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간의 밀회 6
사천왕 자리를 하나 꿰찬 이후로는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여름휴가 때마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평소에는 치고 올라오는 젊은 트레이너들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특훈에 전념하곤 했다.
대부분의 트레이너들이 마지막 관문인 권수에게 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깝고 아쉬운 만큼 못된 말이나 보복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 것엔 신경쓰지 않았다. 나쁜짓을 하는 트레이너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지 않아 포켓몬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챔피언 자리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원금에 관해선 반쯤 농담이었으나, 문하생을 받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직 빛내지 못하는 재능을 가진 트레이너가 분명 숨어있을 거라 믿었다. 미로마을 포켓몬 박사와의 전화를 통해 '문제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깨우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 아이-순무는 서툴러서 또래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그때문인지 소유한 포켓몬들과의 유대가 강했다. 사회성도 부족하고 포켓몬 지식에 관해서도 모자란 것이 많아 권수의 방식대로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강사 시절에 붙은 별명답게 미친듯이 거칠게 굴어도 울지 않고 어떻게든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걸 보자 괜히 스스로가 뿌듯했다. 당연히 순무의 성장을 위해 그걸 티내지 않고 몰래 마음 속에서만 기뻐했다.
강하게 키워가는 재미가 붙을 무렵에는 그 아이에게 못된 마음을 먹기도 했다. 좋아한다고 매달리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정식 자격도 없는데 선생님이라 부르며 어느새부터 자신에게 애정을 키워온 아이가, 고작 사춘기 때의 치기와 방황때문에 제자리에 머물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순무가 타지방에 가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문하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 지원금이 끊겨도 상관없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제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자가 애태우는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머리란 얼마나 교활한지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저절로 순무와 지냈던 날들이 떠올랐다. 망망대해에서도 쓸쓸함이란 걸 느껴본 적 없었던 권수는 자나깨나 순무 생각만 했다. 음식은 입에 맞을지, 사교성이 없어서 괴롭힘 당하지는 않을지, 힘든 일정을 잘 버텨내고 있을지…….
후회가 길어지자 결국 주지 못한 은반지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뱉을 때가 늘었다. 줄 걸 그랬나? 줄 걸 그랬다. 어느날부터 권수는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함께 주려했던 목걸이 줄에 그 은반지를 걸고 다니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목빠지게 기다리던 순무의 소식이 날아왔다. 마당 청소를 하던 도중, 우편물을 주러 온 우체부에게서 엽서를 받았을 때는 손이 떨릴 정도였다. 눈동자는 엽서에 인쇄된 가라르 지방의 풍경이고 뭐고 다짜고짜 글자부터 쫓았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잘 해내가는 중이라고 한다. 언어실력도 늘어가는 중이고 친하게 지내는 트레이너들도 생겼다. 새로운 포켓몬을 잡아서 불타입 팀을 꾸리는 중이라는 말이 너무나 순무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이미 한참 전에 쓴 엽서였기에 또 어떤 새로운 소식이 올지 기대가 되었다.
권수는 당장 순무의 본가에 전화를 걸어 아드님의 엽서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그의 부모님 또한 집에 엽서가 왔다며 굉장히 기뻐했고, 전부 다 권수님 덕분이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권수는 자기가 좋아서 한 일들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내기 위해 엽서를 샀다. 순무의 고향인 용암마을의 풍경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휴대기기의 발달로 편지쓰는 행위가 드물었기에 무슨말을 써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안녕, 단 한 마디만을 적고 손을 멈췄다. 작은 엽서에 많은 말을 담기란 힘들었다. 최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넣지 않고서 힘내라, 잘 해내면 빛이 보일 거다, 네가 자랑스럽다, 응원한다, 그런 말들을 썼다.
얼마 후, 간만에 육지로 돌아와 권수의 집에 묵게 된 하기에게 술상을 차려주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면서 순무가 보낸 엽서를 자랑했더니 하기는 네가 낳은 자식이라도 되냐며 권수를 놀렸다. 그렇게나 들떴나? 하지만 상관없었다. 순무는 권수의 자랑이자 호연의 미래였다. 호연 사람들 모두가 순무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었다.
권수는 아이들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뭘 잘 하는지 알아내고, 노력해서 성장하는 걸 보면 너무나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트레이너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하기는 딱히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순무는 다르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연애는 아니라며 권수의 허벅지를 때렸다. 권수는 손바닥으로 맞은 부위를 문지르면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장난스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며칠을 쉰 하기가 다시 바다로 떠나자 권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아직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 언제 호연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나같은 건 잊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는 아직 젊은데.
언젠가 순무에게 욕정을 품었던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작지만 따뜻한 몸, 매끄러운 뺨, 작은 입술,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눈동자. 전부 권수의 것이 될 수 있었지만 놓아준 건 왜일까. 순무의 미래를 위해서, 라는 것도 사실 도피처로 삼고 싶은 핑계일지도 몰랐다. 아직도 순무에 대한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련만 될 거라 생각한 권수는 유난히 순무가 좋아하던 자신의 파비코리와 해안을 산책하다가, 반지를 달고 다닌 목걸이를 벗어서 저멀리 내던졌다. 태양빛을 받고 한 번만 반짝인 은반지와 목걸이가 바다에 퐁당 빠졌다. 이미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다를 보고 있자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쌓인 그리움은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러나 순무를 향한 그리움은 여전히 마음 속에 쌓여 있었다. 권수는 그에게 순무의 존재가 이렇게나 컸음을 깨닫게 되었다. 미련을 가지기 전에 미련을 저 넓은 바다에 던지고 왔는데, 그 미련은 심해에 가라앉아 아무도 모를 것인데.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의지하려 했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라르로 보내서 더이상 자신에게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들고, 떠날 때마저 마음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바다에 던져버렸던 것은 미련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라르에서 온 엽서가 권수의 책상 서랍에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여가던 겨울이었다.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순무가 호연을 떠난 지 일년이 된다. 권수는 세월 참 빠르다고 생각하면서 우편함에 튀어나와있는 엽서를 꺼냈다. 리그 준비때문에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순무는 이제 현지인들과 어느정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들을 받고 있었다. 점점 주변에 사람도 늘어가고 칭찬만 받고 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면 마음 속이 답답하면서 텅 빈 것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외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권수는 방에 앉아서 왼손으로 파비코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엽서를 다시 읽었다. 엽서가 도착하면 읽고나서 바로 답장을 쓴 뒤 다음날에 부치곤 했으나,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순무의 부모님도 이걸 알고 계실까? 그랬다면 그쪽에서 먼저 권수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은 고요했다. 전화 벨소리는커녕 권수가 코로 숨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오른손에 펜을 든 권수는 생각에 잠겼다. 한 번은 순무를 만나러 가야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리그 개최 준비 기간이라 바쁠 때다. 아직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파비코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무가 포근한 날개털을 마음에 들어했지.
"너도 순무가 보고 싶겠구나."
파비코리는 권수를 쳐다보며 얇은 울음소리를 한 번 냈고, 어쩐지 권수의 귀에는 그것이 구슬프게 들렸다. 머리털에서 손을 뗀 권수는 자세를 고쳐 앉고서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날,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부친 권수는 리그 개최 준비 기간이라 바쁜데도 휴가 신청을 냈다. 당연히 반려되자 초조했다. 이미 엽서를, 만나러 가겠다고 적은 엽서를 보냈단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휴가 일자를 더욱 짧게 조정해서 다시 신청서를 넣었다. 가까스로 며칠뿐인 휴가를 얻게 되자 리그장에서 숙식하며 업무를 처리했다. 하던 일이라도 끝내놓고 가야 동료들이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날에는 해안백화점에 가서 순무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도착한 날에 공항에서 목도리를 잃어버렸다고 했으니 지금같은 겨울에 선물하면 딱 좋을 것이다. 어떤 것을 마음에 들어할지 디자인이나 색상을 비교하다가 바로 옆에 전시된 상품을 보았다. 아니, 볼 수밖에 없었다.
권수는 수건을 손가락 위에 올렸다. 붉은색의 실로 짜여진 부드러운 감촉의 스포츠타올은 홀로 빛나고 있어서 다른색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몇번이나 매만지다가, 순무는 불타입 전문 트레이너이였기에 분명 땀을 많이 흘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도리보다 사용빈도가 높으니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당장에 타오르는 불꽃그림이 새겨진 스포츠타올을 구매하고는 선물 포장을 요청했다. 곧 이 상품은 사천왕 권수가 직접 와서 구매했다는 홍보 문구가 붙을 것이다. 호연지방의 뜨거운 열기를 표현한 디자인입니다. 넓이나 길이도 적절합니다. 다용도로 사용하기 좋아서 선물용으로도 좋습니다. 어쩌구저쩌구.
더 살 것이 없는지 백화점 내에 자리한 기념품 가게에 들러서도 이것저것 구경한 뒤에, 끝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해안백화점은 권수가 손댄 상품들의 홍보 기획을 하느라 바쁠 것이다.
저녁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던 도중에 순무가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동시에 바다에 던져버린 은반지가 생각나자 이번에 갈 때 줄 것을, 하고 멍청한 짓을 했다며 혼자 웃었다.
짧게 있다 오는 것이기에 금방 준비가 끝난다. 혹시나 자신이 없을 때 육지로 돌아올지 모를 하기 녀석을 위해 메모를 써서 현관문에 붙여두었다. 출장 중.
순무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문단속을 한 뒤 발길을 돌리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을 때와 같은 순수한 두근거림이었다.
벌개진 코끝으로 하얀 김을 뿜으며 항구에 도착한 후, 아직도 늦잠을 자고 있는 아침해를 기다리며 담배를 태웠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서서히 어스름이 피어오를 즈음에 배가 입항한다는 경적소리가 났다.
약 열두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가라르 지방의 첫인상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호연지방 공항보다 규모가 컸고 친절하게 타지방 언어들로 안내말이 적혀있어도 어디가 어디인지, 뭐가 뭔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엽서를 쓸 때 대략적인 도착 시간을 적었긴 했지만 이 넓은 곳에서 그 작은 아이를 어떻게 찾을지도 막막했다.
말도 잘 모르는데… 하고 안내데스크에다 미아를 찾는다는 방송을 해달라고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면 권수만큼 큰 윈디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바로 고개를 내리면 거기엔 순무가 활짝 웃으며 권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다 컸다고, 풍겨오는 느낌은 호연에 있을 때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변해있었다.
"오랜만이네."
애써 반가운 마음을 눌러죽이고 인사를 했다. 목소리가 떨렸으려나?
"잘 지내셨어요?"
반사적으로 아니, 라고 하려던 권수는 그렇다고 대답한 뒤 순무가 어릴 때 했던 것처럼 큰 손을 머리칼 속에 넣고 마구 휘저었다. 순무는 그래도 웃었고 머리를 정리한 뒤 권수의 짐가방을 들어주었다.
"피곤하시겠어요."
"으음, 저녁 시간이니까… 밥부터 먹을까?"
"좋아요."
순무를 따라 걸으며 어떻게 바로 찾았냐고 묻자 윈디에게 냄새로 찾아달라고 했다고 대답한다. 뒤따라오던 윈디가 대답처럼 한 번 짖자 조그마한 포켓몬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나는 미아찾는 방송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 말에 순무는 풉 웃었다. 사람이 바글거리자 순무는 윈디를 몬스터볼로 돌려보냈다. 공항 내부의 어느식당에 자리를 잡고 순무에게 음식 주문을 맡겼다. 자연스럽게 직원을 부르고 주문할 때 버벅거리지도 않는 모습을 본 권수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안달났던 애송이가 이젠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가라르에 오겠다고 쓰신 걸 봤을 때 너무 좋아서 울었어요."
순무는 부끄러운듯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래? 난 여태 한 번도 안 울었어."
"…거짓말이죠? 나 없어서 매일밤 못 주무셨을 거 같은데."
순무는 농담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권수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저희 부모님께는 말씀하시고 오신 거에요?"
"아니. 아무도 몰라."
그렇게 대답하고 물을 마시며 순무를 보았다. 찰나였지만, 아름다운 빛을 내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뭐 중요한가?
"언제 떠나세요?"
"지금 리그 준비때문에 휴가도 한 번 거절당했다가 겨우 받은 거야. 귀국편은 모레 저녁으로 예약해놨어."
"네에…."
때마침 직원이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사라졌다. 권수는 오래 있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가방을 뒤져 호연에서 챙겨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순무는 눈을 끔뻑거리며 두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목도리로 사려다가 이게 눈에 들어와서 말야."
순무는 감사합니다, 하고 곧바로 포장지를 뜯었다. 작고 얇은 종이상자를 한참 보더니 이게 뭐냐고 물었다. 권수는 웃으면서 열어보라고 손짓했다. 내용물을 꺼내본 순무는 아!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수건을 펼치고는 이 불꽃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흥분한다.
"안 그래도 불타입 트레이너니까 땀 많이 흘릴 것 같아서. 마음에 드니?"
어릴 때와 변함없이 삐죽 튀어나온 세갈래의 머리칼이 심하게 흔들릴 만큼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수는 나중에 천천히 보자, 하고 배를 채우기 위해 포크를 손에 들었다.
관광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에다가 춥고 피곤했기에 둘은 곧바로 엔진시티로 향했다. 공중택시에서 내린 권수 또한 엔진시티의 웅장함에 압도되어버린다. 둘러보느라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다고 불평을 했다.
"자세히 보니까 공장들이 많잖아. 공기가 나빠서 폐에 안 좋을 거라구."
"담배부터 끊으세요……."
엔진시티가 자랑하는 명물(?) 승강기를 이용해 상층부로 오른 후, 순무는 승강기를 탄 느낌이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갑자기 위로 올라오길래 속이 울렁거리더라. 저기서 토한 사람은 없더냐?"
"뭐에요, 아까부터 불평만 하시고."
"호연이 여기보다 더 좋거든."
농담처럼 말하면 순무는 호연이 더 좋죠, 하고 웃었다. 당연히 가라르 지방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그 어느지방보다 발전도 빨랐고 관광지다운 화려한 풍경도 보기 좋다. 그러나 호연지방의 이름이 나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화는 뚝 끊겨버렸다. 권수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순무의 곁을 따라 걷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순무가 지내는 아파트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순무가 거주하는 호실의 현관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순무는 한숨을 왜 그렇게 크게 내쉬냐고 물었다.
"너무 힘들었거든. 늙어서 빨리 지치네."
한 번 웃은 순무는 권수에게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주고 그의 짐을 들어서 안으로 옮겼다. 권수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동안, 순무는 그리웠던 그의 파비코리를 꼬옥 껴안았다. 파비코리도 오랜만에 만난 것을 기뻐하며 어여쁜 울음소리로 떠들어댔다. 어느새 몬스터볼에서 나온 윈디와 나인테일도 백금빛 털이 빛나는 머리를 권수의 등에 비벼댔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쓰다듬고 순무와 함께 여기까지 올 만큼 성장해서 뿌듯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권수는 가방에서 잠옷삼을 요량으로 챙겨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순무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권수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차를 타서 내주었다. 작은 거실은 포켓몬들끼리 장난치며 놀도록 내버려두고, 손님용 방이 없기에 순무의 침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침대에 걸터앉은 권수는 순무의 마음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순무가 힘들어해서 여기까지 만나러 온 것이다. 순무도 권수를 따라 침대에 앉았다.
"난방이 잘 되니까 전 바닥에서 자도 괜찮아요. 선생님이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니, 괜찮은데."
"그래도 손님이시잖아요."
"뭐 그렇다면……."
만나면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만나게 되고나니 할 말이 없다.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하니? 견딜 수 없을 정도니? 그럼 돌아오면 안 되겠니? 내가 힘들 것 같거든. 자신이 부추겨서 보내놓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었기에, 너른 품정도는 내어주려고 한다. 안겨서 그 나이대 청년답게 마음껏 울어도 괜찮았다.
"순무… 많이 힘드니?"
우선은 그렇게 묻자 순무는 고개를 숙인 채 잠깐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권수는 순무가 말을 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면서 방을 살펴보았다. 벽에는 시계와 달력이 걸려있고 일정표로 보이는 종이도 붙어있다. 신축은 아닌지 벽지와 문틀이 낡아보였다. 저 옷장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한참의 침묵 후에 순무가 대답한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아?"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순무는 숙였던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래도 저희 부모님껜 말하지 마세요. 분명 돌아오라고 하실 거에요."
권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많은 걸 짊고 살기엔 아직 인생이 길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힘들면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짜여진 교육을 받지 못해도 괜찮다. 호연 협회에 건의하여 개편하면 된다. 어차피 돌아올 거라면 더 일찍 돌아오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순무.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고 돌아와도 돼. 넌 아직 어려서 언제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이것저것 하고 실패도 하면서 네가 가장 잘하는 것,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는거야. 그런 게 인생이야."
권수는 순무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숙인 고개가 들리지 않는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데, 무엇이 이 녀석의 발목을 잡는 걸까.
"왜… 왜 그렇게까지 여기 있으려는 거야."
참지 못하고, 마음 속에만 담아두려던 질문을 내뱉자 순무는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고 권수를 보았다. 아직도 모든 색을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무채색 눈동자는 더이상 빛을 내지 않았다. 권수는 가라앉은 안개같은 색을 보자 가슴 속에 무거운 돌이라도 내리떨어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의 바람대로 전 유명해질거에요. 제가 그렇게 되길 바라셨잖아요."
순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차, 싶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이가 그 말, 권수가 핑계로 삼았던 그 말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너무나 마음아팠다. 권수는 그런 순무의 결심을 꺾기로 했다. 앞으로도 순무가 힘들어하는 걸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용암체육관 관장이 되고 싶댔잖아, 그렇지? 그럼 굳이 가라르에서 공부하고 특훈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손짓까지 하며 말해도 순무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용암마을은 너무 작아요."
'엔진시티에 살더니 눈만 높아졌구만….'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자 이제는 따끔히 타이르기로 한다. 혹독한 권수의 가르침을 죽기살기로 따라오던 소년 순무의 열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권수에게는 그래야하는 책임이 있다.
"순무 너,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용암마을이 엔진시티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시설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야. 용암마을을 발전시키고 싶다던 꿈이 엔진시티의 기름때에 더럽혀진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제서야 권수는 순무의 눈에 다시 빛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순무는 화를 냈던 것에 깜짝 놀라 권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할 말이 없어진 권수는 순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실 어느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순무는 어깨 위에 놓인 권수의 큼직한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그것을 천천히 잡아내린다. 그리고는 권수의 손을 두 손으로 살짝 감싼다. 곧바로 따뜻한 열이 전해져온다.
"선생님이 자랑할 수 있는 트레이너가 되고 싶어서에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 속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권수는 행여나 자신의 손을 통해 이 심장 박동이 전해질까봐 긴장되어 순무의 손에서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순무는 아플 정도로 권수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선생님이라 부르는 목소리는 왜 그리 애달픈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눈빛은 어찌나 서글픈지.
비로소 권수는 깨달았다. 순무는 그리 나약하지 않았다.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자 순무는 두 눈을 감았다. 권수는 대답하는 것처럼 순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 뒤 그를 품에 안았다. 타오를 것처럼 점점 뜨거워지는 몸뚱이를 감싸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권수의 무게에 밀려 뒤로 넘어간 순무는 침대 위에 눕게 되고, 권수를 살짝 밀어낸다. 내려다보면 순무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슴 속에는 순무를 향한 애정이 충만해진다. 소년에게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하고 피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미래를 위해 멀리 보내놓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소년이 괴로움에 지쳐 돌아오는 것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선생님……."
순무는 작은 목소리로 권수를 불렀다. 권수는 대답대신 얼굴을 가까이 하고, 콧수염에 아파할까봐 천천히 입술을 찾아 더듬었다. 순무는 눈을 감고 두 팔로 권수의 목을 감쌌다. 닿이는 모든 곳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때문에 수분이라도 날아가는지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점점 숨을 쉬는 것마저 힘에 부칠 때, 권수는 얼굴을 뗐다. 둘은 크게 숨을 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무는 안아달라는 것처럼 다시 두 팔을 뻗었다. 권수는 완전히 엎드려서 순무를 껴안았다. 입술이 닿이는 작은 귓속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무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애태우는 한숨만 내쉬었다.
성적인 것에 있어선 담백하다고 생각했다. 경험도 그리 많은 편도 아니고 딱히 연애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순무는 권수의 오감을 자극시키는 존재였다. 한 번 느끼게 되자 걷잡을 수 없어진다. 여태 묶여있던 욕망이 드디어 해방된 것마냥 흥분감이 몰려왔다. 권수는 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순무도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입고 있던 것을 벗었다.
"저, 선생님…."
"왜?"
"불…… 꺼주세요."
"…그래."
권수가 침대에서 스르르 일어나 형광등을 끄는 사이에 순무는 협탁에 놓인 무드등을 켰다. 침대로 돌아오면 따뜻한 색이 순무의 얼굴에도 퍼져있는 것이 보였다. 권수는 순무를 베개에 뉘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긴장되는 것은 권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계속할지, 그만둘지 고민한다. 물론 싫어하면 그만둘 것이었다. 하지만 순무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 권수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에도 기다려준 것이다.
"후회… 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기도 했지만 투박한 손으로 순무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어보았다. 순무는 뺨을 쓰다듬는 권수의 손을 잡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드등의 빛깔때문인지 한층 더 황홀해보인다.
"괜찮아요."
선생님…… 그 불경한 부름을 들으면서도 몸에는 열이 오른다. 여로에 쌓인 피로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존재에 몰두하게 된다. 입맞춤을 나누고, 서로에 대한 가장 뜨거운 감정을 손에 붙잡고, 매끄럽게 길을 터놓고, 그 터놓은 길에 열덩어리를 마구 쑤셔넣었다. 순무는 처음이었기에 천천히 하려해도 무척이나 아파했다. 그래도 아픔을 참고 울면서 웃었다.
어느새 성장한 흔적이 남은 몸을 쓰다듬으며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돌아오라고 하는 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한다. 화상 흉터와 베인 자국들은 순무가 얼마나 권수를 생각하는지 말하고 있었다. 권수는 순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연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침대에서 하기에 너무 볼품없었다. 귀여워, 조금만 더 참자, 너무 좋아, 괜찮아, 사랑해.
그래, 그 때만큼은 솔직하게 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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