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10개월간의 밀회 4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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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이 되고 권수의 예상대로 순무는 처음으로 참가한 호연 리그에서 일찍이 돌아왔다. 하지만 가장 바쁜 시기인지라 권수는 며칠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리그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순무가 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패배에선 감출 수 없는 쓴맛이 나는 것이다.

리그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자 권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 동료들과 너무 과음한 탓에 온몸이 무겁지만 그동안 혼자 외로웠을 순무가 보고 싶었다. 결승전은 생방송이었는데 순무가 봤을지 모르겠다. 권수가 출전했으니 분명 봤을 것이다.

"나 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순무가 뛰쳐나왔다.

"오랜만에 보네. 별 일 없었지?"

대답대신 순무는 권수의 품에 달려들었다. 어리광피우고 싶은 건가, 싶어서 그래그래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암마을로 안 돌아갔네?"

농담을 하면 주먹으로 옆구리를 맞았다. 과장하며 아프다고 하면 순무는 얼굴을 들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가도 이내 웃어보였다.

"저 이제 감 잡았어요. 일년동안 열심히 해서 내년엔 꼭 우승할 거에요."

우울해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순무는 한살 더 먹어가는 만큼 올바르게 성장해있었다. 순무는 권수가 돌아오지 않는 사이에 집에 돌아갈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노력해온 것과 권수를 생각하자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권수는 술냄새 풀풀 풍기며 장하다고 칭찬을 했다. 순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는 웃었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후, 개운한 상태로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가면 순무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었다. 곁에 앉으며 결승전을 보았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선생님이 나오는데."

"멋있었니?"

씩 웃으면서 묻자 순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그의 에이스인 보만다가 나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근데 눈 화장 하셨던 거 맞아요?"

"으응? 맞아. 분칠도 좀 했지. 잘 나와야하니까. 원래 다 하는 거야."

"그렇구나…."

결승전이 중요한 만큼 분장과 의상마저 힘이 들어가있었다. 무대 연출 총괄은 사천왕들이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까지 지도했다. 권수는 순무의 무릎에 누워서 아무도 모를 뒷무대의 이야기들을 말해주다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 지친 것이다.

이후의 일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순무는 성장했고 얼굴은 아직 어린 티가 났지만 듬직하고 어른스럽게 커갔다. 목소리는 낮아도 부드러웠고 평소에 무뚝뚝해보이는 얼굴도 웃으면 꽤 귀염성이 있었다. 순무의 어린시절도 계절을 따라 이 때 끝났다.

리그가 종료된 봄부터 권수는 순무와 자주 특훈을 하며 함께 필드워크도 하고 도시, 풀숲, 들판을 뛰어다녔다. 여름엔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낚시를 하기도 했다. 권수는 젊었을 적 하기와 배를 타고 돌아다닌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야생 포켓몬을 또 만나고 싶었지만, 다시는 망망대해로 나아가지 않기로 했다.

여름이 지나기 전, 호연 리그는 새로운 배틀 방식을 도입했다. 더블배틀이라 명명된 이 새로운 배틀 방식은 트레이너도 포켓몬도 둘씩 짝을 지어 2 대 2로 대결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순무는 권수와 함께 팀이 되어 싸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권수는 리그에서 보내온 안내장을 읽으며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1 대 1 배틀보다는 재밌겠네. 변수가 많아질 테니. 이번 리그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리그에서의 중대발표가 송출된 이후, 필드에는 둘씩 짝지어 다니는 트레이너들이 부쩍 늘었다. 모든 트레이너들의 최종 목표인 리그배틀에 대비하는 셈이다. 순무는 언제든 불러내서 함께 배틀해줄 수 있는 단짝이 필요했다. 아단과 짝을 이루고 싶었지만 아단은 배틀보다 콘테스트 쪽에 관심이 많았고 코디네이터 준비를 하느라 바쁠 것이었다.

순무가 아직도 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을 어려워하자 권수는 예전에 순무가 아단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단에게 시간을 내서 순무와 짝을 짓는 것이 어떻냐고 물으면 아단은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것을 승낙해주었다. 코디네이터 이전에 그도 트레이너이므로 이번에 도입된 배틀 방식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게다가 아단은 물타입 전문 트레이너였기에 순무가 연구하는 상성 극복에 도움이 될 터였다.

순무는 생각보다 아단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단은 낙천적이고 느긋한 성격에다 그가 살고 있는 루네시티는 그랜드시티와 가까웠고, 마침 아단도 짝을 이룰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 순무는 아단의 도움으로 불타입 트레이너면서 물타입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마했다. 또래친구와 함께 한 공부를 통해 부쩍 엘리트 트레이너 수준까지 뛰어올랐다.

아단에 대해 새로 안 것은 아단도 루네체육관의 관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체육관 관장이란 그 마을 혹은 도시의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장長과 같은 존재다. 코디네이터가 된 후 루네체육관 관장이 된다면 루네시티에 공연장을 마련하고 싶다고 한다. 루네시티는 운석 낙하에 의해 탄생한 마을이라 좀처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단은 고향인 루네시티도 멋진 관광도시로 만들고 싶다고 말해왔다. 순무는 자기도 미래에 용암체육관 관장이 된다면 작은 온천마을을 어떻게 더 부흥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다고 대답했다.

둘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쩌면 이 때의 순무는 권수보다 아단과 보낸 시간이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리그 참가 준비를 하면서도 아단은 코디네이터가 되기 위해 일찍이 포켓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했다. 어느날은 대굴레오가 공묘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박수 소리에 맞춰 대굴레오는 재주있게 머리 위에서 고무공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대굴레오가 씨레오가 되면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말에 순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참가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자 리그협회는 가을부터 엔트리 접수를 개시했다. 순무와 아단은 접수 첫날부터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단과 헤어지고 권수네 집으로 돌아온 순무는 권수가 빨리 와보라며 호들갑을 떨자 의아해했다. 외투도 벗지 않고 손을 잡혀 권수의 방으로 가보면, 그는 작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순무는 포장지를 뜯고 고급스러운 재질의 상자 뚜껑을 열고서 깜짝 놀랐다.

"이건… 불꽃의 돌이잖아요!"

"내가 주는 거야."

밝고 붉은 빛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불꽃의 돌은 두개씩이나 되었다. 순무는 진화의 돌을 손에 들고 권수를 안았다.

"대신 연말 선물은 없다."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이제는 키가 비슷한 순무의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순무는 뛸듯이 기뻤다. 이제 윈디와 나인테일이 그의 포켓몬이었다. 권수는 부디 리그에서 최선을 다하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단에게도 전해주라면서 물의 돌이 든 상자를 건넸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오면 비로소 순무는 성인이 되었다. 이제 제약없이 원하는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일관하며 차근차근 리그 준비를 해갔다.

리그가 개최되고, 물타입과 불꽃타입이라는 기막히고 흔한 조합으로 아단과 순무는 독특한 배틀 방식을 자랑하며 한 팀씩 이겨나갔다. 그러면 쟁쟁한 신예 트레이너들 중에서도 둘의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물타입 기술을 맞고도 버티는 불타입 포켓몬들과 곡예하듯 화려하게 춤추는 물타입 포켓몬들-그런 포켓몬들의 트레이너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아단과 순무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결승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권수는 지금 이 순간 필드에 마주보며 서 있는 순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순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작년엔 맞붙었던 챔피언과 권수는 한 팀이 되어 방어전을 펼쳤다.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긴장한 순무는 상대가 권수임에도 집중하려 했지만 금새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순무를 따라 당황한 것은 포켓몬들도 마찬가지였다. 더블배틀은 싱글배틀보다 복잡한 심리전에 가까웠기에 노련한 어른들은 손쉽게 어린 도전자들의 포켓몬을 쓰러뜨렸다. 순무, 아단, 잘했다. 권수는 패배에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는 순무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그장에서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권수는 며칠 후, 순무를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모아 작은 파티를 열었다. 아단과 순무의 부모님도 한달음에 그랜드시티까지 날아왔다. 아단은 둘이 합을 이루는 결승전이 얼마나 엘레강스했는지 과장스러운 손짓을 하며 감상을 말했다. 순무는 처음 도전했을 때는 처참했는데, 이번엔 결승까지 진출할 줄 몰랐다고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권수와 순무는 먹고 마신 흔적들을 밤늦게까지 치웠다. 그리고나서 권수의 방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어느때와 다를 게 없었다. 순무는 권수에게서 축하의 의미로 키스라도 받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성인인데도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하는 걸까?

조바심이 나자 순무는 손가락을 꿈틀대며 권수의 손을 잡았다. 낮은 탁자에 턱을 괴고 있던 권수는 고개를 돌렸다. 순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권수는 지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은……. 망설이는 권수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순무는 고개를 들고서 눈을 감아보였다.

천천히 따뜻한 콧김이 느껴졌다. 곧 짧은 콧수염이 맨살에 닿였고 메마른 입술은 잡아먹혀서 젖어들어갔다. 불덩어리를 삼켜가는 용처럼 권수는 순무를 딱딱한 바닥에 뉘인 후 입맞춤에 몰두했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잔흉터가 많은 살결을 어루만지며 쓰다듬었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튀어나오는 순무의 콧소리는 낮으면서도 높았고 권수의 울대는 한없이 낮아지며 걸걸한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권수는 있는 그대로를 다 비추는 무채색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 자신이 갇혀있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꼈다. 만약 평생의 동반자가 순무라면 지금부터라도 모든것을 내어줄 수 있다. 순무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권수가 내어주는 모든것을 받아주길 바란다. 이 못난 어른의 이기심을 눈치채지 못하길…….

권수가 목에 입을 맞추면 순무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꽥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덕분에 권수는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

"아파라… 왜 그러는 거야, 순……."

고개를 돌리면, 방의 문턱에는 하기가 서있었다. 깜짝 놀란 권수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가 숨은 순무를 한 번 쳐다봤다가 하기에게 달려들었다. 하기는 내가 너무 늦게 왔네… 라고 중얼거렸다.

"왔으면 왔다고 해야할 거 아냐? 아니 근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현관문 열려있길래 그냥 들어왔지. 그리고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쳤지 뭐야.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늦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권수가 있는대로 인상을 구기자 선물이라고 말한다.

"순무랑 인사는 다음에 해야겠네. 다음에 보자."

"그… 그래. 고맙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하기와 달리 떨떠름하게 그를 보낸 권수는 한숨을 쉬었다. 순무가 진정될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하고, 담배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골치가 아픈 느낌이 들어 엄지로 눈썹을 꾹꾹 눌렀다.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자기자신보다 순무가 큰일이라는 생각에 담배를 돌바닥에 비벼끈 후 안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순무는 이불 속에서 나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권수를 올려다보았다. 들어온 게 하기녀석이라 다행이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오늘은 기분이 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권수는 처음으로 함께 자기로 했다. 순무의 방에서 이불을 들고와선 바닥에 깔았다. 넓어진 잠자리에 같이 드러누워 서로의 체온에 녹아들어가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며칠 후, 갑작스레 협회로부터 호출된 권수는 회의실로 향했다. 거기엔 이방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통역사는 그들이 저멀리 가라르 지방에서 온 손님들이라고 했다.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가본 적도, 갈 일도 없는 곳이다. 권수는 무언가 좋지 못한 느낌을 받으며 악수를 나눴다.

"우리 가라르 지방은 토너먼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체육관 관장을 통해 뱃지를 따낸 신참내기들 중 최후의 일인이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당대의 챔피언과 겨루는 것입니다."

통역사가 말을 마치면 권수는 생각에 잠겼다. 사천왕의 존재가 없는 만큼 가라르 지방의 체육관 관장들은 비록 관장직에 앉아있지만 실력은 타지방의 사천왕들과 비등할 것이다. 독특한 시스템이고 트레이너들간의 배틀이 주 컨텐츠라면 신인들의 존재를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름이 아니라 개최 전에 호연지방에 도착해서 리그를 직접 보았는데……."

이어지는 말은 호연지방에 대한 찬사와 리그전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챔피언과 권수를 포함한 사천왕들의 실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가라르의 인사들은 권수가 배틀할 때 어떠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가라르 지방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기묘한 에너지가 솟아나오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이것에 관해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생명에 무해하다는 것과 일정 시간동안 포켓몬이 거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실내의 사람들이 술렁인다. 그 점들을 이용해서 가라르 지방은 이것을 리그 챌린지에 적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 어느 지방의 포켓몬 리그만큼 열광적이긴 하지만 지방만의 특색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호연지방을 방문한 것도 새로 도입된 더블 배틀을 차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포켓몬의 몸이 거대해지는 현상을 다이맥스라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이맥스 에너지는 연구할 게 많습니다. 챌린지 문화와 다이맥스의 대중화를 위해서 홍보도 절실합니다."

'어떻게 보면 학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모든 임상실험과 연구를 하고나서 결정한 사안이라고 한다.

"…가라르 지방은 타지방에 비해 포켓몬의 개체수도 적은데다 오랜 역사 외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최대규모의 관광도시를 계획 중입니다. 다이맥스를 이용한 챌린지 문화의 개입이 불가피합니다."

가라르 지방은 다이맥스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우수한 트레이너를 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 지방의 챔피언들이 모인다면 그야말로 전지방을 하나로 모아 충분한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종의 국가대표전인 챔피언전은 보류 중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맛있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먹는 법이라나 뭐라나.

"우리가 호연 리그에서 눈여겨 본 트레이너가 몇명 있었습니다. 우선 A선수는……."

가라르의 인사들은 한명 한명씩 되짚으며 그들의 어떤 점이 우수했는지 호연리그의 나레이터와 함께 설파했다. 그중에는 아단의 이름도 나왔다. 묘기를 부리는 듯한 동작과 포켓몬들의 움직임은 마치 배틀이라기보다 무대 공연을 보는 것만 같았다고 칭찬한다. 특히 킹드라의 몸짓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매끄럽게 보였다고 한다. 권수는 아단이 장래에 훌륭한 코디네이터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무 선무는 잘 닦인 보석같더군요. 단일타입을 전문으로 하는 트레이너는 수없이 많습니다. 가업을 이어서, 개인의 취향을 따라서, 재능을 살려서……. 우리가 보기에 이 선수는 재능을 살린 쪽같았습니다. 윈디는 챔피언의 대짱이에게 오랜 시간동안 대적하더군요."

권수는 순무를 칭찬하는 말들을 듣자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러나 삐져나오려는 그의 웃음은 다음말을 듣고 싹 지워진다.

"때문에, 우리는 호연지방에서 순무 선수를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그 말은 즉 순무가 가라르 지방으로 간다는 소리인가? 권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안 된다. 순무는 아직 배울 게 많고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다. 아니, 안 된다. 순무는 권수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기, 우리 지방은 네개의 지방이 같이 붙어있습니다. 그곳엔 가보셨습니까?"

초조해진 권수는 다른 지방의 트레이너를 데려가길 바라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관동지방과 성도지방에선 이미 작년에 선수들을 스카웃했습니다. 신오지방은 동계리그더군요. 올겨울에는 신오지방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제 생각엔."

챔피언이 말을 꺼냈다.

"챔피언인 입장에서 보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순무 선수는 저도 힘겨웠습니다. 순무 선수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훈련을 한다면 분명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권수는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챔피언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뭐라 뒤집을 말이 생각나지 않은 것이다. 통역사가 챔피언의 말을 통역하는 사이, 대부분의 호연인들은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권수를 두고 가라르의 인사들은 항공권을 다음달에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누군가 지금 순무는 권수의 집에 살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하자 다들 권수를 쳐다보았다. 훌륭한 스승, 대단한 안목, 역시, 권수를 치켜세우는 말들이 쏟아져나와도 권수는 웃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실날같은 목소리로 목례를 할 뿐이었다. 입술 근육이 굳어버린 것이다.

권수라고 어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무는 돌아온 권수의 이야기를 듣고서 울어버렸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은 둘 사이로 끊임없이 내리떨어졌다. 순무는 당연히 호연에 머무르길 바랐다. 권수는 열이 식은 냉정한 머리로 순무가 가라르에 가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말하면 순무는 선생님마저 왜 그런 말을 하냐며 울면서 화를 냈다. 어느새 단단해진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맞추며 너를 원하는 큰 무대가 있다고, 이제 너는 호연에만 있기엔 아깝다고 설득을 했다.

"용암체육관 관장은 되지 않아도 괜찮아. 가라르에서도 얼마든지 체육관 관장을 할 수 있대. 거기에도 불타입 체육관이 있고, 거긴 엄청 큰 도시야. 용암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야."

자기자신을 달래는 건지 순무를 달래는 건지 모를 만큼 권수는 필사적이었다. 꼭 순무가 가라르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들먹이면 자신의 멍청한 머리가 납득해줄 것만 같았다.

"난 네가 트레이너로서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이제 그것뿐이야."

점점 울음을 그쳐가는 순무는 훌쩍이며 권수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권수 선생님이 바라는 건 순무가 가라르에 가서도 열심히 해서 누구나 아는 베테랑 트레이너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불꽃타입 체육관 관장을 그곳에서도 할 수 있다. 모든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가라르는 기회의 땅이었다. 순무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거죠?"

"그래, 그렇댔어. 지금은 일단 다이맥스를 홍보하는 차원이라서."

"……알았어요."

"응? 알았어? 알겠지? 그렇지?"

"네……."

권수는 순무를 껴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가라르에 가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그가 고개를 치켜든 것이 울상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음을, 순무는 평생 몰랐다.

순무는 호연지방을 떠나기 전까지 용암마을의 본가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그랜드시티를 떠났다. 그동안 권수는 마음을 추스르며 손님용 방이었던 순무의 방을 청소했다. 처음부터 그 아이가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순무가 실수로 벽지에 남긴 볼펜 자국은 차마 지울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린 순무는 그랜드시티-권수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오는 항구에 권수는 일찍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내일은 순무가 호연지방을 떠나는 날이었기에, 하룻밤 자고나서 권수가 항구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것이다. 자기가 쓰던 방을 다 정리해둔 것을 보면 가슴 속이 쿡쿡 쑤시며 아파왔지만 순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권수는 순무가 챙겨온 짐을 보며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순무는 권수의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파비코리를 쓰다듬다가 낯선 물체를 발견했다. 텔레비전 옆에 아주 작은 상자가 놓여져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순무는 다가가서 그것을 들어올렸다. 벨벳으로 감싸진 작고 가벼운 케이스. 두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열어본 순무는 눈썹을 치켜떴다. 은반지였다. 웬 반지가? 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부르는 권수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재빨리 그것을 닫고 원래 자리에 올려두었다.

"내가 전에 백화점에서 사줬던 목도리 가져갈래? 옷장에 넣어뒀었는데."

"네, 당연하죠."

순무는 텔레비전 옆에 있는 반지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여태 지내면서 한 번도 못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순무는 혹시 그것이 권수가 준비한 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갑자기 기분이 들떴다.

순무의 추측은 옳았다. 가라르에 가서도 권수를 잊지 말기를 바라며 해안백화점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이었다. 하지만 순무의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서 목에 걸고 다닐 은목걸이도 함께 맞춘 것이었다.

새벽에 출발해야해서 일찍 잠이 든 두사람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권수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마지막으로 준비를 끝낸 순무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짐가방을 손에 들었다. 또 언제 올지 모를 이곳을 한 번 돌아보고, 벽에 걸린 권수와 어느새 생긴 순무의 사진을 한 번 훑어보고, 선생님의 자랑스러운 트로피를 쳐다보고, 그리고나서 고개를 돌려 권수를 바라보았다.

"갈까?"

"가요."

갈모매들이 날아다니는 항구를 향해 가면서도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순무는 곁눈질로 권수의 오른쪽 바지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보고 어제 발견한 반지를 떠올렸다. 선생님이 사랑스러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공항을 향해 가는 표를 한 장 끊고 둘은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았다. 그 언젠가처럼, 순무의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색은 주홍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권수는 침묵 속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주고 싶지 않았다.

"……순무."

"네?"

"거기 가서도 올바른 마음가짐은 잊으면 안 된다."

순무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고향에서 체육관 관장을 하며 살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자신을 큰 무대로 보내준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고향에서 사천왕을 맡으며 살고 싶었지만, 자기가 이 아이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미안하면서도 그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순무가 탑승할 여객선의 입항 시간이 되었다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천천히 항구를 향해 걸어갔다. 순무는 마지막으로 권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순무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하고 싶니?"

권수와 처음 만났을 때에 그가 한 질문이었다.

"가라르에서 유명해질 거에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네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순무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이 말만큼은 전해두고 싶다.

"선생님. 제가 나중에 돌아오면, 저랑… 저랑……."

저랑 평생을 같이 살아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해도 권수는 넘실거리며 모든 것을 품어주는 바다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러면서 몰래 주머니 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오른손에 꽉 쥐었다.

"아, 아니에요. 이만 가볼게요."

"건강히 지내고, 연락 자주 하자. 하기랑 아단에겐 내가 말해둘게."

"네. 감사합니다."

날 이렇게 위해 주고 배려해주시는데 꼭 가서 잘하고 돌아와야지. 순무는 그렇게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는 배를 타기 위해 낡은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른다. 권수는 반지 케이스를 쥔 오른손을 슬며시 등 뒤로 숨기고 왼팔을 크게 흔들며 작별인사를 보냈다. 순무도 팔을 흔들고 슬픔을 잊기 위해 웃어보였다.

끝내 반지는 전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권수는 여전히 순무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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