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간의 밀회 5
길기도 길었지만, 아직은 짧은 순무의 인생 중 일부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가만히 앉아서 돌이켜보니 스스로도 깜짝 놀랄 지경이다. 언제 상처약을 챙기고 모험을 떠났는지, 언제 뱃지를 따고 리그에 나갈 만큼 성장했는지, 또 언제 최고의 자리에 도전을 했는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거짓말을 했음에도 선생님을 만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런 순무의 등을 떠밀어준 것도.
삶을 반추하는 잡념들이 차곡차곡 쌓여가자 순무는 마치 잠에서 깨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서 세갈래로 삐죽 튀어나온 앞머리도 흔들렸다. 언젠가 선생님이 이 머릴 보고 아차모같다고 했었는데. 순무는 고향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잠을 자기로 한다. 계속 생각하다보면 당장 이 상공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비행타입 포켓몬도 없는데 말이다.
불편한 자리와 선잠에 피곤해하면서 오랜 시간을 거쳐 가라르 지방에 도착했다.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순무는 협회 관계자와 만나기 전에 짐가방을 찾고, 그 속에서 겉옷을 꺼내 입었다.
이미 다 구겨진 지 오래인 안내장을 읽으며 지정된 장소로 가보면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 멀리서 그의 용태를 살폈다. 큰 키와 길쭉한 코, 연갈색의 눈동자는 틀림없는 서방인의 형태였지만 순무와 같은 검은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넘기고 맵시좋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관계자는 포켓기어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듯 했다. 이미 호연발 비행기가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마침내 자신을 힐끔거리는 순무를 보았다. 금새 순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는 활짝 웃었다.
순무를 내려다보는 관계자와 어색하게 인사를 한 뒤에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순무는 가라르어를 할 줄 몰랐지만 관계자는 현지인 수준으로 4개지방(관동부터 신오까지의 동방 지방)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협회에서 4개지방의 관리와 통역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고 한다.
숙식은 협회에서 제공하는 선수촌 아파트에서 하게 될 것이고, 협회와 선수 간의 계약은 2년마다 갱신된다고 한다. 버틸 수 없다면 도중에 돌아가도 된다는 소리였다. 순무는 빨리 돌아간다면 권수가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사천왕인 권수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었기에 어떻게든 적응해보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포켓몬이 이동수단인 공중택시를 탄 채 관계자에게서 가라르 지방이 어떤 지방인지 설명을 들었다. 호연지방 이야기도 하다보면 금방 도착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엔진시티였다. 이곳은 불타입 체육관이 있었기에 어떤 곳일지 기대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 길에 한 발을 내딛은 순무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눈동자 속에 가득 차오르는 적갈색에 압도되자 저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된다.
붉은 벽돌로 세워진 도시는 오랜 세월 무너진 적 없는 성벽같았고, 그때문에 고전적인 향취를 풍겼지만 산업화의 기름때를 만나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층층이 쌓인 벽돌에 장식된 톱니바퀴들, 뜨거운 도시가 내뿜는 숨결같은 증기, 이질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멋지고 아름답다. 당장 떠오른 감상은 그것밖에 없었다. 같은 붙타입 체육관이 있어도 고향인 용암마을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순무는 관계자를 따라 걸으면서도 도시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포켓몬들과 무리지어 걸어가는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작업복이며 얼굴이며 검댕을 묻히고 있었다. 순무의 눈에는 그들이 고식한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공장 단지가 대로와 가까이 붙어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엔진시티는 달랐다. 벌써부터 그런 점도 엔진시티답다고 느낄 정도다.
정신 팔린 채 걸어가다가 하마터면 누군가가 꺼내놓은 포켓몬과 부딪칠 뻔 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가라르에 온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권수에게 쓸 말이 많았다. 엽서를 몇장이나 써도 부족할 것 같다.
"엔진시티에선 매년마다 가라르 리그가 열려요. 와일드에리어도 가깝고, 선수촌도 있고, 협회 사무실같은 것들이 집대성 되어있죠."
말을 마친 관계자는 독특한 구조의 승강기 앞에 섰다. 순무도 그의 옆에 다가섰다.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지키며 승강기에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놀이기구같은 승강기에 올라서면 순식간에 상층부에 도착했다. 코앞에는 엔진스타디움이 있었다. 누가 봐도 저 건물이 체육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어보면 관계자는 체육관이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높은 곳까지 올려다본 순무는 뜨겁게 열이 오르는 가슴을 안고 관계자와 함께 스타디움 쪽으로 향했다.
뛰어가고 싶었지만 잘 참고서 내부로 들어가면 로비는 넓고 깨끗하고 온통 붉은색으로 맞춰져 있었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면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를 걷던 관계자는 어느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낯선 남자가 업무용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서 순무에게 악수를 청했다. 순무는 관계자보다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고 긴장되었다. 남자는 웃는 얼굴로 인삿말을 했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라르 트레이너 협회의 인사 담당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순무 선수. 라고 하시네요."
관계자가 통역을 해주자 순무는 약간 떨면서 상투적인 인삿말을 건넸다. 그는 소파를 가리키고는 앉으라며 둘에게 손짓을 했다. 순무는 관계자와 인사담당자와 마주보며 가죽소파에 앉았다. 직접 가라르에 와보니 어떤지, 시차에 적응은 되었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등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순무는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하나씩 차례대로 대답했고 관계자가 바로바로 통역을 해주었다.
"지금 협회장님이 오시는 중입니다. 협회장님이 오시면 곧바로 회의실로 갈 거에요."
순무는 어쩐지 협회장이란 분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사 담당자는 일어나서 책상에 쌓아둔 서류를 뒤지더니 작년에 관동과 성도에서 온 트레이너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4개지방에서 온 사람이 순무만이 아닌 것에 점점 긴장이 풀렸다. 올 겨울에는 신오지방의 동계리그를 참관한 후 트레이너를 데려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하나지방, 칼로스지방에도 눈여겨보는 인재가 몇명 있는데 알로라지방에는 포켓몬 리그 자체가 없어서 아쉽다고 덧붙인다.
이제는 마음 편히 통역사를 통해 잡담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노크를 해왔다. 낯선 사람이 협회장이 왔다고 하자 셋은 일어서서 회의실로 향했다. 널찍한 회의실에는 프로젝터를 손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순무는 관계자의 권유에 따라 앞줄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조금 부담스럽다.
이윽고, 나이 있음직한 협회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러명의 사람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온 협회장은 웃으며 순무에게 악수를 청했다. 순무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 협회장이 인사를 했다. 순무에게 어디 아프거나 한 곳은 없는지 묻고나서는 괜찮다는 대답에 프로젝터를 이용해 자료 사진을 띄웠다. 그리고는 앞으로 자신들이 해낼 관광사업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가라르의 북부에선 지금 대기업인 매크로 코스모스와 손을 잡고 슛시티라 명명한 새로운 관광도시의 개발사업을 진행 중이다. 100층짜리 빌딩 건설과 강철타입 체육관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 엔진 스타디움보다 규모가 더 큰 리그장을 새로이 건립하여 리그장을 엔진시티에서 슛시티로 이전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한다.
다이맥스 현상을 적용한 리그 챌린지와 그로 인한 관광효과는 앞으로 수십년을 내다보는 중이며, 특색없는 가라르 지방이 화려하게 부흥할 것이라는 말을 마치자 가라르인들은 박수를 쳤다. 순무는 얼떨결에 그들을 따라 박수를 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지방의 우수한 트레이너를 스카웃한 이유는 각 지방의 대표로서 온 트레이너들이 다이맥스를 사용하면 고향지방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홍보도 하고 다이맥스에 관한 연구도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는 회의실의 전등을 모조리 끈 뒤에 프로젝터로 영상을 틀었다. 가라르 말을 모두 알아듣기엔 무리였지만 다이맥스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별 생각없이 영상을 보던 순무는 덩치가 건물만큼 커진 포켓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름모를 낯선 가라르의 포켓몬이 기계에서 쏘아진 밝은 빛을 맞자 서서히 몸집이 커졌다. 영상 속 포켓몬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퍼지자 두려움이 떠올랐고, 그에 따라 경외심도 피어났다. 순무는 긴장되어서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구든 텔레비전에서 전대물을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흉악한 포켓몬의 인형옷을 입은 배우가 도시를 구현한 세트장에서 마구 날뛰면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서 그것을 제압하곤 했다. 지금 순무는 어릴 때 즐겨보았던 전대물이 떠올랐다. 저렇게 큰 포켓몬이 엔진시티를 누비고 다니면 도시는 금방 쑥대밭이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다이맥스 현상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포켓몬이 원래 크기로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아직 그 회귀 조건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서 순무는 커진 포켓몬들이 배틀필드에서 배틀을 펼치는 진풍경이 담긴 영상을 보았다. 멀리서 날아온 피로마저 잊게 만드는 흥분감에 가슴 속이 콕콕 쑤실 만큼 불타올랐다.
"어떤가요?"
짧은 영상이 끝나고 까만 화면만이 스크린을 비추고 있다. 협회장이 물었고 통역사가 말을 전해주었다. 순무는 굉장해요, 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시대는 아직 3D 기술이 크게 발전하기 전이었음에도 포켓몬이 기술을 쓰면 땅바닥이 흔들리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협회장은 순무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매번 영상을 볼 때마다 저도 가슴이 두근거린답니다. 거대해진 포켓몬들의 배틀… 괜찮지 않나요?"
순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빨리 권수에게도 이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막 성인이 된 소년답게 선생님의 파비코리가 커진다면 굉장히 폭신할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협회장은 앞으로 순무가 해야할 일들을 설명했다. 커리큘럼은 트레이너 육성 전문 학교와 같이 굉장히 체계적으로 세워져 있다. 다이맥스 홍보를 위해 스카웃된 타지방의 트레이너들, 가라르에서 선발된 트레이너들과 함께 아침부터 체력단련을 하고나서는 이론 공부를 해야했다.
이론 수업은 다행히도 각각 언어에 맞춰 스케줄이 짜여져 있었다. 오후에는 가라르어 기초 회화 강의가 잡혀져있다고 한다. 사업이 이제 막 시작된 만큼 트레이너들의 능력도 천천히, 최대한 크게 발전시킬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협회장은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마찬가지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순무도 관계자를 따라 스타디움에서 나왔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자랑하는 지방답게 가볍게 봄비가 떨어지고 있어서 약간 쌀쌀했다. 둘은 걸어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선수촌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관계자가 관리실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눈 후, 이제부터 순무가 쓸 집 열쇠를 건네주었다.
"오자마자 쉬지도 못 하셨네. 협회장님 일정때문에 조절이 어려웠거든요. 이해해주세요."
"괜찮아요."
"저는 관동, 성도, 호연지방을 담당하고 있으니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면 돼요."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순무의 포켓기어에 입력했다. 담당자는 푹 쉬라며 작별인사를 하고 아파트를 떠났다. 순무는 발길을 돌리고 비교적 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해당하는 층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소음을 내며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미 누군가가 지냈던 것인지 완전히 새집같다는 느낌은 없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던 순무는 아차, 하고 동작을 멈췄다. 신발장을 뒤져서 실내용 슬리퍼를 찾고는 그것으로 갈아신었다.
드디어 가라르에서의 하루가 지나간다. 초행길인데도 조금 헤맨 것 말고는 무사히 도착했고 담당자들도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순무는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짐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요. 권수는 무얼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순무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자 그제서야 이곳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옷가지를 가장 마지막에 정리하던 순무는 권수가 사주었던 목도리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분명 떠나오기 전에 선생님이 챙겨주셨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가방들을 살피고 침실이나 옷장을 뒤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 설마 그 때……?"
순무는 공항에 막 도착했을 때, 호연지방보다 약간 낮은 기온에 가방을 뒤적이며 겉옷을 찾았었다. 그 때 잠깐 꺼내두었던 것을 서두르느라 챙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시간도 한참 지나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반지라도 받아올 걸 그랬네, 하고는 아쉬운 마음에 울적해진다.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 며칠동안 휴식을 가진 순무는 주변의 길부터 익혔다. 돌아다니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현지인들의 말을 엿들으며 조금이라도 알아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곤 했다.
텔레비전도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뉴스는 발음이 또박또박해서 듣기에는 편했지만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마지막에 세계지방 날씨가 흘러나오면 자연스레 호연지방 날씨로 눈이 갔다.
식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도전해보았다. 가라르의 음식은 그럭저럭 입에 맞았고 한창 먹을 나이인 순무는 입맛을 다시며 이것저것 다 먹어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드디어 리그장에 나가게 된 날,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깔끔히 씻은 후 면도도 하고 아침도 차려먹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몬스터볼도 챙겼다. 문단속을 하고 내려가면 아파트 입구에는 담당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뭘 했냐길래 길을 익히고 말을 알아듣기 위해 나름 무언가도 해봤다고 대답했다. 쑥스러운 느낌으로 웃으면 담당자도 웃었다. 순무가 첫인상과 다르다는 말을 하길래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순무 선수님은 가만히 있으면 되게 무서워요. 무표정이 냉정해보인다고 해야하나. 근데 웃으면 눈썹이 이렇게 되어선, 되게 귀여운 느낌이 나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웃을 때면 안면근육이 저절로 풀리긴 하지만 그게 귀엽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누구도-권수조차 콕 집어서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무는 무표정이 밝아보이도록 표정 연습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엔진 스타디움으로 가서 몸에 맞는 유니폼을 지급받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다같이 로비에 집합하여 오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트레이너들은 순무를 포함해 스무명이 조금 넘었고 순무보다 어린 아이들도 몇명이 있었다.
인원이 모두 모였는지 확인하고 트레이너들과 줄을 맞춰서 복도를 지나 배틀 필드로 향했다. 리그장은 호연지방도 크기가 컸기에 어느쪽이 좀 더 큰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트레이너들은 지도강사의 지시에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가벼운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준비 운동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체력 단련은 엔진 시티를 한 바퀴 도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어릴 때부터 뜨거운 용암마을을 내달리던 순무는 달리기엔 자신이 있었기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어린이들은 지도강사가 가까이서 지켜보며 수시로 몸 상태를 확인받았다.
아침의 거리를 달리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부끄럽지만 주목받게 되자 가슴 속이 이상하게 근질거렸다.
다시 스타디움으로 돌아와서는 짧은 휴식을 취했다. 지도강사는 순무에게 첫날인데 뛰는 폼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했다. 순무는 말을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의 손짓을 보고는 자신을 칭찬한 것을 알았다. 무심코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숙였더니 주변 사람들이 순무를 보며 웃었다.
"지금은 호연지방에 있는 게 아닙니다, 순무 선수."
어느새 다가온 순무의 담당자도 웃으면서 껄껄 웃는 지도 강사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순무는 서방의 인사예절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실수가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올라버린다. 첫날부터 이게 뭐람.
체력 단련 시간이 끝나면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땀을 흘린 사람들은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이 다음은 이론 강의시간이었다. 여기서는 고향지방 언어에 따라 인원이 나뉘어졌다. 순무는 동방인들과 함께 강의실을 찾았다. 순무는 트레이너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를 택했다. 아까 일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가가는 것이 아직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무는 강의 중간부터 들어온 것이라 교재를 새로 받았다.
챔피언이 배틀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어떤 판단을 내리고서 그런 기술을 지시했는지 분석하기도 했다. 강사는 나중에 챔피언의 방식을 따라해 실전 훈련에 응용해보라고 했다.
순무는 불타입 기술인 도깨비불에 대해 생각했다. 호연지방에서 이 기술은 그닥 인기가 없다. 효과는 괜찮지만 명중률이 낮기 때문이다. 쓰는 트레이너가 적은 기술을 유려하게 활용하는 트레이너…….
'포켓몬이 기술을 네가지밖에 못 써도, 나중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이나 도구같은 걸로 조합을 맞추면 얼마든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수가 있어.'
언젠가 권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때 그가 했던 말이다. 권수는 포켓몬이란 생명체는 인간과 달리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고 믿고 있었다. 포켓몬은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트레이너 또한 마찬가지다. 트레이너는 자신이 소유한 포켓몬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토대로 포켓몬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제나 버릇처럼 강요하던 '올바른 마음가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던 말이었다.
순무는 물타입 기술을 맞아도 버틸 수 있도록 포켓몬들을 훈련시켜왔다. 불타입의 약점을 이용해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결과다. 도깨비불 기술 역시, 아무리 명중률이 낮다 해도 명중률을 높이면 되는 일이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혼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로비로 돌아오면 담당자가 순무에게 다가왔다. 등번호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말하길래 무슨 등번호인지를 물었다.
"선수 번호말이에요. 등록을 해야하거든요. 양식은 자유에요."
"어… 생각 좀 해볼게요."
"내일 꼭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가라르 리그는 굉장히 시스템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사천왕도 없고, 그 해 리그 도전자들끼리 경쟁을 해서 마지막에 올라온 도전자가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 위해 승부한다. 개개인이 싸운다면 구분을 위해 등번호가 필수일 것이다.
오후내내 회화 수업에 참여한 순무는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아파트로 돌아가기 전에 엽서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부모님과 권수, 아단에게 편지를 썼다.
오자마자 끌려가서 설명을 들었던 것, 며칠동안 둘러본 엔진시티가 꽤 마음에 든다는 것, 감사표현을 할 때에 악수대신 허리를 숙여서 모두가 웃었던 것…. 식탁에 앉아 순무가 정갈하게 글씨를 써가던 엽서가 십여 장을 넘어갈 때, 펜촉이 미끄러지고 엽서에는 잉크가 번졌다. 서서히 잉크자국으로 검게 물들어가는 엽서와도 같은 애달픈 마음은 그의 보드라운 뺨을 타고 내리떨어졌다.
아무도 없는데도 목소리를 죽이고 울던 순무는 펜을 던져놓고 식탁에 엎드렸다. 선생님이라 이름붙은 그의 세계가 점점 뒤바뀌어 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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