 인기척을 느꼈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나누가 아는 한 순무는 잠버릇이 고약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잘도 자는 중이었다. 끔뻑거리던 눈을 내리깔고 순무의 속눈썹을 보며 무슨 일 때문에 나누의 곁에서 잠을 청했을지 생각해 본다. 밤중에 천둥 번개라도 쳐서 무서웠나? 벽을 통해 팬텀이라도 들어와서 겁을 먹었나? 그 어느 것도 믿을 순 없었다. 계속 이렇게 순무를 보는 것도 좋았으나 순무가 눈을 떴을 때 나누만큼 놀랄 것을 생각해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없는 동안 깬다면 좋을 테고,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 있었음을 알고 부끄러워한다면 더 좋을 터였다.

아침부터 즐거운 기분으로 얼굴을 씻고 면도까지 끝낸 나누는 단화를 한 손에 들고 본채로 향했다. 빗물이 덜 말라 추적거리는 땅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여름의 풀냄새를 풍겼다. 세탁실에서 손빨래로 단화를 세탁한 뒤 밖으로 나와 볕이 잘 드는 곳에 세워 둔다. 직원 몇 명이 지나가며 인사를 해서 나누도 인사를 올렸다. 별채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습도를 머금은 여름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가면 순무도 잠에서 깬 상태였다. 나누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순무의 얼굴이 당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순무는 동작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좋은 아침, 하고 인사했다. 나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아침 인사를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누의 자리까지 침범한 것을 알고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 차라리 계속 자는 척을 할 걸 그랬나 보다. 재밌었을지도 모른다.

어딜 다녀왔냐고 묻자 나누는 비에 쫄딱 젖었던 단화를 세탁해 볕에 말려 두고 왔다고 전했다. 순무는 이불을 개며 그래…… 하고 대답해 보인다. 나누는 그런 순무를 배려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놀려봤자 서로에게 좋을 건 없어 보였다.

아침을 먹기 전, 혈기왕성한 둘은 별채의 뒷길을 올랐다. 나누의 깜까미도 순무의 가디도 서로 장난을 치는 것을 보니 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도착하면 식스테일은 햇빛을 가려 주는 무성한 나뭇잎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행을 보았다.

배틀을 시작하자 순무는 아까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서 나누와의 겨루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바짝 붙어 잠들었다는 부끄러움도 점차 사라져 갔다. 나누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며 상대의 움직임을 쫓았다. 역시 이런 곳에 있기엔 아까운 실력이다. 눈으로는 가디를 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완고한 순무의 부모를 떠올렸다. 정말 모두 화가 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나누에겐 원망 대신 할 일이 있었다.

한참 후, 더위에 지쳐 헥헥거리며 다 같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순무는 깜까미의 순발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했고 나누는 멋쩍게 웃으며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순무는 맹한 얼굴로 시커먼 속을 한 나누의 진심도 모르고 포켓몬에 관해 떠들었다. 나누는 단번에 애욕을 느낄 만큼 순무에게 빠져 있었지만, 순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안고서 더위에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순무는 뒤따라오는 식스테일에게 다음엔 너도 같이 해, 하고 말을 건넨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식스테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포켓몬들을 데리고 본채 건물의 뒤쪽으로 향했다. 부엌 뒷문 안으로 들어갔던 순무가 플라스틱 바가지에 시원한 물을 받아 와선 깜까미와 가디에게 뿌려 주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물을 떠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물줄기가 그의 턱을 타고 똑똑 떨어졌다. 순무의 권유에 나누도 한 번 찬물로 얼굴을 씻었고 남은 물은 땅바닥에 휙 뿌렸다.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사라진다.

어영부영 마당에서 시간을 죽인 뒤 둘은 직원들이 차려 준 아침밥을 먹었다. 방으로 돌아간 후 나누는 책을 폈고, 순무는 나누의 허락을 받고 좌식 책상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일필휘지로 훈련 일지를 작성했다. 순무는 옷자락을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나누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다. 곧은 허리와 둥글둥글한 무릎, 겨우 보이는 정강이, 쪼끄만 발. 자잘한 흉터가 새겨진 손. 여름임에도 긴 옷에 가려져 잘 볼 수 없는 순무의 일부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저절로 그 선을 하나하나 따라가게 된다. 나누는 남몰래 즐기는 이 음흉한 버릇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 가는 것이 아깝다며 마음을 고쳐먹은 나누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다. 순무는 그가 집중하는 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미 많이 읽어서 닳아버린 책을 또 꺼내 읽었다. 다음 휴일에는 서점에 가서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박학다식해 보이는 나누에게 좋은 책을 추천 받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자 다음 휴일이 기다려졌다.

"이런, 며칠 후에 태풍 예보가 있네."

주인장이 신문을 읽으며 점심을 먹다가 불쑥 말했다. 호연 지방은 남쪽에 있기에 오는 족족 태풍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나누가 대비 같은 걸 하냐고 묻자 그는 태풍이 올 동안 손님을 받지 않고 바람에 날아갈 만한 물건이 있는지, 하수구 등을 확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관은 일 년 전쯤 전체적으로 공사를 했기에 작년 여름에도 잘 버텼다고 덧붙인다. 밥그릇을 비운 주인장이 먼저 자리를 뜨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순무가 별채도 무사할 거라고 말해 왔다.

"우리도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겠네."

나누의 말에 순무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동시에 흠칫한다. 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식탁 뒷정리를 하고서 나누는 먼저 별채로 돌아갔고 순무는 카운터 너머 휴게실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순무가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일해 온 직원과 화면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중에 어쩌다 나누의 이야기가 나왔고, 직원은 나누가 요즘 젊은 애들 같지 않다며 대견스럽다고 칭찬했다. 순무도 거기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로 한 걸음씩 올라오는 길에 이상하게 순무는 가슴속이 답답했다. 무언가 걸려 있는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더위를 먹었나 싶어 방으로 돌아와 에어컨 바람을 맞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누는 순무의 언짢은 표정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물었다. 순무는 옷장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나누의 옆에 앉았다. 아까 직원이 나누에 관해서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저 생각 없이 나온 말들에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나누와 자신을 비교해 버렸다. 그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거야, 말하기 싫은 거야?"

약간은 다그치는 느낌이 들었을까 봐 곧바로 너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하고 걱정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순무는 언젠가 보았던 슬픔을 닮은 얼굴로 나누를 보았다. 그 순간 나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종류의 위로를 바라는 듯한 순무의 얼굴에 져 버리고 만다. 조심스레 안아도 되냐고 묻자 순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누는 두 팔을 벌리고 어제처럼 순무를 안아 주었다. 순무가 어깨에 이마를 붙이면 서로의 체온이 다가왔다.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그러고 있다가 순무가 고개를 들자 좀 나아졌는지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졌냐고 물어보자 그렇다고 대답해서 안심이 된다. 누구도 순무를 상처 입힐 수 없다. 나누는 그렇게 의지를 다졌다. 그동안 순무는 나누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맞춤을 내려 주길 바라는 애달픈 충동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나 당연히 나누는 그 마음을 알 리가 없었고 졸린 건가, 하고 생각해 버렸다.

그렇게 별일 없이 며칠이 지나고 예보대로 하늘이 끄물끄물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내내 카운터는 태풍으로 인한 예약 취소와 상담 때문에 진땀을 빼느라 바빴고, 여관도 태풍 예보가 내린 일수 동안 휴무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 투숙객이 체크아웃을 하고는 하늘이 더 사나워지기 전에 부리나케 떠났다.

나누를 제외한 직원들은 모두 출퇴근을 했기에 손볼 곳만 손보고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다 같이 점심을 먹고 나서 청소와 정리, 태풍 대비를 했다. 용암마을에서 나이 지긋한 전문가를 불러 배수구를 확인했고 창문마다 테이프를 발라 두었다. 둘은 마당에 놓인 철제 쓰레기통을 포함해 바람에 쓰러지거나 날아갈 수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뒷마당의 창고로 옮겼다. 여관은 오르막길에 위치해 있었기에 침수될 걱정은 없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주인장은 비상용 손전등이 작동하는지 확인하다가 건전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둘에게 마을로 내려가서 건전지와 생필품을 사와 달라고 부탁했다. 활동하기 편하도록 사복으로 갈아입은 둘은 거칠어지는 바람에 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을로 내려갔다. 비가 올 것을 알리는 눅눅한 공기에 거리에는 관광객도 적었고 상점들도 벌써 불을 꺼둔 곳이 있었다.

습기 속에서 걸어 내려오느라 지친 둘은 잠깐 거리의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이윽고 나누가 옆에 서서 잠깐 담배를 피울 동안 순무는 아버지가 메모에 적어준 것들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누는 담배를 다 태운 뒤 필터 맛을 느끼며 쓰레기통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어쩐지 이 순간이 기회로 여겨져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열심히 수련하는 순무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기 때문에 전에 봐 두었던 가게에서 그것을 구매한다. 그리고 또 혹시나 해서 하는 마음으로…….

'세 개까지 다 쓸 수 있을까.'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고 까만 종이 상자를 손에 든 나누는 입수량을 확인하고는 누가 볼세라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나라도 쓸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며 순무를 찾으러 간다.

잠시 후, 각각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직원들은 이미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이제 여관에는 주인장 내외, 순무, 나누뿐이었다. 아이들이 사 온 것을 차례로 정리하는 여주인장이 이제 가서 쉬어도 된다고 말했다. 주인장이 막 나가려는 나누만 불러 세우더니, 이럴 땐 자연재해라 유급으로 쳐 주겠다고 설명했다. 나누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먼저 나와서 기다리던 순무와 함께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하루 종일 나누와 방 안에 같이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무는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온갖 감정들이 둥둥 떠다니는 순무와 달리, 나누는 책을 펴도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태풍이 가실 때까지 순무와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함께 붙어 있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달라졌으니 당연했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잡념이 많아진 나누는 담배도 피울 겸 포켓내비를 손에 들고 일어나서 별채의 현관문을 열었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제일 먼저 보였다. 어머니는 호연의 태풍 소식을 듣고 나누가 걱정되어 연락했다고 한다. 나누는 괜찮다고 한 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호탕한 웃음소리로 웃으며 네 걱정이나 하라며 농담을 했다.

나누는 아직 아무에게도 순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 봤자 반가운 반응이 없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나누가 어떤 친구를 사귀든 저 알아서 할 일이라며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몇 안 되는 부모님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순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저녁 뉴스에 자기 얘기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농담을 섞어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눈 깜짝할 순간,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누는 발길을 돌리고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는 순무의 물음에 웃으면서 어머니가 걱정돼서 전화해 주셨다고 했다. 그러자 실례인 건 알지만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다. 나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냥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기에 괜히 묻는 게 껄끄러운지 순무도 더는 묻지 않는다.

어수선한 환경에서 교재를 보다가 빗방울이 창문을 톡톡 치고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별채의 창문에도 테이프를 잘 발라 두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누는 기지개를 켜고는 씻고 오겠다고 한 뒤 새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샤워를 하며 어떻게 해야 순무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지 생각해 본다. 아까 샀던 '선물'은 그에게 애정을 느끼기 전부터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것을 주며 좋아한다고 하면 넘어오게 될지도 모른다. 나누가 순무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여지를 보이면 눈치챌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만 하다가 샤워를 마친 나누가 방으로 돌아오면 순무도 따라서 샤워를 하러 욕실로 사라졌다. 나누는 수건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말리다가 문득 벽에 붙어 있는 순무의 가족사진을 보았다. 좀 더 젊은 순무의 부모님과 어린 순무. 나누는 저렇게 환했던 순무의 웃음을 빼앗은 그의 부모님을 보자 심기가 불편해진다.

'사장님, 지금 저는 당신네 귀한 자식 구멍에 쑤셔 넣을 용의가 가득합니다.'

그 한 마디를 사진 속 인물에게 속삭여 본다.

여전히 빗소리만이 울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나누는 교재 내용에 집중했고 순무는 음악 테이프를 들으며 너덜너덜한 책을 읽었다. 그것은 순무가 어릴 때부터 읽어 온 포켓몬을 돌보는 법에 대한 책이었다. 거의 백과사전과 같은 내용이라 두께도 그것과 비슷했다. 순무는 나누의 포켓몬인 깜까미에 대해 알고 싶어져 목차를 뒤져 본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나누의 유일한 포켓몬이었기에 어떤 습성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기본적인 설명, 어두운 동굴에서 주로 지내는 생태 환경, 보석을 먹는다는 신기한 점들이 약간 오싹하게 느껴진다. 나누는 이런 무서운 깜까미의 어디에서 매력을 느낀 걸까.

어두운 바깥의 색과 빗소리, 하얀 배경 위의 까만 문자들이 어우러져 졸음을 이끌어낸다. 나누는 꾸벅꾸벅 졸다가 스르르 책상으로 쓰는 밥상에 엎드려 버린다. 툭 쓰러지는 그 소리에 순무는 고개를 돌렸다. 나누가 잠든 걸 보고는 귀에서 이어폰을 뺀 뒤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 무거운 것을 옮기고 마을까지 걸어서 다녀오느라 꽤나 피곤한 모양이다. 순무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손을 올리고 나누의 귀 위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검회색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감각에 나누는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순무는 나누를 쳐다봤고, 나누도 순무를 쳐다봤다. 공부하다 잠깐 졸아버린 것 같다. 그런데 순무는 얌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피곤했구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낀 순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두세 번 끄덕였다. 대체 잠든 사이에 뭘 했던 거야? 순무는 나누가 알았을까 조바심을 내며 의문이 가득한 그의 시선을 피해 일어선 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누는 뒤통수를 긁으며 하품을 했다. 당황한 순무에게 진정할 수 있게 안아 줄까? 하고 말해 보고 싶은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무는 곁눈질로 본 나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자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은 더욱 다급하게 뛰었다. 그러나 나누는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울 뿐이었다. 순무가 나누를 멀뚱히 쳐다보자 나누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포켓탭을 달라고 한다. 순무는 떨지 않도록 하며 나누에게 다시 음향 기기를 돌려 준다.

"같이 들을래?"

순전히 호의로 물어본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순무는 나누의 오른편에 누웠다. 이불을 깔지 않은 방바닥은 서늘했다. 둘은 평소처럼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 끼고 천장을 바라본다. 나누는 어릴 때부터 모아둔 음악 테이프를 몇 개 챙겨 왔었다. 하나씩 바꿔가며 들었기에 순무도 이젠 거의 다 들어본 셈이다. 이 방에는 라디오가 없어서 요즘엔 무슨 음악이 유행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음악 잡지를 살 것이기에 딱히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순무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순무는 느릿한 박자의 음악이 나오자 서서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고 나누를 보면 그 시선을 의식한 나누도 고개를 돌려 순무를, 눈동자를 정확히 바라본다. 슬슬 딱딱한 방바닥에 뒤통수가 아파 올 무렵까지 둘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희열 가득히 웃으며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래도 일어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남들은 보기 힘든 나누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함께 미소를 짓고 있는 순무는 망설이며 왼손을 살짝 움직였다. 손톱 끝이 다다미 깔린 방바닥을 긁는 감촉이 좋았다. 천천히 왼손을 옮겨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나누의 오른손 옆에서 딱 멈췄다. 분위기를 타고 들떠가는 순수한 정애는 그의 손짓을 부추겼다. 빗소리, 음악 소리,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등으로 느껴지는 살랑한 바닥의 온도. 아무런 욕심도 없어 보이는 엷은 미소. 형광등 빛을 받아 보석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 그때 순무는 책에서 봤던, 깜까미가 보석을 먹는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누는 오른손에 무언가가 닿이자 눈동자를 내리깔았다가 놀라서 눈썹을 찡그렸다. 순무의 흉터진 손이 나누의 손등에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로 시작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누는 미소를 거두고 눈동자를 올려 순무를 보았다. 순무는 몇 번 보았던 슬픔을 닮은 표정으로 나누를 보고 있었다. 아마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이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순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나누는 오른손을 뺐다. 순무의 얼굴이 아쉬운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빼냈던 오른손을 순무의 왼손에 올려 두고는 손가락을 오므려 그 손을 잡았다. 순무의 얼굴이 놀라움에서 애틋함으로 바뀌는 그 짧은 순간도 지켜보았다. 나누는 순무가 왜 이러는지, 무슨 마음인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작은 손이 빠져나갈까 봐 꽉 잡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순무는 울고 싶어졌다. 저도 모르게 복잡한 감정에 이끌려서 해 버린 행동이었는데 나누가 거기에 대답을 들려 준 것이다. 그 대답은 너무나 강렬해서 잡힌 손에서 아픔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누는 손을 잡은 그대로 몸을 밀고 순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비어 있던 왼손을 들어 순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순무는 눈을 감고 나누의 손길을 받았다.

흘러나오던 곡이 마지막 음을 두드리고 끝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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